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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애를 인정하면 세상과 나는 하나가 된다[사람 사는 이야기] 네오엑세스 대표이사 노영관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lim0192@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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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5.02.10  10: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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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얼굴 표정을 포함한 외모가 가장 먼저 작용할 테고, 다음이 그 사람의 행동과 태도가 될 것이다. 이건 길거리나 식당 같은 각종 공간에서 얼마든지 타인들을 혼자 평가해 볼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아는 척할 필요도 없는, 말 그대로 혼자 생각하고 판단해 버리면 그만인 혼자만의 느낌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직접 마주앉아 대화를 하게 될 경우의 첫인상은 무엇으로 결정이 될까? 바로 음성과 표현 방식, 적절한 언어(용어) 사용 여부가 그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됨은 분명한 일이다.

나름 적지 않은 인생의 시간을 지내오면서 이번에 만난 인물만큼 정제된, 절제된, 적절한 용어와 문장 구성을 사용하며 편하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이는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기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더욱 깊은 대화를 나누게끔 분위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력은 잃었다지만, 누구보다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네오엑세스의 대표이사인 노영관 씨가 이번 호 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제대로 받지 못한 치료

서울 지하철 7호선 남성역에서 15분 정도의 도보거리에 있는 그의 회사를 찾아갔다.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는 듯한 허름한 외관의 건물 2층에 그의 사무실이 있다고 했다. 입사원서를 들고 왔다면, 건물 모습을 보자마자 그대로 발길을 되돌릴 만한 그런 외관이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정말 있었단다.) 건물의 첫인상이 이러하니 내부의 모습은 오죽할까. 우려 섞인 마음으로 2층 출입문을 열었는데, ‘아!’ 전혀 다른 깔끔한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손님을 맞이하는 여러 직원들의 표정이 모두 환하게 밝아지는 게 아닌가.

손님을 안내하고 차를 권하는 직원들의 언행이 정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이건 회사 내부의 평소 분위기가 이처럼 자유롭다는 뜻이며, 회사의 최고 책임자가 어떤 마음자세로 회사를 경영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증거가 된다. 어느 회사든 어느 매장이든 간에, 최고 경영자의 스타일에 따라 운영 형태가 완전히 뒤바뀌는 건 늘 경험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뒤 오늘의 주인공인, 이 회사의 대표이사 노영관 씨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정중한 인사와 차분한 음성, 따뜻한 환대의 손길은 ‘선비’ 같은 사람이리라는 첫인상을 남겼다.

“당시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망막박리로 실명을 하게 됐어요. 망막박리의 특성이 아주 짧은 기간에 갑자기 안 보이게 되는 것이거든요. 처음엔 ‘아, 눈이 나빠진다. 시력이 떨어지는 것 같네?’ 정도였다가, 한순간에 시야의 한 부분부터 안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 일주일 정도 걸렸을까요? 한쪽 눈이 아예 안 보이게 됐죠.”

어린 나이였기에 눈 다래끼가 심해진 건가 싶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넘어가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건 병원을 간 이후에 판명이 됐단다.

“한쪽 눈은 완전히 안 보이고 다른 눈은 시력이 그나마 남아 있는 상태에서 병원에 갔어요. 그런데 당시에 의사의 오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느끼는 증상하고 의사의 진단이 전혀 맞지 않고 다른 거예요.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도 저는 크게 화를 내면서 저의 상태를 얘기했어요. 분명 일주일밖에 안 된 증상인데, 의사는 몇 년 된 증상이라고 자신의 판단을 고집했거든요. 아, 그때를 생각하다 보면, 한 사람의 개인적인 직무 전문성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치명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때 그걸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죠. 하지만 저는 제 생각을 잘 표현할 훈련을 받지 못한 어린 나이였고 그런 성격도 아니었기에, 적절한 치료 받을 시기를 그렇게 놓치고 만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제대로 된 치료를 제 때에 받으면 완전실명 같은 우려는 벗어날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단다. 완벽하게 정상적인 시력은 아니더라도, 다소 떨어진 상태라도 시력을 유지할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단다. 그럼 지금 노영관 씨 눈에 존재하는 시력의 힘은 어느 정도라고 해야 할까? 완전히 안 보인단다. 낮과 밤의 구분도 없고, 태양의 존재도 느낄 수가 없다고 한다.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요.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문득 어떤 고요한 순간 같을 때 저의 시야 쪽으로 관심의 무게를 옮기면, 뭐랄까요. 우주 공간에서 막 혼란스러운 3차원 영상이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장면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특정한 시각적인 포인트가 있는 것도 아닌 그런 흐름들 같은 거…. 약간의 움직임 같은 게 있다는 건 신경의 반응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죠.”

