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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이 아니라…이제부턴 ‘우리는’입니다[사람사는 이야기] 한국정신장애연대 활동가 박미선
대담 이승현 기자 | 정리·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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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3.05.06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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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영역은 정말 넓고 행정적·의학적으로 갈수록 세분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지만, ‘비장애’의 눈으로 바라보는 장애는 휠체어와 검은 선글라스로 상징되는 몇몇 장애유형에 국한되는 게 여전한 현실이다. 특히 정신장애의 경우는 뿌리 깊은 편견과 선입관이 우선하기 때문에, 장애가 아닌 전혀 다른 질병 내지는 치료 불가능한 중병의 영역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편견과 선입견을 살짝 걷어낸다면 대한민국에서 아니, 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정신장애이고, 그 당사자 대부분은 ‘나’와 ‘우리’의 가족이거나 이웃과 지인들에 해당된다는 게 분명한 일이다.

‘나’와 ‘우리’라는 표현 때문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고 발끈하실지 모르겠는데, 정신장애는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에 따라 좌우될 영역이 아니라, 인류의 일상적 생활에 너무나 보편화되어 가장 흔히 보이는 증상으로 존재해 왔음을 이젠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신질환은 극히 열악한 ‘누군가’의 삶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는 이들의 상당수가 이미 겪었고 지금 역시 겪고 있는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도 어렸을 때는 학습장애였고,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빌 게이츠는 아스퍼거 자폐증이라는 정신장애를 앓았다고 한다. 유명한 배우 짐 케리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미남 축구선수로 유명한 데이비드 베컴은 강박불안증과 섭식장애로 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영국의 처칠 수상과 작곡가 헨델은 조울증을 앓았고, 링컨 대통령 또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게 다 ‘정신장애’라는 것이다. 국내 유명 연예인들 중 ‘공황장애 등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데, 그것 또한 정신장애의 한 종류가 된다. 영화 속 정신병원의 음침한 이미지부터 떠올리며 시선을 돌리기 전에, ‘상담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와 같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용어들이 바로 정신장애와 그 예비단계의 치료과정임을 인식한다면, 정신장애는 이미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함께걸음>은 작년부터 정신장애와 관련된 지면을 조금씩 늘리기 시작한 바 있었다. 편견과 선입견의 대표적인 장애증상이면서도 공개적인 대화와 토론의 과정을 접하기가 어려웠기에, 편집기획 차원에서 적극 접근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편견의 틀을 깨기로 했다. 한국정신장애연대(Korean Alliance on Mental Illness ; KAMI) 활동가이며, 정신장애 당사자인 박미선 씨를 이번 호 ‘사람 사는 이야기’ 주인공으로 함께 만나기로 한다.

   
 

카페 같은 아니, 카페가 맞는 사무실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의 한국정신장애연대 사무실로 향했다. 장애인권 관련 사무실들의 분위기가 보통 어떤지를 알고 있었기에, 사진 촬영은 밖으로 나와 따로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떠올리며 건물 3층에 있다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 이건 뭐지?’ 출입문을 잘못 연 게 분명했다. 여기는 일반 카페 매장이고, 사무실 주소를 잘못 알고 찾아온 것 같은 풍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어서 오세요. <함께걸음>에서 오셨죠?”라는 맑은 목소리. 이건 또 뭔가?

기존의 카페로 운영되던 공간이었는데, 한국정신장애연대가 그 인테리어를 그대로 사무실 공간으로 사용하게 된 모양이었다. 카페 분위기를 그대로 보존하며 사무실을 운영한다는것, 그건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다!’ 싶은 풍경이었다. 이번 호 주인공 박미선 씨는 서로가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도, 마치 ‘이 카페’의오랜 주인처럼 편안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커피를 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차로 드실래요?” 답을 들은 뒤 찻잔을 꺼내 준비하던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독백이 나올 때까지는 정말 카페에 온 것 같았다. “어, 생수가 하나도 없네. 물이 없는데 어떡하죠?” 그 한마디에 함께 웃으며 이 짧은 해프닝을 편안하게 즐겼다. 이로 인해 확인된 사실은 딱 두 가지였다. 박미선 씨는 이 카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또한이 자리는 카페‘이다’가 아니라 카페‘였었다’라는 사실 말이다.

