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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최선을 다하면, 나의 내일이 다가옵니다[사람사는 이야기] 방송 아나운서 이창훈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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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3.09.17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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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사람 사는 이야기’의 지면 공간 안에 등장할 거라 기대되는 인물들이 있다. 그런데 이 기대는 편집부의 몫이 아니라, 언제나 독자들의 문의로부터 시작된다. ‘왜 그 사람은 안 만나는가요?’ ‘그 분의 인생 얘기를 듣고 싶어요.’ ‘이번엔 그 인물을 소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등의 의견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편집부의 안테나도 결국 그 방향의 주파수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그러한 인물의 상징과 같은 ‘1인’이 이번 호 안에 찾아든다. ‘대한민국 1호’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다니는, 그 타이틀 때문에 모든 활동이 대중의 이목을 끄는 공영방송 최초의 장애인 아나운서 이창훈 씨가 그 주인공이다.  낮 12시 뉴스에선 항상 말쑥한 용모로 앉아 있는 상반신만 마주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까 키 183cm의 정말 잘 생기고 신체 건장한 청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웃는 모습이 너무 시원시원해서, 이번엔 그의 활짝 웃는 얼굴 위주로 사진 이미지를 골랐다. 방송 뉴스 화면에선 볼 수 없었던 그의 파안대소와 함께, ‘인간 이창훈’의 삶을 같이 들여다보기로 한다.

 
   
 

두 번의 뇌수막염 - 잃어버린 빛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지만, 마주앉은 ‘이 남자’는 정말 멋진 인상을 남겼다. 대화가 한창 진지하게 진행되던 중에 스스로를 ‘훈남자(잘 생기고 성격 좋은 남성이라는 일상적 표현)’라고 소개하며 웃는 모습은, 전형적인 대한민국 젊은이의 자신감으로 넘쳐흘렀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이번 만남의 전제조건을 먼저 설명했다. 전체 국민 앞에 자신을 드러낸 ‘어느 해 11월 7일’ 이후의 삶과 견해는 많이 밝혀왔으니까, <함께걸음>은 그 11월 7일 이전의 인간 이창훈의 삶을 만나고 싶다고 말이다. 평소의 언론 인터뷰와는 전혀 다른 방향 제시였는지, 그는 잠시 동안 “아, 네….” 하며 말줄임표 같은 음성을 몇 차례나 반복했다. 그리고 나선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 “네, 알겠습니다!”라며 첫 번째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공적인 질문 아닌 사적인 궁금증을 그에게 먼저 던졌다. 이건 방송 화면을 마주대하던 시청자의 입장에서 정말 궁금했던 건데, 경남 진주 출생으로 알고 있던 그의 입에서 사투리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오랜 관심사였다. 생활 주변에서 만나는 이들은 출신지역이 어딘지를 금세 알 수 있을 만큼의 사투리를 ‘아주 약하게라도’ 드러내는 게 일상의 모습 아닌가. 그런데 이창훈 씨는 방송 아나운서에게 요구되는 표준어의 기준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다는 게 매번 궁금했다.

   
 
“경남 진주에서 살다가 제가 8살이 됐을 때, 부모님께서 저의 교육 문제 때문에 많이 고심하셨던 것 같아요. 시각장애인을 교육할 학교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많은 생각을 하셨다는데, 결국 서울에 있던 어느 맹학교에 입학하게 됐죠. 그런데 친구들이 다 서울말을 쓰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친구들하고 어울리다 보니, 저 역시도 자연스럽게 표준어를 쓰게 된 거죠. 그런 얘기 있잖아요. 초등학교 이전에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습득된다고 말이에요. 아나운서니 뭐니 하는 직업적인 미래를 바라보며 발음을 고친 게 아니라,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한 저의 생존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그랬을거라 생각한다는 거죠.”

이창훈 씨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중증의 시각장애라고 했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뇌수막염이 찾아왔단다. 그 뇌수막염이라는 게 누구한테는 청각으로 가고 누구한테는 뇌로 간다 하는데, 자신에게는 시신경으로 전이되어 시력을 잃게 됐다고 한다.

 “제가 듣기로는 한번 크게 아팠대요. 열이 너무 심해서 일단 가까운 병원에 갔는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더 큰 병원, 더 큰 병원, 더 큰 병원으로 계속 옮기다가 서울의 몇몇 대학병원까지 찾아가게 된 거죠. 뇌수막염으로 인해서 시기능이 손상을 받았다는 최종 판정을 받게 됐대요. 그게 생후 7개월 때의 일이었답니다.”