   
 

낯선 느낌, 모든 게 비현실적인

초등학교 6학년 여름이면 인생에 있어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닌가. 게다가 일주일 만에 한쪽 눈이 완전실명으로 진행됐다는 건, 듣는 입장에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시각적인 기억은 어디까지, 어느 정도나 그의 가슴 안에 남아 있을까? 예상밖의 대답이 전해졌다. 거의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시각에 대한 기억을 사진 찍은 것처럼 명료하게 간직해 왔던 것 같아요. 사람들마다 기억의 형태라는 건 조금씩 다르겠죠. 제가 실명했기 때문에 예전 기억을 붙잡으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시력이 있던 당시에도 어느 장소와 공간을 떠올리며 그걸 실제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장면을 연상하는 데 익숙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체적인 기억들은 갖고 있는데, 대신 새로 생긴 개념들에 대해선 제가 느낄 수 있는 게 없죠. 26년도 넘었으니까 그때 없던 것들, 새로운 디자인이나 캐릭터, 그 나이 땐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들, 예를 들어 당시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으니까 비행기 실내가 어떤 모습을 가졌고, 창 밖으로 내려다보는 풍경 같은 게 얼마나 장관인지 같은 건 떠올릴 게 없어요. 나중에 학습을 통해 추측한 개념으로만 헤아려 볼 뿐이죠.”

실명을 한 게 1989년 여름이라서, 1989년에 대한 기억이 특히 많이 남아 있단다. 그 1년 전인 88서울올림픽의 영상은 물론 또렷이 남아 있고, 시력을 마지막으로 잃어가던 시기가 마침 프랑스혁명 2백 주년이 됐다던 그해 여름이라서, 당시 방송 화면에서 보여 주던 해외뉴스와 특집 같은 내용들이 희미한 영상으로 떠오른단다. 중국의 천안문사태도 89년이었고, 최루탄이 난무하던 대한민국의 시대상도 당시의 모습으로 기억 안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럼 눈이 안 좋아진다는 느낌이 처음 들었을 때부터, 두 눈 모두 완전실명하기까지의 기간은 얼마나 걸린 걸까. 세세하게 헤아리지 않더라도 한 달 안쪽에 진행이 완료됐단다. 서울의 큰 종합병원에서 한쪽 눈이나마 살리려고 수술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고,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때까진 실명이 큰 실감으로 와 닿진 않았다고 한다. 그냥 ‘교과서에서 배웠던 헬렌 켈러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나?’ 그마저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생각이라기보다는 ‘학습되어진’ 틀 안에서 그 정도의 느낌만 가졌을 뿐이었단다. 그렇다면 실명이라는 현실이 인생의 무게로 다가온 건 언제였을까? 3~4년 정도 지난 청소년기, 바로 사춘기로 접어들던 그 시기였다고 한다.

