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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우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물론 당신 곁에도
채지민 객원기자  |  gypsy7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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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5.08.17  11: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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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 걸리버는 난데없이 소인국에 들어가 이방인이 된다. 소인국에 들어갔으니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나라는 소인들만 살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왼손잡이들은 이 사회에서 소수자였다. 오른손잡이가 당연한 사회였다는 편견이 우세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는 것이다.

장애인이란 존재 역시 당시까지는 소수자조차 아닌 예외자였을지도 모른다. 아예 배려할 필요도 없는 대상이었다는 거, 소수자든 예외자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최소한의 움직임과 현실참여는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어떻게든’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수자, 예외자, 외계인 취급을 받는 이들이 있다. 성(性)정체성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갈수록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함께걸음>이 그런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민다.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가 소인국의 모든 이들에게 “내가 옳은데, 너희들이 소인이잖아!”라고 외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정리한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인 강한새 씨가 그 이름 그대로 ‘강한(strong)’ ‘새(bird)’가 되어 독자 여러분을 만난다.

장애진단도 안 나왔던 중증장애

그가 편하게 찾는다던 카페가 약속장소로 정해졌다. 먼저 도착해서 카페 안팎을 둘러보는 동안 그가 나타났다. 초면이면서도 초면이 아닌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동안 정식 인사를 나누지 않았을 뿐, 분명 오랜 기간 마주침을 반복했을 것 같은 인물의 등장인 것이다.

편하게 첫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묻는 몇 마디를 덧붙인 뒤, 본격적인 대화의 시작을 위해 무슨 장애 몇 급인지를 물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의 첫 질문은 항상 이 한마디로 시작한다. 그래야만 대화의 방향을 판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완전하게 예측이 빗나갔다. 시각장애 1급이란다.

그건 이해가 안 됐다. 마주앉아 나누던 대화의 시간 내내, 그의 눈동자는 말하는 이를 정확하게 응시했고, 두 눈동자가 똑같이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마주앉아 말하던 이의 얼굴도 안 보였다는 건가? 그런데 이어진 그의 음성은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만들었다. 쇼그렌증후군(Sjogren Syndrome)이 자신의 진짜 증상이라는 것이다.

“희귀질환이에요. 사람의 몸에는 외분비샘이라는 게 있죠. 눈에 들어가는 이물질들을 걸러 내거나 소화를 시키는 내장기능, 그리고 말을 할 수 있게 침을 만들고 몸의 땀을 배출하는 신체의 분비물들이 제대로 분비가 되지 않아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제 기능을 잃어가는 증상이에요. 면역력에 이상이 생겨서 면역력이 역으로 몸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죠. 안구건조증과 구강건조증이 주요 증상이지만, 이미 어릴 때부터 몸 전체로 퍼져 있었어요. 워낙 희귀질환이라서 2008년에야 쇼그렌증후군이라는 최종 진단을 받았죠.”

2007년에 시각장애1급 판정을 받았지만, 온 몸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장애가 왜 발생하는지는 몰랐는데, 시각장애 또한 쇼그렌증후군의 한 증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피부건조증 때문에 몸 전체의 피부가 하얗게 일어나서 바셀린을 바르고 또 발라야 했고, 다섯 살 때부터 갑상선기능항진증을 앓게 되어 근력이 약해진 탓에 제대로 된 보행이나 몸동작마저 하기가 힘들었단다.

“미숙아로 태어났어요. 10개월은 다 채웠지만 아기 몸무게가 1.44kg, 저체중아였죠. 그래서 아기에게 신길 양말도 없었대요. 너무 작아서요. 그런데 14개월 터울로 태어난 저의 남동생도 2.14kg의 몸무게로 곧장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는데, 동생은 상태가 아주 심해서 뇌성마비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최중증 뇌병변장애에 시신경 위축으로 인한 시각장애도 가진 중복이고 간질까지 앓게 됐죠. 그러니까 선천성장애를 가진 동생에 비한다면, 저는 상대적으로 장애가 아니라 몸이 유난히 허약한 정도로만 보였던 거예요.”

