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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여, 장애를 극복하지 말자[특별기고]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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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4.02.06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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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까지 날아가서 장애 1등급을 받은 알짜 장애인인데, 그냥 앉아 있으면 장애인인 줄 잘 모르게 생긴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움직이기 시작해 쌍목발을 짚은 장애인의 모습을 보일라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없어 하거나 미안해한다. 그러면서 새삼 안부를 묻는다. “언제 사고 당하셨어요?” 아닌데! 최근에 난 무슨 사고 때문이 아닌데. 그래서 더 열없게 만들지 않으려고 얼른 대답해 치운다. “아니요. 전 두 살 때부터 소아마비로 지체장애인입니다.”

꽤 기특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장애인인데도 장애인 티를 전혀 내지 않을뿐더러, 장애인 같게 생기지도 않아서 일단은 장애인이 가까운 데 있어서 느껴야 할 부담감이나 불편한 마음을 전혀 느끼게 해주지 않았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사실 나도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까지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이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기를 쓰고 의연하려고 애를 쓰며 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 책가방을 들어주던 고마운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은 자기들이 등교하기도 바쁠 터인데, 내 집이 바로 학교 앞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학교 가면서 대문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 어머니가 얼른 책가방을 내주고, 친구들은 그 책가방만 들고 쌩 하고 가면 나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곤 했다. 덕분에 나는 초•중•고등학교를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학년말마다 개근상을 꼬박꼬박 챙기곤 했다.

이런 행복한 상태는 서울로 대학에 오면서 깨졌다. 나는 단지 책가방을 들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책가방을 든 상태로 버스를 타야 했다. 다행히 대학에서 강의를 듣기 위해 가져가야 했던 교재들의 양은 하루 8시간 이상 수업을 해야 했던 고등학교 때까지의 교재 양보다 훨씬 적었다. 하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의 시내버스들은 세 계단으로 된 그 승강구가 사정 없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면서 버스표나 동전을 내기도 해야 했다. 입구에서 그런 북새통을 치다가 버스가 조기 발진이라도 하면 손에 잡히는 대로 의자 등받이든 차 안의 봉이든 붙잡고 몸의 중심을 잡느라 정신이 없기도 해야 했다. 다들 바뿐 버스 승객들에다 대고 내가 장애인이니까 어떻게 해달라고 할 엄두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한 번은 가리봉동에서 밤을 새고 학교가 있는 신림동까지 114번 버스를 탔는데 공교롭게도 아침 첫 차였다. 거의 35년이 지난 그 때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그 차의 기사가 차를 타던 나를 보더니 그 선량한 얼굴을 찌푸리면서 약간은 원망스러운 눈빛을 던졌는데, 그 미묘한 눈빛이 아주 미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움의 눈빛도 아니고 그 어떤 성가심의 시선도 아닌데, 어느 편인가 하면, 하필 자기가 모는 이 첫 차의 첫 손님이 장애인인가 하는 것을 영 재수 없어 하는, 그러면서도 타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데서 오는, 뭐랄까, 일종의 원망의 눈빛이었다. 할 수 없이 태우고 가기는 하지만 내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 내뱉는 말에는 바로 그 원망이 잔뜩 묻어 있었다. “몸이 불편하면 집에나 있을 것이지...” 이른 아침 신림동까지 가면서 그 어떤 공포나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가뜩이나 손님이 적은 새벽차에서 후사경을 통해 원치 않게 기사와 눈길이 가끔 마주칠 때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의 장애 문제는 주로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살아야 했던 데서 발생했는데, 사실 그것은 ‘문제’랄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비장애인들이 나의 장애로 인해 어떤 문제를 떠안는 것을 극력 피했고, 젊은 시절에는 젊은 기운으로 어느 정도는 비장애인의 보조에 맞출 수 있기도 했다. 술 마실 때 빠지지 않았고(술 취하고 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는 거의 무의미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거리 도보 경주에도 나가 보았고 (종로에서 워커힐까지 비장애인들과 나란히 걷기도 하였다.), 심지어 데모 하고 감옥도 같이 갔다(좁은 방에 갇혀 있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는 무의미하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내가 비장애인과 전혀 차별받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최후진술을 할 때였다. 당시 대학 3학년이었던 나는 구형받기 직전 최후진술에서 당시까지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아주 비겁한 짓을 했다. 정말 감옥 가지 무서워서 “제가 몸도 불편하니 풀어 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내 장애를 들어 판사의 동정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형을 받을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전적으로 평등했을 뿐더러, 장애 여부와 상관 없이 죄질이 매겨져 비장애인보다 훨씬 많은 형을 받았다. 나는 그 뒤 독일에 갈 때까지 내 장애를 팔아 동정을 구걸하는 치사한(?) 짓을 다신 하지 않았다.

