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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의 모든 전환점엔 바로 '당신'이 계셨습니다[사람사는 이야기] 성악가 황영택
글·사진 채지민 기자  |  lim0192@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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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15  11: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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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선 한 가지 분야의 삶을 집중해서 살기도 바쁘다. 최선을 다해도 그 목표를 이루기 어려운데, 언제 그 다음 인생을 설계하며 둘러본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지금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려 하지만 모든 게 부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허리끈을 조이며 달음질치지만 그래도 모자라는 게 이것저것 너무나 많다. 늘 그렇다. 그게 우리의 실제 삶이라서 한숨이 많아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산 사람도 있다고 한다.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난데없이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그 일을 하던 중에 소중한 아내를 만나게 됐지만 업무 중에 중한 장애를 얻게 됐다는데, 그 다음 인생이 대한민국 휠체어테니스 국가대표 선수라고 한다. 이쯤 되면 ‘이건 뭐야?’ 하며 물음표를 떠올려야 하는데, 지금은 인지도 높은 테너 성악가로서 큰 활약을 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도대체 몇 가지 인생을 두드러지게 살았고, 앞으로는 또 무슨 인생을 새롭게 살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인물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뿐이었다. 성악가 황영택, 그를 만났다. ‘아니면 말고!’가 아니라 ‘아니라도 계속!’을 간직하는, ‘앞으로도 계속!’임이 분명한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제목에 적은 ‘당신’이 누군지를 먼저 밝히고 시작해야겠다. 바로 그의 아내 박금주 님이다.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다는 것

대화의 자리를 시작하면서, 결론부터 묻는 경우는 드물다. 술자리의 건배도 첫 잔부터 차례대로 한 번씩 부딪쳐야 하는데, 이번에는 아예 마주앉자마자 ‘만취상태’인 양 결론부터 물었다. 남들이 부러워했을 게 확실한 대기업의 직장생활, 수입이 아주 많았다는 건설업계 생활, 그리고 척수장애 1급을 얻게 된 사고를 당하고 난 뒤 그 재기의 과정, 장애인 테니스 국가대표로 활약했다는 지난날의 기억 그리고 지금은 탄탄한 성악가로서의 인생을 살기까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인생역전이 존재했는데, 그 인생 과정을 각각의 삶으로 지금까지 계속 살았을 경우를 떠올린 적이 있었는지 물었다.

다시 부연한다면 대기업에 그냥 계속 다녔다면, 사고 없이 건설업을 지금껏 계속 하고 있었다면,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다가 은퇴했다면 그 다음을 어떻게 준비하며 살았을지, 더불어 지금은 인지도 높은 성악가로 살아가는데 성악가 다음의 다른 인생이 따로 준비되고 있는지 여부까지 한 번에 모든 질문을 퍼부었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의 얼굴은 처음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눌 때보다 훨씬 묵직해졌지만, 묻는 이의 기준으로 볼 때는 그 정도의 삶의 반추(反芻 ; 소나 양이 음식을 되새김질하듯, 특정한 일을 되새기고 음미하며 생각을 반복하는 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깊이 있게 간직하면서 살아왔다는 의미로 가득 채워졌다.

“당연히 생각을 많이 했죠. 제가 그 대기업에서 그냥 직장생활을 계속했다면 어땠을까…. 조직문화에 젖어서 틀에 갇힌 생을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질 자체가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밖으로 나가서 업무를 보고 싶었는데, 제가 담당했던 건 사무실 안에서 서류를 전담하며 만지는 일이었거든요. 말(馬)이 좁은 공간 안에서 갇혀 살 때 얼마나 답답할까 싶을 때, 그런 생각이 가득해질 때 건설업계에서 나름 잔뼈가 굵었던 저의 형님한테서 제안이 왔어요. 같이 하자고요. 당시 88올림픽을 앞두고 건설업계의 경기가 아주 활성화됐을 때였거든요. 저는 그 제안에 제가 방목(放牧)이 되는 느낌이었어요. 사람이라는 게 머리로 가고 싶은 데가 있다 해도, 발이 먼저 가고 싶은 데가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발이 간다는 건 마음이 같이 따라간다는 의미와 같잖아요. 몸 자체가 움직이기를 원하는 분야가 있다는 건 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가고 싶었으니까요.”

