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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곁에 항상 함께하는 '1인'이 되겠습니다[사람사는 이야기] 변호사 김주관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natalir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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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4.12.24  18: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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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은 중요하다. 나중에 그 인상의 내용이 뒤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첫 인상 자체의 의미는 변치 않고 간직된다. 좋았다면 좋은 걸로, 나빴다면 나쁜 걸로 두고두고 기억되며 깊은 인상 속에 남겨지는 것이다. 이번 만남을 위해 수도권 국철 1호선 송내역 인근의 한 법률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첫 인상’이라는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다. 눈앞에 놓인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방문객 누구나 이용할 온수기 옆 작은 테이블에 놓인 몇 권의 책 중 한가운데 있던 한 권이, 이 공간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전태일’이란 이름이 표지에 담긴 책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시선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변호사 ‘1인’을 만났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낙천적인 성격과 긍정 가득한 시선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제 그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활인(活人)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인 김주관 씨가 이번 호 주인공이다.

   
 

자연 속에서의 일상

김주관 변호사,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이라 했다. 당시엔 전깃불마저 희미했던 시절이었겠지만, 지금은 화려한 펜션으로 곳곳이 채워진 남한강 최상류의 깊은 산골이 그의 고향이라는 의미가 된다. 북쪽으로는 태화산(1,027m), 동북 방향으로는 마대산(1,052m), 동남쪽 전체로는 소백산(1,439m)과 형제봉(1,178m)에 둘러싸인, 게다가 남서쪽으로는 온달오픈세트장으로 유명해진 온달산성이 자리 잡은 곳이다. 지역의 위치 또한 특별하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바로 위는 강원도 영월군이고, 바로 아래쪽은 경상북도 영주시가 맞닿고 있다. 3개의 도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인 것이다.

“아주 깊은 산골짜기였어요. 저의 동네 위로는 사람 사는 마을이 없었으니까요. 농사를 하긴 했지만 산을 깎아 밭을 일군 것이었기에,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은 별로 없었다고 봐야겠죠. 담뱃잎, 고추, 감자, 이런 농사를 했어요. 현곡이라는 지역이었죠. 검을 현(玄), 골짜기 곡(谷), 그래서 순우리말로 ‘거무실’이라고 불린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중 가장 또렷이 남겨진 게 뭔가를 물으니, 학교를 갔다 오던 길에 늘 지나치던 밭에서 서리를 한 범인(?)으로 지목되어 그 주인아주머니한테 크게 혼났던 일이란다. 직접 동참했던 게 아니었는데도, 워낙 많은 피해를 보고 있어 잔뜩 벼르고 있던 주인아주머니한테 오해를 받아 혼쭐이 났던 모양이다. ‘빠져 죽을 일 없을 만치’ 좁게 흐르던 계곡에서 친구들과 놀던 일 또한 기억의 한편에 깊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예전 기억으로 따진다면, 여섯 살 정도부터는 떠오르는 것 같네요. 산골짜기 생활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같이 놀 친구들이나 형 동생들이 많았거든요. 가을이 되면 산에 밤이 널려 있었어요. 밤 따러 매일 나가고, 대추도 많아서 많이 따먹었죠. 봄이 되면 진달래꽃 따먹으러 몰려다니던 기억이(웃음)… 정말 오랜만에 떠오르네요. 참 재미있게 지냈던 것 같아요.”

김주관 씨의 실제 출생년도는 1972년인데, 주민등록상에는 1971년으로 되어 있단다. 그 깊은 산골, 아마도 출생신고를 할 때 담당했던 행정 공무원이 서류 안에 획 하나를 잘못 적었던 모양 같단다. 소아마비 예방주사 같은 존재는 알지도 못하던 깊은 산골의 생활, 세 살 때 고열의 며칠을 보낸 게 결과적으로는 소아마비로 이어졌다고 한다. 오른쪽 다리로 인해 3급 장애인이 된 것이다.

“불편함은 분명히 있었지만, 지금 세상과는 달리 장애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전혀 없었어요. 워낙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내던 동네 어른들과 친구들이었으니까요. 지금의 관점으로 헤아린다면, 2km 정도 거리가 될 아랫마을 초등학교에 한 시간 정도 걸어서 다녔어요. 친구들이 저의 걷는 속도에 맞춰줬고, 항상 재미있게 놀면서 등교와 하교를 같이 했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참 좋은 기억으로 많이 남아 있어요.”

