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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찾으면, 그것이 자신의 꿈으로 이뤄집니다[사람사는 이야기] 기업연수 전문강사 임임택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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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2.02.10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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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임임택’이라는 인물로 결정됐단다. 절반 정도는 아는 사람이라 느껴지고 나머지 절반은 ‘누구지?’ 하는 심정이었기에, 일단 인터넷으로 검색부터 해봐야 했다. 기업연수 전문강사이고 음악인 출신이란다. 언젠가 봤던 인물이 맞는 것 같아 관련 자료들을 이리저리 살피다 보니, 시각장애를 가진 몸으로 강사 활동을 하며 사회적 명성이 아주 높은 1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 다음에 이어졌다. 취재준비를 하며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됐다’ 하니, 주변 모든 이들의 반응이 하나처럼 똑같았다. 왜 이 사람을 이제야 취재하느냐는, <함께걸음>이 아직도 이 사람을 취재하지 않았냐는 지적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솔직히 난감했다. 나름의 생각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라는 점은, 개인적인 정보력 내지는 관심이 훨씬 낮았다는 현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의 홈페이지부터 꼼꼼하게 살핀 뒤 약속을 정하고, 서울 모처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깔끔한 집 안으로 안내하는 안주인을 따라 거실로 들어섰고, 방 안에 있던 이번 2월호의 주인공이 문을 열며 나타났다. 예상보다는 작은 체구였고, 걸어서 나오는 몸동작은 그가 시각장애 1급임을 반증하는 듯했다. 첫인사와 함께 이번 취재의 취지를 먼저 설명했다. 내용을 확인하려는 그의 몇 마디 질문을 듣는 순간, 이 인물이 논리적인 ‘기승전결’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무슨 내용이든 간에 ‘군더더기’가 없는, 핵심 위주로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병명도, 원인도 모르던 병(病)

임임택 씨는 언론의 인터뷰를 가급적 거절했다는 말부터 꺼냈다. 자신이 했던 얘기도 아닌 내용을 너무 성의 없이 쓰는 것 같고, 게다가 사진 몇 장 찍고 몇 마디 물어보는 걸로 곧장 정리하며 기사를 내보낸다는 데 대한 부담감이 많았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발언과 언급 자체가 올바르게 전달돼야 하는데, 진지하게 말했던 내용이 임의대로 왜곡되면 그게 부풀려지게 되어 있고, 아닌 게 진짜인 것처럼 각색되는 경우가 그동안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걸음>의 취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했더니, 걱정 자체를 안 한다는 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왔다. 취재를 위해 찾아든 이의 작업 스타일을 이미 파악했다는 뜻일까? 카메라와 녹음장비 설치 등의 준비를 마치고 대화를 시작하려니까, 그때까지 곁에서 임임택 씨의 손발이 되어주던 그의 아내가 “말씀 나누세요.” 하며 순식간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같이 계시며 말씀을 함께 나누면 좋겠다 했더니, 임임택 씨가 대신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아내는 정말로 언론에 노출되는 걸 싫어한다고, 방송화면에 나란히 같이 앉으라며 PD가 아무리 요청해도, 저 뒤 어딘가의 구석에 숨어 있다가 마지막에 나타나는 사람이라고….

“제가 시력을 잃게 된 계기는 지금껏 의학적으로 병명(病名)만 정해져 있는 ‘베제트’라는 병인데, 이게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의사선생님들도 확실하게 말씀을 못하십니다. 저는 태어나고 백일 때부터 눈 때문에 병원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요. 지금도 못 밝혀내는데 그 당시에는 더 못 밝혔겠죠. 제가 1952년생이니까 딱 60년 전의 일인데 소아마비 같은 게 눈으로 왔다는 둥, 병명도 없었고 원인도 모르며 지금의 현대의학으로도 치료약과 치료방법은 여전히 없습니다.”

