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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차별이지만, 장애는 또 하나의 축복입니다[사람사는 이야기] 뇌성마비 1급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류흥주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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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2.04.13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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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심상치 않다. 장애가 축복이라니…. 빈말이 아님은 분명할 테니까, 이번 호 주인공의 고백을 먼저 들어보는 게 나을 듯하다. 그가 인생의 이름으로 내린 결론이 그렇다 했으니, 우리는 그의 삶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공감의 고개 끄덕임을 함께 나누면 될 것 같다.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는 류흥주 씨를 만났다. 선천성 뇌성마비 1급 장애의 몸으로, 그 장애를 딛고 목사 안수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폭넓은 삶의 이야기를 그에게서 들을 수가 있을 것 같다. 그의 삶 속으로 함께 들어가기로 한다.

 
   
 

 

팔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 

“저는 군부대만 가득하던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1965년 12월 말에 팔삭둥이로 태어났죠. 군부대만 있던 시골지역이었으니까, 거기에 무슨 병원이나 변변한 시설이나 산파 같은 게 있었겠습니까. 열 달도 못 채우고 갑자기 나오게 되다 보니까, 당시 부대에 계시던 아버님께 급히 연락을 해서 군의관 두 분이 달려나온 다음에 저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급하게 달려 도착한 군의관 두 사람은 아기를 받은 뒤, 별다른 말도 없이 포대기에 싸서 아랫목에 내려놓고 갔다 했다. 다른 얘기는 없이 ‘아기를 따뜻하게만 있게 해주라’는 말이 전부였다는데…, 미숙아로 태어났으니까 그리 큰 생존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더라는, 그런 한마디가 뒤늦게 들렸던 모양이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아기가 잘 자랐는데, 문제는 앉혀놓기만 하면 쓰러지기 일쑤였다는 것. 이상하다 싶고 발육이 좀 늦나 보다 했지만, 그때까지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발육이 늦다 해도 걸음을 떼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니까 뒤늦게 서울의 한 대학병원을 찾아가게 됐고, 결국 의사로부터 뇌성마비라는 최종 진단을 받게 됐단다.

“당시 군인 가족이라면 다 비슷한 처지였을 겁니다. 애가 그렇게 태어났다 해도, 제대로 신경 쓸 여유 같은 게 없었겠죠. 군인 가족들이야 지금도 그렇겠지만 별을 단 장군들이나 안정적으로 살지, 말단 영관급 장교들은 매번 옮겨 다니며 이사해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으니까요.”

   
 
누나 하나 여동생 하나인 1남 2녀인데, 출생지를 보면 당시 생활의 밑그림이 보일 듯하다. 누나는 철원 태생이고 자신은 포천에서, 여동생은 산정호수 쪽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영관급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의 소속부대에 따라 이리저리 이사 다녀야 했던 군인 가족의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셈이다. 그러다가 서울 미아리로 이사를 왔고, 그때부터 얼마 전까지는 미아리 사람으로 살아왔단다. 요즘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버지가 ‘기러기아빠’의 생을 선택하셨다는 뜻이 된다.

“지금도 재활의학과 의사들을 만나 얘기하다 보면, 어릴 때 치료를 좀 받았느냐는 질문을 꼭 받게 돼요. 전혀 안 받았다고 했더니, 받았다면 좋았을 걸 하며 안타까워하더라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업혀 다녔거든요. 못 걸어 다녔으니까요. 기어 다니고 뭐든 하는 건 다 했는데, 걷는 게 그만큼 늦어졌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발을 떼기 시작했단다. 아무래도 중심 잡기가 힘들기 때문에 벽을 잡고 다니거나 친구들이 옆에서 잡아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지팡이 같은 보조기구 없이 스스로의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는 건 세상이 완전하게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휠체어 생활을 시작했느냐 물으니까 지난 2000년부터 앉게 됐단다. 장애 특성상 걸어 다니다가 넘어지는 일이 잦았는데, 엉덩방아를 찧는 게 누적되다 보니까 목 신경을 누르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도 양쪽 팔이 저리고 아파서 97년에 처음 국립재활원에 갔더니, 처음 몇 번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이것저것 다 검사했는데도 모르겠대요. 그래서 CT 한 번 찍어보자고 했어요. 사실… 뇌성마비가 CT나 MRI 찍으려면 반은 죽어야 돼요. 자꾸 움직이니까요. 그래서 MRI가 없던 당시 국립재활원에서 CT 촬영을 했는데 증세가 조금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영동세브란스병원으로 가 MRI를 찍었더니 목디스크로 판명이 났어요. 그래서 98년에 첫 수술을 하고 2002년에 두 번째 수술을 한 뒤부터 아예 주저앉게 되었죠. 그런데 대부분의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목디스크를 안고 살아요. 기본적으로 몸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에 어릴 때는 모르다가, 나이가 들면서 그게 고착화되면서 기력이 빠져가면 아프기 시작하는 것이죠. 제 주변의 분들도 거의 대부분 저와 같은 케이스라고 하십니다.”

