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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다 쓰러질 때까지, 여러분 곁에서 노래하겠습니다![사람사는 이야기] 투쟁현장의 문예일꾼 박준
대담 이승현 기자 / 정리·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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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2.10.24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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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까이에서 바라만 봐도, 또한 어딘가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다.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살아가다 보면, 그런 인물을 만나게 될 계기가 분명히 존재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 하는 의견으로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는 그런 조건에 딱 맞는다고 믿어지는 1인을 만나게 됐다. 거리의 투쟁 현장에서 늘 마주치는 사람, 언제나 낙천적인 웃음 속에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담아 전하는 사람인 건 맞는 것 같은데, 그 긴 세월 동안 마주하며 지내왔으면서도 정작 명함 교환 한 번 했던 적이 없었다는 게 더 의아해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소개를 뭐라고 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투쟁현장의 문예일꾼’이라고 해주시면 딱 좋겠다고 한다. <함께걸음>의 화보 이미지 등을 통해, 독자 여러분께 이미 익숙한 얼굴이 됐으리라 믿어지는 박준 씨가 이 지면을 통해 인사를 올리게 됐다.

그런데 잠깐, ‘사람사는 이야기’는 장애를 가진 우리의 이웃들을 초대하는 자리인데, 덩치 좋은(?) 체격의 그가 왜 여기에 등장한다는 걸까? 재작년 언젠가부터 집회현장에서 마이크만 잡으면, 그가 꼭 외치던 한마디가 있었다. “여러분, 저도 이제 5급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당당히 함께합니다!” - 지체장애 5급 판정을 이제야 받아서, 여러분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함께하게 됐다던 그의 삶을 반가운 마음으로 들여다보기로 한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면서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의미 깊은 자리가 될 것 같다.

 
   
 

자연스럽게, 모든 걸 자연스럽게

“굳이 ‘사회적 약자’라고 표현한다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들 곁에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서게 된 것 같아요. 제가 1980년대 시작점부터 명동성당에 발을 들여놓게 된 이유도 여러 가지 있었지만, 당시엔 철거민들의 싸움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특히 상계동 철거민 그 분들이 명동성당 들머리로 오시게 됐을 당시, 그 과정까지 정말로 많이 그 분들을 만나러 다니곤 했어요. (제)정구 형님하고 빈민사목을 전담하셨던 정일우 신부님이 그때 함께하셨던 분들이죠. 휴우…, 정구 형님은 속이 새카맣게 타서 돌아가셨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아주 강한 음성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불의에 짓밟히는 민초들이 너무나 많았잖아요. 그래서 그 분들과 항상 눈높이를 함께하고, 똑같은 걸 바라보려 노력하면서 지내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것 같은데, 외면적인 스타일(?) 때문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그의 출생년도부터 물었다. 1960년생이란다. 그런데 군 생활을 오래 하셨던 아버님 때문에, 형제들 모두 호적 기록이 조금씩 늦어졌다 한다. 주민등록증 속 숫자로는 62년이지만, 실제로는 60년생이란다.

쥐띠가 맞는데, 그는 몇 년 전부터 자신이 쥐띠라는 얘기를 절대로 꺼내지 않고 살아왔단다. 저기 어딘가에 있는 ‘그 쥐(?)’ 때문에, ‘쥐’라는 단어를 언급한다는 자체가 짜증이 난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쥐띠’는 뭐고 ‘그 쥐’는 무엇일까? 이런 대화법이 바로 박준 씨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특징이 아닐까 싶었다. ‘그 쥐’가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모를 독자 여러 분들이 계신다면…, 그 부연설명을 이 지면에 구체적인 활자로 옮기지 못하는 고충(?) 비슷한 걸 이해해 주실 거라 기대하고 싶어진다.