그런데 그는 특이하게도 9살 때 두 번째 뇌수막염을 앓게 됐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불빛 같은 것과 앞에 뭔가가 있다는 형체 정도는 보였었는데, 두 번째의 그 ‘앓음’ 이후로는 최소한의 빛마저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봤다는 기억은 거의 흐릿하다는 이창훈 씨, 그렇다면 어렸을 때는 어떤 아이였다고 스스로를 얘기할 수 있을까? 뜻밖에도 무척 무기력하고 자아존중감이 낮았던 아이였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내심 깜짝 놀랐다. 자신의 과거를 얘기할 때는 약간의 포장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는 법인데, 그는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드러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젠 인정받고 싶다는 것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집안에서 누나가 셋인, 그런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그 귀한 아들이 앞을 볼 수 없다고 하니까, 부모님 입장에선 아이를 빨리 나아지게 하고 싶었을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런저런 시술을 정말 많이 했대요. 모든 병원을 다 다녔죠. 병원뿐만 아니라 교회와 절과 모든 민간요법까지도 다 시도했다는데, 그런 다양한 요법들이 막 행해지니까 제 몸 자체가 못 견디는 거예요. 무슨 영적(靈的)이라는 기능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항상 불안하고 매번 어딘가를 가야 했고, 늘 누가 저를 만지고 있고 누르고 있고 하다 보니까 굉장히 아파했던 것 같아요. 심적으로 굉장히 약해지게 된 거죠.”

그는 태어난 지 2년 반이 지난 뒤에야 걷기 시작했단다. 우리 나이로는 4살 전후가 돼서야 걸었다는 건데, 그만큼 몸이 약했을 뿐 아니라 영적 시술에 시달린 나머지 밤마다 가위에 눌리는 꿈을 꾸는 등 엄청난 불안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다가 8살 때 어머님의 품을 떠나 머나먼 낯선 공간에서 학교생활을 해야 했기에, 마음속에는 외로움과 괴로움과 힘겨움이 동시다발적으로 가득 채워지게 됐다고 한다.

집이 가까워서 주말마다 집에 가는 친구들이 그렇게나 부러웠단다. 자신은 방학이 되어야만 고향집에 갈 수 있었으니, 그 힘겨움은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부작용마저 낳게 됐다고 한다. 점자를 익히는 속도라든지 계산능력 같은 것도 심하게 떨어져 갔단다. 모든 게 불안감으로 휩싸였기에, 이창훈 씨는 당시의 어린 시절을 ‘총체적 난국’이라 표현하곤 한단다.

   
 
“그렇게 침체되어 있었는데, 4학년 때 맹학교에 계시는 어느 분이 트럼펫이라는 악기를 한번 불어보래요.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알겠다고, 배워보겠다고. 그래서 그 악기를 배우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거예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제가 남보다 훨씬 뛰어난 음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예요. 1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합창단도 했지만, 그건 제 의사가 아니라 전체가 다 하니까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수동적인 활동이었거든요. 그런데 트럼펫은 완전히 달랐어요.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면서 칭찬도 해주는구나.’ 이런 느낌들이 점점 올라오면서, 무너졌던 저의 자존감이 음악을 통해 확 끓어오르게 됐어요. 정말 쑥쑥 올라오게 된 거죠.”

그런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면서, 소년 이창훈에게는 새로운 욕구가 팽창하기 시작했단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 앞에서 인정을 받을까?’ 하는,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모든 걸 그 욕구 하나에 집중하게 됐다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와 자신감이 학교 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게끔 만들었다는데 고등학교 때는 전교 회장도 했다니, 한 악기와의 우연한 만남이 인생에서 이만큼 큰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건 대단한 인연이었음이 분명한 일이다.

신선한 느낌의 활동 속으로

“어렸을 때는 목회자가 되려고 했어요. 제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어머님이 ‘너는 커서 목사해라.’ 하셔서 그걸 그냥 따랐던 거죠. ‘너의 꿈이 뭐냐?’ 하면 저는 ‘목사님이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많은 걸 생각해 보게 되잖아요. ‘내가 목사님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큰 물음표가 생기는 거예요. 저의 삶을 아무리 다시 들여다봐도 뭐랄까, 결이 안 맞는 거예요.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저의 내면이 충돌하면서, 결국은 목회자의 꿈을 접게 되었죠.”

그런데 청소년 시절 그의 가슴엔 또 하나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지게 됐단다. 12년 동안 맹학교 생활만 하다 보니, 비장애인들과도 어울리는 삶을 절실히 갈망하게 됐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시각장애’라는 걸 깊이 생각하게 됐는데, 참 불편한 게 많다는 결론과 함께 자신의 삶의 질을 개선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기로 하고, 상대적으로 장애학생의 비율이 낮았던 모(某) 신학대로 진학한 뒤 아주 적극적인 대학생활을 펼치게 됐단다.