일반 휠체어를 조금씩 사용하다가 2011년부터 전동휠체어에 앉게 됐는데, 몸의 모든 증상이 복합적인 장애라서 걷는 것을 일상적인 수단으로 택하기엔 너무 어려웠단다. 천식증상이 있어 호흡기가 안 좋고, 계속되는 빈혈에다가 근육의 힘은 갈수록 빠지기에, 전동휠체어 사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엉덩이뼈가 부러진 사고 때문에 신경이 회복되지 않아, 지금도 극심한 통증이 남아 있단다. 이 또한 쇼그렌증후군에 동반되는 전신근육통증이라는 것이다.

“눈이 갑자기 안 좋아진 건 중학교 3학년 때인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어요. 안경을 쓰고 교정시력이 1.0을 넘은 적은 제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죠. 제 몸 상태 때문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왕따를 심하게 당했어요. 중학교 시절에 쇼그렌증후군의 마수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저를 지배하게 됐죠. 그래서 일반적인 학교생활이 거의 불가능했어요. 하지만 장애진단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몸이 많이 허약하고 눈이 안 좋은 아이 정도로 취급 받아야 했죠.”

전남 광주광역시에서 살다가 인근 장성으로 잠시 옮겨 살았는데, 배정된 고등학교는 버스를 서너 번 갈아타야 하는, 그나마 등교시간에 맞추려면 새벽 5시 반에 나가는 버스를 타야만 가능했던 먼 거리였단다. 그 학교를 한 차례 방문해 본 뒤 내린 결론은 ‘나는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였다고 한다. 스스로의 판단에도 다닐 수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게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심하게 이어졌던 왕따, 그것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는 한마디가 덧붙었다.

인권으로 눈을 돌리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꿈이 대통령이었고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의사가 꿈이었어요. 명확하게 특정 전공까지 정해진 재활학과 의사가 꿈이었죠. 그 다음부터는 사회복지사가 꿈이 돼서 고등학교 때 공부를 했어요.”

진학을 포기한 고등학교 대신 시각장애특수학교를 1년 정도 다녔는데, 건강이 너무 악화돼서 쉬던 중에 난치병 진단을 받고 지체장애와 관련된 학교로 옮겨갔단다. 고등학교 입학은 제 나이에 들어갔지만, 졸업은 늦게 해야 했다고 한다. 2학년만 3년을 다녀야 했다며 그는 크게 웃었다. 물론 당시에는 눈물이었겠지만 말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강한새 씨에겐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대한 반전이 다가왔다고 했다. 청소년 인권 현실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미 자신은 운동권이었던 것 같단다. 실제로 청소년들 중에서 인권의식이 확고한 이들은 적지 않다. 그런데 중요한 건 계기가 무엇이었냐는 점이다.

“체벌 같은 거, 다양성을 억압하는 학교의 규범이 안 맞았던 것 같아요. 그 다양성이라는 게 사실 뭐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저는 제 몸이 이러니까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는 건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거죠. 어렸을 때부터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있으니까 체력적으로는 항상 힘들었잖아요. 등록된 장애는 아니었지만, 저의 모든 상황이 장애 그 자체였는데 인정을 못 받았거든요.”

갑상선기능항진증은 심한 수전증(손 떨림)을 동반하는데, 전반적으로 몸의 에너지를 너무 빨리 써버려서 쇼크와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근육마비에다가 심하면 심장마비까지 일으키는데, 어렸을 때부터 근력이 약하고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니까 달리기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단다. 그런데도 중학교부터는 유독 단체기합이 많았는데, 선착순 달리기 같은 건 아예 포기를 해야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쓰러지면 그래도 믿어주기는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쓰러진다는 것도 이젠 안 믿어주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그런 일상이 계속되다 보니까 학교 규범에 대한 신뢰도 없었고, 그걸 지켜야 하는 게 어떤 공공의 가치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됐어요.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학교에서 못하게 하는 것들이 제 신체의 문제들과 너무나 직접 관계되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던 거죠. 교복만 입으라는 거, 저는 더위와 추위에 취약하니까 이게 제 마음대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서 저는 좀 더 따뜻하게 있어야 해요. 그런데도 전혀 반영이 안 됐던 거죠.”

