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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쥐세상은 이제 그만![이서진의 살며 생각하며]
이서진 소설가  |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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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9.11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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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얼굴을 보는 B가 출근과 동시에 기척을 냈다. 대개 아침 시간에 잠을 자는 내 악습을 고려해 그녀는 살금살금 다니며 냉장고를 여닫고 주방과 욕실을 들락거리며 우리 집의 일상을 유지해준다. 함께 한 세월이 수년째니 때로 친구처럼 자매처럼 또 때로는 엄마처럼 허물없고 배려 또한 지극하다. 대체 뭘 먹는 거야, 이렇게 안 먹고도 사는 게 용하지, 라고 혼잣말을 하다 급기야는 쯧쯧, 혀를 차고 냉장고 문 닫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가수면 상태를 누리는 식이다. 그런데 그날은 불쑥 방으로 들어오더니 “좀 일어나봐. 심장 떨려서 못 견디겠어.” 한다. 아무리 가수면 상태라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뭔 사달이 났다 싶어 나 역시 가슴이 철렁, 내려갔다. B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마저 부석부석했다.

아들의 친구가 가버렸다고, 어젯밤 목을 맸다고, 그런 나쁜 놈이 있느냐고, 그녀는 철퍼덕 앉아 울음을 내놨다. 철렁, 내려간 내 가슴도 턱, 숨이 막혔다. 어째서? 꽃다운 나이에……. 하나 마나 한 물음이었다. 당자는 가버렸으니 누가 알 것인가? 군 필역하고 졸업하여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직장까지 얻었다고,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녀는 연실 눈물을 훔쳤다. 그놈이 중학교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라고, 내가 그놈 삼겹살 구워 상추쌈도 먹였다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는 먼산바라기를 했다. 불현, 내 머릿속에 B의 아들이 떠올랐다. 파릇파릇 새순처럼 싱그러운 앳된 얼굴. 망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나는 B의 아들이 적이 걱정스러웠다. 애는 괜찮은가?, 물으면서 내 안에 잠재된 이기성에 흠칫, 했다. 괜찮을 턱이 있겠는가? 친구가, 것도 가장 친한 친구가 세상을 버렸다는데. 장례 치르고 신경정신과 내원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게 하는 게 좋겠다고, 나는 그 상황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읊조릴 뿐이었다. 시선 둘 곳이 없어, 아니 젖어드는 눈가를 혹여 B가 볼까—그렇다면 그녀의 슬픔을 증폭시킬 테니까—봐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어째서 청춘들이 목숨을 내놓을까? 아직 피지도 못한, 이제 막 앙다물었던 꽃봉오리가 입을 열려는 찰나에…….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실체가 나오기도 전에 말이다. 좀 더 살아보라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살 가치 또한 충분하다고, 청춘들의 팔을 붙들고 사정이라도 해볼까?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레밍효과’가 있다. 레밍은 핀란드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산악지대에 서식하는 몸길이가 3.5㎝에 불과한 아주 작고 귀여운 들쥐의 일종이다. 놈들은 3~4년 주기마다 급속도로 번식하는데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집단이주를 해서 길과 평야를 장악하기도 한다. 주목할 점은, 레밍 떼의 ‘집단자살’이다. 어느 날 선두주자 몇 마리가 앞으로 달려가면 그걸 본 다른 쥐들이 똑같이 달려나가고 그다음 쥐들도 그리고 그다음 그다음 쥐들도 달린다. 결국, 떼를 지어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가다가 해안가의 절벽을 만나게 되고 선두주자가 멈추지 않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면 뒤이은 쥐들까지 망설임 없이 뛰어내려 마침내 집단자살에 이르게 된다.