대기업 사무실에서 ‘얌전하게’ 근무하다가 거칠 대로 거친 건설현장에 뛰어들었다면, 대인관계는 어떻게 풀어갔을까? 나이가 두 배는 많은 근로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조직의 소통방식을 하나씩 배워가며, 그는 개인적으로 크레인 자격증을 따서 기사로 직접 현장 업무에 뛰어들었단다. 사람을 ‘쥐었다 놨다’ 하는 방식도 그때 몸으로 익히게 됐다 한다. 일을 할 때는 해병대처럼 강하게, 일이 끝나면 쉬고 싶은 만큼 편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한 여인이 그의 인생에 등장하는 건 그 시기였다고 한다. 작업현장의 크레인 운전석 안에 통기타 하나가 늘 함께하던 시절, 점심식사 후 가요 몇 곡 부르는 게 마음의 작은 창과 같던 시기에 강원도 원주에서 ‘그녀’를 만나게 됐단다. 너무 순수해서 그녀가 좋아졌단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원해왔던 ‘무언가’에 딱 맞는 그녀에게 마음속 진심을 말하게 됐다고 한다. ‘무언가’는 무엇일까? 2남 4녀의 막내인 그는 4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됐단다. 그가 원했던 건 화려한 여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엄마와 같은 포근함을 주는 ‘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제 삶을 얘기했어요. 너무 외로웠던 거죠. 여자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까요? 당시 떨어져 지내던 어머니께서 저한테 똑바른 인생을 살라면서, 당신의 반지를 제 손가락에 끼워주신 일이 있었어요. 제 손가락의 그 반지는 어머니를 상징하는 징표와 같았죠. 그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줬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죠. 내 어머니와 같은 나의 여인이 되어주면 좋겠다고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그 반지를 보며 그녀는 울었단다. 힘들었던 자신의 지난 시절 모두가 떠올랐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개인적인 주변의 모든 것을 정리하며, 당시 황영택 씨의 사무실이 있던 삼척에서 결혼식을 앞둔 동거가 시작됐다고 한다. 화려하든 소박하든 간에 미래의 모든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을 그 시기의 두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를 나누며 지냈을까. 이 글을 적으면서도 마음이 아리는 듯하다. 그들의 그 다음 인생이 너무 짧은 전반전을 끝내고, 기나긴 후반전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직감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단다.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그릇을 떨어뜨려서 깼대요. 느낌이 너무 안 좋았대요. 당시엔 국내에 아주 드물던 무선전화기를 들고 제가 일하던 시절이라서, 하루에 몇 번씩은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거든요. 그릇은 깨지고 밖에 비는 계속 내리고…, 여자 특유의 민감한 느낌이 있었나 봐요. 일 조심해서 하고 저녁에 보자고, 알겠다고 말한 뒤 시공 작업을 계속 했죠.”

