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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웃어야 거울도 함께 웃음 짓습니다[사람사는 이야기] 제15회 심훈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이서진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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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1.07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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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의 유형을 있는 그대로 모두 거론한다면, 아주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이 필요할 것이다. 의학적 발전 뿐 아니라 관계부처의 행정적 분류까지 더해지다 보니, 장애의 종류는 보다 세세한 구분으로 나눠지며 아주 복잡한 도표까지 그려지게 됐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내용들을 단면적으로 정리한다면 ‘선천적’과 ‘후천적’이라 나눠 설명할 수 있겠고, 월간 <함께걸음>의 이름으로 만나는 수많은 분들과 나누는 문답 중 하나 또한 그것이기도 하다.

  통계상으로 정확하게 밝혀진 수치는 물론 행정 기록상에 존재하겠지만, 여기서는 단순하게 ‘선천적’과 ‘후천적’의 비율을 1:1이라고 가정해 보겠다. 장애 유형의 절반이 후천적 원인 때문이라면, 도대체 언제 어떻게 장애를 안게 된 걸까? 많은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또한 느끼게 된 정답은 아주 짧고 간단했다.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는 것이다. 후천적 장애는 ‘내게 장애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예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장애를 갖게 될 수도 있겠다’는 염려나 준비과정마저 아예 없는 일이다. 그냥 ‘눈 깜짝할 사이’이다. 사고의 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1초 전’의 인생과 ‘1초 후’의 인생이 완전하게 다른 길로 ‘영원히’ 나눠진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오래 전, 그러니까 1998년 전후부터 <함께걸음>에 칼럼 비슷한 연재를 몇 년 간 하고 있을 때, 장애를 갖지 않은 모든 이들을 가리키며 잠재적인 ‘예비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용어 조합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분들의 항의가 이어졌기에 해당 표현을 더 이상 지면에 사용하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그 단어 조합의 의미가 옳다는 생각을 간직한 채로 지낸다. 장애를 갖고 싶어서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원해서 가진 사람도, 예상하면서 기다렸던 사람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세상과 인생과 존재감 모든 것이 180도 돌변했다는 게 결론이자 결과일 뿐이다.

  ‘비장애’와 ‘장애’의 차이를 극과 극으로 인식하는 이 땅의 사회적 편견 앞에서, ‘예비 장애인’이라는 표현이 머나 먼 나라 까마득한 남들의 이야기일 뿐일까? 자기 인생에서는 절대로 닥치지 않을 불쾌한 언어라며, 무조건 거부하고 내쳐버려야 할 일일까?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에서 만난 주인공은 이서진 씨이고, 중편소설 <강변에 서다>로 2011년 제15회 심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다. 그를 만나 아주 긴 대화를 나누고 아주 긴 의미를 공유하면서, 위에 적은 후천적 장애의 ‘눈 깜짝할 사이’를 내내 떠올렸던 건 바로 -흔한 말로 -남 얘기가 절대 아니라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와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여기에 정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리 방식을 기존의 틀과 달리 해서, 원고 자체를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물론 그가 언급했던 소회(素懷)와 고백을 토씨까지 충실히 인용하는 것이기에 오해의 소지는 없겠지만, 이런 시도를 하는 이유는 ‘그’에게 ‘그’의 인생을 다시금 확실하게 안겨주고 싶다는 나름의 기대치가 생겼기 때문이다. 척수장애 1급이라 하지만, 문학적 도전과 완성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 그에게 미리부터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박수의 울림이 문학 지망생을 비롯한, 수많은 ‘내일의 희망’을 꿈꾸는 이들에게 메아리로 울려 퍼지기를 기대한다.

   
 


     어린 시절의 나

   나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내 기억 속의 나는 무척 말 잘 듣는 아이였다. 착한 아이였고 모범생이었다. 학생 때는 정말 그랬다. 학교에 가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집에 오면 부모님 말씀을 무조건 순종했다. 자기자랑 아니냐고 오해를 받을 것도 같은데, 그건 지금도 자연스럽게 얘기 할 수 있는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정말로 항상 그랬으니까 말이다.