모두가 정말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

“예전에는 정신장애인이다 하면 체험담 위주로, ‘나는 어쩌고’ ‘나는 이랬고’ ‘나는 이러했는데’ 하는 식의 증언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잖아요. 그게 하나의 붐(boom)을 일으키면서, 정신장애의 실제 입장을 강연하고 다니는 이들의 대표적인 발언 방식이 됐어요. 하지만 제가 한국정신장애연대 활동가로 활동하다 보니 답을 얻게 됐죠. ‘나는…’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우리는…’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가 아닌 ‘우리는’이란 말로 표현함으로써, 이 모든 편견에 대한 모든 당사자들의 입장을 함께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죠.”

마주앉아 나누는 첫 대화에서, 박미선 씨는 오늘의 결론을 미리 언급한 것 같았다. ‘나는’이 아니라 ‘우리’라…. 이건 정신장애뿐 아니라 모든 장애, 더 크게 확대한다면 시민단체 모두를 향한 조언이자 따끔한 지적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세상의 타성을 가진 눈으로 본다면, 사람들이 다 먹고 사는 문제로만 바쁜 것 같잖아요.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사실 제 주변만 둘러봐도 정말 치열하게 사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제가 대학원에서 음악치료를 전공한 기간이 있어서, 그때 장애아동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거든요. 장애아동을 키우는 엄마들…, 정말 엄청나게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또한 신체장애를 가진 분들은 아무리 신체적 기능이 상대적으로 낫다 해도, 개인적인 용변을 보는 일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힘들고 열악하잖아요. 그런데도 모든 분들이 정말 너무나 열심히 살고 계세요. 저는 제가 왜 이런 지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됐는지를 솔직히 고민했거든요. 아마도 제가 이런 시대적 흐름을 표현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저라는 사람이 이 지면에 선택된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더 열심히 사는 분들의 인생역정을 들여다본다면, 그 분들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처절한 삶인가 여부가 바로 증명될 텐데….”

박미선 씨의 대답은 한마디로 ‘시원시원’했다. 그만큼 막힘이 없었고, 적재적소에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언급이 된 상황의 설명을 이끌었다. 자신의 장점이 그렇게 말을 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활동가로 일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더욱이 여러 대학이나 기관에 강의까지 나가며 지낸다고 하니, 그가 단순한 속칭의 표현이라며 언급한 ‘말빨’은 아닌 게 분명한 일이었다. 아무리 말을 잘 한다해도, 청중 앞에 설 수 있는 강단의 무게감은 분명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별안간…

“저는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었어요. 5살 때 이미 죽음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했으니까요. ‘영원히 죽는다’는, 그 ‘영원히’라는 말에 너무 소름이 끼치고 무서워서 혼자 경기를 일으켰거든요. 당시에 또 간질 환자를 직접 목격하면서, 저 역시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고 혼자 고민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죠. 그 정도로 진지하고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집안에서 막내딸이었던 초등학생 박미선을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건 바로 ‘엄마’였던 것 같다. ‘나쁜 엄마’가 아니라 ‘너무 아픈 엄마’였다는 의미이다. 미선 씨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직장암에 걸리신 엄마는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실 때까지, 어린 소녀 박미선에게 너무 큰 인생의 상처와 의미를 생생하게 전해주셨다고 한다.