독일의 복지체계를 직접 체험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나의 장애는 극복하거나 비껴갈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체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장애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는 신체적•정신적 표지가 아니었다. 그 뒤 놀란 일이 한두 가지 아니었지만, 내가 독일에 첫 발을 내디뎠던 바로 그 날, 즉 1988년 6월 7일, 제일 먼저 놀란 일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열차를 타고 가 내렸던 프라이부르크 역 안에서, 우리 기준으로 완연하게 정신병자가 틀림없는 몇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모두가 가난하였던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시골 버스 정차장에서나 보았던 일이었다. 그래도 개발이라고 도시나 시골이나 때벗기 시작하면서 거리와 정류장을 헤매던 부랑자나 정신병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아주 나중에야 그런 사람들을 강제로 격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있음을 알았다.) 독일 생활이 어느 정도 지나 알게 된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도리어 반문했다. “그런 이들 때문에 혹시 피해본 거라도 있어요?” 당연히 없었다. 그러면서 차츰 장애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어 같이 할 일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 점점 뚜렷하게 드러났다.

독일 장애인 정책의 첫 번째 원칙은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원천으로 자각하게끔 끊임없이 의식화시킨다는 것이다. 사회적 이익이 발생하는 모든 제도적 장치나 기관에는 반드시 장애인상담관(Behinderteberater)이 배치되어 있어 장애인의 권리를 끊임없이 알려준다. 나도 베를린에 가서 집을 구할 때 학교에서 처음 들은 소리가 “베쓸러 부인에게 가 봐요. 장애인상담관이거든요”라는 것이었는데, 베쓸러 부인을 찾아가자 부인은 베를린 주정부의 학생후생국의 대기번호에 장애인이라면 0순위로 올릴 수 있다는 권리뿐만 아니라, 당시 아직 학생증을 발급받지 못한 나에게 석사 과정에 있다고 거짓말 하라는 불법(?)행위까지 친절하게 그리고 정밀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장애인 정책의 두 번째 원칙은 장애인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 틀림없는 비장애인은 그로 인해 어김 없이 이익을 보게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나는 통일 전의 베를린에서 버스를 탈 때 버스가 저절로 기울어져 내 휠체어가 그대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보고 기절하듯이 놀랐다. 아내는 더 이상 내가 휠체어 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아내가 하고 싶어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버스 안에는 장애인보다 유모차를 끄는 아빠나 엄마, 그리고 노인네들이 더 많이 탔다. 등록된 장애인들에게는 한달 10매의 택시쿠폰이 지급되었는데, 그것은 백지수표로 장애인의 주행기록과 서명만 있으면 구청에서 택시비를 내주었다. 통일 이후 이런 백지쿠폰이 폐지된다고 했을 때 반대 시위에 앞장 선 이들은 장애인이 아니라 베를린의 택시기사들이었다. 장애는 더 이상 국가와 사회의 가외 부담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일자리와 수익이 창출되는 일종의 복지시장이 되어 있었다.

장애는 장애인 개인이 극복한다고 없어질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나누어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인간조건인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국가가 선진화될수록 이런 장애 요인은 감소하기는커녕 점점 증가한다.
 
법률상으로 우리나라는 장애의 개념을 아주 좁게 잡고 있다.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법(제2조①항)에 따르면 ‘장애인이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면서 그 다음 항(제2조②항)에서 ‘신체적 장애’는 외부 신체 및 내부 기관의 ‘기능 장애’로 규정하고, ‘정신적 장애’란 ‘발달장애 또는 정신 질환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했을 때 그런 사람이 장애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청소년기까지의 미성년자, 조기에 노화를 강요당하는 우리의 고령층, 그리고 각종 산업재해나 환경재해로 인한 피해자 증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앞으로 통일된 이후 끌어안아야 할 북한의 영양실조로 인한 발달부진층까지 합하면, 장애인 비율은 급증한다.

이것은 곧 앞으로 국가운영의 중심에 장애인을 이 국가 시민의 표준모델로 놓고 그 운영계획을 짜야함을 의미한다. 장애 상태가 거의 정상화된 사회상태라는 것을 상정해 놓아야 인구의 반이 사회적으로 도태되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건강함을 유지하고 살다가는 성숙한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통일이 대박이 아니다. 사실 대박을 노린다면 당장 목전에 있는 5백만 장애인을 집과 시설에서 풀어내고 이들에게 인간적 욕구를 고무시키면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십만 개의 일자리와 수억 개의 상품 수요가 창출될 것이다. 장애인 자신에게 장애를 극복시킬 것이 아니라 장애인 자신을 통재로 해방시키면 비장애인도 성장할 것이다. 아마 장애인이 해방되는 것을 보면 북녘 동포들도 해방되겠다고 나설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단언컨대, 장애인 해방이 당장의 대박이다. 그러면 장애인이 할 일은 분명하다. 장애인이여, 비장애인을 위해 장애를 극복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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