  왜 그랬을까? 천성이 그랬던 걸까? 천성이 맞는다고 한다면 나는 바르지 않은 거, 옳지 않은 거, 이런 것들은 못 견뎌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분명히 존재했음을 빼놓을 순 없겠다. ‘가정교육’이라는 대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7남매 중 다섯 번째이고 언니만 넷, 그러니까 딸만 다섯이나 나란히 태어난 집안의 막내딸이다. 내 밑으로 남동생 둘이 있다는 건, 나의 아버지가 종손이셨다는 걸 반증하는 증거가 될 것 같다.

  종손인데 딸만 연이어 태어났으니…, 아버님은 굉장히 철저하게, 아주 엄격하고 완고하게 집안을 이끄셨다. 엄격한 집안일 경우엔 그걸 반항하며 삐딱하게 나가는 애들도 하나둘 생겨나는 게 보통이라 하지만, 다행인지 몰라도 우리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집안의 정서 자체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장소는 경기도 평택의 시골이었다. 제법 크게 농사일을 하셨던 아버님 때문에, 우리 집에는 일하는 분들을 포함해서 항상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 많은 사람들한테 예를 갖춰서 대접하는 역할은 항상 어머님의 몫이었다.

  언제나 예를 갖추며 손님을 맞고 환대하는 모습, 그런 모습을 계속 마주대하며 지내다 보니, 어머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그 풍토가 우리 형제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던 모양이다. 앞서 언급했던 ‘무척 말 잘 듣고 착한 모범생’이었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언니들도 거의 똑같은 비슷한 스타일로 자랐고, 그렇게 생활하며 비슷비슷한 성격을 갖게 된 셈이다. 요즘은 그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수많은 학원을 전전하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데, 유치원이나 학원 같은 건 아예 존재 자체도 몰랐던 시골 지역의 내 어린 시절은 그런 가정의 풍경과 가족 분위기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3일 전에, 딱 사흘 전에…

  어린 시절의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나는 나는 될 터이다. OOO이(가) 될 터이다.’ 하며, 대통령이든 의사든 판검사든 과학자든 우주비행사든 뭐든 거창한 직업을 자신의 미래라고 노래하던 풍경이 있었다지만, 나의 경우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아주 어렸던 시절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신 중학생이 될 즈음, 그러니까 사춘기를 맞이하고 나 자신의 정체성을 떠올릴 무렵이 됐을 때 갖게 된 나의 미래는 선생님이었다.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원하시던 거, 당시 여자로서 가장 무난한 직업은 선생님이라는 당신들의 말씀, 더욱이 시골에서 생활하던 입장에선 여자가 직업을 갖고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책이자 목표는 언제나 ‘선생님’으로 귀결되곤 했었다.

  그렇게 하라는 말씀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그 어떤 이견 같은 건 달지도 못한 채로 나의 장래희망은 선생님이 됐고 그렇게 굳어져 갔었다.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OO사범대학이 목적지가 됐고, 모범생이라던 나는 순응과 순종의 나날을 여전히 보내게 됐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사고를 당하게 됐던 것 같은데…, 운명론이든 뭐든 따지고 싶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거역이라는 과정을 통해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떠오르곤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내 가슴 안에는 미리 내 인생이 다 지정되고 결정지어지는 것 같은, 어떤 억울함 같은 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뭐든 하고 싶었던 걸 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선생님이 돼야 하나?’ -이게 무슨 의미였나 하면, 일단 ‘영문학과’라는 하나의 학과를 예로 들며 거론해 보겠다. 영문학을 전공한다면 졸업 후 다양한 종류의 기업체에 입사할 수 있고 전공을 살려 유학을 갈 수도 있을 것이며, 작가가 되거나 개인적인 프리랜서 작업을 할 수도 있는 등의 가능성이 아주 넓게 열려 있다. 그건 사실 아닌가. 그런데 당시 기준으로 사범대학을 나오면, 그 다음의 직업은 딱 하나였다. 다른 무엇을 둘러보지도 못한 채 무조건 선생님이 되는 것, 그게 전부였을 뿐이다.