베제트라는 질병증상은 아주 천천히 나타나며 진행된다고 한다. 게다가 이 증상이 시작되면 본인이 언젠가는 실명한다는 걸 미리 알게 된다는데, 다른 증상과는 달리 합병증으로 인해 2,30대 나이에 숨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단다. 망막색소변성증(RP)과 달리 수명까지 좌우할 만큼 심각한 상태로 악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임임택 씨 또한 26살 때 사경을 헤맸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구내염 때문인데 한 달에 20일 이상 아무런 이유도 없이 혀에 구멍이 뚫리며 터지는 증상이 계속 반복되는 바람에, 기운마저 차릴 수 없는 상태로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 오른쪽 눈을 먼저 실명하고, 21살 때 완전히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안 좋다는 사실만 알았지, 실명했을 때도 의사선생님한테 베제트라는 병명은 못 들었던 것 같아요. 그 용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요. 베제트라는 건 한참 뒤에야 알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서울 영등포의 공동묘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이었단다. 아버님의 사업 실패로 그 외진 지역까지 이사를 가게 됐는데, 동사무소에서 배급되던 작은 밀가루 1포로 일곱 식구가 견뎌야 하는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고 한다. 원래 병이 있어 병원생활을 해왔었는데 그나마 가난 때문에 치료 중단이 되고 영양부족까지 겹치니까, 12살 나이에 결국 실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단다.

“눈이라는 건 영양하고 아주 많이 직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옛날 어르신들 보면, 식사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눈이 침침해진다’고 하셨잖아요. 정말로 영양하고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일상적으로 나누던 인사말이 ‘식사하셨습니까?’ ‘아침 드셨습니까?’였잖아요. 하루에 보통 두 끼 먹으면 다행이던 시절이었죠.”

여섯 살 때부터 안경을 써서 친구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그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똑똑한 아이였단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한글과 구구단을 익혔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엔 누님의 학교 숙제를 대신해 줄 만큼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실명이 찾아들었고, 그때부터 그의 장래희망은 의사로 결정됐단다. 그 어린 마음에도 ‘꼭 의사가 돼서 내 눈부터 고쳐야지!’라고 생각했다는 건데, 바로 그 시기에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새로운 세계가 찾아들었다고 한다. 노래가 정말로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기타의 선율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환경과 목표, 어느 것을 먼저 보는가

“5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어떤 팝송 한 곡을 듣게 됐는데, 그 곡 앞부분에 나오는 전자기타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당시엔 전축이라고 불렀죠. LP판이 턴테이블에 돌아가던 그 전축,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기타 소리를 듣는 동안에, 제 몸이 그 전축 스피커 안으로 쑤욱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게다가 소리는 형태라는 게 없잖아요. 그런데 그 소리가 덩어리처럼 날아와서 제 속으로 확 들어오더라고요. 다른 소리는 다 빼고 그 기타 소리 하나만 말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의 가슴에 박힌 그 기타 선율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난단다. 그때부터 기타 소리가 무조건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자기타, 클래식기타, 일반 통기타 가리지 않고 기타 소리 자체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는 건데, 여러 악기가 동시에 연주되는데도 하나의 악기 소리만 들린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몇 해 전 ‘사람사는 이야기’를 통해 만난 적 있는, 클라리넷 연주자 이상재 교수도 같은 고백을 한 적 있었다. 학생 시절 어느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게 됐는데, 딱 하나의 악기 소리만 가슴속에 들려오더라는 것 - 그게 바로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클라리넷 소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에서 기타가 직접 눈앞에 등장한 건 언제였을까? 14살 시절에 옆방으로 이사를 온 어느 아저씨가 통기타를 가지고 있어서, 어깨 너머로 그 아저씨가 치는 ‘도레미파’ 소리를 익혔단다. 빌려서 직접 만져보기도 했지만, 실력이 별로였던 그 아저씨 말고 더 배울 방법이 없다는 게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고 한다.

“제대로 더 배우고 싶었던 거죠. 저도 팝송을 치고 싶었고 삼촌 집에서 전축으로 들었던 외국 팀들의 여러 연주곡도 하고 싶은데, 공동묘지 동네니까 선생님이 있겠습니까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제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은 건 ‘언젠가는 내가 기타 잘 칠 수 있는 그날이 온다’는 확신의 꿈이 생겼다는 겁니다. 프로 기타리스트가 되겠다 같은 건 아니었죠. 아직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기타를 잘 칠 수 있는 그날이 온다는 욕망과 소원 같은 게 아주 확고하고 선명하게 간직되기 시작했습니다.”