“80년대 당시의 철거민들의 싸움은 지금하고는 아주 달랐어요. 용역 애들도 있었고 전투경찰도 당연히 있었지만, 맞붙어 싸우는 과정이 딱 끝나고 나면 동네 어르신들이 ‘야, 이제 상황이 끝났으니까 이리 와서 막걸리 한잔 하자.’ 하며 그들을 불러 함께 잔을 기울이곤 했어요. 그래도 그때까지는 그만큼의 인간적인 소통이 있었다는 거죠. ‘상황이 끝났으니까 이리 와서 한잔 하자….’ 지금은 아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데, 저는 그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넉살 좋게 잘 어울리며 그 시대적 분위기를 익히게 된 것 같습니다.”

1980년대가 어떤 시절이었던가. 1979년 10월 어느 날의 총성으로 구체제가 붕괴된 후, 난데없는 쿠데타의 총알들이 국민 모두의 심장을 향해 무자비하게 난사된 이후가 아니었던가. 1980년대의 명동성당은 ‘1980년대’라는 수식어의 덧붙임이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의미가 남겨져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분노한 시민들이, ‘이건 아니다’라고 공감하던 민초들이 그나마 숨통을 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으로써 존재하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박준 씨는 전례연구회 활동을 통해 청년미사를 담당했다고 한다. 명동청년회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그의 생활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게 진행됐단다. 지금은 국민적 가요가 된 ‘아침이슬’마저 공공의 장소에선 부를 수 없었던 시절, ‘사노라면’이란 구전가요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반체제라 낙인이 찍히던 당시에, 명동성당은 국가의 폭력적 공권력이 덤비지 못하던 열린 해방의 공간이었다. 박준 씨는 거기에서 민중가요를 접하고 수많은 의문사 등 굴절된 시대상을 생생하게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세상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고 한다.

 
   
 

지워진 기억, 그 이전과 이후

“하하하, 이런 얘기도 해야 하나?”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혼잣말로 껄껄 웃던 그는, 자신이 사제(가톨릭 신부)가 되려 했던 당시를 얘기했다. 지금은 정의구현사제단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계신 전종훈 신부님이 그 시절엔 가장 친한 선배였단다. 어떤 단체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인데, 거기서 그 선배가 불쑥 이런 제안을 던졌다고 한다. “준아, 우리 신부하자.” 그래서 “좋아요. 합시다, 형!” 하며 곧장 의기투합하게 되어, 당시 성당 주임신부님의 배려로 교육관 꼭대기의 방 하나를 잡아 공부에 전념하게 됐단다.

그런데 인생의 여정을 바꾸게 될 일이 그때 벌어졌던 모양이다. ‘해직교수’라는 명칭이 굴절된 시대상의 반영처럼 존재했던 그 시절,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던 리영희 교수님이 복직되어 성당 문화관에서 강연을 하신 적이 있었단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서 3천 명 이상 가득 채워졌는데, 강연이 끝나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크럼을 짜고 ‘흔들리지 않게’라는 곡을 합창하며 성당 언덕길을 내려오게 됐다고 한다. 백골단이 아래 입구를 막아선 건 당연했을 테고,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박준 씨는 함께 나서지 못한 채 언덕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단다. 신부님께서 신신당부 말씀하신 게 있고, 더불어 자신이 준비하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란 게 건드려지면 튀어나갈 수밖에 없는 거 아니에요. 멀리서 보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백골단 애들한테 잡혔어요. 그때는 그랬습니다. 여럿이 사지를 딱 잡아요.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본능적으로 반항을 할 게 아니에요. 여성은 더 해요. 그런데 백골단 놈들이 그 여성의 윗도리를 확 벗겨버리는 거예요. 아…, 무자비했어요. 그게 딱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건 뭐, 어떤 주저할 이유가 없었어요. 성당 언덕 위에서 전 속력으로 달려 내려가 그 속력으로 붕 날아서 백골단을 덮쳤어요. 싸워서 이길 방법은 아예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 여학생을 구출해야겠다 해서 가까스로 떼어놓고, 시민들 쪽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했죠. 그리고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정말 많이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몇 개월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거든요.”