 
낯선 환경에서 가슴을 앓다

그의 장애를 계기로 부모님이 아랫마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당시 서울 영등포의 부흥회 목사님이 그 산골에 종종 내려왔던 모양이다. 그 인연에 따라 단양 산골짜기를 떠나 서울 영등포로 가족 전체가 거주지를 옮기게 됐는데, 소년 김주관의 인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하며 전혀 다른 환경을 만나게 됐단다. 5남매의 셋째였던 그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세상과 마주치게 됐다는 것이다.

“부모님 입장에선 애들을 얼마간 키우고 나서 다시 내려가려고 준비를 하셨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죠. 어머니께서 그 다음해 위암에 걸려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저희 남매를 키워야 하셨으니까요. 얼마 되지도 않던 단양의 밭은 나중에 정리하셨다고 들었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는 그나마 가까운 거리였지만, 고등학교는 ‘뺑뺑이 시절’ 강서구의 먼 학교로 배정이 돼서 참 다니기 힘든 거리를 등하교하며 지내야 했다고 한다. 한참 걸어서 버스를 타야 했고 긴 시간을 등하교 과정에 써야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친구들과 어울릴 상황을 만들기가 참 어려웠단다. 산골짜기 친구들 같은 문화가 아닌 서울 한복판의 삶이었기에 갈등도 많았고 개인적인 힘겨움도 많아서, 결국 고교 3학년이 되기 전에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방과 후에 어울릴 친구가 없었어요. 많이 힘들었죠. 여러 갈등이 많아서 2학년 마치고 봄방학이 됐을 때, 그러니까 3학년이 되기 바로 직전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그 다음에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에 들어갔죠. 거주지의 환경이 완전히 바뀐 것도 힘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저의 장애보다는 빈부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거든요.”

   
 

미래에 대한 뚜렷한 준비 없이 서울로 오셨던 탓일까?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어가기 위해, 참 힘든 일들을 ‘이것저것’ 계속 하셨단다. 게다가 엄마 없는 가정에서 아빠 혼자만의 책임을 홀로 져야 했던 입장 아닌가. 당시의 힘겨웠던 생활이 울컥하며 오랜만에 떠올랐던 모양이다. 자신의 지난 삶을 담담하게 털어놓던 김주관 씨의 음성이 말줄임표를 이어가더니, 눈가에 살짝 이슬 비슷한 게 맺혔다. 12월호에 수록되는 이 글을 읽게 된 다음에 그런 적이 절대 없다고 그가 강변하며 항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마주보며 대화 나누던 입장에선 분명히 그 ‘반짝’이 눈에 보였다.

“솔직히 불만이 좀 많았어요. 아버지는 성실한 분이라서 그 아래서 저희들도 중심을 잘 잡고 아버지 덕분에 잘 크긴 했지만, 제 입장에서는 반항기라고 할까요? 저는 그런 생활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든요. 빈부의 차이 같은 걸 전혀 모르며 지내던 시골의 생활이 있었는데, 왜 굳이 서울로 와서 아버지 당신도 고생하셨지만 우리들한테도 심적인 갈등을 만드셨는지, 당시엔 그게 참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든요.”

 

사회 속으로, 현실 속으로

고등학교에선 수학을 잘 한다는 이유로, 게다가 몇 차례의 수학경시대회 입상을 거치다 보니 이과를 선택하게 됐단다.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문학에 대한 갈증이 들끓게 됐고, 문과가 자신의 적성이 아니었나 하는 갈등이 시작됐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제게 자주 말씀하셨어요. ‘너는 다리가 좀 불편하니까, 앞으로 약대 쪽으로 가라. 다리가 불편하니까, 앉아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런데요. 저는 그런 의견을 듣는 게 정말 너무 싫었어요. 생활 주변에서도 어르신들은 비슷한 말씀을 계속하셨죠. ‘너는 기술 계통의 일을 배워라. 다리가 불편하니까.’ 거기에 대한 반항이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사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일의 분야를 꿈꾸기 시작했어요. 왜 저의 인생이 다리의 제약을 전제로 한정이 되어야 하나요? 반항이 아니라, 저의 자존감을 갖기 위해선 그런 의견들을 떨쳐 내버려야 했거든요.”

