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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을 위한 노동사회의 유니버설 디자인[장애학연구회]
김도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직실장  |  aery727@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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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4.06.19  10: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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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인정 노동자로서의 장애인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정부에 이러저러한 투쟁 요구안을 제시할 때, 우리는 보통 한국보다 장애관련 정책이 잘되어 있다고 하는 외국의 사례를 함께 정리해서 첨부를 하곤 한다.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부 관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생떼를 쓴다고 펄펄 뛰는 경우가 많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기가 조금은 애매한 영역이 있으니, 그게 바로 장애인의 노동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011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장애인의 고용률(employment to population ratio)은 35.5%이다.1) 즉 3명 중 1명 정도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고용률은 소위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이자 장애 정책이 잘되어 있다고 하는 나라들도 (통계마다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수치를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장애인권이나 장애인복지 관련 지표들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것들이 OECD 30여 개국 중 30등이거나 멕시코를 하나 밑에 두고 29등인데, 2000년대 후반 장애인 고용률은 OECD 국가 평균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2) 그리고 이는 ‘장애(인)’이라는 근대적 범주의 형성 과정을 이해한다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형성기, 즉 본원적 축적기는 토지에서 쫓겨났지만 임노동 관계에 편입되지 못했던 소위 ‘부랑자’가 대량으로 양산된 시기였다. 느리고 자율적이며 유연한 형태의 노동에 익숙해 있던 많은 사람들은 칼 막스(Karl Marx)가 『자본』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자면 ‘별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렇게 부랑자가 되었는데, 이들을 임노동 관계로 포섭하기 위해 국가는 강제 수용과 훈육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서구 사회복지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구빈원(workhouse)은 사실 바로 이러한 강제 노동과 결합된 수용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구빈원에서는 일정 시점부터 효과적인 훈육과 나태의 방지를 위해 수용된 부랑자들을 ‘일을 할 수 있는 몸(the able-bodied)’과 ‘일을 할 수 없는 몸(the disable-bodied)’으로 구분하게 되며, 이로부터 ‘장애인(disabled people)’이라는 범주가 발명된다.3) 요컨대, 근대 사회로의 전환기에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범주는 근대의 자본주의적 노동에서 배제 당해온 사람들, 즉 ‘불인정 노동자(不認定 勞動者, unrecognized worker)’ 집단을 가리켰던 개념인 것이다.4)

 

워커홀릭 놈팡이라는 역설적 존재와 모순

그런데 우리는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던 바로 그 국면 속에서 다소 역설적으로 노동이 지닌 역사성을 읽어낼 수 있다. 즉, 그들이 노동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되어야 했다면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결코 초역사적이거나 보편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논의를 풀어가 보자. 주변의 동료들은 종종 필자를 보고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즉 내가 ‘노동’ 중독자라는 것인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맞을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틀린 얘기다. 노동의 가장 간결한 사전적 정의는 ‘몸(육체와 정신)을 움직여 일을 함’이지만, 사회적 의미에서의 노동이란 이것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어떠한 활동을 하되, 그것이 가치가 있어야 하고, 그러면 그에 따른 대가가 수반된다. 즉, 가치가 있어서 대가가 제공되는 활동, ‘활동 → 가치 → 대가’라는 계열 내에 있는 활동이 노동인 것이다.5) 이것이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규범이자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장애인운동을 하는 활동가로 살아왔던 필자는 장애인 야학에서 성인 학생 분들을 가르쳤으며, 장애인권과 관련된 다양한 일을 하고 법률들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연금공단이 내가 노동을 했다고 인정하는 기간이 36개월 정도에 불과하니, 나머지 기간에 필자는 사회적으로 보자면 ‘놈팡이’로 지낸 셈이다.

이렇게 내가 ‘워커홀릭 놈팡이’라는 역설적인 존재가 된 이유는 일단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해명을 해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사회에서 실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메커니즘은 ‘활동 → 가치 → 대가’가 아니라 ‘활동 → 대가 → 가치’였다. 즉, 우리는 어떤 활동이 가치가 있으면 대가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활동이 대가를 받고 있으면 그것이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돈 못 버는 일은 가치 없는 일, 조금 버는 일은 조금 가치 있는 일, 억대 연봉 받는 일은 엄청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소위 말하는 화폐의 물신화(物神化, fetishization) 현상으로, 화폐가 가치를 표상하고 매개하는 수단에서 가치 자체 혹은 지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둘째, ‘활동 → 가치 → 대가’가 아니라 ‘활동 → 이윤 → 대가’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즉, 어떤 활동에 대가가 제공되도록 하는 매개 항은 가치가 아니라 이윤 창출에 대한 직간접적인 기여였다. 혹은 가치라는 것이 이윤이라고만 해석되어왔다. 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자본이 추구하는 것은 이윤이니까.