  그런 갈등을 앓으며 지내다가, 나는 가족한테 얘기하지도 않고 사범대 아닌 다른 대학과 다른 학과로 원서를 썼다. 서울의 모 대학 사학과였다. 공부는 제법 잘 하는 학생이라고 인정받곤 했는데, 결과는 떨어졌다는 소식뿐이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될거라 하셨는데… 결과론이지만 대학에서 떨어졌고, 나는 재수를 하게 됐다. 완고하셨던 아버님의 말씀은 단순하면서도 묵직했다. 대입에 실패한 딸한테는 한 번의 기회밖에 주지 않겠다는 거. 그래서 나는 당시 결혼한 뒤 안양에 살던 언니 집에서 혼자 공부를 했다. 재수학원이나 과외, 이런 건 아예 상상도 못하던 상황이었기에, 혼자만의 자습 위주로 재수생활을 끝까지 이어갔다.

  ‘그래, 순리대로 가자!’ -재수를 하면서 정한 학과는 기존의 자의반타의반의 목표였던 사범대학이었고, 모범생이라는 꼬리표를 늘 달고 다녔던 탓인지는 몰라도 새벽처럼 도서관으로 향하는 나날을 계속 이어갔다. 그때까지는 집안에서도 내가 다른 학과를 지원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 순리대로 가자!’ 나름 열심히 노력했고, ‘순리’에 맞는 미래를 살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다하던 그 날은 학력고사 3일 전이었다. 신호가 없던 횡단보도를 건너서 버스를 타야 시립도서관에 갈 수 있었기에, 여느 날과 똑같이 버스를 타러 건너가고 있었다. 새벽 6시 전후라고 기억이 나는데… 약간 외진 지역의 산업도로였고, 내가 마지막으로 서서 걸었던 길 또한 바로 그 길이었다.

 

      머리카락을 깎으면 안 돼!

  당시의 대입시험 명칭은 학력고사였다. 체력장도 다 뛰어서 체력장 점수도 이미 받아놓은 상태였기에, 학력고사만 잘 치르면 나의 미래는 내 선택 그대로 진행될 게 확실했다. 왜냐? 나는 ‘무척 말 잘 듣고 착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거역하지 말고 순리대로 나가면 다 이뤄질 테니까, 내가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걸 나는 나 스스로가 믿었다. 그런 기대와 믿음을 간직한 채로 시험 최종 마무리를 위해 도서관을 향하던 내게 다가왔던 건…, 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내게 들이닥쳤던 건 새벽녘에 질주하던 속칭 총알택시였다.

  의사들도 정말 극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총알택시에 받혀 극히 위급한 상태에서 종합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중환자가 끝까지 또렷하게 의식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기억 속에서 당시 상황을 꺼내놓으며 얘기할 수가 있다. ‘무언가’의 일이라는 게 벌어졌는데,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는 확실하게 들렸다. 저 차량은 택시가 맞고, 운전사 옆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손님일 거라는…. 그들이 서로 뭐라고 얘기하는데 하나는 운전사, 또 하나는 손님이라는 게 구별될 만치의 소리가 에코(echo,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려 퍼졌다.

  병원으로 급히 달려온 나의 가족은 내 증상이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를 이미 그때 알게 됐던 모양이다. 당시 그걸 몰랐던 건 어머님과 나 뿐이었다고 뒤늦게 들었다. 여기가 병원인 건 알겠고 의료진들의 얼굴도 보이고 의식은 깨어 있었기에, 눈앞에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파악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팔다리가 안 움직이는 걸까? 일어나고 싶은데도 못 일어나겠다는, 팔다리를 포함해 온 몸에 쇠뭉치 같은 걸 달아놓은 것 같은 그런 느낌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도 이게 일시적인 충격에 의한 후유증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뭔가의 사고를 당해서 잠시 움직이지 못하는 후유증, 일시적인 후유증, 조금 지나면 해결이 되고 털어낼 만한 그런 게 분명하리라는….