 

어린 시절의 명(明) 그리고 암(暗)

어렸을 때의 생활은 어땠을까?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이니까 풍족하진 않았을 테고, 게다가 직업군인 가족이었기에 상황이 남달랐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정반대였다.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답은 단순하게 제시가 됐다. 1970년대라 함은 흔히 말하는 ‘끗발’이 좋은 게 누구였던 시절일까? 바로 직업군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육이오와 월남전에 참전하신 아버님은 말년에 육군본부에서 예편하실 때까지 깐깐한 성격으로 군복무를 하셨고, 그 덕분에 가정 형편은 어려움을 모르는 편이었단다.

“제가 3대 독자예요. 그렇기에 집안에서 잘 해줬고, 어머니가 업고 학교에 다니셨고, 집에만 있고 학교만 다녔으니까 저 자신은 어려움을 거의 몰랐죠. 그때는 사는 게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었잖아요. 그런데 육본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저의 누나를 육본에 타자수로 취직을 시켜줬어요. 피엑스(PX : 영내면세매점)에서 물건을 사면 무척 쌌잖아요. 그래서 라면과 커피와 콜라 이런 걸 매번 사오면, 그게 애들한테 엄청 인기가 좋았어요. 그런 건 동네에서 구하기 어렵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열댓 명씩 집으로 몰려와서 라면 끓여 먹고 콜라를 함께 마시곤 했죠. 친구들도 많았기에 어렸을 때는 불편함을 잘 몰랐어요. 걸어 다니는 것만 못했지, 나머지는 제 손으로 다 했었으니까요.”

   
 
친구 관계가 좋았다는 게 기분 좋은 소리로 들려왔다. 류흥주 씨는 아무래도 말주변이 있는 편이라서 그랬던 것 같단다. 또한 당시 어른들이 꼭 하시던 말씀 중에서, 밥 먹을 때 밥풀 많이 흘리면 친구가 많다 했는데 그게 꼭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혼자 외롭거나 힘든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기억된단다. 그 얘기를 하던 그의 얼굴이 잠시의 침묵과 함께 굳어져 갔다. 이어서 인권협회 회장다운 몇 마디가 이어졌다.

“제가 장애인 운동하면서 늘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대다수의 장애인들이 부모님 사랑을 못 받고 어렵게 자라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차별 받으며 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생각 없이 건네는 한마디가 큰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그런 조바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 어려움 없이 자랐다는 얘기 같은 걸 평상시 생각대로 말하기는 쉬운데, 듣는 이들한테는 큰 상처로 남게 되거든요. 밥 한 끼도 먹기 힘들게 지내다가 시설에 버려진 친구들한테는 이 땅의 생활이 곧 지옥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류흥주 씨는 항상 부족함 없는 인생만 살아왔을까? 그건 물론 아니란다. 뒤에 언급되겠지만, 퇴역하신 아버님께서 개인 사업을 하겠다고 시작하셨다가 모든 걸 다 날리셨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집에서 살다가 일순간 달동네 꼭대기 집으로 쫓기듯 옮겨 살아야 했던 기억은, 아주 어릴 때가 아니라 성장한 뒤의 일이었기에 지금껏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화제를 바꿔보았다. 어렸을 때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 군인이었기에, 그의 꿈도 멋진 군인이 되는 것이었단다. 장애 때문에 된다 안 된다는 문제를 떠나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의 유일한 꿈은 실제로 아버님과 같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목사’라는 인생이 그에게 처음 다가선 건 언제였을까? 구체적으로 목사가 되겠다 다짐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단다. 또래보다 훨씬 일찍 인생의 길을 찾아낸 셈이기도 하다.

