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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만져보고, 물어보고, 웃으며 읽어요 : 손으로 읽는 그림책 전시회

오사카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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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오고 침침한 날씨, 한낮인데도 컴컴한 게 오늘은 일년 중 낮이 제일 짧다는 ‘동지’라는 게 말 그대로 느끼지네요. 일본은 생활 전반에 걸쳐 양력을 쓰지만 24절기에 대해서는 음력을 쓰고,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전래되는 풍습도 있어요. 우리는 동짓날 팥죽을 쑤워 먹는 풍습이 있잖아요. 일본에서는 팥죽 대신 단호박을 끓여서 먹고, 유자차를 마시는 대신 뜨거운 물에 유자를 띄워 목욕을 하는 풍습이 있대요. 동짓날 단호박을 먹고 유자 물에 목욕을 하면 겨우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다는데, 오늘날 과학적으로 봐도 일리가 있는 옛사람들의 지혜인 것 같아요.

“아, 팥죽 먹고 싶다!” 연말도 되고 나이도 한 살 더 먹게 되니 어려서부터 가족과 같이 즐기던 풍습이 떠오르고 그리움이 더해지네요. 오사카에서도 겨울에 ‘젠자이’라는 단팥죽을 먹지만, 우리의 팥죽과는 달리 단 맛을 즐기는 간식이에요.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뭐든지 바로바로 손에 들어오는 편리한 세상이라지만, 그리움의 맛까지 그대로 재현시켜 주기란 쉽지 않죠. 동네에는 한국 요리집이 많지만 어쩌다 먹는 한국식 팥죽을 파는 가게는 없나 봐요. 팥죽은 포기하고 일본식 단호박이나 단팥죽이라도 사서 먹어 봐야하나, 살다 보니 사는 곳의 풍습을 흉내내게 되는 것도 살아가는 모습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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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의 문고'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책

달력으로는 크리스마스가 낼 모레, 어느 먼 나라의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머릿맡에 놓아둔 양말 속에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기대해 보는 기분도 아기자기하죠. 아이들의 선물하면 떠오르는 거, 최근에는 게임이나 최신 기기들도 많지만 표지를 만지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상상해보는 그림책도 좋지 않을까요? 얼마 전 이웃 동네의 한 회관에서 그림책 전시회가 열렸는데 “손으로 읽는 그림책 전시회”라고 어른도 아이들도, 볼 수 있는 아이도, 볼 수 없는 아이도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림책을 소개하는 ‘점자번역 만남의 문고(ふれあい文庫) 설립 35주년 기념’ 행사였어요.

점자번역 그림책이란 보통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인기 있는 그림책이나 오리지널로 제작된 그림책의 활자 부분에 염화비닐로 만들어진 투명한 시트에 점자를 인쇄하여 올록볼록 하게 붙이고, 그림도 염화비닐로 형태를 본 뜨거나 점자로 설명문을 덧붙여 만든 것으로 시각장애인들도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든 그림책이래요. 이 ‘만남의 문고’를 개설한 사람은 이와타 미쓰코(岩田美津子, 시각장애인) 씨로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 달라고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림책은 문자를 익히는 데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그림의 세계를 상상해 보면서 아이들의 풍부한 창조력과 감정이 키워지는 것은 물론, 그림책을 통해서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야말로 가족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셨대요. 하지만 아이나 그림책을 읽어주는 가족이 시각장애인인 경우 보통 서점에서 파는 그림책으로는 어렵기에, 그런 분들을 위해서 볼 수 있는 사람도 볼 수 없는 사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점자 번역 시트를 붙인 그림책을 직접 만들어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84년 오사카시의 자택에서 ‘이와타문고(岩田文庫)’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1987년에 점자 번역의 그림책을 우편으로 무료 대출해 주는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91년 사회복지법인 시각장애인문화진흥협회 사업의 일환으로 ‘만남의 문고(ふれあい文庫)’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여 비영리법인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네요. 현재 ‘만남의 문고’에서 직접 제작하여 소장하고 있는 점자번역 그림책은 5,000권이 넘고 연간 약 6,000권을 전국에 무료로 대출해 주고 있으며, 100명이 넘는 봉사자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현재 점자번역된 ‘손으로 읽는 그림책’은 서점에서도 구입할 수도 있고, 도서관에서 빌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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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의 문고'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책

10여 일간 개최된 전시회장에는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꽤 알려진 그림책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점자번역이 된 그림책을 빌려 읽은 시각장애아 가정과 시각장애 당사자 등 많은 분들의 소감문도 벽에 있었어요. 그리 넓지 않은 전시장이었지만, 방문하신 분들이 직접 책을 손으로 만져가며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같은 것들을 접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일상생활을 통해, 우리들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실감하잖아요. 어린아이가 세상을 알아가는 첫 번째 만남인 그림책, 볼 수 있는 아이도 볼 수 없는 아이도 같은 그림책을 접하며 시작할 수 있다는 건 따로따로가 아닌 서로 통하는 세상을 그려가는 소중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해요.

해가 저물어가는 서운함을 달래 주듯 집 근처 공원에 장식된 화려한 네온이 추운 연말 겨울밤을 밝혀주네요. 그 화려함을 보이지 않는 분들께도 비춰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빛은 설명하기 어려워도 향기나 맛은 전하기 쉬울 것 같아 대신 일본 술 이벤트를 하나 전해 드릴게요. 오사카의 번화가 우메다에 최근 개장한 상가 한 코너에 ‘술 나오는 수도꼭지’가 마련되었다는데, 설치된 수도꼭지를 틀면 유명한 사케(일본술) 네 종류가 ‘술술’ 흘러나온대요. 넘치도록 따라도 한 잔에 200엔, 지나는 사람들이 호기심과 술향에 끌려 한 잔씩 맛본다고 합니다.(이벤트 기간은 12월 29일까지) 일본말과 우리말은 다르지만 그간 꼬이고 얽혔던 일들도 ‘술술’ 풀리고 ‘술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술 한 잔 들이키는 어른들의 연말 풍경을 보며 웃어 보네요.

 
작성자번미양/지체장애인, 오사카 거주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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