후배들한테 나중에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병원 생활을 길게 여러 번 했다는 것, 그때의 기억은 정작 박준 씨 본인이 아니라 후배들에게만 남겨져 있다는 것이다. 담배를 엄청 즐기던 시절이라 병원에서도 담배를 거의 손에 들고 살았다는데, 인턴 같은 의사들이 회진을 돌면 지적 받기 싫어서 도망 다니곤 했다는데, 그건 후배들의 기억에만 남겨져 있는 생의 한 페이지인 셈이다. 어떻게 기억이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몸을 추스르며, 그는 후배의 조그만 방에서 함께 생활을 하게 됐단다. 결국 신학교는 포기하게 된 채로 말이다.


‘공부보다도 사는 데 사제의 길이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너의 몸 상태가 이러니까, 일단 사제의 길은 잠시 접고 건강을 되찾았을 때 다시 생각해 보자.’

신앙의 길을 이끌어주시던 주임신부님의 말씀에 따라 원했던 인생길을 내려놓았는데, 그때 그에게 다가온 게 바로 심장병 어린이들이었다고 한다. 사실 박준 씨가 이 세상에 그의 존재를 처음 드러낸 건 1985년 명동성당 입구에서 시작됐던 ‘심장병 어린이 돕기 모금행사’였다. 당시 성당 입구 바로 옆에서 기타 들고 노래하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겨져 있을 텐데, 바로 그 사람이 박준 씨였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다.

 
   
 

그거 아저씨가 한번 구해볼게

‘너에게 달란트라는 건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온다.’

신부님께서 그에게 해주셨던 말씀처럼, ‘심장병 어린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 건 달란트와 같은 인생의 인연이 아니었나 하며 지금도 떠올리게 된단다. 그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 고장이 난 앰프와 스피커를 고쳐 성당 들머리에 섰고,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풍경은 ‘그때’부터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된 셈이 된다. 처음 만나게 된 아이를 돕고 치료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활동했지만, 그 아이는 결국 그해 겨울에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단다. 숨 쉬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그 아이는 뭘 갖고 싶은지 물으면 늘 작은 무언가를 얘기했기에, 그는 꼭 이렇게 답해 줬다고 한다. ‘알았다. 그거 아저씨가 한번 구해볼게.’ 그리고 그걸 마련하기 위해, 다시 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모금행사를 벌였다는 것. 그런데 어느 날 그 어린 아이가 ‘연례행사’라는 표현을 썼단다. ‘아저씨, 왜 추울 때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오죠?’ 하면서.

   
 
“그 ‘연례행사’라는 표현이 지금까지도 가슴에 깊이 남아 있어요. 어려운 이웃들이 추울 때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게 맞잖아요. 그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서, 다시 용기를 내서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5월인가, 전례연구회에서 음악회를 하자고 해서 그걸 맡아 하게 됐어요. 마침 같은 모임에 윤복희 씨의 먼 조카가 있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댁으로 찾아가서 말씀드렸더니 쾌히 승낙을 하셨죠. 오성과 한음, 해바라기 등의 가수들도 오게 됐고, 제가 성가 지도를 하던 반에 마침 서울예전 연극반 조교수가 있었어요. 그 분이 드라마센터의 조명세트를 빌려주시는 등 정말 많이 도와주셨죠. 2시간 예정이었는데 3시간을 넘길 정도로, 정말 많은 분들이 자신의 재능을 나눠주셨어요. 그 분들한테 제가 드릴 건 딱 꽃 한 송이밖에 없었거든요. 그 많은 분들이 너무 아름다운 음악회를 선물로 남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음악회를 계기로, ‘수와 진’이라는 남성듀엣 가수가 그에게 다가오게 됐단다. 함께하고 싶다는 의향을 가지고 온 것이었는데, 못할 게 뭐 있나 싶어서 같은 자리에서 노래를 하게 됐지만,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 떠올리게 됐던 모양이다. 순수하게 ‘심장병 어린이를 돕자’고 시작했던 일이, 카메라 플래시가 난무하는 속에 수와 진으로 그 중심이 옮겨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는 의미 같았다. 그래서 ‘아픔을 상품처럼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몇 차례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은 계속 그가 원치 않던 방향으로만 흘러가기에, 마지막 한마디를 그들에게 남기고 그는 자신이 시작했던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했다. ‘심장병 어린이들을 가지고 장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이건 진심으로 호소하는 거다.’