“중학교하고 고등학교는 맹학교를 다녔어요. 당시 첫 수업을 듣게 될 때의 낯선 느낌이 지금도 선하게 떠올라요. 맹학교라는 곳에 가서 책상에 앉았죠. 수업이 진행되는데 칠판에 분필로 적는 판서를 보지 않고 공부한다는 게…, 진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큰 장막 같은 게 교탁과 책상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는 느낌 같은 거, 설명하시는 선생님의 음성은 들리지만, 굳이 말뜻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 맥락이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굉장히 비현실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는 학교생활을 나름 열심히 하려 노력했단다.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기숙사 생활도 잘 했으며, 시각장애인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면서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었다고 한다. 왠지 모르는 초조함과 불안감 같은 게 늘 마음속엔 있었지만 말이다. 사춘기의 늪으로 빠지기 전까지는 나름 활발한 모습으로 학교생활에 충실했다는데, 시각장애라는 현실을 ‘뼈 속 깊게’ 깨닫게 되는 건 전혀 다른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일상생활을 얘기하던 그의 차분한 음성 속에서 ‘충격’이란 단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 위치, 현실

같이 있던 중학교는 수업시간이 45분이었고 고등학교는 50분, 그래서 벨을 두 차례씩 각각 울릴 수 없어서 고등학교 수업시간도 45분으로 조정됐단다. 결과적으로는 맹학교가 다른 학교들보다 30~40분 먼저 수업이 끝나게 된 셈이다. 노영관 씨는 흰 지팡이 사용도 익숙해져서 고등학생이 된 이후엔 학교 주변을 보행하는 데 큰 어려움 없이 지냈고, 간식을 사러 교문 밖으로 나가는 일도 일상의 풍경과 같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그날도 간식 구입은 노영관 씨의 몫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경험적으로 장애를 인지하게 된’ 인생 최초의 날이 그날이었다며 미리 설명을 덧붙였다.

“친구들하고 같이 있다가, 모든 수업이 다 끝나고 간식을 사러 가겠다며 나갔어요. 간식을 사들고 학교로 되돌아오던 길이었는데, 그 주변 인근에 다른 중학교와 고등학교들이 있었거든요. 그 학교들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된 거예요. 폭이 2미터도 채 안 될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그 학교의 학생들이 개미떼처럼 가득 밀려오는데, 저는 저 혼자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상황을 맞은 거예요. 앞이 안 보이는 저 혼자 반대편으로 헤쳐 나가야 했던…, 그때 정서적인 충격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남들에겐 무심하기도 할 풍경이겠지만, 거기에 합류하지 못하고 그 흐름을 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 정말 자존감이 많이 꺾이던 순간이었어요.”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 날은 기차역으로 기차를 타러 갈 일이 있어서, 흰 지팡이를 손에 쥔 채 폭이 3~4미터 되는 길을 걷고 있었단다. 그런데 앞쪽 길 한가운데서 한 여성이 걸어오는 구두소리가 들렸고, 그는 자신이 피해서 걷기 어려운 탓에 잠시 멈춰 있었다고 한다.

   
 

“제가 곡선을 그리면서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 분이 살짝 비켜 가면 그게 편하잖아요. 그러면서 어깨가 슬쩍 닿았는데, 뭘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성이 크게 비명을 지르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고 다른 여러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저는 그때 아주 정확한 느낌을 받았어요. ‘아, 나는 장애인인데,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 말고도 사람에 따라서, 또한 상황에 따라서 혐오스럽거나 혹은 위험하거나 혹은 불쌍한 그런 대상이 될 존재가 되는구나’ 그건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제가 그렇게 규정이 된다는 것이잖아요. 그런 실감을 정말 피부에 와 닿게 느꼈어요.”

노영관 씨는 담담한 음성으로 몇 가지 사례들을 더 언급했는데, 모든 상황이 마치 화면 속 동영상을 바라보듯 생생하게 전해졌다. 말도 안 되는, 분노에 휩싸일, 치를 떨어야 할 일들밖에 없었는데도, 그의 음성은 정말 물 흐르듯 덤덤하기만 했다. 어떻게 저만큼 차분하게 그 모든 세상의 일그러짐을 풀어낼 수 있을까? 답은 하나뿐이다. 그는 이미 그 모든 걸 딛고 일어선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진로희망조사를 하면서 장래희망을 써내라고 해서, 저는 대통령이라고 써냈어요. 그냥 굉장히 막연했고 어떻게 보면 구체적인 꿈이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 생각하면 어떤 현실에 대한 괴리감 같은 걸 조금씩 느끼면서 변화나 기회에 대한 고민들이 커져가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그래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게 대통령이라서 그냥 그렇게 써냈어요. 그게 별일도 아닌 걸로 그냥 넘어갔더라면 제가 그때 뭐라고 썼는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 못하는 채로 지내고 있었겠죠.”