“엄청나게 고통스럽게 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거죠. 종말기의 암환자 바로 옆에서, 제가 함께 잠들며 살았다는 거예요. 정말 마른 몸이 되어 참혹하게 돌아가셨어요. 엄마의 아픈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어수선한 건 많이 있었는데, 그래도 학교에선 무척 외향적이고 밝은 아이라는 평가를 들었거든요. 하지만 저의 마음 안에 있는 게 뭔지는 애들은 아무도 몰랐죠. 늘 반장을 하고 지도적인 활동을 하는 아이였지만, 저에 대해선 밖으로 거의 얘기를 안 하고 지냈으니까요.”

무조건 귀여운 막내딸이었고 엄마는 그렇게 심하게 아프신 그런 와중이었지만, 그 어린 소녀에게는 성(性)적인 문제가 너무나 큰 부담으로 남몰래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 어떤 ‘나쁜 상상’ 같은 일이 아니라 여성의 성(性)적 부위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고민이 많았는데, 그걸 어디에서도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괜한 자의식과 죄의식 때문에 혼자 끙끙 앓으며 괴로워했고, 괜한 아픔 때문에 약국에 가서 엉뚱한 약만 계속 사먹는 나날이 이어지기만 했는데, 박미선 씨는 이 대목에서 분명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어린 아이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왜 아픈지를 확인한 다음 정신적인 주변상황도 함께 살펴봐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당시엔 다 그랬겠죠. 대화를 할 데는 없고, 약국에서는 약만 처방하고…. 이 얘기를 왜 제가 중요하게 말씀드리는가 하면요. 성적 수치심에 의한 혼자만의 죄책감이라는 게, 정신질환에 있어서 상당한 근본바탕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제가 2,30년 공부를 해왔지만, 정신질환은 항상 어떠어떠한 설(說)이 많아요. 정신병의 원인이 뭔지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지식인들은 확정적으로 발언한다는 것이죠. 유전론이다, 낙인론이다, 뭐다 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건 현실하고 전혀 다른 게 대부분이에요.”

신경쇠약에 이르기까지 힘겨워하던 그에게 다가온 낯선 고등학교 세상은, 또 다른 흔들림의 원인을 제공했던 모양이다. 당시 ‘달동네’라고 불리던 지역의 중학교 풍경에 익숙했던 그에게, 마침 개통된 서울 지하철 2호선으로 통학이 가능하게 된 ‘강남 모 지역’의 고등학교는 별세계의 낯선 환경을 던져줬던 것 같다고 한다.

“정말 부유한, 정말 상막한 고등학교를 접했을 때 제가 발병이 된 것은, 정신질환도 환경요인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환경요인은 정말 중요해요. 학교라는 환경이 어느 한 학생을 지지해 줬을 때는 괜찮지만, 환경적 요소마저 한 개인을 억누를 때는 발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일반적인 누구에게나 환경적인 문제로 압박을 가하다 보면, 정신질환이 생길 수 있다고 저는 판단을 하고 있어요.”

어느 날 너무 힘든 나머지, 중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를 찾아갔단다. 그리고 너무 힘들다며 울면서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돌아서서 길을 나서는데, 갑자기 서 있던 길의 바닥이 밑으로 푹 꺼지면서 난데없이 동서남북의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렸다고 한다. 친구한테 급히 얘기해서 언니가 찾아오기는 했는데, 그때가 정신장애의 본격적인 첫 시작점이 됐던 것 같단다. 시점은 고교 1학년 생활이 막 시작되던 4월이었다.

   
 

진실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

“그때부터 증상이 시작됐어요. 증상이라는 게 뭐냐 하면 말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뭐든 먹이면 입에 담고만 있으면서 뱉지도 않고….”

그렇다면 그게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냐고 물으니까 그렇단다. 오전과 오후가 완전히 달라진 식이냐고 다시 물으니까 맞는다고 한다. 정말 갑자기 닥쳤다는 것이다.