 

장애라는 이유 하나로

“걷기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그 전까지는 학교하고 집밖에 없다가, 그때부터 다닐 곳이 하나 더 생긴 거죠. 교회라는 갈 곳이 생겼다는 겁니다. 놀리는 애들도 없고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중학생이 된 다음부터는 생각이 바뀌게 됐는데,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속상한 일이 있어도 표현을 못했는데, 교회를 다닌 뒤부터는 막 울며 기도를 하다 보니까 마음속 응어리 같은 게 풀어졌어요. 그래서 다짐을 하게 됐죠. ‘나 같은 친구들도 다들 이렇게 살 텐데, 내가 이 좋은 걸 그들한테 알려주고 싶다’며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거예요. ‘나 같은 친구들’이라 함은 장애를 가진 다른 친구들을 의미했죠. 어떤 면에서는 장애운동의 신념을 그때부터 싹틔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교회 목사님이 그를 불렀단다. 그리고 격려 반 우려 반의 의미로 이런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글쎄, 목사 힘들 텐데…. 나도 목회하지만 목사는 슈퍼맨이어야 돼. 해달라는 거 다 해줘야 하고, 뭐든 다 챙겨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어?’ 그런 식의 내용이었단다. 물론 그의 장애를 염려하며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꼭 하겠다는 다짐을 대답으로 말씀드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목회자가 되는 길은 어땠을까? 신학대를 나오고 대학원까지 마쳤는데도 목사가 될 방법이 없었단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장애의 몸이라는 사실 하나뿐. 그래서 긴 시간 방황을 하던 중, 그가 속한 감리교회에서 ‘목사고시’라는 시험제도를 2000년에 도입했다는 소식을 교수님들한테 듣게 됐다고 한다. 시험이 생겼으니까 보라고, 한국에 감리교회가 3000개가 넘는데 너 하나 받아줄 데가 없겠냐며 시험을 적극 권하셨단다. 그래서 목사고시 1회차 시험을 봐서 당당히 합격하긴 했는데, 결론은 오라는 데가 한 군데도 없어서 목회의 길을 시작할 방법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현실 속에서 고민하며 지낼 때, 한 장애인단체에서 제안이 왔어요. 원래 알고 지내던 단체이긴 했는데, 일을 같이 해보자는 것이었죠. ‘뇌성마비연구회 ㅂ、롬’이라고 93년에 만들어진 친목단체였는데, 그게 2002년 서울시에 비영리단체로 등록되고 2005년에 법인이 되면서 현재의 인권협회 이름으로 변하게 됐죠. 나름의 역사가 꽤 되고, 활동도 활발하게 이어진 단체입니다.”

장애인단체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인생은 수많은 굴곡을 넘나들게 됐던 모양이다. 전역 후 사업에 손을 댔던 아버님은 모든 걸 잃으셨고, 장애를 이유로 자신의 목회의 길은 꽉 막혀 열릴 줄을 몰랐고, 그가 대학원 졸업하기 1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아버님은 3년 내내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고, 그 와중에 목디스크 수술이 진행되는 등, 돈도 없고 변변한 배경도 없던 나날 속에 1990년대가 정신도 없이 순식간에 흘러가버리고 말았단다.