   
 
“저는 사실 제가 나름의 도전을 한 부분도 있지만, 제가 무리하게 뭔가를 만들었던 경험은 별로 없어요. 주어진 환경 안에 있는 것들을 잘 조합해서, 잘 녹아들어가면서 무언가를 하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대학만큼은 장애학생들이 주로 선호하는 몇몇 대학이 아닌 학교를 택했어요. 그 대학 전체에 시각장애는 저 하나밖에 없었죠. 일부러 그런 환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거든요. 저를 더 많이 열어 보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며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어요. 제대로 된 편의시설도 없는 캠퍼스였지만, 그래도 신학대학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따스함과 선한 마음들 때문에 참 많은 유대를 잘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이창훈 씨는 처음부터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어서, 남자 동기들과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단다. 그리고 대학 전반기에는 주로 교내 활동을 많이 하고, 후반기에는 적극적으로 외부 활동에도 뛰어들었다고 한다. 특히 2006년 헌법재판소에서 시각장애인 안마가 위헌이라는 최종 판결이 났을 때, 그는 당시 한국시각장애인대학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었기에 세상 속으로 더욱 열심히 뛰어들었단다.

참 많은 활동을 했던 것 같다. 시각장애인 안마 인식개선을 위한 무료안마 시연행사를 하고, 신촌 대학가에 시각장애 체험카페를 만들어서 조명이 없는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고, 시각장애인 뮤지컬도 만들어 주인공 역을 담당하기도 했단다. 2미터 높이의 무대 아래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고 하니, 젊음이라는 열정 아니면 이뤄낼 수 없는 시기를 보냈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똑같은 의미를 담은 그의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그런 활동들이 재미있잖아요. 신선한 느낌의 활동들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된 다음에, 사회인이 된 다음에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때 해도 되잖아요. 사실 저는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활동들이 뭐가 있을까를 늘 고민하면서, 신선함이 가미된 무언가의 활동들을 계속 같이 했던 것 같아요.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하는 활동으로 말입니다.”

   
 

듣지 않고 본다

그렇다면 ‘방송’이라는 세계와의 첫 만남이랄까, 그 인연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된 것일까? 대학 4학년 때부터 인터넷 방송 진행을 하게 됐단다. 한국시각장애인인터넷방송이 그 무대가 되는데, 어느 날 한 선배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한다. ‘너, 목소리도 나름 괜찮으니까 한번 해봐라.’ 그래서 해보겠다는 대답과 함께 시작한 게, 마이크 앞에 앉는 인생의 첫 계기가 된 거란다.

그런데 인터넷 방송과의 만남 전에도 학교의 각종 행사와 축제 같은 열린 공간에서의 사회 진행을 많이 맡으며 지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방송인이 되기 전에도 이미 순간적인 임기응변 같은 위기대처법은 나름 몸에 익힌 셈 같았는데, 그 역시 그게 맞는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제가 작년에 프로야구 시구(始球)도 했었는데, 사실 어렸을 때 제가 방송에 대한 매력을 처음 갖게 된 건 라디오의 야구중계였어요. 선배들이 라디오 중계를 계속 몰입하며 듣더라고요. 저는 그게 뭔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홈런!’ 하며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면서 손뼉을 막 치는 거예요. 그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 분이 누구였는지는 몰랐지만, 정말 맛깔나게 중계를 참 잘하셨거든요. 듣는 사람들이 완전히 경기에 몰입하도록 너무 잘하시는 거예요. 그걸 계속 듣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저 사람은 누굴까? 저 사람의 역할이 뭐기에, 모든 사람들이 이만큼 열광하는 걸까? 왜 형들이 저기에 저렇게 관심을 갖는 걸까? 아, 저게 방송이라는 것의 매력인가 보다.’ 실제로 방송에 대한 흥미를 그때부터 크게 느끼게 됐고, 저 또한 야구를 정말 좋아하게 됐어요.”

야구 경기 중계에서 말하는 흔한 표현들 또한 인생의 좌우명처럼 그에게 새겨졌단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승부는 9회말 투아웃부터.’ 등의 의미가 너무 좋게 들렸기 때문에, 야구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한다. 정말 야구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까 진짜로 좋아한단다. 그렇다면 어느 선수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듣는 이가 생생하게 그 모습을 떠올릴 만치의 설명이 뒤따랐다.
“90년대 LG트윈스에서 ‘야생마’라는 애칭을 가졌던 이상훈 선수를 정말 좋아했어요. 저는 중계방송의 그 느낌만으로 아는 거지만, 정말 너무 멋지더라고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마운드로 올라온다.’는 거, 또한 ‘불같은 강속구를 던진다.’는 거, 그 얘기만 들어도 너무 멋진 거예요. 지금은 봉중근 선수를 정말 좋아하고요. 다시 전성기의 기량으로 활약하는 이병규 선수도 정말 좋아합니다.”