  그런데 이건 뭔가? 의사가 내 머리카락을 삭발해야 한다고 했다. ‘견인치료’라는 걸 해야 하기에, 내 머리를 박박 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안 된다고 했다. 학력고사가 사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내 머리카락을 밀면 어쩌라는 말인가. 나는 내일 모레에 시험을 보러 가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깎아대면 나가지를 못하지 않느냐. 모자도 못 쓰게 되지 않느냐. 도대체 이렇게 깎으면 어쩌자는거냐…. 나는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엄청나게 울었다고 기억된다. 그 눈물이 병상을 가득 적시는 동안 내게 들렸던 건 내 머리카락을 밀어내던 기계음 소리, 또한 내 머리카락을 내 머리 피부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들던 이물질의 섬뜩한 느낌 같은 거… 그게 전부였다.

   
 

 

     나의 책읽기 그리고 운명이 된 글쓰기

  내가 내 상태를 비로소 알게 됐던 건, 1년하고도 3,4개월 정도 지난 후였던 것 같다. 내 상황과 현실을 제대로 알게 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갔다는 의미가 된다. 2년 6개월 동안 입원해 있던 곳은 서울 성동구의 한양대학병원이었다. 지금의 그 곳은 새로운 건물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서 좀 삭막해졌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데, 당시 그 병원의 주변은 벚꽃과 아카시아가 가득했던,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꽃길이었다. 참 보기 좋았던 길이었다. 그 길을 오고 가던 대학생들의 활달하고 까르르 웃던 모습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꽃길을 따라 오가면서 내 친구들이 하나둘씩 병문안을 왔다. 나는 그때가 가장 견디기 힘든 기간이었다고 지금껏 기억된다. 어느 대학으로 진학하든 간에, 그런 캠퍼스의 낭만을 직접 만끽해야 했던 게 바로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젊은이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는 언제나 귓가에 울려 퍼졌고, 나는 1987년 5월 퇴원할 때까지 지난한 시간을 병원에서 견뎌야만 했다. 그 절망의 긴 터널을 어떻게 견뎠을까? 나는 책읽기에 미치듯 파고들었다. 병상에 누워 하루 15시간씩 책을 읽었다는 당시 생활 내용이 최근 어느 일간지 기사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나는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아이였기도 했다.

  시골에 살다 보니, 게다가 농사일을 하는 집 환경이다 보니 내겐 책을 사주는 이가 없었다. 아주 많이 읽고 싶은데도 손에 잡을 만한 책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나는 학교 도서관을 가장 많이 애용했다. 그래도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싶어서, 교무실로 달려가 선생님들 책꽂이의 책까지 빌리곤 했었다. 선생님들은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가 봐선 안 될 책들을 일일이 제지하시며 ‘너는 이걸 읽기엔 아직 어려.’ 비슷하게 말씀하시던 모습들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일반적인 소설책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 교무실까지 찾아가며 책을 찾던 나의 책읽기는 거의 유일한 몰입의 대상이기도 했다.

  중학교로 진학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던 건, 학교 도서관에 여러 종류의 책들이 정말 많았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이 모든 건 내가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만큼 책읽기를 좋아했다는 건, 상대적으로 내가 ‘아주 정적(靜的)인 아이’였다는 점을 반증하는 거라 생각된다.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면, 나는 무슨 큰 꿈이 있었거나 어떤 특별한 비전 같은 걸 간직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던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조용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이번 제15회 심훈문학상 시상식 참석을 위해 당진에 갔을 때, 그 문학상을 주관하셨던 어느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딱 한마디를 건네셨다. ‘소설 쓰는 게 운명인 것 같다.’고 말이다. ‘선생님은 저를 처음 보셨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라고 완곡하게 여쭈었는데도 그 분의 대답은 똑같은 말씀의 반복이었다. 소설 쓰는 게 운명인 것 같다는, 그 한마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나는 아직도 종종 헤아리곤 한다. 물론 해답은 이제 내 가슴 안에 담겨지게 됐지만 말이다.