그렇다면 닫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을까? 한 줄기 햇살은 기대치 않았던 곳에서 흘러들어왔다고 한다. 감리교회 차원에서 중증장애의 ‘이 사람’을 한번 키워보자는 의견이 존재하고 있긴 했는데, 현실은 계속 동떨어진 방향으로만 흘러갔기에 난처한 입장이 된 교단 차원에서 최종적인 결단을 내렸단다. ‘자금을 줄 테니까 개척을 해라!’ - 뜻 있는 이들이 십시일반 모은 개척자금으로 교회 개척이 결정된 건 2011년 1월, 그리고 목사 안수를 같은 해 4월에 받음으로써, 그는 서울 연남동에 개척교회를 가진 목사님으로서의 인생의 길을 비로소 걷게 됐다. 2000년에 목사고시를 통과한 이후 무려 11년의 세월을 먼 길로 돌아와야 했던 셈 아닌가. 다른 이들은 곧장 자리를 잡고 자신의 뜻을 펼쳤을 텐데, ‘장애’라는 이유 하나가 그를 그만큼 먼 길로 내몰아갔던 것이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다

그렇다면 장애운동의 길은 어떻게 전개됐던 걸까?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시간이 나면 꼬박꼬박 했던 게 신문 독자란에 기고하는 일이었단다. 문제점이라고 판단되는 부분들을 매번 파헤치곤 했는데, 당시 그가 통학 길에 이용하던 서울 지하철 사당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단다. 버스에서 내려 사당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던 생활이었는데, 지금과 달리 장애인 편의시설이 전혀 없던 현실을 강하게 꼬집었던 모양이다. ‘장애인 요금 할인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지하철역 안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를 못하는데.’ 그런데 그 글을 읽은 한 사람이 자신을 수소문해서 찾아왔단다. 같은 장애를 가진 이였는데, 그때가 생애 최초로 ‘나 아닌 장애인’을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현실 얘기를 나누었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93년 6월에 ‘ㅂ、롬’이 만들어졌다 했는데, 이후 이어진 그의 발언에서는 이 땅의 장애운동의 산증인들 이름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실제 현실을 들여다보면, 산증인들의 이름이 거명될 수밖에 없음이 분명해진다.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창립된 게 80년대 후반이었고, 당시는 ‘장애인의 인권’이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장애운동이니 이동권이니 뭐니 하는 단어들은 머나먼 별나라의 얘기였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장애인 현실은 척박하고 열악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더욱이 88올림픽을 준비하고 치른다며 자행했던 게, 장애인들을 ‘시설’이라는 공간에 몰아넣어 거리에서 아예 보이지 않게 만든 만행 아니었던가. 그 어두운 시대를 지나는 동안 뜻을 같이 했던 이들이 바로 장애계를 지금의 모습으로 이끌어온 ‘산증인’들일 수밖에 없기에, 류흥주 씨의 증언에서 그들의 이름이 계속 등장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제가 아주 주저앉게 됐습니다. 연이은 수술 이후로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거죠. 그래서 장애운동과 교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상황에 놓이게 됐어요. 저 자신도 둘 다 안 될 바에는, 본격적으로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는 절박함 같은 게 있었죠. 그래서 교회 일은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운동부터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진짜로 본격적인 장애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공식적으로 일이 시작되니까 사무실이 필요했고 단 몇 명이라도 직원이 있어야 했기에,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며 알아보던 중에 깜짝 놀랄 일이 생겼어요. 저의 고등학교 선생님이 방송뉴스에 나오는 게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인생에선 특별한 계기가 찾아들고, 특별한 인연 또한 뒤따르곤 한다. 그를 깜짝 놀라게 한 그 선생님은 누구일까?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이수호 씨가 바로 류흥주 씨의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졸업 후 찾아뵙지 못했던 은사님의 얼굴이 방송화면에 커다랗게 등장했으니,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더 반가웠을까. 그래서 그는 민주노총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결과는 어땠을까? 여전히 그를 기억하시던 선생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졌고, 장애운동의 뜻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를 위해 단체의 고문직을 흔쾌히 승낙하셨단다. 더불어 그가 살던 지역의 국회의원이었던 조순형 의원도 고문직을 수락하여, 든든한 두 분을 고문으로 모신 뒤 본격적인 장애운동의 길로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더 많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소명(召命)을 받은 자는 아무리 뒤돌아 앉거나 눈을 감고 있어도, 그 빛이 그의 영혼을 비추고 있기 마련이다. 류흥주 씨에게 장애운동과 목회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었을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자전거의 두 바퀴가 함께 움직여야 바로 설 수 있듯이, 그의 삶을 온전히 나아가게 만드는 양축으로써 존재했음이 분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다가 이런 걸 느끼게 됐습니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뭔가. 어차피 한 번 살다가 가는 세상인데, 이 땅에서 정말 하다가 죽을 수 있는 일이 내겐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부터 1년 가까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답을 얻게 되었죠. ‘정말 제가 하나님 앞에서 처음 약속했던 것들, 그걸 이룰 수 있게 해주시면 제가 죽을 때까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열심히 살다가 죽겠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게 된 겁니다. 장애운동을 접거나 등한시하겠다는 게 아니고요. 그때까지는 둘 중에 협회장 일이 일단 먼저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거꾸로 하자. 목회부터 먼저 하자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 거죠. 사람이 몸으로 입으로만 먹고 사는 게 전부는 아니지 않느냐. 영혼이 해결되어야 하지 않느냐. 장애인들이 차별 받고 배고프니까 먹고 사는 문제에 우선 매달리지만, 엄연한 인간으로서 영혼의 문제도 있으니까 이제 나는 그들의 영혼 문제를 해결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 그래서 하루만 살더라도 오늘 죽을 것처럼 살자는 다짐을 굳게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다 해도 교회 공간을 만들 최소한의 보증금마저 없던 그에게 십시일반의 도움이 찾아든 건, 류흥주 씨 스스로 그만큼의 믿음과 비전을 보여줬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준비 없이 갑자기 이뤄지는 일은 없지 않은가. 인권협회 회장으로서 또한 개척교회의 목사로서의 두 가지 삶을 살게 된 그는 장애인의 인권에 관한 관심이 부족한 장애인 비례대표 의원들의 잘못을 따갑게 지적하면서, 장애인운동의 허와 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의견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진정한 공동체를 실현하는 시설을 건립하고 싶다는 꿈도 펼쳐놓았다.

