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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라 해도 좋을, 이젠 편한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사람 사는 이야기] 한의원 탕전실 근무 최현배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natalir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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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4.11.24  13: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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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원 약재실에서 한의사의 처방에 따라 각종 원재료를 모아놓은 다음, 그 재료들을 푹 달여 한약 자체의 짙은 색감인 걸쭉한 액체로 만드는 곳이 바로 탕전실이다. 가끔씩 그런 안내판을 접하며 익숙해진 공간이었는데, ‘탕전’이라는 표현이 국어사전에도 포함되지 않는 용어였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인터넷 검색에도 ‘탕전’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한의학과 관련된 의미로는 ‘탕전’이라는 말이 국어사전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재(藥材)는 한자용어로 존재하는데 탕전은 없다. 글쎄, 개인적으로 검색하는 그 노력이 부족했던 탓일까? 각각의 분야마다 그 분야 특유의 전문용어가 등장하듯, 그런 의미로 ‘탕전’의 의미가 존재하리라 헤아리며 이 글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한의원에서 ‘따끈따끈’한 한약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전담하는 탕전실 실장인 최현배 씨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조금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천천히 발언하겠다던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한마디마다 ‘띄엄띄엄’ 진행된 그와의 만남은 참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이웃을 만난 듯 정겨운 시간이었다. 그 만남의 흔적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내 손길로 한약을 만든다

전라북도 부안군이 고향이란다. 국립공원인 변산반도를 품은 부안은 서쪽 면 전체가 바다와 접한 곳이긴 하지만, 최현배 씨가 살았던 지역은 농촌지역이었단다. 태어날 때는 전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돌이 되도록 뒤집기를 못하고 돌이 훨씬 지나서도 걷지 못하는 증상이 염려스러워서, 어머님은 서울에 있던 큰이모집으로 올라와 세브란스병원에서 진찰을 받았고 진단 결과를 통보받았다고 한다. 뇌성마비가 맞고, 평생 대소변을 받아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님은 너무 큰 충격을 받으셨다 한다.

“그 충격을 안고 집에 내려오신 엄마가 오빠를 계속 운동시키면서, 매일 매순간 온 몸을 펴주는 노력을 계속 하셨대요. 엄마가 정말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엄마의 그 노력이 통했는지, 오빠는 여섯 살이 됐을 때 걷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됐대요.”

최현배 씨 곁에 앉아 함께한 이는 그의 막내 동생 최은숙 원장이다. 미리 전후 관계를 밝히며 정리한다면, 막내 동생 최은숙 씨가 한의원을 운영하는 원장이고, 그 한의원의 탕전실에 근무하며 약을 달이는 모든 책임을 지는 실장이 바로 최현배 씨가 된다. 작년 3월부터 탕전실 업무를 전담했단다. 혹시 모를 오해가 생길지 몰라, 본격적인 대화 이전에 원장인 동생한테 먼저 질문을 던졌다. 탕전을 하는 작업이 전문적인 자격증 같은 게 필요한 건 아닌지, 만약에 자격증 없는 이가 탕전을 한다면 의료법이나 보건법 같은 데 저촉되는 건 아닌지를 물었다. 그건 전혀 아니란다.

“이건 전공이 필요 없는 일이에요. 내방한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을 내리는 건 당연히 한의사가 담당하죠. 그 처방에 따라 약재를 분류해서 고르는 것까지 한의사가 직접 전담합니다. 그 다음 약을 달이는 걸 실장님이 하시는 거예요. 규모가 작은 한의원은 한의사들 중심의 학회 차원에서 원외(院外) 탕전실을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해요. 그런데 한의원 자체 안에서 탕전실을 운영하는 경우는 전담 간호사를 두거나, 탕전을 전담할 일반인을 따로 뽑는 편이거든요.”