담임선생님이 그를 불렀단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에게 따귀를 때렸다고 한다. 노영관 씨는 자신이 딴 거 뭘 잘못한 게 있거나 맞을 짓을 했는가 보다 싶었는데, 그 이유를 들어 보니 말도 안 되는 걸 써냈다는 게 따귀를 맞은 이유라는 거였다. 앞뒤 분간도 못하며 맹인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이건 분명히 선생님을 놀리려는 그런 의도가 있는 거라며 크게 화를 내셨다는 것이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선생님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판단했다는 사실에 그는 정말 많이 화가 났었다고 했다.

“저하고 대조되게 칭찬을 받은 친구들이 있었어요. 학교선생님, 침사, 안마사라고 써낸 친구들은 잘 썼다고 칭찬을 받은 거예요. 제 생각은 이랬어요. 대한민국 어디를 구석구석 털어낸다 해도, 16살 학생들의 꿈이 안마사라는 걸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곳은 이 공간 말고는 어디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현실적으로 시각장애 선배들이 가장 잘된 케이스가 학교선생님이 됐다는 거, 그것 말고는 꿈과 희망을 갖고 선배들을 따를 다른 직업들이 없었거든요.”

 

   
 

스스로 열어야 하는 문

노영관 씨는 원래 법학을 전공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으로 입학이 가능한 법학과를 찾아 수소문했지만, 어느 대학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애인특혜입학이 시행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법학과의 문은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당시엔 어떤 유형의 장애인을 몇 명씩 선발하겠다는 걸 학교마다 다 정해놨어요. 장애특성을 고려해서 전공으로써 수학능력이 될 것 같다고 판단하는 구분으로 쓰였다지만, 한편으로는 ‘이 학과에선 이런 유형의 장애는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목적으로도 사용됐던 거죠. 한마디로 안 받고 싶다는 거예요. 특례입학 시행 초기라서 법제도의 미비점은 일면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장애학생들에게 문호가 개방됐다던 몇몇 대학들마저도 법학은 지원할 수 없다는 건 정말 모르고 있었거든요.”

특례입학전형의 마지막 날. 이 날이 지나면 일반전형으로 바뀌기 때문에, 노영관 씨는 어떻게든 지원이 가능한 학과를 골라 선택해야만 했단다. 하지만 다른 시각장애 선배들이 주로 진학하던 전공은 안 하고 싶었다고 한다. 적극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특수교육’, ‘사회복지’와 같이 장애학생의 당연한 진로로 여겨지던 학과들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몇 개 안 되는 학과 중에서 그가 최종적으로 정한 건 경제 관련 학부였다고 한다.

“일단 입학해서 경제를 전공으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면서, 법학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어요. 그런데 그때 학교 내에서 엄청난 설왕설래가 있었대요. 법대 교수들은 법을 전공한 법학자들인데, 시각장애 신입생의 법대 입학은 허용하지 않고 재학생의 복수전공은 허용한다는 건 완전한 이율배반이잖아요. 저는 신청이 안 될 이유가 없다고, 당연히 되는 거라고 판단해서 복수전공을 신청했고 실제로 하게 됐어요. 나중에 뒷얘기를 들어 보니까 학교와 학과 내부적으로는 꽤 시끄러웠다고, 그런데 외부 모르게 덮고 지나가도 될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표면적으로는 조용히 넘어갔다고 하더라고요.”