“그게 시작되면서 계속 저는 딴 소리를 막 듣게 됐죠. 막 웅성거리는, 그 어떤 죄의식이 발동되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존재야.’ 그런 목소리들이 들리는 거예요. 실제로 그런 문장들로 이루어진, 뭔가 내용이 있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막 쏟아지는데, 몇 주 되지 않아 결국 정신병원에 입성(入城)을 하게 됐죠”

첫 발병과 첫 입원, 그 두 달의 입원생활은 그에게 너무 큰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 준 듯했다. 단 두 달이었는데도 체중이 10kg나 늘었고 눈 밑이 퍼렇게 변하며 얼굴 전체에 생기가 없는, 한마디로 말해 ‘환자 티’가 너무 드러나는 모습으로 병원 문을 나서야 했단다. 특히 정신질환의 약 복용은 부작용이 광범위하고 심각했기에, 정말 불유쾌한 상태로 견디며 지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요. 지금도 정말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뭐냐 하면, 당시의 일기장에 제가 이렇게 썼었어요. ‘나는 엄마한테 굉장히 칭찬만 받고 공부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뭐든 잘하는 칭찬덩어리였는데, 내가 왜 남들이 제일 싫어하고 혐오하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을까? 그건 그 누구도 정신병원을 다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정신병원이라는 고유한 경험을 내가 직접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내가 지금 이런 병을 앓기 시작한 거다.’라고 말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제가 앓게 된 이 질병을 뭔가 의미 있는 데 쓰겠다는 직감이란 게 있었다는 거죠. 그게 오늘날까지 저를 살아오게 한 동력이 됐던 것 같아요. 그 의미부여를 한 다음부터는 여러 가지 힘든 과정을 다 견딜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게 입증이 되는 게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인 것이죠.”

입학 동기들은 고2가 되고 그는 다시 고1로 복학을 했는데, 진짜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스스로 준비돼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단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애들이 싫어할 정도로, 쉬는 시간마저 단어를 외우면서 공부벌레로만 지냈다고 한다. 친구를 못 사귀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남들이 자신을 싫어하든 뭐든 개의치 않고 개인적인 목표에 모든 걸 집중했단다. 종합영어책에 실린 유명 인사들의 명문장들을 접하는 지적인 희열이 굉장히 컸고, 특히 한글과 영어원서와 불어원서로 각각 읽었던 <어린왕자>는 특별한 인생의 감동을 안겨줬다고 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는 게 <어린왕자>의 주제잖아요. 제가 <어린왕자>를 그렇게 좋아했던 것이 지금도 신앙만큼이나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치를 판단하지 말고, 눈이 아니라 마음과 진심으로 본다는 것이 저의 삶에 굉장한 토대가 되어 줬거든요.”

미세학문부터 공부하면 사람이 좁아지니까 역사나 철학 같은 큰 학문부터 전공하라는 형부의 조언이 너무 멋지게 들려서, 그는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 역사교육을 전공하게 됐단다. 그리고 과 학우들과 학회를 만들어서, 아주 유의미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물론 최루탄 포연 자욱하던 군부독재시절이라 모든 게 너무나 어수선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주체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학풍을 겪으면서 제가 그런 생활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제가 지금 카미(KAMI : 한국정신장애연대의 약칭)에서 일할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저 하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의 경험을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그 토대를 대학교 때 이미 마련했다는 것이죠.”

더 깊게 정신장애를 연구를 하고 싶다

   
 
대학 3학년 때 다시 재발이 됐다는 박미선 씨. 그때부터 자주 입원을 해야 하는 생활이 반복됐단다. 2개월에서 4개월 내외, 가장 길게 입원했던 건 5개월이었는데, 크고 좋다는 종합병원 생활은 못해봤지만 그래도 나름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계속됐던 모양이다. 마음에 상처로 남겨진 끔찍한 입원생활도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하나의 입원 과정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실제로 ‘무언가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저의 강점이 뭐냐 하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 그리고 해석을 굉장히 잘한다는 거예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죠. ‘그래,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될 텐데, 이렇게 다양하고 열악한 병원들을 경험한다는 건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만 정신장애인들이 어느 정도로 대우를 당하는지를 내가 알게 될 게 아닌가.’ 그러니까 이게 돈키호테 식 같은 의미 부여지만,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막 괴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이 경험을 통해서 뭘 또 알고 느끼게 되는 거지?’ 하는 이 여지가 있으니까 늘 견딜 만한 거예요. ‘이 여지’라는 게 저한테는 참 중요했거든요.”