만남의 자리에선 그 내용을 그 정도까지만 대화로 나눴지만, 돌아온 이후 글을 정리하기 전에 인터넷 검색으로 사실관계를 확인부터 해봤다. 동생인 원장의 말이 맞았다. ‘탕전’의 검색어로 두루 확인하다 보면, 탕전실을 담당할 분을 찾는다는 한의원 측의 게시글과 탕전의 일을 하고 싶다는 지망자들의 글이 여기저기에서 쉽게 보였다. 의학 계통의 일이라, 너무 묵직하게 생각하며 선입견 차원에서 들여다봤던 모양이다.

가장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커피전문점의 바리스타(barista)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지적장애 등을 가진 분들이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의 영역에서 안정적인 활동을 한다는 게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가. 물론 의학적인 부분과 커피의 무게감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똑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오히려 집중하며 일을 하는 데는 더 적격의 업무 영역이라는 답도 이미 나와 있는 상황 아닌가. 최현배 씨의 하루는 제대로 된 한약을 달이며 만들어내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내 길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것

“형제는 저하고 동생 셋이에요. 제가 첫째 아들이고 동생들은 다 딸이고, 원장님은 저의 막내 동생이에요.”

부끄럼을 많이 탄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형식의 발언의 기회가 극히 적었다고 해야 할까. 곁에 있던 동생의 말에 조심스러운 짧은 한마디의 추임새만 넣던 최현배 씨가, 환자 진료를 위해 자리를 잠시 떠난 동생이 없을 때 본격적인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언어사용과 발음에 불편함이 많을 경우는, 보통 질문하는 이가 ‘네’ 아니면 ‘아니오’를 중심으로 대답을 이끌어낼 만치의 많은 내용을 한 번에 담아 질문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현배 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발적인 의견을 얘기하려고 노력했다. ‘나를 얘기하고 싶다’는 뜻이 된다.

“어렸을 때는 시골이라… 학교 가는 게 20분에서 30분 걸리니까, 그러니까 학교만 왔다 갔다 했어요.”

대화라는 건 물꼬가 터졌을 때 질문을 집중해야만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아주 어릴 때는 모르며 지냈겠지만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거, 다시 말해서 ‘친구들과 내가 좀 다르구나’ 하는 현실을 처음 떠올린 건 언제였느냐고 물으니까 의외의 답이 전해졌다. 그런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글쎄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런 걸 느낀 적은 없었어요. 별로 느끼질 못했어요. 제가 사회에 나와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게 그때부터 많았거든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장애를 느끼지 못했다고? 그 의미가 뭔지를 다시 물었다.

“친구관계가 좋았고, 얘기도 잘 했고 같이 놀기도 했고… 그랬죠.”

그렇다면 요즘 의미로 따돌림 같은 것도 없었다는 건가? 왜냐하면 최현배 씨는 언어사용이 많이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그걸 빌미로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경우가 많았으리라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단다.

“거기가 시골이라 사람들이 적고 별로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다 친했어요.”

그럼 장애의 무게감을 본격적으로 느끼게 된 건 언제였을까?

“고등하교 졸업하고 서울로 왔을 때였는데…, 그 스트레스라는 게 워낙 많아가지고… 일 하면서도 스트레스 받고, 일 끝나고 저녁시간에 어디 가서 뭘 먹고 그럴 때, 그럴 때도 그런 게 참 많았어요. 스트레스요.”

덧붙이는 질문을 던져도 더 이상의 설명은 잇지 않고 ‘네.’ 한마디만 반복하는 걸 보니, 당시의 속상함이 되새김질됐던 모양이다. 1966년 말띠로 고교 졸업 후 서울에 왔다면, 한창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 국가 최고의 지상과제인 양 떠들던 시절 아닌가. ‘장애’ 자체를 길에서 없애버리고 시설로 수용하면서, ‘아∼ 우리 대한민국!’을 외치던 시절이 바로 그때가 맞다. 최현배 씨는 대한민국 역사상 장애인권의 최악이던 시절에 서울이라는 세상으로 등장한 셈이 된다.

“서울로 와서 OO재활원에서 1년 동안 전자 관련 공부를 하고 일을 했어요.”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당시가, 그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인 모양이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씁쓸한 미소로 반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위기 전환은 진료 중간에 동생인 최은숙 원장이 합석했을 때서야 이루어졌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는 의미가 된다.