1992년 10월 말 당시 그의 위치는 강릉 모처의 아파트 건설 작업현장. 땅바닥을 파헤친 터파기를 끝낸 넓은 밑바닥에 ‘파일’이라는 거대한 철제기둥을 세로로 깊게 심기 위해, 그러니까 건물의 중심을 잡기 위해 땅 속 깊숙이 그 기둥을 내리박는 작업을 크레인으로 하던 그의 눈앞에 갑자기 와이어(크레인이 들어 올린 기자재를 지탱하는 두터운 철제 끈) 그 줄이 끊어지는 게 보였단다. 15미터 길이의 묵직한 무게의 그 철제기둥이 공중에서 세워지던 중 허공에서 떨어지며 ‘나’를 향하던 그 3초를, 황영택 씨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정말 3초 정도 됐을 거예요. 지면과 2미터 정도 높이에 운전석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운전석 문은 늘 열어놓고 작업자들과 그때그때 소통을 하던 와중이었으니까, 그 즉시 뛰어내렸다면 어떻게든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죠. 그런데 그건 사고 이후의 생각이고, 그 짧은 순간 안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방법론을 나름대로 떠올렸던 거죠 그런데 제가 재빨리 움직이려 했던 장비가 작동을 하지 않았어요. 결과적으로는 그대로 맞게 된 거죠.”

결과는 척추뼈의 11번과 12번의 탈골, 그나마 얼굴 쪽은 본능적으로 숙였기 때문에 찢어지고 긁혔던 정도의 상태지만, 문제는 두 다리와 함께 하반신 전체가 짜릿하게 잘리는 고통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병원에 옮겨져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대수술과 중환자실에 누워 있기를 반복했다고 들었단다. 열흘 후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가 처음 본 건 병상 끝자리에서 두 손 모으고 기도하고 있던 아내의 모습이었단다.

“제발 살려달라고만 했겠죠. 살아있게만 해달라고…. 그 정성의 기도에 제가 깨어났겠지만, 정말 너무 아팠어요. 허리를 손톱만큼도 비틀 수가 없었고요. 그래도 그때까지는 우리가 골절상을 입을 때처럼 깁스를 한 뒤에 뼈가 붙고 퇴원하면 그만 아니냐 하는 그런 느낌 그대로였어요. 그런데 6개월 정도 지난 뒤 주치의선생님의 진단이 최종적으로 내려졌죠. ‘당신은 평생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타야 한다.’ 아…, 이건 살 가치가 없는 일이었어요. 26살 먹은 사내가 이 지경이 되다 보니까, 죽는 게 차라리 편한 입장이 되어버린 거죠.”

 

모든 게 주어진 섭리 같은

그런데 아무리 죽을 방법을 찾아도, 도대체 병원 안에서는 죽을 방법이 없었단다. ‘왜 하필 나냐? 왜 하필 내가 이 지경이 된 거지? 억울하다. 내 나름 굉장히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치며 살았는데, 181cm 키에 돈 잘 벌고 예쁜 마누라 얻어 이제 행복하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왜 하필 나냐고!’ 게다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아내의 한마디, 임신 5주차가 됐다는 것이다. 사고 이후 입원한 지 4주차가 됐는데, ‘아빠’가 사고 나기 바로 직전에 2세가 생겨 엄마 몸에서 아빠를 기다리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당시까지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의 동거 상태였기에, 황영택 씨의 결론은 ‘그녀를 떠나보내는 게 낫다’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모든 게 긍정적이었단다. 어떤 실수, 예를 들어 그에게 난데없는 배변의 문제가 발생할 때도 그녀의 입장은 똑같았다고 한다. ‘다 괜찮다. 씻으면 되는 거 아니냐.’ 게다가 남자가 이런 상황에 빠지면, 당연히 자신의 딸을 빼내어 갔을 장모님이라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자신의 딸에게 말이다.

“저의 장모님…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어차피 네가 그 집 가문으로 갔으니, 거기서 뼈를 묻어야 하지 않겠느냐. 황서방 재산을 보고 간 것도 아니고 인물을 보고 간 것도 아니고, 진짜 그 사람 자체를 만나서 그 사람한테 간 건데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고 하셨대요. 지금도 저는 장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아까 처음에 저의 네 가지 인생에 대해 물으셨죠. 어느 인생이든 제 아내를 빼면 안 되는 인생이었어요. 오늘의 저를 만든 사람이니까요.”