 
   
 

우리 배지도 달아주소!

대화의 분위기를 바꿨다. 독자 여러분들이 박준 씨를 가장 많이 만나는 곳은 다름 아닌 거리의 현장 아닌가. 그렇다면 무대에서 여러 분들을 만나게 될 때는 어떤 마음으로 마주하게 되는지를 물었다. 무조건 식구 같단다. 그리고 무대를 무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무대의 눈높이가 싫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바닥에 늘 내려와서 함께 노래를 하게 된다고 한다. 무대라는 건 앞에 앉아 있는 장애인 동지들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데, 무대라는 게 항상 커 보이는 게 싫어서 눈높이를 맞추고자 늘 아래로 내려가곤 한단다. 무대와 관중 또는 무대와 객석이란 이분법이 아니라, 함께해야 하고 함께하겠다는 그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어야 하며, 자신 스스로도 장애인 주체이기에 더더욱 함께해야 한다는 마음을 앞세우게 된다고 했다.

   
 
여기서 잠깐! 그가 무슨 장애 몇 급을 가졌다는 건지, 그걸 아직까지 묻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게 아닌가. “여러분, 저도 이제 5급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당당히 함께합니다!”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했다. 지체장애 5급인데, 왼쪽 발목 뼈 안쪽에 염증이 생겨 초등학교 때 골수염 수술을 했고, 오른쪽 무릎에도 골수염이 와서 왼발과 오른발의 발육상태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 외견상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는 남모르게 운동을 아주 많이 했다고 했다. 운동을 안 하면 완전히 퇴화가 될 것 같아서, 근력운동을 끊임없이 해왔다는 것이다.

“사실 예전에 장애등급을 받으려고 OO의료원에 간 적이 있었어요. 10년 전일 겁니다. 그런데… 아휴, 이 의사들이 너무 깐깐하게 드는 거예요.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장애인들이 너희들한테 동냥질하러 오는 줄 알아? 장애인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마! 이것들아, 내가 어떻게든 급수 하나 받으려고 이렇게 오는 줄 아는 모양인데, 너희들이 지금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과 그 행태가 뭐야?’ 그래서 집어치우고 그때는 받지 않았죠. 그런데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좀 안 좋아지는 것 같아 정형외과를 갔는데, 그 의사가 ‘하나 만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는 거예요. 정형외과 의사들은 골반을 가장 많이 보거든요. 제 다리를 보더니 ‘상당히 많이 치료를 받으셨나 봐요.’ 하더군요. 다리가 어떤 상태인지 알겠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재작년에 5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사실 많이 아파요. 아침에는 그냥 못 일어나요. 많이 풀어줘야 일어설 수 있거든요.”

화제를 또 바꿨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항상 수많은 배지가 달려 있다. 기타 케이스에도, 기타 표면에도 형형색색의 배지들이 늘 가득하다. 이걸 다 어디서 구한 건지 물었다. 전부 다 현장에서 주신 거란다. ‘우리 배지도 달아주소!’ 하며 하나씩 건네받았던 것들이 모이고 쌓여,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배지 하나씩의 설명이 잠시 뒤따랐다. 설명 중에 옥란이(고 최옥란 열사)와 똑같은 걸 함께 달았던 거라며 가리킨 하나의 배지가 인상적이었다. 그럼 왜 이렇게 많이 달고 다니는가? 이게 다 홍보란다. 자기 자신의 홍보가 아니라, 그 현장과 그 싸움과 그 투쟁을 대외적으로 상기시키는 수단으로 이 배지들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게 문예일꾼의 삶입니다