 

     외롭다 해도 이젠 나의 길을 가야겠다는 거

  내게 가장 많이 던져지는 질문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야 할 만큼 한 가지로 모아진다. 왜 하필 소설인가? 문학의 장르는 여럿 많은데, 불편한 몸으로 가장 호흡이 긴 소설을 택한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일단 분량 면에서도 가장 길고 부담되지 않느냐, 하는 문답을 자주 갖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저는 아직 마음결이 곱지 않아서 시가 안 나오는 것 같아요.’ 또한 덧붙이며 ‘어떤 빛 나는 한 줄을 적는다는 건, 아직 제 역량으론 안 되는 것 같아요.’ 내 신체적인 상태를 염려하며 헤아려 주시기 때문일까? 다들 소설 아닌 시를 먼저 언급하며 권유하시곤 한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나 자신한테 궁금증을 가지며 질문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왜 소설을 선택했을까? 그 계기는 아주 단순하고도 엉뚱한 데서 시작되며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2001년이었나? 어느날 남편은 대강 찢어낸 듯 보이는 신문지 한 조각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내 남편은 성격이 좋고도 정말 털털한 사람이다. 어떻게든 보기 좋게 오려서 가져오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겠는데, 손으로 삐죽삐죽 ‘툭’ 찢은 게 분명한 종잇조각 하나를 내 앞에 제시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장애인문학상 공고’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는데, 내게 응모를 한번 해보라는 권유가 뒤따랐다. 책이야 참 많이 읽었다는 건 나름 자부했지만, 글이라는 대상은 아직 막연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어차피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게다가 기동성이 없는 상태로 혼자만의 생각과 상상을 떠올리다 지우던 나날의 연속이었기에, 글을 쓸 만한 분위기 자체는 일정 부분 갖춰져 있는 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글을 쓴다는 건 ‘감히’라는 전제를 달아야 할 부담스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편의 ‘신문조각 하나’로 발단이 된 글쓰기의 시도로 인해 상을 받게 되고, 또 다른 몇몇 문학상 공모에서도 큰 상을 받게 되니까, ‘작가’라는 인생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 또한 내 의도보다는 빠르게 진행됐던 것 같다. 훨씬 빠르게 말이다.

  ‘누구는 누구 문하생, 누구는 누구의 제자’ 하는식의 문학적 인간관계 같은 건 내게 없다. 지금 생각으로는 아주 답답하며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지만, 내겐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며 지표가 될 만한 문인친구 역시 없다. 허나 답답하다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왜냐, 내겐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기에, 그 기대치를 안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카뮈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거, ‘아, 이 작가가 그런 시대에도 이런 걸 느꼈다고? 정말 이런 걸 느꼈을까?’ 하는 심정을 계속 간직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는 그의 시대를 살았지만, 나는 나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가장 큰 힘으로 존재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역사에는 ‘if(만약에)’가 없다지만

  잘 알려진 작가들마다 그들이 간직하던 주된 테마들이 작품의 진행을 이끌곤 한다. 누구는 이별이나 공허, 누구는 종교와 사색, 누구는 연애나 사랑 등으로 작가적 색채를 분명히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 이끌어가야 할 나의 문학은 무엇을 중심으로 삼으며 세상을 바라봐야 할까? 요즘 심각하게 헤아리고 있는 나의 화두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고통’이라는 그 화두에 왜 그리 천착(穿鑿)을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고통,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느끼게 되는 건 육체적인 어떤 아픔에 자꾸만 방점이 찍힌다는 것. 그런데 그게 역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이 매 순간 내적으로 성찰할 힘을 내게 건네곤 한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성찰한다. 그 계기가 바로 글쓰기라는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거, 새로운 언어를 창작해 나간다는 거, 그건 사실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외로움이 없다면 창작의 언어들이 나올 수 있을까 하며, 가끔씩은 혼자만의 자문 자답을 반복하곤 한다. 이런저런 기회로 취업 형태의 일을 할 만한 자리가 눈에 보이기도 했고, 그런 유혹이 늘 갈등의 단초가 되기도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뒤늦게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면 ‘그래도 나는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이라면 그 어떤 자리로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늘 뇌리 한 공간을 떠나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왜 나는 모두 다 ‘과거형’의 문체로 적고 있는 걸까? 갈등의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if(만약에)’가 없다고 그 유명한 어느 학자가 갈파하지 않았던가. 뜬금없이 주어지는 기회라는 건 없다. 그렇기에 나 는 항상 오늘 이 시간을 최선의 노력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내 실력의 높이나 깊이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나의 언어들을 모아 세상의 문을 두드렸고, 세상은 조금씩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정말 다행스럽고 행복하게도 말이다. 이제는 나의 길이 어느 쪽이고 무슨 모습인지를 알게 됐다. 몇 해 전부터 인생의 이름으로 본격적인 나의 글을 적기 시작했다. 이번에 큰 상을 받게 된 것도, 어쩌면 더 이상 뒤돌아보지 말고 나아가라는 누군가의 뜻인지도 모른다. 그래, 이젠 뒤돌아보지 말자. 뒤를 돌아보는 만큼 미련과 갈등이 생겨나기에, 이젠 앞만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일이다. 그게 바로 나의 길이기에.

