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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장애인의 죽음…기억되지 않는 죽음
여준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  lim0192@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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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4.09.12  15:5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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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제 곁을 떠나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태어나고 한 평생 재미지게 살다가 맞이하는 자연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평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최근의 ‘죽음’이란 단어는 미치게 아프고 슬프게.... 그리고 그 슬픔이 온 몸을 휘감아 일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무력감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이는 비단 저만의 상황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우리의 일상 모두를 뭉개 뜨릴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으니까요. 한순간에 벌어진 충격적인 사고의 죽음이 아니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죽음의 길로 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는 것이 모두의 책임 문제로 다가오게 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와중에도 뭔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들은 ‘일상이 이토록 잔인할까’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무력감에 빠져 힘도 없고 진정한 추모를 하고 싶어도 ‘일상’이란 것에 발목 잡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저나 장애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끊임없이 억울하고 비통한 마음을 갖게 하는 ‘죽음’과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죠.

15년 전의 일입니다. 최옥란 열사 장례식장에서 펑펑 우는 저에게 장애계 선배는 이런 말을 했죠. “준민아, 너무 슬퍼하지 마. 아마 네가 나이가 들면서 이런 일들이 더 많아 질 거고 익숙해져야 할 거야.” 그때는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곧 몸으로 알게 되더군요. 장애가 있는 지인들이 1년에도 몇 명씩 세상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사로 보일 수 있지만 ‘장애’와 ‘가난’ 때문에 남들보다 먼저 생을 마감해야 하는 ‘사회적 타살’과 다름없는 죽음 말입니다. 어처구니없이 망연자실할 틈도 주지 않고 그렇게 저는 어느새 ‘죽음’이란 단어와 너무도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광화문 농성장에는 9개의 영정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왜 우울하게 저런 사진을 걸어놔?”하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는 그 속사연을 알고 싶어 가던 길을 멈추고 적혀 있는 글들을 들여다보기도 하지요. 우울할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유쾌한 상황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책임에 대해, 고인의 삶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고 넋을 위로하는 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 아닐까요?

고백하자면 저 또한 이런 인간의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어떤 분들의 죽음을 욕보인 적이 있습니다. 불과 몇 달 전인데, ‘형제복지원 사건’ 때문에 국가기록원을 찾아가 75년부터 87년까지 부산 어느 경찰서의 변사 사건 기록부를 검토했습니다. 총 30권이나 되는 막대한 분량의 사건 자료를 들추다보니 성급하게 ‘형제복지원’이란 단어만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자료들 중에는 문서만 있는 게 아니라 사진도 첨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화재로 인한 죽음, 익사한 죽음, 철도 길에서 당한 죽음, 의문사.... 현장 사진이라 너무나 처참했고 뇌와 온갖 장기들이 다 파헤쳐진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진은 처음이라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그 다음부터는 다음 장에 먼저 손을 넣어 사진이 부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보지도 않고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해 밖에 나와 있는데 선배가 따라 나오더군요. 그 선배는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활동했던 선배인데, 저에게 ‘죽음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 했습니다. “변사기록을 보는 것은 그 분의 최후와 마주하는 것이다. 원래는 자료를 보기 전에 추도를 위한 묵념을 하는 것이 맞는데 그걸 얘기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예를 갖춰서 놀라거나 얼굴을 찡그리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왜 진즉에 가르쳐주지 않았냐”고 퉁명스럽게 당혹스러움을 넘겨버렸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사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억울한 죽음 앞에서 그의 영혼을 인지하지 못하고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봤으니까요. 슬픈 죽음이 저의 태도로 인해 더더욱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 되었을 것 같아 정말 너무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런 자료들을 볼 자격이 없다고 판단돼 더 이상은 동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죽음’이란 것에, ‘품위 있는 죽음’이란 것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그것은 바로 ‘기억해야 할 죽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억해야 할 죽음’이 너무도 많습니다. 생각해보니, 장애계에서는 1년에 몇 건씩의 장례식과 추모제를 갖습니다. 화재나 사고로 혹은 자살로 혹은 장애로 인한 자연사(?)로 말입니다.

지난 4월은 대한민국 전체가 애도를 해야 하는 집단적 죽음의 달이었지만, 우리 또한 25년을 시설에서 살다 이제 막 ‘자립’의 의지를 태우며 비틀비틀 사회적 관계망을 갖고 살아보려는 용기를 낸 한 분을 어이없게 보내야 했지요. 바로

故 송국현 동지입니다. 몇 번 마주한 적은 있지만 언어장애 때문에 눈빛으로 소통했던 송국현 동지는 참 외로워보였던 분이십니다. 늘 한쪽에 앉아 조용히 사람들의 말과 태도를 응시하고 있었고 수줍어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까지는 그 분의 인생 스토리를 잘 몰랐습니다. 서서히 친해지면서 알게 되겠지 했는데, 그 틈도 주지 않고 가버리신 거죠.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어 다리를 절게 되었고, 아이큐도 낮아지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셨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는데 장애까지 갖게 되니 한국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설’로 가신 거죠. 꽃동네라는 어마어마한 대규모 시설에서 무려 25년을 사셨답니다. 20대에 들어가 50이 다 되어 처음으로 사회란 곳에 나오게 되신 거죠. 뭐 하나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세금, 돈 관리, 숫자, 한글, 길 찾기 등 모든 것이 낯선 상황이니 옆에 누군가가 없으면 혼자 일상생활이 완벽하게 불가능하셨던 거죠. 지금 우리가 말도 못하는데 저 먼 외국에 덩그러니 혼자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먹고 자고 하는 것 자체, 삶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립생활센터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 그 분을 지원했지만 역부족인 것이 많았습니다. 두 팔, 두 손을 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3급 판정을 받았고 결국 활동보조인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을 외면한 채 의학적이고 인위적인 잣대로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 이의신청을 했지만 그 역시 현행 제도상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3일 만에 집안의 화재로 돌아가신 겁니다. 문까지는 불과 2~3m인데 말입니다. 문형표 복지부장관 집까지 찾아가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유감’이었습니다. 잘못된 국가정책과 권위적인 공무원들의 태도로 발생한 억울한 죽음에 ‘유감’이라니요.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부당한 태도에 ‘국가란 무엇인가’란 생각을 하며 그저 참담하고 비통했습니다.