그렇다면 그 병이 생기는 어떤 이유가 있는걸까? 정해진 주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입원을 해야 할 상황 비슷한 게 매번 그에게 닥친다는 의미 아닌가. 박미선 씨는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게 될 때, 잠을 못 자게 되면 발병이 된단다. 또한 시국상황에 굉장히 약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삼풍백화점이 붕괴됐다 하면 자신도 똑같이 흔들린단다. 전체 사회를 흔드는 일이 생겨도 그렇게 되고, 심한 환경적 변화가 닥쳤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도식이 깨져요. 일단 조울증일 때는 사나워지고, 일을 많이 벌이면서 돈을 엄청 많이 쓰는 반응이 일반적으로 나타납니다. 주체할 수 없게 사업을 벌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 도식이 어떻게 깨지는가 하면, 그 증상을 다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조울증일 때는 돈을 안 쓰겠다고 다짐하게 돼요. 인지적인 통찰로 그걸 막을 수가 있다는 거죠. 저는 주로 자원입원을 하거든요. 불필요한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돌아가고 잠을 잘 수 없게 되면, 그게 사흘 나흘 이어지면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서 저 자신을 통제시켜야 해요. 잠을 자기 위해서라도 입원을 해야 하거든요. 정신과 치료는 ‘잠 치료’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정말 맞는 말이에요. 입원을 하기 위해 저의 짐을 먼저 싸죠. 속옷 몇 장, 갈아입을 옷 몇 벌, 세면도구 등을 챙겨서 병원으로 향합니다.”

몇 해 전 지인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한국정신장애연대(카미)의 의미 있는 활동상에 이끌려 직접 활동가로 함께하게 됐는데, 지금도 그는 수많은 현실사안들을 고민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과제가 무려 100가지나 된다는데, 그 중에서 가장 고민하는 것은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강제입원이 많은 건가?’ 하는 점이란다. 미국에서는 20살 이상이면 가족의 도움을 전혀 안 받는데, 우리한테는 그런 문화가 왜 없다는 걸까.

“무엇 때문에 강제입원이 심할까? 미국에서도 동일하게 심할까? 유럽 선진국들도 그럴까? 그런 걸 계속 파헤치며 연구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요. 조울증이 심할 때 부모한테 사업자금을 달라고 요구하며 협박하는, 그런 건 외국에서는 아예 문화적으로 가능하지 않잖아요. 그건 우리나라 만의 문화적인 문제도 있는 게 아닐까 하며, 보다 다각적으로 고찰을 하게 돼요. 외국에선 많은 부분을 국가가 담당해 주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단 가족에게 떠맡김으로써 생기는 의존성과 부작용이 너무 큰 것 같거든요.”

 

정신장애인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더 열심히 뛰고 연구하겠다는 박미선 씨. 독자 여러분도 이번 만남을 계기로 ‘카미’라는 한국정신장애연대의 약칭은 가슴에 외워두시는 게 좋을 듯하다. 정신장애인 인권신장을 위한 소중한 벽돌을 탄탄히 쌓는 단체로 굳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추고 가리기보다는, 당당하게 세상 앞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정신장애 권익확보를 위한 확실한 지름길이 되리라 믿어진다. 더불어 직접 사무실을 방문해서 문을 두드려도 좋을 일 같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주 맑고 경쾌한 한마디를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안녕하세요!” 하며 나타나는 ‘누군가’의 웃는 얼굴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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