야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면 무슨 말인지도 모를 구체적인 설명과 묘사를, 이창훈 씨는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습으로 실제 중계하듯 약간의 흥분과 함께 자세히 언급했다. 그는 야구를 ‘들었다’고 하지 않고 ‘봤다’고 얘기했다. 묘한 대비감이 느껴졌다. 그를 생각하게 될 때마다 항상 되살아나던 언젠가의 방송 뉴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이 내일을 만듭니다

어느 해 봄날이었던 것 같다. 낮 12시 뉴스에서 다양한 생활 정보를 알려 주던 그가 이런 소식을 전한 적이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 화려한 대자연의 축제가 열렸던 것 같은데, ‘꽃과 대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겠습니다. 함께 보시죠.’라는 내용을 그가 말했던 것이다. 그 말을 한 이창훈 아나운서와 화려한 대자연의 방송 화면, 그날의 그 뉴스는 정말 묘한 대비감을 남기며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남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적절한 용어를 찾기가 정말 어려운, 가슴으로만 느껴야 할 여운이라 해야 할까? 시각장애를 가진 아나운서가 ‘함께 보시죠.’ 하며 시청자들에게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설명한다는 건, 속세를 벗어난 그 어떤 성(聖)스러운 영역의 한 장면 같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시각장애를 단지 신체기능 상으로 ‘보이지 않음’에 국한시키며 단정 지었던 게 아닐까 싶은, 실제로는 무한한 정신작용으로 인해 더 많은 걸 생생하게 보고 있는 게 바로 그 장애를 가진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경험이었던 이 느낌을 마주앉은 그에게 전하며, 묵직한 무게감의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인간 이창훈의 인생에 있어서 시각장애는 어떤 의미였는가?’ - 부담이 가는 질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 역시 묵직한 무게감을 담은 대답을 곧장 이었다.

“저는 ‘어두움은 얻음’이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있어 장애는 무엇인가?’ 하는 그 화두를 저도 진지하게 자주 생각해 봤었는데, 만약에 제가 보였었다면 저는 고향인 진주 어딘가에서 목적성 없는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삶에 임하는 진지한 무엇을 갖지 않고, 때가 되면 뭘 하고 또 때가 되면 뭘 하는 식으로 그냥 살았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보이지 않음’은 저에게 많은 걸 깨우쳐 줬어요. 첫 번째로 하나님을 믿는 종교적 세계관을 갖고 삶을 이끌어갈 수 있게 되어 기본적으로 감사드리고요. 과정이야 어찌됐든 서울에 올라와서 이렇게 공부할 수 있게 됐다는 것도 감사하고요. 삶에 대해서 계속 고찰할 수 있게 됐고, 항상 뭔가를 할 때마다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점 또한 감사드려요. 이렇게 직업적으로 성취를 이루게 된 것 역시, 부모님께 효도하게 된 부분도 없지 않겠죠. 저 개인적인 부분 말고도, ‘어두움’은 많은 걸 얻게 만들어 준 것 같아요.”

정말 멋진, 진정으로 삶의 진지함이 느껴지는 그의 대답이었다. ‘어두움은 얻음’이라…. 좋은 의견을 들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만 더하겠다고 했다. 무엇이든 간에 ‘1호’에게는 지속적인 관심이 쏠리게 된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이든 방송인이든 뭐든 간에, ‘1호’는 그 상징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게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1호’ 아나운서로서, 앞으로 탄생하게 될 수많은 ‘10호’, ‘50호’, ‘100호’ 후배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 한마디 남겨달라고 했다. 아직 나이는 젊지만, 그 역시 누군가에겐 ‘멘토’와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저는 기본적으로 인생 자체를 그리면서 살지 않았어요. 대학과 대학원 시절까지는 제가 방송을 하는 사람이 될 줄도 전혀 몰랐다는 거죠. ‘방송을 꼭 해야겠다.’ 하며 인생 자체를 그려왔던 게 아니라, 오늘의 주어진 삶을 살다 보면 내 안에 주어지는 또 하나의 인생이 있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거든요. 후배들 앞에서 얘기해야 하는 자리가 자주 있는데, 저는 이 한 가지를 꼭 강조합니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 건지를 항상 생각하라고 해요. 스스로에게 책임감이 부여되어야만, 자신의 참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거든요. 그래서 ‘(    )를 연습하고, (   )를 버리고, (   )를 채워라.’라고 조언합니다. 이 괄호 안에 들어갈 단어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잖아요.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무엇을 연습해야 하는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는 자기만의 답을 갖고 최선을 다해야 할 거예요. 최선을 다하는 오늘 하루하루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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