성장하기를 고민하던 그 간절함이 결국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낸 걸까? 당시 그의 삶에 아주 큰 전환점을 만들게 된 특별한 순간이 찾아든다. 방학 마지막 날 밀린 일기를 한데모아 적고 있는데, 문제는 하루하루의 날씨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친구 도움을 받으러 공동묘지를 넘어 마을 나무그늘 앞을 지나가는데, 한쪽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단다. 왜 그런가 들여다봤더니 스물 한두 살 정도 된 형 하나가 기타를 치고 있는데, 삼촌 집 전축으로 듣던 그 오리지널 곡 그대로의 실력으로 연주를 하는 게 아닌가.

직접 눈앞에서 연주가 되는 건 처음 봤기에 완전히 매료가 돼서, 집에 가려던 그 형을 불러 세웠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선 그의 눈앞에 기타의 신(神)이 진짜로 등장한 셈이었기에, 기타 가르쳐 달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집이 어딘지를 먼저 물었단다. 사람들 앞에서 거절당하면 창피할 것 같아 그 형의 집부터 알아내고, 밀린 숙제를 어떻게 마무리했는지도 모르게 끝내고 나니 밤 9시가 되어버렸단다.

갔다가 오는 건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문제는 밤중에 공동묘지를 가로질러가야 한다는 공포였다. 요즘과 달리 묘지 관리가 극히 부실하던 시절이라, 조금이라도 비가 세차게 내리면 묘들이 휩쓸려 무너지고 관 안의 내용물(?)들이 질퍽한 흙길 위에 나뒹굴던, 그런 공동묘지였단다. 그래서 저녁 7시만 돼도 인적이 딱 끊기던 동네였는데, 기타를 배울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순 없고 그렇다고 그 공동묘지를 혼자 넘어갈 수도 없고…. 임임택 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강의를 할 때 이 얘기를 언급하면서 모두에게 물어보면, 다들 공동묘지를 넘을까 말까를 고민했을 거래요. 그래서 제가 정정합니다. ‘그것은 고민이 아니라 갈등이다. 사람이 꿈을 놓고 갈등한다는 건 정말 비참한 거다.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고민해야지, 넘을까 말까를 고민해선 안 된다.’ 밤 9시에 갔다가 와야 하는데, 방법을 고민했지 갈까말까를 고민할 수가 없죠. 가야 하니까요. 그 형의 기타에 완전히 이끌렸는데, 제가 안 갈 수는 없고 가는 방법을 고민했던 거예요. 그런데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방법이 딱 한 가지는 있어요. 그냥 가는 거야. 그냥 가야지, 누구 같이 갈 사람도 없잖아요. 또 몰래 갔다 와야 하는데, 이 밤에 어딜 가느냐고 부모님한테 야단맞을 건 분명하고….”

대문을 나섰다가 뒷걸음질 치며 들어서기를 여러 차례, 결국 달빛 하나뿐인 그 공동묘지를 어떻게 넘어갔는지 모르게 가로질러서 결국 그 형 집에 도착했단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입은 얼어붙어버렸는데도 형은 불러야 하고, 그래서 아주 작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형!”을 불렀단다. 대답이 없어서 몇 차례 더 불렀는데, 안쪽에서 들려오는 어느 어른의 목소리는 이것이었단다. “형 없다!” - 어떻게 여기까지 왔던가. 마당인지 마루인지 기억도 안 하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형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단다. 통행금지 시절인데 통행금지가 지나야 들어오고, 아침에는 일찍 학교로 간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한다.

“아…, 공동묘지를 넘어 다시 집에 오는데요. 그걸 언제 넘었는지 몰랐어요. 그 어린 마음에 ‘늦게 들어오는 형, 아침 일찍 학교 가는 형, 그 형을 도대체 언제 찾아가야 하고, 그 형 학교는 어디고, 어떻게 찾아가서 기타를 배워야 하지?’ 그것만 계속 생각하고 땅 내려다보면서 오는 바람에, 공동묘지를 지나왔다는 걸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강의를 할 때 이런 점을 강조하며 말씀드리곤 합니다. ‘환경을 먼저 보면 아마추어의 세계이고, 목표를 먼저 보면 프로의 세계이다.’라고요.”