박준 씨를 만날 수 있는 곳은 기름지고 흥겨운 자리가 아닌, 소외되고 차별 받는 이들이 싸움을 벌이는 장소뿐이다. 처음에도 물었지만 다시 물어 보았다. 왜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문예일꾼의 역할이 그것이기에 이렇게 살아간다고 했다. 문예일꾼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를 나타내기 위해 올라가는 게 아니고 지쳐 있는 동지들을 격려하기 위함이란다. ‘내 노래를 들어주소!’가 아니라 그들에게 힘을 전하기 위해 뛰는 것이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으며 다음 노래를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 생각한단다. 민주노총이든 한국노총이든 뭐든 간에, 그 안에 소속된 노동자들과 싸우는 동지들이 있으면 언제든 어디든 가야 한다며 늘 준비하고 있다 했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난한 싸움을 계속 하고 있는가. 회사를 살려놓았는데 해고당한 노동자들, 긴 세월 싸워 온 동지들, 20년 가까이 혼자만의 싸움을 계속하는 이도 있고, 콜트악기나 재능교육의 경우는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현장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나마 알려진 단위들도 대중의 관심 밖에 있는데,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싸움은 얼마나 외롭고 처절하게 이어지고 있을까. 박준 씨는 일단 싸움의 방식을 먼저 살펴보게 된다고 했다.

“다분히 저 개인적인 판단입니다만, 저는 일단 충분히 그쪽의 얘기를 들어보고, 문예일꾼의 역할을 이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를 살핍니다. 흔한 얘기로 ‘부르면 와야지.’ 이런 마인드라면 단호하게 거절하죠. 한마디 던져줍니다.

‘부른다는 표현 쓰지 마라. 무슨 개OO도 아니고, 최소한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 않은가. 부탁도 있고 요청도 있고, 아니면 정말 힘드니까 연대라고 할 수도 있고 함께 라는 말도 있는데, 왜 그런 표현을 못 쓰냐? 내가 개OO냐? 부르면 가게?’ 그런 의미로 나름 정중하게 지적을 하죠. 알아들을 귀가 있으면 그 의미를 알아들을 테고요. 아니면 말고요. 하하!”

오래 전 어느 파업 현장에 갔을 때, 서른을 갓 넘긴 듯한 진행자가 그를 이렇게 불렀단다. ‘어이, 이리 와 봐!’ 그래서 깜짝 놀라면서도 어이가 없어 ‘저요?’ 하고 물으니까, ‘어, 자네, 너 이리 와 봐!’ 하더란다. 그의 다음 반응은 어땠을까? 여러분의 예상이 100% 맞을 것이다. ‘야, 네가 이리 와 봐, 이 자식아!’ 돌변한 상황에 얼굴이 시뻘개져서 온 그 진행자한테, 그는 정말 얼굴이 새카맣게 변할 만큼 혼(?)을 냈던 모양이다. 완장을 찼다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부류들을 가장 경멸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은연중에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나이 차이나 직급의 차이 따위는 벗어던지고, 같은 동지적 입장에서 봐야 하는 게 옳지 않나요? 장애인이든 비정규직이든 같은 눈높이로 봐야지, 그걸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게 바로 차별인 겁니다.”

 

끝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수많은 투쟁의 현장을 두루 살펴봤을 테니까, 그는 정말 치열한 싸움의 외침을 생생하게 목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이해가 안 되는 현장이라는 것도 있을까? 모든 게 다 절박함의 절규로 진행되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그 대목을 새로운 질문으로 던졌다. 아주 많단다. ‘정말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는 노조 또한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모 재벌기업의 대규모 노조집회에 참석해 노래하기로 되어 있어 공항까지 달려갔는데, 전화 한 통이 왔단다. ‘비 오는 우천 관계로 집회가 취소되었습니다.’ 박준 씨의 이어질 다음 반응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리를 질렀단다. ‘야, 이런 개 같은 놈들아, 이 정도의 비로 집회를 취소해? 그게 노동자의 투쟁이냐!’

“어느 현장에 갔을 때의 일인데, 믿으실지 모르겠는데 노조원 전체가 하나 같이 딱딱한 자세로 똑같이 앉아 꿈틀도 안 해요. 무대의 진행에 반응도 안 해요. 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몇 천 명이 다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건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또 어떤 현장을 갔을 때는 노조원 전체가 그 비싸다는 휴대전화를 전부 다 손에 들고, 그 비싸다는 신발들을 다 신고, 그 비싸다는 옷들을 다 입고 있는 거예요. 이건 분명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 현장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죠.”