장애학생을 위한 학습도우미를 신청했냐고 물으니, 그런 제도 같은 건 없었단다. 게다가 그런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입장이면서도 그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도, 그런 요청이 받아들여질 거라는 상상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센스리더 같은 장비는 아예 없던 당시, 일반 컴퓨터는 윈도 시스템으로 모두 바뀌었지만 시각장애인용 컴퓨터는 여전히 도스 시스템에 의지해야 했던 환경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어려운 법학서적을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필기를 했고 음성도서 지원마저 없었을 상황에서 공부는 어떤 방식으로 했다는 걸까.

“대부분 수업 내용을 충실히 듣는 데 집중했어요. 최소한의 자료들을 복사하는 방법으로 모았지만, 부정확하거나 충분하지 않았죠. 보완책으로 활용한 건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고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강의테이프가 있어 구입했는데, 그게 부족한 교재들을 보완하는 데 도움이 좀 됐어요. 그렇게 어렵사리 한 학기 한 학기를 넘어갔던 것 같네요.”

 

홀로 서기, 스스로 서기

   
 

지금은 번듯한 기업의 대표이사로 자리매김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의 위치에 오기까지의 중간과정은 아주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다고 하니까, ‘맞다’는 한마디가 묵직해진 그의 음성으로 들려왔다.

“제가 진짜로 원했던 건 규모가 큰 조직에 아주 작은 일원으로 들어가서, 그 조직의 시스템을 배우며 일하는 근무형태를 원했던 것 같아요. 특정한 직업 분야라기보다는, 남들과 똑같은 원활한 사회생활을 갈망했던 거죠. 왜 그런가 하면 그 당시 현실을 생각해 봤을 때, 생계는 무슨 수를 쓰든지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제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조건을 대입해서 보면, 그런 큰 조직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얻기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큰 조직과 여러 사람들이 일하는 공간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메커니즘(어떤 구조의 작용 원리)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 이전까지는 늘 좁은 사회 안에서만 지내왔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고자 무모할 만큼 도전을 하게 됐던 거죠.”

대학 졸업 후 얼마간의 사회경험을 이어가다가, 자신의 꿈을 진짜 이루기 위해선 일정한 ‘스펙’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을 느껴서 경영마케팅을 대학원에서 전공하게 됐단다. 석사과정을 마친 뒤 다시 취업을 위해 이력서 작성을 시작했는데, 시각장애인이라고 밝혀놓으면 탈락했다는 말조차도 돌아오는 게 없었다고 한다. 간혹 시각장애라는 정보를 감추고 원서를 지원하면 2차 시험에 오라는 연락이 오기도 했는데, 어차피 안 될 게 분명한 그런 지원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단다.

“저는 회한을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저하고 비슷한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들이 분명히 있을 게 아니에요. 그들한테 ‘너 참 멋지다!’ 하며 격려를 해줘야 하는데,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 기회가 닿지 않아 나는 아무것도 못했다’는 후회를 나중에라도 남기고 싶지 않았거든요.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 젊은 시절을 돌아볼 때, 그런 후회가 제 인생에 남겨져 있다는 거, 그런 인생으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정말 진지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어떤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아 1년 동안 1백 통 넘는 이력서와 지원서를 작성해서 보냈거든요.”

‘사회적 선입견을 타파해야 한다’며 입사지원자의 신상을 전혀 밝히지 않은 채로 진행된, 심지어 남성인지 여성인지도 공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신입사원 모집을 진행한 어느 대기업 건설회사가 있었단다. 노영관 씨는 이사들이 진행하는 최종면접까지 올라갔고, 집단 토론과 개별 발표를 거친 뒤 마지막 질의 시간에 그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저는 ‘됐다!’는 감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심사위원들한테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가 시각장애인이고 이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는데, 이 회사에서 주어지는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제 업무를 처리하지 못할 거라고 우려되는 상황이 어떠어떠한 게 있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요.”

순간 모두의 분위기가 곤혹스러워지는 느낌,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심사위원들의 답을 들으면서도 느껴지는 본능적인 결론…. 결국 그 입사마저 좌절되면서, 노영관 씨는 최종적인 인생의 전환점을 결정짓게 됐다고 한다.