“저는 장애인들이 지혜로웠으면 좋겠어요.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거든요.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고 하셨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왕으로 대접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도 왕으로 대접하라는 겁니다. 장애인운동에서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의 목적을 먼저 도와줘야 되는 겁니다. 우리 옛말에 ‘품앗이’라는 멋진 말이 있잖아요. 그게 장애운동의 기본이 돼야 합니다. 뭔가 꿈을 이루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정력적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내 꿈을 얘기할 때, 그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류흥주 씨에게 장애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선천적으로 갖게 된 장애가 그의 삶에선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 그 속내를 듣고 싶었다. 뭐랄까, 일순간 시공을 초월하는 듯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실제로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런 느낌이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그의 마지막 고백과 독백을 끝맺음으로 올린다. 비로소 이 글의 제목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함께 얘기할 시점은 바로 이 지점이 될 것 같다.

“저는 개인적으로도 얘기하고 설교도 그렇게 합니다. ‘과연 장애의 목적이 뭘까?’ 왜 하나님이 왜 나를 유독 이렇게 만들어놓았을까. 하나님의 실수인가? 실수가 아니라면 목적이 있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장애인과 하나님이 함께하기 위해 만드신 겁니다. 장애가 있다는 건 제가 혼자 못한다는 거잖아요. 분명히 누군가가 같이 가야 되잖아요. 그 ‘누군가’는 가족일 수 있고 이웃일 수 있으며 활동보조인일 수도 있습니다. 혼자 못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꼭 필히 더불어 살게 만드신 거죠.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군가에게 장애가 많으면 많을수록,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장애가 심한 만큼 활동보조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사도우미, 자원봉사자, 더욱 더 많은 사람들과 뭉쳐서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야만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가 있잖아요. 장애가 심할수록 많은 사람들과 살 수 있다는 건, 그게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는 겁니다. 이 월간지 이름이 <함께걸음>이네요. 참 좋은 말을 먼저 쓰시는 것 같습니다. (웃음) 저는 확신하며 믿습니다. 장애는 축복이다! 물론 지금은 차별이지만, 지금은 소외되고 지금은 원통한 것이지만, 조금만 더 열심히 살면 장애가 축복이 될 수가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으며 나만의 개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축복을 서로 나누고 서로 함께하는 것, 저는 그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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