검정고시를 치른 뒤 대학 법대에 들어가고 남들이 다 한다는 (사법)고시반에 들어갔지만, 그는 ‘딱 1년’만 그 안에서 지내다가 - 아니, 견디다가 - 과감히 나와 버렸단다. 입학하자마자 모든 신입생들이 고시 하나에 매달리는 학과의 분위기가 너무 싸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란다. 그의 지향점은 따로 있었단다.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 관심을 직접 경험하며 뛰어들고자, 그는 야학교사의 생활을 대학 내내 계속했다고 한다. 아무리 세상이 ‘잘났다’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그의 ‘마음과 몸’이 원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1학년 말에 고시반에서 나온 뒤, 학교는 그냥 큰 부담 없이 다녔어요. 개인적으로 하던 야학교사 생활이 훨씬 편했거든요. 제가 90년대 초반 학번이니까 사회현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실제 시위에 참여하는 일은 제 신체적 입장에선 동참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래서 야학교사 생활을 하며,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과 함께 어울리는 데 전념했어요. 대학교에선 도서관 근로 장학생으로 책 정리를 담당했죠. 전공인 법 공부는 졸업할 정도, 딱 그 수준까지만 했어요. 전공보다는 일반서적, 특히 사회현실에 관련된 책 읽기가 훨씬 즐거웠거든요.”

그럼 고시 준비는 언제 했다는 말인가? 4학년이 되어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단다. 당시 국가의 경제주권을 나라 밖 ‘남’에게 내주던 IMF체제가 시작됐던 때였고, 그는 단기간에 안 되는 게 분명한 고시공부에 그때부터 몰입하기 시작했단다. 1차와 2차와 3차까지 진행되는 사법고시에서 2차 시험에 떨어지기를 두어 차례 반복하다가, 그는 2003년 말에 합격과 함께 5급의 국가 공무원 자격을 얻게 됐다고 한다.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연수원 동기들끼리 여러 연구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는데, 저는 사회복지를 연구하는 사회보장법학회의 학회장을 맡게 됐어요. 장애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니까요. 직접 현장에 나가 실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때 저의 학회 회원들과 함께 나갔던 곳이 바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였어요. 연구소의 인권팀과 호흡을 맞추면서, 정말 활발하고 절친하게 일을 할 수 있었죠. 당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만들기 위해 입법안을 가지고 집중적인 논의가 진행되던 때였는데, 장애권익을 위해 이만큼 노력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점에 큰 감동을 얻게 됐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큰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사회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인간관계를 그때 많이 맺게 되었죠.”

거주지와 가까운 부천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활동한 지 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가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분야는 초심 그대로 이어지고 있단다. 전국운수산업 민주버스노동조합 인천지부 고문변호사, 경기서부하나센터 탈북자법률교육위원 같은 그의 여러 직함들을 보면, 그가 지향하는 방향이 ‘금빛 찬란한’ 양지가 아닌 ‘땀과 눈물’의 음지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가 활동하는 지역이 인천, 부천, 김포인데, 이곳 위주로 일을 하다 보니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서 정말 많이 아쉬워요. 하지만 연구소를 중심으로 젊은 변호사들이 장애인 권익을 위한 소송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늘 듣다 보니까 참 보기 좋더라고요. 직접 동참하지 못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같이 뛰는 날이 꼭 올 거라고 다짐합니다.”

‘서울에서의 활동 못지않게 지역에서 풀뿌리를 감싸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은가’하는 의견을 전했더니, 김주관 씨는 당연히 맞는 말이라며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례들을 설명했다. 그가 변호했던 이들의 면면은 모두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지역의 특성상 노동자의 인권과 관련된 업무가 많다는 게 눈에 띄었다.