대화를 나누던 중 그제야 시선을 돌려 보니, 실제로 강한새 씨는 옷을 여러 겹 단단히 차려입고 있었다. 7월 한여름의 불볕더위는 반팔의 옷마저도 땀으로 푹 적시는데, 그는 11월에 어울릴 정도의 복장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희귀질환이라도 당시에 어떻게든 장애판정을 받았다면, 그랬다면 일방적인 학교 질서에서 조금이나마 배려나 예외를 인정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학교에선 저의 장애라는 걸 몰랐죠. 그냥 허약하고 신경 좀 써줘야 하는 애? 눈이 많이 안 좋은 애? 그리고 생각이 좀 삐딱한, 이건 제가 청소년인권활동을 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런 딱지가 제게 씌워져 있는 거예요. 제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들여다보지 않고, 단순히 하기 싫다는 핑계로만 봤던 거죠. 굉장히 인격모독적인 욕설도 많이 들어야 했어요.”

그에겐 인권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그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됐던 것 같다. 그럼 단순한 생각만이 아닌, 본격적으로 청소년인권운동에 처음 발을 딛게 된 건 언제였을까? 15살이던 2005년에 포럼 형태의 모임에서 청소년의 인권 현실에 대한 자기 경험을 얘기하는 것으로 인권의 삶이 시작됐다고 한다.

포럼 형태였다는 그 모임은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의 중심이 되어 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그것이다. 강한새 씨는 05년에 청소년인권의 눈을 떴고 06년에 장애운동을 접하게 됐으며, 그의 본질적인 관심이 정체성 문제로 넘어가면서 07년부터는 청소년 성소수자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17살의 소녀가 성소수자 문제에 집중하게 됐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숨 쉴 공간을 만나게 되다

중학교 3학년 때 좋아하던 여자친구가 있었단다. 그런데 당시 강한새 씨는 학교에도 못 나갈 만큼 많이 아팠다고 한다. 병원에선 원인을 못 찾았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마저 너무 심해져서 집안에는 얘기 안 한 상태로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단다. 심리상담소 같은 곳도 여럿 다녀봤지만, 한 곳에 오래 다닐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도 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소년이기 때문에 질문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상담소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단다. 처음엔 딱 잡아뗐지만 그 마음이 조절이 잘 안 돼서, 우리 반에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다는 걸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상담사가 하는 말이 그건 여기에서 못 고친다고, 당신은 동성애를 했고 부정한 것인 동성연애 때문에 에이즈에 걸린 거라고, 천벌을 받았기 때문에 나을 수 없는 거라며 한 기도원을 소개시켜 줬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어떻게든 고치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 기도원에 갔죠. 정말 별의별 일을 다 당했어요. 악령을 내쫓는다고 물고문까지 시키는 거예요. 이런 일까지 겪게 되다 보니까, 이젠 해결 안 되는 거라는 낙담에 빠지면서 못 고치면 그냥 죽자는, 인생에 대한 포기 같은 걸 느끼게 됐죠.”

강한새 씨는 그 즈음에 비로소 시각장애1급의 판정을 받아, 전신의 수많은 장애 중에서 시각적인 원인 하나만 우선 찾아내게 됐단다. 그때 이런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에이즈 따위는 아닐 거라는, 정신병은 아닌 것 같다는 심증이 들어서 깊은 고민을 하던 중에 몇몇 성소수자 단체를 알게 됐다고 한다. 얘기를 하고 관련된 책을 읽으며,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영상을 접하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었단다. 그리고 그때 하나의 답을 얻게 됐다고 한다.

“이게 저의 얘기라는 걸 느꼈죠.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를, 혹은 다른 성적지향이나 성적정체성을 범죄시하고 격리하려는 건 계속 있어왔잖아요. 저는 고등학교에서도 소속감을 잘 못 느꼈었어요. 특수학교 대부분이 종교시설에서 운영하잖아요. 동성애는 정신병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고 인류가 멸망할 거라는 식의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까 소속감이 생겨날 리 없었죠. 그런 것 때문에 숨 쉴 곳이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안에 커뮤니티 형태로 청소년 성소수자 모임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강한새 씨는 그 모임을 알게 된 이후로 크게 안도하게 됐단다. 온라인 기반의 커뮤니티였지만 서울에서 스터디 모임도 했기에, 나름대로 열심히 참가하면서 토론도 하고 공부도 함께하게 됐다고 한다.