뱃속의 아기가 점점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극심했던 분노가 오히려 보잘것없이 느껴질 정도의 환경이 계속 만들어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먼저 걸어야겠다는 의지가 가장 커졌다고 한다. 모든 게 주어진 섭리 같았단다. ‘아내는 떠나지 않고 곁에 있겠다 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2세가 자라고 있으니, 가족 부양을 위해서라도 내가 일어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정말 이를 악물고 몰두했던 게 재활훈련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병원생활이 1년 8개월 흘렀을 때, 그에게는 퇴원 결정이 내려졌단다. 더 이상 치료를 할 게 없고 의학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의 합병증이 생기지 않게끔 하는 게 최선이라는 담당의사의 설명이었다 한다.

“하지만 퇴원을 하고 나니, 병원에 있을 때와 모든 게 느낌이 달랐어요. 병원에서는 저만 아픈 게 아니고 다 아픈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런데 퇴원을 하고 나니까 모든 게 장벽이었어요. 모든 데 걸려 넘어지고, 가장 참혹했던 건 물웅덩이에 빠졌을 때였어요. 경사로를 내려가는데 앞바퀴가 걸려서, 몸만 앞으로 빠져나오며 길바닥의 물웅덩이에 빠져버린 거예요. 아…, 정말 창피하고 비참했어요. 엉덩이 다 젖고 그 웅덩이에 주저앉아 있는 저 자신의 현실이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정말 살기 싫어 6개월 동안 술 하나로만 살았습니다.”

   
▲ 사진제공 황영택 씨

새로운 길을 찾아 세상 속으로

창피해서 낮에는 집 밖에 나오지 못했고, 해가 떨어진 뒤에야 밖으로 나가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였단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던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휠체어를 밀며 비틀비틀 귀가하던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눈에 보였단다. 스스로 생각해도 꼴불견이고 추한 형상이었다고 한다. 자멸감에 휩싸인 채 집에 들어와 자고 일어난 아침, 멍하고 허탈한 몸과 정신으로 이부자리 위에 그냥 앉아 있는데, 바로 옆에서 자고 일어난 아들이 누운 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아빠를 올려다보더란다.

“그때 아이의 눈동자에서 이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아빠는 내 아빠 아니야? 왜 그렇게 방황하며 살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옆에서 아직 잠들어 있던 아내도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죠. ‘당신, 내 남편이잖아.’ 머릿속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 같았어요. ‘아, 내가 죽으면 안 되겠구나. 내가 아빠구나. 내가 남편이구나. 내가 이렇게 망가져서 죽으면, 얘랑 아내는 애비 없는 자식으로, 남편 없는 과부로 힘든 삶을 나 때문에 새로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아주 간절하게 떠오른 거예요. 그때부터 제가 살아야 되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진지한 목표를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의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휠체어테니스였단다. 병원의 재활훈련 기간에 경험했던 적이 있었기에, 거창한 목표 같은 것 없이 순수하게 운동을 위해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테니스라는 종목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운전면허도 새로 받아서 사회 속 재활훈련을 하나씩 시작한 셈이란다. 휠체어도 혼자 밀고, 차에 휠체어를 혼자 싣는 연습도 생활화했단다. 언제까지 아내의 도움에 기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휠체어만 움직이는 것도 힘든데 라켓까지 잡아야 한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되든 안 되든 간에 땀을 흠뻑 흘리고 난 뒤의 상쾌함이 테니스에 몰두하게끔 만들어갔단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져 나왔다.