우리 사회의 ‘쏠림현상’을 적절하게 비유한 예라 하겠다. 비슷한 의미로 가축들이 놀라 우르르 내달리는 ‘스탭피드 현상’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한마디로 ‘맹목성의 추구’라고 단정할 수 있다. 앞에서 뛰는 놈들을 보며 ‘쟤가 왜 뛰지?’ 의문을 가지면서도 뛰지 않으면 대열에서 도태되어 고양이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뛰기 시작한다. 결국, 먼저 달려가던 놈들은 떼 지어 뒤에서 추격하는 놈들이 무서워서 더 빨리 달리고 쫓아가는 놈들은 낙오되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리는 셈이다.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는 필사의 레이스……죽음의 경주는 비단 레밍들뿐이랴.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벼랑 끝으로 몸을 버리는 집단최면은 들쥐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중·고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고층아파트에서 몸을 내던지는 세상이다. 신문 방송을 접할 때마다 예의 ‘레밍효과’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나만의 우려일까? 이생에 단 한 번뿐인 생을,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생명을, 아니 존재 자체를 그렇도록 무화시킬 수 있더란 말인가! 생명을 해할 권리를 대체 누가 주었던가? 죽음을 선택한 이들의 피할 수 없었던 고통의 쓴잔을 공감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그런 것쯤 엄살이라고, 다들 위태위태하게 혹은 물속처럼 진부한 날들을 견디는 거라고, 목구멍의 포도청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으냐고, 비난하거나 나무랄 맘은 털끝만큼도 없다.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치열했던 고뇌와 그 갈등을 존중하지 않음도 아니다. 어째서 우리 사는 세상이 이처럼 ‘들쥐세상’이 되었을까, 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에 나는 통각의 날을 벼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절벽까지 자신의 생명을 몰고 가는 사건은 이제 신문 방송의 특정 누군가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야? 잘 지내니? 거긴 편하겠지. 요즈음은 네가 많이 생각나. 꿈을 이루라는 네 말 잊지 않을게. 잘 있어라.’
어느 날 올라온 SNS에 아이는 그렇게 적고 있었다. 어미라는 원초적 본능 탓인지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게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상대방의 이름도 생소하고 웬일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머릿속에서는 이미 영상물이 돌아가고 있었다. 달포 전부터 아이는 급속하게 우울모드였다. 복잡 미묘한 사춘기 정서와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며 게다가 현실적인 고교선택 문제 때문에 부모와의 갈등이 빚은 탓이려니, 그저 그렇게 지내던 터였다. 교과목은 내팽개치고 그 나이에 소화하기 어려운 철학 문학 역사서들을 허구한 날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아이였으므로 저놈이 ‘열병’을 앓는 중이거니, 지나쳤다. 십 대 전반기는 마음껏 룰루랄라, 하다가 후반기에 대학관문이 턱, 버티니 어찌한들 괴롭지 않으랴. 더구나 밥도 떡도 안 나오는 인문학 지망생이므로 제 놈도 슬슬 ‘현실’이란 괴물이 보이기 시작했으리라. 요놈 쌤통이다, 맘이 후련하다가도 한끝으로 그래 너 원하는 삶 살아라, 라는 심중의 응원은 여느 부모 못지않았다. 추세야 어찌 되어가든 대학은 학문하는 곳이니 밥과 떡은 차후 문제 아닌가?

자초지종을 물었을 때 아이는 왈칵, 눈물부터 쏟아냈다. 엄마 걱정할까 끙끙 혼자 앓았단다. 그 애가 옥상에서 떨어져 피가 낭자한 악몽에 시달린다고, 밤이 두렵다고 호소했다. 썩, 친하지는 않은 친구였지만 뛰어내리기 사흘 전에 만났는데 자신을 부러워했단다. 넌 네 꿈이 있어 좋겠다, 꼭 그 꿈 이루라고 외려 독려해주기도 했단다. 아직도 그 애가 살아있는 것 같다고, 자꾸만 그 친구가 떠올라 SNS를 무심코 하게 되었다고, 아이는 고통스러워했다. 아아, 나는 죽은 아이도 내 아이도, 아니 나 자신조차도 우린 모두 고해의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가련한 존재임을 상기했다. 아이에게 해줄 말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겨우 나는 짧게 말했다. “오늘 밤 ‘백석’을 읽어봐.”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백석’을 좋아했으므로.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는 구절에 위로받기를 어미가 원하는 것쯤 아이는 알고도 남을 테니까.

B가 집안 곳곳에 정성스런 손놀림을 주는 동안 예전처럼 B의 아들은 전화를 걸어온다. 매일이다시피 아침 그 시간대는 가수면 상태의 나도 B의 통화내용을 주시한다. “으응, 먹었다고? 산책? 잘했어. 이따 보자.” 두문불출하던 B의 아들이 며칠 전부터 밖엘 나다니는 모양이다. 다행히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잘 견디는 듯하다. 주방에서 똑똑, 도마의 칼질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B의 전화가 운다. “왜 또? 정말? 와우! 아들 축하해!” 똑똑똑, B의 칼질 소리가 경쾌하다.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들린다. 최종면접이 통과되어 취직한 모양이다. 일상을 회복해가는 B의 아들이 대견하다. 우리는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아야 하기에 ‘사랑’과 ‘슬픔’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를 지혜롭게 굴려야 하리라. 맘껏 사랑하고 맘껏 슬퍼해도 바퀴의 축을 한쪽으로만 기울게 하지 않는다면 수레는 자박자박 굴러가리라. 눈을 뜨고 시계를 본다. 쉬는 시간을 틈타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에게 전활 해야겠다. ‘아들아? 네 꿈을 사랑하되 너무 슬퍼하지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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