“생각을 바꿨어요.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주어지면 그걸 디딤돌 삼아 열심히 해 볼 의지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그게 끝까지 안 되니까, 인생의 기회라는 걸 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직접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진 거죠. ‘아, 이젠 그만하자. 같은 방법으로는 의미도 없고 그만하자.’ 방향을 바꿔야만 미련이 남겨지지 않는 상황이 됐던 거예요.”

마지막으로 어느 보조공학 업체에 입사를 하게 됐단다. 그런데 ‘잘해 보자’는 의미가 영 보이지 않는 회사였다고 한다. 아무리 기술적인 부분을 제안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단다. 그는 심각한 고민 끝에 이직을 결심했고, 이직 이상의 다음 세상을 설계하게 됐다고 한다.

“보조공학이잖아요. 저는 회사에 소속된 직원 구성원이기도 했지만,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용자나 소비자 입장이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그 두 부분을 동시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회사는 최고 책임자의 의견만 따라가는 게 저의 의지와는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때 진지하게 결심하게 됐죠. 많이 어려워진다 해도, 저 스스로 제가 할 수 있는 형태의 일을 저의 사업으로 해 보자고요.”

 

세상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개인적으로 창업을 하겠다고 했으니, 첫 출발의 시점에 정부의 창업지원 같은 걸 받은 게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색을 하며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손짓 또한 그 허탈감을 이어갔다.

   
 

“없어요. 그런 게 많은 줄 알고 시작했는데, 실제로 지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거든요. 게다가 제출해야 할 무슨 서류가 왜 그렇게 많은 건가요? 인증서와 같은 A라는 서류 하나를 제출하려 하면 A-1, A-2, A-3 같은 부수적인 서류들을 갖춰야만 A서류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A서류를 가져가야만 다음 B서류의 진행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 과정이 참 힘들었습니다.”

독자적으로 제품 개발을 완료할 능력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시절, 노영관 씨는 처음 1년 반 정도 혼자 일을 하면서 외국의 좋은 제품을 한국어 버전으로 만드는 현지화 작업에 우선 매달렸단다. 스크린리더의 한글화 작업이 그의 손에서 완성이 된 것이다. 단순 번역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전부 다뤄야 했기에, 상당히 까다롭고 고된 과정을 거쳐야 했다고 한다.

“작업은 혼자 했지만,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업체와 계약을 맺으면서 저희 회사가 국내보다 해외에 먼저 소개됐어요. 왜냐하면 이 산업계에선 잘 알거든요. 스크린리더 하나를 어떤 국가의 언어로 버전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방대하고 난이도 높은 작업인지를 알기 때문에, ‘이 소프트웨어 한국어 버전 개발업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검증이 된 걸로 보는 거죠. 운도 많이 따른 것 같고요. 그때부터 직원들을 늘리면서 본격적인 사업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회사의 주된 업무 영역은 보조공학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방식으로 생산하는데, 시각장애인을 위해 특화된 제품들을 중심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저부터가 시각장애인이고, 제일 잘할 수 있고 관심도 높은 게 시각장애인용 보조공학이거든요. 컴퓨터 화면을 읽어 주는 스크린리더 기술과, 시각장애인들이 온라인으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을 구축하는 서버 시스템 사업, 종이책을 음성으로 읽어 주는 독서 장치 개발, 이런 데 목적을 두고 회사를 시작했고요. 국내시장 규모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외국까지 하나의 시장으로 보면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외형적인 규모는 작지만 꽉 채워진 내실로 탄탄한 회사, 그의 회사에서 개발된 신제품으로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 시각장애인들이 마음속 빛과 선율을 느끼게 될 멋진 날이 곧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장애당사자의 관점에서 개발되는 제품들이기에, 가장 필요한 핵심 중심으로 신제품이 탄생할 게 아닌가. 참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도, 지면의 제약에 따라 더 많은 내용을 담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최고의 신제품 개발 소식이 들리면, 그 제품을 소개하는 지면을 만들어 그와 다시 재회하고 싶다는 기대감을 끝맺음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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