“실력을 쌓고 싶고 더 나은 기술을 배우고 싶은데도, 휠체어테니스를 가르쳐 주던 선배라는 사람들이 배우는 저의 기를 죽이고 심한 텃세를 부리는 거예요. ‘야, 그것밖에 못 치냐’, ‘그게 그렇게 안 되냐’ 하며 모멸감을 주는데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독한 오기가 생겼어요. ‘나를 기죽인 너희들을 반드시 꼭 이기겠다!’ 그때부터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운동하고, 휠체어 뒤에 타이어를 매달아 공원을 달리는 등 이를 악물고 체력을 키웠어요. 타이어를 매달고 끙끙대는 저를 쳐다보던 사람들은, 저를 지나치면서 손가락으로 머리 옆을 빙빙 돌렸죠. 미쳤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문전박대를 당하던 헬스장에도 열심히 다녔고, 수영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제 고향이 울진인데, 제 별명이 ‘울진 물개’였거든요. 그렇게 모질게 몸을 만들고 나서 테니스장에 들어서면, 휠체어가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았어요. 공중부양이라도 될 것 같이 사기가 충천됐거든요.”

좀 더 전문적으로 운동하고 싶어서 휠체어테니스 전용 휠체어도 마련할 무렵, 그에겐 일본에 가서 3개월 동안 집중적인 트레이닝을 받게 되는 좋은 기회도 생겨서 우리나라에선 절대 배울 수 없는 기술을 거기서 다 익히게 됐다고 한다.

“시스템이 완전히 달랐어요. 휠체어테니스에 최적화된 환경에서 테니스 하나에 몰입할 수 있는 구조였거든요. 코트마다 각각 5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연습하는 과정을 모두 촬영해요. 그런 뒤 그걸 같이 보면서, 안 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시 가르치는 거예요. 체력훈련도 그냥 무작정 힘을 빼는 게 아니라, 테니스에 꼭 필요한 트레이닝만 집중하게 만들어줬어요. 발상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절대 익힐 수 없는 방법론을 거기서 다 배우게 된 거죠.”

그런 선진기술을 익히고 개인적인 훈련까지 더해지다 보니, 그에게 찾아든 결과는 그에게 모멸감을 줬던 선배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쾌감이었다. 그 선배라는 사람들이 누군가? 그들이 바로 당시 대한민국 휠체어테니스 국가대표 선수들이었는데, 자신들을 이기는 새까만 후배의 등장 앞에서 그 선배라는 사람들은 라켓을 집어던지며 분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랴. 새까만 후배의 실력이 더 나으니 승패가 갈릴 수밖에. 그러니까 황영택 씨는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게 아니라, 국가대표들을 이기다 보니까 대표선수로 선발된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국가대표를 하면서 국제대회에 나가고 성과를 거두는 동안, 저한테는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우리나라 안에서만 살았던 제게, 해외의 다른 문화와 다른 가치관들은 제 삶의 기준과 가치관마저 바꾸게 만들었거든요. ‘저들은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내가 우물 안에서만 살았구나. 그 좁은 틈 안에서만 살았구나.’ 그때부터 인간 황영택이 완전하게 다른 정신으로 바뀌게 된 거죠. 외국 장애인 선수들의 인상은 다들 환하고 자유로움 그 자체였어요. 너무 밝고 자연스러웠어요. ‘야, 이게 다른 거구나. 이 다친 육체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내 소중한 육체를 아끼고, 나의 내면적인 건강과 아름다움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아주 굳은 다짐을 하게 됐죠.”

내면적인 건강과 아름다움과 행복을 위해서, 그가 선택한 길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창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창팀을 가르치시던 지도선생님이 성악가라서, 그는 국가대표 선수생활과 더불어 가요가 아닌 성악의 발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생활을 병행하게 됐단다. 그런데 그 스스로도 놀랄 만치의 실감이 찾아들었단다. 내면적인 아름다움과 행복을 얻고 싶어 노래라는 방식을 활용했던 건데, 실제로 그의 마음에선 장애로부터 받아왔던 상처와 트라우마가 노래를 통해 모두 치료되고 풀리는 기적 같은 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노래 중에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시작하는 ‘가시나무’라는 곡이 있죠. 그 노랫말 그대로였어요. ‘그래 맞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구나. 장애로 인한 내 안의 내가 너무나 많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데, 내가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있구나. 여기에서 벗어나야겠다.’ 완전한 카타르시스, 그러니까 저를 정화시키는 노래의 힘이 정말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온 것이죠. 테니스에서의 카타르시스는 승리의 순간에 집중되지만, 노래는 제 삶 자체를 정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때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죠. ‘내가 육체적인 재활은 테니스를 통해 했지만, 내면적인 재활과 건강을 위해서 진짜로 노래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거예요. 테니스를 계속 했다면, 아마도 저는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됐겠죠. 하지만 그 시점에 저는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됐어요.”