 

‘되어보겠다’가 아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형한테 정말 배우게 됐을까? 배웠단다. 어떻게? 임임택 씨가 설명해준 그 과정은 아주 실감나는 긴 내용이었는데, 짧게 압축해서 정리하자면 ‘정말 악착 같이 귀찮게(?) 달라붙어서 조르고 또 졸라’ 끝내 승낙을 받아낸 거라 표현하면 될 듯하다. 그럼 얼마나 배웠을까? 6개월 동안 그 형의 모든 실력을 다 배워냈단다. 6개월 동안 그 형을 만났다는 건, 그 기간 동안 매번 공동묘지를 오고 가며 넘나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왜 6개월일까? 더 이상의 새 악보를 구할 수 없어서, 그 형이 가르쳐줄 수 있는 능력이 거기까지였다는 것이다. 당시는 돈을 주고 악보를 사던 시절이 아니라, 좋은 악보가 있으면 선배들이 그걸 베껴서 연습하던 게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그 선배의 선배들은 어디서 악보를 구했을까? 대중음악계의 용어로 ‘곡을 딴다’고 표현하는데, 정말 실력 있는 고수들이 음반을 듣는 것만으로 직접 악보를 적어내는 일을 뜻한다. 그렇다 보니 공동묘지 동네의 형은 더 이상의 악보를 구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소년 임임택 역시 2년 동안 혼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단다.

“16살 때 저의 형님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저의 학원비를 마련해 주셨어요. 제가 기타를 정말 좋아하고 실력을 갖췄다는 걸 아셨기에, 형님 덕분으로 당시 영등포 시골 동네에서 시내 한복판 종로의 학원까지 기타유학(?)을 다니게 됐죠. 거기서 아주 좋은 선생님을 만나, 정말 혹독한 훈련을 받았어요. 그 선생님도 제가 소질이 있다는 걸 아셨던 거죠. 기타에 완전히 이끌려 있다 보니, 제가 기타를 잡을 때 내려다보는 눈빛 자체가 다르더래요. 그렇게 1년 넘는 혹독한 훈련을 받고, 17살 때 전국에서 117명이 모였던 전국대회에서 제가 2등으로 뽑혔습니다. 최연소자로 2등의 영예를 얻게 된 거예요.”

당시 기타실력을 겨루는 경연대회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전국에서 모인 117명이었다면 최소한 각 지역에서는 최고 실력자들이었을 텐데, 게다가 수십 년 경력의 연주자들까지 다 모였을 텐데, 거기서 17살짜리 소년이 2등을 했다는 건 결코 간단하게 평가할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임임택 씨는 당시의 피눈물 나는 노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계속되는 연습에 모든 손끝엔 피멍이 들고, 그 피멍을 뚫고 기타 줄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과정을 참아가면서까지 연습했다는 것이다. 2등의 영예를 얻게 된 이후, 그는 마음속 가득 확신을 갖게 됐단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가 될 수 있다!’ - 그동안 되새기던 ‘되어보겠다’가 아니라, 확실하게 ‘될 수 있다!’로 그 각오와 다짐이 바뀌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로 인정받은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대중음악계에서 ‘성공의 보증수표’라 인식되던 미8군 무대에 스카우트가 된 것이다. 흔한 말로 ‘미군부대에 발만 들여놓아도 이력서가 달라진다’던 시절이었고, 실제 6,70년대 최고의 대중음악인들 대부분의 약력에는 ‘미8군 무대 활동’이라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그에게 여러 명의 원로급 음악인들 이름을 호명하니까, 그의 입에선 아주 반가운 얼굴이라는 듯 그들과의 활동과 관계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워낙 어린 나이에 데뷔했기 때문에 ‘신동’ 소리까지 들으며 해외공연이 확정될 만큼의 활약을 3년여 이어갔는데, 인생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그에게 찾아든 건 무엇일까? 바로 ‘완전 실명’이었다.

 

머릿속에 새겨놓은 2,200곡

   
 
“그 당시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렇게 물으시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그냥 죽음이더라. 죽음과 같은 좌절을 했다. 모든 게 다 죽었다….’ 왜냐, 해외공연 초청을 받아놓고 있었고, 그 공연을 갔다 오면 미8군에 최고의 조건으로 재계약해서 활동하게 될 텐데…. 어쨌든 해외공연은 못 가게 됐죠. 미8군 무대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내려와야 했지만, 제가 제일 크게 좌절했던 건 실명 때문에 저의 오랜 꿈 모두를 잃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기타를 완전히 포기할 순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어느 날 정신 차리며 기타를 잡았는데, 단 1곡도 치지 못하고 기타를 내려놓았단다. 악보를 보지 못하니까 외우고 있던 곡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임임택 씨의 생명력이 발휘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렇게 밀려오는 후회 때문에 자신이 되살아나게 됐다는 건데, 좌절을 하면 그 좌절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걸 기회로 삼는 내면의 힘이 표출됐다는 의미였다.