그나마 송국현 동지는 여러 벗들이 빈소를 지키고 장례식이나마 공개적으로 했으니, 조금이나마 넋을 위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남은 자들의 자기위안일 수도 있지만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해야 하는 활동을 더욱 힘 있게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건 바로 우리 모두가 그의 죽음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며칠 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제가 2년 전에 만났던 분이었습니다. 청와대 앞에서 부부가 몇 달 째 1인 시위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 이유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충주의 한 장애인시설에서 지내던 김모 양은 10대 학생으로, 심한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설 측에서 갑자기 죽었다는 통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새벽에 뛰어가 봤더니 아이의 목이 의자 등받이와 팔걸이 사이에 끼어 질식사했다는 것인데, 가만히 잠자던 아이의 목이 왜 의자등받이와 팔걸이에 끼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타당한 이유도 제시되지 않았는데 이미 질식사로 처리되었고, 시설 측은 아무런 책임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시설 거주인의 죽음은 그저 으레 그럴 수 있는 하찮은 죽음으로 처리된 것입니다. 헌데 이미 초동수사가 너무 잘못되어 되돌릴 수 있는 여지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법적인 조치 방법들을 알려드리고 다시 필요한 것들은 연락 주십사 하고 헤어졌는데, 그 후 무슨 일인지 부모님들은 연락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최근에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면 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 끝난 사건인 줄 알았는데, 부모님들의 힘으로 재판까지 갔다니 정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힘을 실어드릴 일이 그것밖에 없어 탄원서 조직을 해서 보내드렸는데, 시설 직원 한 명이 기소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고맙다, 고맙다를 연발하시는데 해드린 것도 없이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면목이 없었습니다. 2년이나 지났지만 죽음의 이유와 책임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부모님의 승리였습니다. 7월 22일자 언론에도 보도되었는데, “대전고법 제2형사부(이승훈 부장판사)는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사망한 김모(당시 11세) 양의 부모가 시설 관계자 5명에 대해 낸 재정신청 중 일부를 받아 들여 생활지도교사 강모(42) 씨에 대한 공소제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김 양의 부모님은 시설 관계자 5명을 고소했지만, 검찰이 지난해 5월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이들 모두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었거든요. 재판부는 “강 씨는 야간근무를 하는 생활지도교사로 잠을 안자는 장애아동이 있으면 다시 잠 들 때까지 보호하고 응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필요한 응급조치와 연락을 취해야 하는 등의 의무가 있었다”며, “피해자를 홀로 두고 다른 방에서 잠을 잤던 점 등에 비춰볼 때 업무상 주의 의무를 게을리 해 피해자가 사망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볼 수 있는 과실에 대해 공소를 제기함이 상당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또한 누구라도 그 아이의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요?

하지만 시설 거주인의 죽음이 모두 이렇게 의미 있게 마무리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김 양 역시 부모님의 힘겨운 싸움이 있어 가능했지만, 실제 시설 거주인의 죽음은 그렇게 마무리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김포 석암재단 투쟁 때 알게 된 여성 거주인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비리로 얼룩진 구 석암재단 이사장 이부일의 양녀로 입적된 분이었는데, 이부일은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명의가 필요해 양녀로 입적한 것뿐이지, 결코 지원이나 돌봄은 없었습니다. 그 분은 30여 년을 내내 시설에서 살았으니까요. 석암재단의 비리 문제가 사회문제가 되고 이사장직에서 물러나자 그는 필리핀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리곤 즉시 故 연모 씨 명의로 되어 있던 재산도 모두 자기 앞으로 바꿔 놓았지요. 그런데 최근 연 씨가 지병으로 사망해 시설 측에서는 아버지로 되어 있는 이부일에게 연락을 했답니다. 그녀가 남긴 재산이 80여만 원 정도 있다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이부일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장례를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고, 그 돈은 나에게 부쳐라”라며 계좌번호를 알려줬다고 합니다. 여전히 인간쓰레기로서의 진면목을 보이는 그의 이야기에 다들 순간 ‘멍~’해 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이부일에게 시설에서 거주하는 장애인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아니 의미라도 있었을까요? 온갖 이용만 당한 채 살아온 그녀의 죽음은 ‘평화’일까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 소식이 또 가슴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아이와 여성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민족의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장애 아이들이 있는 곳, 팔레스타인의 장애인시설도 폭격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악마의 행위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 이스라엘의 태도에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기억하는 죽음, 기억해야 할 죽음. 시설에서 평생을 살다간 분들에 대한 보편적 예의입니다. 그 분들을 생각하며 짧은 기록으로나마 넋을 위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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