그러나 첫 번째 해명은 말이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활동에 대한 대가를 무엇을 기준으로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 해명은 많은 사례에 적용될 수는 있지만, 정치인의 정치활동, 종교인의 종교활동, 미화원들의 청소활동, 교사들의 교육활동, 돌봄노동자들의 돌봄활동 등 이로써 설명되지 않는 사례 또한 무수히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화될 수 없고 따라서 이 역시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될 수는 없다. 결국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규범은 ‘활동 → 가치 → 대가’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할 경우 여기서의 가치란 ‘다른 사회구성원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풍요로움에 대한 기여’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니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왔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내가 해왔던 활동도 노동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장애인의 활동 역시 설령 이윤 창출의 과정에 효과적으로 투입될 수 없다하더라도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삶에 기여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러한 활동도 노동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공공시민노동과 만인을 위한 노동사회의 건설

말은 대충 좋은 거 같긴 한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도대체 뭘 어찌하자는 얘기일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중단기적’ 구상은 대충 이렇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권에서는 이러 저러한 공약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곤 한다. 좌파적인 구상이나 정책도 우파 보수 정치인들의 손에 들어가면 다들 이상하게 망가져서 튀어나오곤 하던데, 나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라는 우파적인 맥락에서 소위 ‘자활’을 위해 만들어진 ‘공공근로’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사회적 일자리’라는 정책을 한번 좀 좌파적으로 망가뜨려서 리뉴얼을 해봤으면 싶다. ‘공공’이나 ‘사회적’이라는 말이 붙은 건 죄다 없애버리려 하는 요즘 추세에서 보자면, 이 정책들은 일단 개념적으로는 그렇게 나쁠 건 없다. ‘이윤과는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일에 대해 공공이 대가를 제공하는 일자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가 전혀 될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러한 일을 통해 제공되는 대가가 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연명을 하기에도 간당간당한 수준이라는 것. 둘째, 그러한 공공적(사회적)인 일자리의 목록에 들어가는 활동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한다는 것.

그래서 필자는 이 두 가지 지점을 확 바꿔서 ‘공공시민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행을 해봤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공공시민노동이란 ‘개념’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다. 첫째, 노동은 헌법의 정신에 따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시민권, 즉 ‘권리’로 존재해야 하며, 더구나 노동(근로)은 단지 ‘권리’인 것만이 아니라 교육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제32조 ①항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라고 노동할 권리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②항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둘째, 어떤 것이 이처럼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예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처럼 민간(시장)의 영역에 방치되어서는 안 되며, 공적인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공교육이 존재하지 않고 사교육만이 존재한다면, 혹은 ‘공교육+α’로서 사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α’로서 공교육이 자리매김 된다면, 교육은 결코 권리도 될 수 없고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도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이 하나의 권리이자 의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노동 역시 시장이 아닌 공공의 영역에 존재하거나 최소한 공공의 영역에 의해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을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도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공공(정부)이 노동의 기회를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기반으로 한 공공시민노동 ‘제도’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따른다. 첫째, 공공시민노동을 통해 제공되는 급여는 전체 상용노동자 평균 임금의 50% 이상(2011년을 기준으로 하자면 최저 약 150만 원)에서 정해진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터무니없이 낮은 최저임금을 견인하는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공시민노동으로 인정되는 활동은 국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제3섹터’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단위들과 공공시민노동을 하려고 하는 개인들 자신으로부터 신청을 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단위 및 개인이 신청한 활동이 공공시민노동에 합당한지는 기초지방자치단체 단위로 꾸려지는 ‘공공시민노동위원회’에서 심의를 한다. 물론 이러한 위원회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노인・이주민・청소년 등의 소수자-대중교통의 유니버설 디자인과 접근권 문제에서 사용되는 ‘교통약자’라는 개념을 차용한다면 이들은 ‘노동약자’라고 개념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를 포함해서 지역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다양한 민간위원들이 2/3 이상 참여를 해야 한다. 물론 위원회와는 별도로 이러한 업무를 행정적으로 총괄하는 ‘공공시민노동청’도 중앙과 지방에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공공시민노동위원회에서 이루어지는 공공시민노동으로의 인정 여부에 대한 심의 기준은 ‘해당 개인이 지닌 현재적 조건 및 능력’에 비추어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풍요로움에 기여’를 하는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할 경우 현재 매우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지니고 있거나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의 생존활동 자체를 노동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노동이란 ‘해당 개인이 지닌 현재적 조건 및 능력’에 비추어 판단되며, 그/그녀의 생존(활동)은 그/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상당한 정신적・정서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상이 실현될 수 있다면, 중증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들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또는 남성)의 가사활동도 새롭게 그 가치를 공인받을 수 있으며, 현재 광범위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도 실질적인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공시민노동의 적용 집단이 점차적으로 확대되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노동에 대한 정의와 관념이 일정하게 재구성 될 수 있다면, 그 토대 위에서 ‘중장기적’으로는 기본소득(basic income) 6)의 전면적 도입도 병행해 추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할 때만이 노동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야만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놀이’가 아니라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자신의 삶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시민권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김성희 외, 『2011년 장애인 실태조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1, p. 270.
2 김성희 외, 『장애인 복지지표를 통해 살펴 본 OECD 국가의 장애인 정책 비교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1, p. 122.
3 Michael Oliver, The Politics of Disablement, St. Martin's Press: New York, 1990, pp. 32~34.
4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메이데이, 2007, p. 72
5 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그린비, 2009, pp. 235~236.
6 ‘기본소득’이란 국가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기본 생활비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학술・담론 운동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스위스에서 2013년 10월에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국민발의안이 12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연방의회에 제출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스위스의 안은 정부가 성인인 국민 모두에게 한 달 2500스위스프랑(약 297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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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츠모모
역시 김도현님이십니다. 단연 빼어난 글입니다.^^
(2015-02-15 16: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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