“이제 꿈도 다 잃어버리고 모든 걸 다 잃어버렸는데, 이렇게 좌절만 하고 있다간 정말 제 인생이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타를 칠 수 없다는 건 저의 모든 걸 잃어버린다는 건데, 그렇다고 기타를 놓을 순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점자악보라도 배워서 기타를 연습해야겠다, 무대엔 못 오르더라도 기타 연습은 하자, 그래서 점자를 배우게 된 거예요. 중도실명자들은 점자 배우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다들 말했는데, 저는 손끝의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읽어봤습니다. 왜냐, 기타를 해야 하니까, 점자악보를 봐야 하니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뭔가 하나를 시작하면 그걸 끝을 내야 해요. 이뤄내야 하는 건 꼭 이뤄내야 한다는 거죠. 질질거리는 걸 아주 싫어하고, 포기와 좌절을 크게 하면서도 그게 아주 짧아요. 그렇게 손끝이 벗겨질 때까지 읽다보니까, 남들은 3개월 걸린다던 점자악보를 저는 18일 만에 끝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들으며 악보를 만들고 있던 어느 날, 후배들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더니 ‘형, 우리 연주생활 같이 합시다.’ 하며 제안을 하더란다. 그러면서 6개월 뒤 다른 나이트클럽으로 계약을 옮긴다며 자신들이 연주하는 150곡의 악보집을 건네는데, 처음에는 놀리는 줄 알고 정말 기분이 안 좋았단다. 하지만 임임택 씨는 ‘그 좌절도 20초’였다고 한다. 무대도 음악도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찾아와 준 후배들이 새로운 기회로 등장한 게 아닌가.

6개월 동안 그 악보들을 점자악보로 만들어 외우기를 반복하니까, 정말로 6개월 뒤 후배들이 찾아왔단다. 그래서 120곡밖에 못 외워 미안하다 했더니, 오히려 후배들이 너무 크게 놀라더란다. ‘자신들은 그걸 외우라고 한 적 없다, 자신들의 연주곡이 150곡이라는 거다, 우리는 그냥 같이 하자고 얘기한 거다, 6개월은 새로운 계약이 맺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 것뿐이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는데, 임임택 씨는 당시 너무 맥이 빠지고 황당해서 정말 ‘눈 뜨는 줄 알았다’며 껄껄 웃었다.

“그래서 그들하고 8년 동안 같이 연주했습니다. 그들은 악보를 보면서 하고, 저는 점자악보로 만들어 일일이 외우면서 했던 거죠. 8년 동안 함께한 뒤 마지막으로 무대를 내려올 때, 후배들이 여덟 권의 두툼한 악보집을 제 팔에 안겨주더군요. ‘형, 우리는 악보를 봤지만 형은 외우면서 했잖아. 이게 형이 우리와 함께하며 외웠던 곡이야.’ 그래서 전부 몇 곡이냐 물었더니… 2,200곡이랍니다.”

 
   
 

목표는 최고, 과정은 최선

화제를 바꿔보았다. ‘기업연수 전문강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 인지도가 굉장히 높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 강의라는 걸 처음 했던 게 언제였는지를 물었다. 20년 정도 된 것 같다고 했다. 어떤 계기로 하게 됐느냐고 다시 물었다. 당시 교회 주일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같이 성경을 가르치던 다른 선생님이 이런 제안을 불쑥 꺼내셨단다. 기업교육계에선 아주 독보적이던 기업컨설팅 전문가였는데, 자신이 혼자서 며칠씩 담당하던 강의 중간에 와서 인생 얘기 좀 2시간 정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임택 씨는 자신은 할 얘기가 아무것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는데, 그 전문가는 해당 분야 베테랑답게 아주 쉽게 설명을 해줬단다. 기타 하나로 미8군 무대에 선 얘기, 점자악보를 18일 만에 독파한 얘기, 교회 새벽기도 반주하려고 피아노 3년 독학한 얘기 등등을 일기장 넘기듯 넘겨봐라, 그 중간마다 기타 연주도 하라면서 모든 방법론을 다 얘기해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2시간 강의를 위해 강단에 서기는 섰는데, 1시간 반 만에 할 얘기는 다 떨어지고…, 그래서 기타 연주와 반주로 남은 시간을 애써 채운 뒤 내려왔단다. 그런데 다음날 교회에 갔더니 그 분 하시는 말씀이, “강의를 어떻게 했기에 그런 성적이 나왔어요?” 하시는 게 아닌가. 임임택 씨는 정말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한다.