“법률계가 아주 소수이던 시절에는 특권의식으로 부와 명예를 독점하며 누렸겠지만,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면 정말 꼭 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원하는 어려운 분들이 너무 많이 계세요. 일을 하고 여러 활동을 하면서, 저는 항상 이런 마음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장애인권 같은 사회문제를 마주할 때는 이성적으로 비판적인 의식을 갖는 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언제든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자기 인생 자체가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항상 밝은 면으로 생각하고,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을 잃지 않아야 해요. 그런 면에서는 신앙적인 부분도 꼭 필요하겠죠. 그래서 제가 생활신조처럼 가장 좋아하는 말도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에요.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자주 사용하셨던 말씀이기도 하죠.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거, 그 문구가 마음속에 깊이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법률 활동 이외에 즐겨 하는 일이 있느냐 물으니, 그는 많이 읽진 못해도 사고 싶은 책은 항상 사서 본단다. 어떤 분야가 됐든 꾸준히 독서를 하는 편이고, 높은 산은 힘들지만 낮은 산을 찾아 오르는 걸 즐긴다고 한다. 가족이 어떻게 되느냐 물으니 아내와 두 딸, 막내가 아들이란다. 자녀 셋은 요즘 세상에서 ‘부의 상징’이 아니냐고 되물으니까, 그는 껄껄 웃으며 그건 절대 아니고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셋을 갖게 됐단다. (참고로 그의 법률사무소의 이름이 바로 그의 막내아들 이름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사담을 나누듯 자연스럽게 문답을 이어가다 보니, 대화의 중심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월간 <함께걸음>으로 옮겨졌다. 연구소 출신의 활동가들 이름이 줄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들과의 인간관계와 좋은 기억들을 자세하게 언급하는 걸보니, 사법연수원에서 연구소로 실습과정을 나왔던 게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나름 자부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함께걸음>에서 즐겨 읽는 꼭지와 여러 감상들을 풀어내는 걸보니, 그 또한 이 월간지의 애독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조금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변호사 일을 하면서 현장을 찾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기 부천지역만 해도 중동신도시, 상동신도시가 거대하게 들어섰잖아요.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는 건 서로 섞여 살아야 해요. 잘 살든 못 살든, 잘났든 못났든 간에 다양한 면면들이 한데 섞여 어울리며 살아야 사람 사는 세상이 되는데, 여기 신도시를 계획할 때부터 아주 심각하게 잘못된 모순이 존재한다는 게 눈에 띄더라고요. 중산층 이상이 살 만한 넓은 평수의 집들은 시청이나 법원 근처에 광범위하게 집중되어 있어요. 대신 작은 평수나 임대아파트는 신도시 외곽 맨 끝 쪽에 한데 모아놨죠. 신도시 계획을 세울 때부터 계층 구분을 확실히 나누고, 도시 구조를 ‘가진 자’ 중심으로 획일화시켜놓았어요. 참 좋지 않은 설계라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제가 도시계획까지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인위적으로 서로를 나누고 있다는 점은 정말 우려할 문제가 분명해요.”

아주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건 비단 부천지역만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전국 어디를 가도, 최근에 들어선 거대 신도시의 중심과 외곽은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특히 만남을 위해 임대아파트를 찾아가는 길이 가장 멀다. 수소문하며 그 아파트 단지를 찾아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지팡이를 쥐고 힘겹게 걸어가시는 어르신들과 전동휠체어의 모습이다. 이동의 편의가 가장 필요한 이들인데, 이들만 가장 먼 곳으로 배치한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김주관 씨의 의견대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가진 자’ 중심으로 인위적인 편 가르기를 한다는 건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위한 만남은 토론의 마당으로 바뀌었고, 대화의 자리는 변호사 사무실을 떠나 소주와 삼겹살이 놓인 테이블로 옮겨졌다. 심각한 사회현실과 또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근황이 한데 뒤섞이며, 탁자 위 한쪽으로 빈 병이 하나둘씩 모아졌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거,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닌가. 딱딱한 문제를 언급하다가도 ‘빙그레’ 웃음 짓는 얼굴로 금세 돌아오는 김주관 변호사의 활동이 이젠 여러분의 곁에서 진행될지도 모를 일이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그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변호사라는 직업 이전에 이런 이웃과 함께한다는 건, 우리 모두가 혼자가 아니라는 힘을 전하는 촉매가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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