최근의 예로, 서울 시내 한복판의 사거리 전체를 전국에서 찾아온 이들이 사방으로 가득 채우고 앉아 대오를 이루고 있는데, 무대는 한쪽 방향만 바라보며 끝까지 진행되더란다. 최소한 좌우 양쪽과 뒤쪽에 있는 동지들을 배려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끝까지 그대로 진행되기에, 배려와 이해가 없는 지도부의 진행에 큰 답답함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그 많은 노동자들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야죠. 정파적인 문제가 아니거든요. 함께 가야죠. 물론 저한테도 저의 정치관이 있지만, 그런 데 휘둘리며 노동운동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정파는 좌든 우든 있어야 한다고 봐요. 치열하게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결국엔 바다에 가자, 이거예요. 바다에! 그런데 바다에 갈 생각은 아예 못하고, 매번 올챙이들처럼 깃발 따로 들고 지겹게 외치면서 각개전투를 언제까지 할 거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민중의 절절한 호소들이 많은데 따로 놀아요. 이건 정말 가슴 아픈 거예요. 치열하게 붙을 논쟁에서는 붙자, 이겁니다. 바다로 가야 하는데, 허구한 날 씩씩거리면서 다 잘난 사람들이 자기가 잘났다고 하고 있으면, 언제 ‘우리’가 될 거예요? 그런 걸 생각할 때마다 정말 마음이 답답해져요.”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쳇바퀴 톱니바퀴 맞물리듯 살고 싶진 않단다. 성격상 어느 조직이나 그런 데 흡수되어서는 생활을 못하기 때문에, 열심히 활동하는 후배들이 더욱 힘을 낼 수 있도록 일정한 견제세력의 역할을 담당하고 싶다고 한다. 그 무게감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문예일꾼들의 역할이 올바르게 자리 잡는다면 그 방향의 일에 매진하고 싶다는 것이다. 모든 걸 머리로만 처리하려는 세상에, 뜨거운 가슴을 남기고 싶다 했다. 머리는 굉장히 똑똑해져서 다들 말은 너무나 잘 하지만, 그래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실제로는 모이지 않고 제각기 흩어져 있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단다.

‘답답하고 마음 아픈’ 대화만 이어지는 것 같아, 휴식의 기본인 가족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척 슬쩍 물었더니 표정이 순식간 환해지면서, 자신은 아무리 먼 거리를 떠나더라도 아침에 딸들하고 눈을 꼭 마주쳐야 한다고 했다. 딸들? 고교 1학년, 중2의 두 딸의 아빠라면서, 얼굴 가득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그의 모습을 계속 마주보다 보니, 그는 사제의 길보다 더 사제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칼라(Roman Collar)의 복장이 아니더라도 그는 더 낮은 곳으로, 없는 이들 속으로, 핍박 받고 있는 소외계층 속으로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긍정의 힘을 믿고, 따뜻한 가슴을 나누려 애를 쓰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의 인생을 사제의 길에서 문예일꾼으로 돌려놓은 건, 그게 바로 절대자의 진짜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을 떠올리게 된다.

‘답답하고 마음 아픈’ 앞으로의 계획 말고, 즐겁고 희망 담긴 계획을 짧게 말해달라고 했다. 박준 씨는 혼자서 또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짧게요? 한마디로요?’라고 되묻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진짜로 한마디를 던졌다. 그가 뭐라고 했을까? 혹시라도 그의 모습과 목소리를 직접 접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래의 한마디를 읽고 난 뒤 ‘역시나!’ 하며 함께 웃음 짓게 될지 모르겠다. 손뼉 몇 번 ‘짝짝짝’ 부딪치면서 말이다.

“뭐, 언제까지라는 건 없고요. 끝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노래하다 자빠질 때까지. 네, 하하하!”

 
   
 

대담 이승현 기자 / 정리·사진 채지민 객원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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