“제가 안도했던 건 혼자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거, 어떤 사라져야 할 개념의 그런 게 아니라, 육체적으로 이상한 것도 아니고 정신적으로도 이상한 게 아니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고 무조건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답을 얻으면서, 저 혼자만의 책임감과 부담감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 숨 쉴 공간을 만나게 됐던 거죠.”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긍정하고 인정했던 게 언제였냐고 물으니 18살 때였던 것 같단다. 그럼 보통 커밍아웃이라고 하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대외적으로 얘기하게 된 건 언제냐고 다시 물으니 그것도 그 즈음이었는데, 사실 처음에는 커밍아웃을 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늘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공개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굳이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모두의 앞에 드러낼 필요가 있는 건지가 항상 물음표로 간직됐던 것이다.

“굳이 남한테 알릴 필요가 있는가. 그건 각자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커밍아웃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되면 안 되잖아요. 내 존재와 내 경험과 내 생활 방식에 대해서 타인과 나눌 수 없다는 데 어려움이 있고 갈등이 있고 부딪침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해소하고자, 스스로의 본 모습 그대로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던 거죠. 저도 그랬고 단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다 그런 욕구에서, 또한 스스로를 설명하고 싶어서 커밍아웃을 하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세요

   
 

그래도 왜 굳이 커밍아웃을 하느냐고 다시 묻는다면, 그건 정치적으로 ‘우리가 여기에 있다!’라고 얘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란다. 왜 해야 하느냐고 말하기보다는, 거꾸로 뒤집어서 왜 하지 못해야 하느냐를 되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임은 분명한 것 같다. 혼자 가슴으로만 앓고 있는 이들도 많을 텐데, 강한새 씨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삶을 밝혔다. 청소년인권운동과 장애운동의 경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았다면, 그 또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저는 다른 장애인 성소수자들과는 좀 다른 면이 있었어요. 물질적인 자원은 없었어도, 당시 활용할 수 있었던 인적관계의 자원들은 많이 있었다는 거죠. 그걸 통해서 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저 자신을 어떻게 이름 붙이고 설명할 수 있는지도 결정할 수 있었으니까요.”

청소년 성소수자 모임의 구성원들은 주로 어떤 이들이었을까? 사회적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굉장히 빠르게 증가했고 나중에는 헤아려지지 못할 정도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사용하는 용어가 달랐다. ‘사회적 생물학적’이란 표현은 일상적으로는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주로 비장애인들이었지만, 장애인들도 드문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궁금증을 질문했다.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면, 그 선택의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 청소년기에 동성에게 관심을 갖는 건 그 연령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기에, 일반적인 기준으로 이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범성애자인지를 구분하는 선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10을 기준으로 3.5 이상은 무엇이고 5.0 이상은 뭐다.’ 이런 식의 수치화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자기 자신만 아는 게 되는 거죠. 그건 어떤 이름이 자기에게 가장 와 닿는지, 그 용어에 대한 정의는 해당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다 보면 자기가 제일 잘 알게 되는 자기선택의 범주인 것 같아요.”

지난 6월에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대한민국 퀴어 페스티벌 2015(Korea Queer Festival 2015)’라는 행사가 열렸다. 성적지향과 성정체성과 관련된 소수자들이 공개적으로 모여 축제와 다양한 행사들을 개최하고 진행한 것이다. 퀴어(queer)는 그 소수자들을 의미하게 된 영어 단어이며 우리말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공개적인 활동이 가능해질 만큼 세상은 바뀌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서늘한 눈빛 또한 광범위한 규모로 존재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강한새 씨는 이런 세상의 현실 앞에 어떤 한마디를 남겨놓고 싶을까?

“사실 저는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 옆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다만 밝히지 않았을 뿐, 모르고 있을 뿐인 거예요. 만약에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고 있거나 그게 정체성 문제의 고민이었다는 걸 모르고 있을 수도 있는, 또한 여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분명 적지 않게 존재하고 계실 거예요. 저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가장 자기 자신답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힘든 시간은 곧 지나갈 것이라고 말예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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