“전자 계통의 일을 배웠는데 워낙 손이 가는 게 많고 빨리빨리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그 손작업이 잘 안 되니까 다른 걸 배워 보자 해서 갔던 게 인쇄 쪽이었어요.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전자 쪽보다는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실수는 거기까지로 끝!

막내 동생이 곁에 앉자마자, 그의 표정이 훨씬 환해졌다. 심적으로 안정이 된다는 뜻이다. 동생 역시 이 사회 속에선 개인 한의원을 운영하는 전문가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오빠 앞에서는 ‘예쁜’ 막내 동생일 뿐이었다. 이게 바로 가족 아닌가.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 ‘실장님’이 탕전실 일을 하면서 실수했던 게 뭐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단순한 분위기 반전 이상의 의미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한약에 있어서 실수라는 게 포함된다면, 그 결과는 누군가에겐 독이 되는 게 아닌가. 동생인 최은숙 원장은 그 대목을 분명하게 되짚으며 설명했다.

“탕전 일을 하면서 실수를 하면, 그리고 그 실수를 원장한테 얘기도 안 하고 그냥 덮어버리면, 그 약이 환자한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걸 원장이 나중에 듣고도 모를 수밖에 없어요. 같이 일하는 직원에 대한 신뢰가 우선이지, 원장이 CCTV(폐쇄회로 감시카메라)를 달아놓고 일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실제로는 그렇게 감시할 시간도 없어요. 한의원 내의 모두가 유기적으로 동시에 함께 움직여야 하니까요. 오빠가 탕전 일을 처음 배울 때부터, 저는 항상 오빠랑 같이 움직이면서 대화하고 다짐을 했어요. ‘오빠, 이 일을 실수해서 환자들한테 약효가 하나도 없으면, 아무도 우리 한의원에 안 오겠지? 그러니까 만약에 작은 실수라도 하면 꼭 나한테 얘기해 줘. 그걸 해결해야 환자들한테 약효가 나잖아.’ 오빠는 그걸 꼭 지켜줬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몇 가지 실수가 있긴 했죠. 대신 오빠는 그 즉시 저한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그 약을 다 빼낸 다음, 새로 약재를 제조해서 퇴근을 못하더라도 밤늦게까지 다시 약을 달이는 과정을 반복하곤 했거든요. 오빠는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약속을 지켜줬어요.”

질문하는 이가 짓궂은 걸까? 초기에 실수했던 게 뭐냐고 다시 물었다.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서 마주친 시선 사이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정말 비싼 게 좋은 녹용을 사용할 때인데, 본인 부담이 60만원이 넘는 약을 달일 때 오빠가 첫 실수를 했어요. 밸브를 열고 작업을 해야 하는데 어중간하게 잠그고 하다가 약은 적게 나오고 나머지는 바닥에 흘려버리고…, 그래서 그날 늦게까지 다시 약을 달이면서 새로 약을 만든 적이 있었거든요.”

동생인 최은숙 원장은 편하게 ‘있는 그대로’의 한의원 세계를 설명했다. 탕전의 일이 힘들단다. 한여름에 에어컨을 아무리 틀어놓는다 해도, 100도가 넘는 약 제조 과정을 좁은 공간 안에서 책임져야 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탕전실을 갖춘 한의원에선 탕전 일을 전담하는 이들이 그만두면서 교체되는 경우가 잦고, 약 제조의 믿음을 담보하기 위해서 원장의 가족 중 1인이 탕전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의원 원장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탕전실을 담당하는 예가 많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란다. 실수를 적당히 감추며 넘어가는 게 한의원 운영 차원에선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런 문화와 질서가 그 세계에선 정착이 되고 있다는 설명은 처음 듣는 내용이면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역지사지라 하지 않았나. 누구나 그 위치에서 그런 상황에 마주친다면, 똑같은 결론을 내릴 게 분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책임은 나의 몫이다