“쩔쩔매다가 내려왔는데… 이거 큰일 났구나 싶어서, 뭐가 잘못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분 말씀이 ‘아, 잘못된 게 아니라, 100명 교육생들의 평가가 500점 만점에 498점 나왔어요.’ 하시는 게 아닙니까. 모 백화점이었고 그게 첫 강의였는데, 그 분은 앞으로도 이런 교육을 할 때 2시간 강의를 요청하면 꼭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교회에서 신앙생활에 대한 얘기는 많이 하며 지내왔어요. 그게 밑받침이 되긴 한 건데, 그렇게 한해 몇 편씩 하다 보니까 10년 정도 지나니 연 150회 정도를 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모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한 이후로, 많게는 1년에 400회까지 강의를 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20년 동안 했던 강의가 총 3,000회. 이건 보통의 숫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강의를 들은 청강생(聽講生)들의 반응을 살펴보니까 그냥 ‘잘 들었다’ 수준이 아니라 ‘정말 감사하게 잘 들었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겠다’는 극찬 일색인데, 그것도 때와 장소가 전부 다른 청강생들의 반응이 최고의 감동이라 모아지는 이유를 본인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강사 임임택의 강의가 다른 강사들과 도대체 뭐가 다르기에, 그만큼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

“굳이 말씀을 드려야 한다면…, 일단 제 강의는 살아있는 이야기잖아요. 남의 것을 베끼거나 일부러 연구한 얘기도 아니고 일부러 꾸민 얘기도 아닌, 제가 체험했던 제 삶의 이야기 그 자체니까요. 제 삶을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한다면 그런 감동이 안 나오겠죠. 그냥 제 이야기를 술술 풀어냅니다. 인생이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니까 실패담도 솔직하게 하고, 항상 함께하는 이 기타 역시 한몫을 할 거예요. 강의 때마다 ‘목표는 최고, 과정은 최선’이라는 프로의 세계를 강조하는데, 거짓이 아닌 정말 프로다운 기타 연주가 펼쳐지니까 더 큰 실감을 얻으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강의 내용은 자신의 일기장이란다. 정말 기억에 남는 강의와 청강생들과의 추억을 독백처럼, 또한 고백처럼 꺼내놓던 그에게 새로운 즉석강의 하나를 부탁했다. 바로 <함께걸음>이라는 강단에 서서, 지면(誌面)이라는 객석에 앉은 독자 여러분을 위한 말씀을 남겨달라며 무형(無形)의 마이크를 건넨 것이다. 제안을 받게 되자 평안한 미소를 짓던 그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대신 목소리는 단호했다. 독자 여러분 마음속으로 하나의 무대 강단을 떠올리며, 아래의 임임택 씨 의견을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 읽다가 밑줄 칠 내용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듯싶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어느 누구든지 해야 할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어느 누구든지 해야 할 일을 먼저 찾으면 그게 꿈이 되고, 그런 일이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아무리 부자연스럽고 부족한 면이 있다 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가 분명히 있다고 봐요. 꿈을 가져야 꿈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그 꿈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마시라고 저는 강조하고 싶어요. 꿈을 갖게 되면 아침에 일어나서라도, ‘나는 이런 꿈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항상 되새기세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찾으면, 분명 그 어떤 장애를 갖고 있다 해도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실명을 하고 나서, 점자를 배운 뒤에야 기타를 다시 칠 수 있었잖아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의 꿈은 잃었지만, 그 뒤의 삶을 이렇게 이어갈 수 있었죠.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찾으셔야 꿈이 생기고 이룰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해야 할 일의 꿈을 찾아내세요. 꼭 이루어질 겁니다.”

 

편집자 註) 임임택 씨의 장애증상으로 언급된 ‘베제트’는 ‘베체트병, 베체씨병, 베체트 증후군(Behcet’s disease, Behcet syndrome)’ 등 아직까지도 그 표현 자체가 통일되지 않을 만큼 발병원인이 확인되지 않고 있기에, 본문에선 ‘베제트’라는 용어로 기술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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