 
   
 

     내가 먼저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if(만약에)라는 단어를 전제로, 내가 내게 던지는 질문 중에는 빠지지 않는 내용이 있다. 만약에 그때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당시 학력고사를 보고 대학생이 되어 캠퍼스 생활을 하다가 사회인이 됐다면, 그랬다면 나는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주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생각을 엮어보아도, 결론은 늘 한 가지로 남겨지곤 한다. 선생님이 됐을 거라고. 특별하게 새로운 건 없었을 거라고. 당시의 틀은 완고하면서도 견고하게 그 질서가 유지됐기에 나는 그 질서 안에서 선생님이 됐을 테고, 언니들이 다 그랬듯이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하는 과정을 그대로 밟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 하나가 늘 덧붙여지는 게 있는데, 당시의 내 학구열이 나 자신을 움직여서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 같다는, 그건 ‘아마도’와 ‘만약에’를 대입시켜도 실제 그랬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곤 한다. 공부가 즐거워서 한다는 수재는 아니었지만, 나는 공부를 잘 하려고 노력하는 아이였고 그 노력에 익숙했기에 분명히 더 높은 학위에 도전했을 것이다. 이런 if(만약에)를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반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의 내 삶을 재정립하고 다시 바라보기 위한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많이 살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나고 나서 보니까,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인내’라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참고 살 수 있다는 것, 그건 내 주위에서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분들에게도 꼭 전하고픈 한마디이기도 하다. 무언가의 목표를 갖고 지내는 분들이 많은 만큼,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상심 속에 살아가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 말씀은 꼭 전해드리고 싶다. 본인이 처한 장애는 불가항력이라는 거,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우선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용하는 데는 엄청난 분노와 좌절이 동반되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받아들이는 게 다음 생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언젠가 어머님께서 혼자 통곡하시는 걸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 장면은 모든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내던 내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러다간 어머님께서 먼저 돌아가시겠다는, 내가 이렇게 절망하고 좌절 속에 빠져 있어선 안 되겠다는 결심을 그 눈물을 통해서 하게 된 셈이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그때부터 찾게 됐고, PC통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 소통 안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 것도, 습작이나마 글을 쓰게 됐던 것도, 학위 취득을 위해 공부하며 인터넷을 두드린 것도 모두 다 내가 나의 상황과 현실을 받아들인 이후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언젠가 라디오를 통해 짧게 들었던 내용 중의 한 대목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출연자 한 사람이 <탈무드>를 다시 읽으며 느꼈던 점을 얘기했는데,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는 대목에 밑줄을 다시 긋게 됐다고 말했었다. 나도 언젠가 읽으며 마음속 밑줄을 그었던 대목이라 떠올리며 공감했다. 그렇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춰준다. 거울이 먼저 움직임을 보여줄 리 없고, 거울이 먼저 내게 손을 내밀리도 없다. 거울을 웃게 하려면, 내가 먼저 웃어야 한다. 거울의 미소가 보고 싶다면, 내가 먼저 미소를 지어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만 따지며 간직한다면, 이 세상은 해결책 하나 없는 아수라장일 뿐이다. 나는 내가 먼저 내 마음속 거울에게 미소를 보내기로 했다. 거울의 따뜻한 대답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이렇게 나아가며 수놓아질 것 같다. 그래도 오늘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내일엔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그 하루를 오늘 살고 있다.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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