2002년에 36살의 나이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며 라켓을 놓을 때, 그에게는 선택을 해야 할 두 가지 인생이 눈앞에 놓여 있었단다. 하나는 지도자의 길이었는데, 재활스포츠를 전공해서 국내나 외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해야겠다는 게 다음 인생의 길이었다고 한다. 누가 보더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다음 인생이 지도자의 길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닌 또 하나의 길을,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선택했단다. 성악을 하겠다는 거, 노래가 좋아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진짜 성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악을 하려면 제대로 된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는 정식으로 음대에 가기 위해, 그 늦은 나이에 수능시험 준비에 돌입했단다.

한마디로 ‘머리 터지는 줄’ 알았단다. 그런데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냥 자유로운 음악을 하며 찬양을 해도 충분할 텐데, 굳이 성악을 선택한 건 사서 고생한 게 아니냐 물으니 맞단다. 사서 고생을 한 게 분명한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보석을 찾아 무모하리만큼 새로운 인생으로 몰입했던 것 같단다. 그리고 모든 걸 만족한다고 한다.

“무식한 놈이 당당하고 겁이 없다고들 하잖아요. 제가 그랬던 것 같은데, 사실은 운동을 할 때도 그랬고 음악을 할 때도 저의 아내 금주 씨의 동의가 정말 컸어요. 운동할 때도 기가 죽어 들어오면 괜찮다고, 당신은 잘 하고 있다고 항상 격려해 줬거든요. 선배들한테 시달릴 때 제가 힘들어서 못하겠다 짜증을 내면 보통의 아내라면 하지 말라고,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하느냐고 말렸을 텐데, 제 아내는 어느 순간에도 당신은 할 수 있다고, 하게 될 거라고 응원을 보냈어요. 음악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항상 저의 아내는 제 삶을 긍정적으로 맞이해줬어요.”

   
▲ "사랑하는 저의 가족입니다" 사진제공 황영택 씨

어느 누가 그를 욕한다 해도, 아내는 항상 그의 편이었단다. 얼마 전에야 그렇게 모든 걸 응원해 준 이유를 물어 보았다고 한다. 아내의 대답은 이랬단다. ‘당신은 내 자존심이었다’고, ‘당신이 휠체어 타고 다니고 운동을 하고 노래를 할 때면 내가 노래를 하고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모든 걸 괜찮다고 긍정했지만, 운동할 때 지고 들어올 때면 자기가 더 분노에 차고 더 속으로 힘들어 했다는 걸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저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진심으로 응원해줬던 거죠. 제가 외출하려고 옷을 입을 때도, 아내는 가끔씩 제가 입을 옷을 골라줘요. 오늘도 아내가 고른 옷을 입은 거예요. 편해 보이죠? 대충대충 입고 나가는 게 싫대요. 좋은 옷이 아니더라도 자기 남편이 모든 이들에게 깔끔하게 보이기를 원한대요. 정말 고마운 사람이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아내는 저를 응원해줄 겁니다. 그렇기에 제가 더 열심히 살아야겠죠. 더 열심히 노래하고, 더 열심히 찬양하고, 더 열심히 이웃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거예요. 그게 제 아내 금주 씨에게 보답하는 길이겠죠? 소중한 사람…, 정말 고맙다는 마음의 인사를 여기에 진심으로 남겨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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