“뜨거운 공간에서의 작업이니까, 여름 기간 동안의 일은 당연히 힘들죠. 그런데 이번 해 6월인가? 오빠의 오른쪽 눈에 다래끼가 났어요. 치료를 하고 온 날은 두어 시간 동안 눈이 거의 안 보인다고 해요. 오빠는 장애 때문에 왼쪽 눈이 아예 안 보이는데, 하필 오른쪽 눈에 다래끼가 난 거죠. 그러니까 두 눈이 다 안 보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빠의 그 증상이 그런 줄도 모르고, 밀려드는 환자분들 때문에 왜 진료시간에 병원에 가느냐고 만류한 적이 몇 번 있었어요. 직원 모두가 다 근무하고 있는데, 오빠한테만 예외를 줄 수가 없었던 거죠. 오빠는 묵묵히 일을 하고, 저의 그 말 때문인지 일요일에만 진료하는 병원을 찾아다니더라고요. 다래끼의 상태는 더 안 좋아져서 양약도 안 되고 저의 한약에도 한참 뒤 반응을 할 만큼 악화가 됐고…. 3개월 넘게 오빠가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상태에서 일을 했어요. 저는 오빠가 일요일 진료를 일부러 찾아다닌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거든요. 정말….”

동생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 환자가 왔다는 양해를 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환자가 실제로 있건 없건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묵묵히 일을 하는 오빠의 모습을 보며, 막내 여동생의 마음은 얼마나 짠하게 아픔으로 스며들었을까.

“여덟시 반에 출근하고 일곱 시에 퇴근해요. 다들 아홉 시에 출근하는데, 제가 미리 와서 청소를 해야 하니까요.”

여동생이 책임자인 의료 장소를 오빠는 그렇게 관리하고 있었다. 여동생의 눈물이 짠하게 느껴진 게 혼자만의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동생이 처음 탕전실 일을 담당해 달라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물었다. 무척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단다. 처음 하는 일이었고 준비하는 데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때까지 하고 있던 인쇄 일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다가설 일이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예쁜’ 여동생과 함께하는 게 아닌가.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단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짠’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준비를 하고 계시는 건지 ‘짓궂음’을 반복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 한마디에 얼굴이 벌겋게 변한다. 이제부터의 대화는 짧은 단답형의 문답식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실제 그렇게 대화를 나눴고, 최현배 씨의 속마음이 그 짧은 한마디 안에 툭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 속마음… 다 이뤄질 거라 믿으며 그의 언어를 아래에 담는다.

   
 

- 동생 없을 때 묻겠습니다. 어떤 배우자를 원하시나요?

뭐, 그냥 평범한 사람. 그런 사람이 좋죠.

- 사귀어 본 이성은 있으시죠?

결혼을 준비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여자친구로….

- (농담 식으로) 그럼 그동안 몇 분을 사귀신 거예요?

(정색을 하며) 아니, 직업훈련소에 있을 때예요. 좋은 사람이었는데, 나는 인쇄를 배웠고 그 사람은 양장 그걸 배웠으니까 지나가면서… 지나치면서 보고….

- 부안의 옛 친구들과는 연락이 되시나요?

지금은 없어요. 아무 연고가 없는 거죠. 15년 정도 못 갔어요. 부모님 올라오시기 전에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내려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좀….

- 혼자 있게 될 때는 어떤 일을 주로 하시나요? 탕전의 일 자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테고, 주말에도 혼자일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일을 할 때는 일을 하는 과정을 늘 생각해요.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거예요. 그리고 퇴근할 때는 주말 계획을 떠올려요.

- 주말 계획이라는 게 주로 어떤 내용으로 떠오르시나요?

여행이에요. 지하철이나 전철로 갈 수 있는 곳이면, 그 곳에 가서 내려서 구경을 해요. 춘천과 의정부를 자주 가요. 인천 소래포구도 좋아해요.

-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게 뭔가요?

하하하, 결혼하면 좋겠어요. 아니면… 결혼이 안 된다면, 결혼은 안 하고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술 한잔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어요. 친구로도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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