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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문제를 당사자가 해결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죠"
박윤경 기자  |  gypsy7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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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5.09.09  09: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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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박마루 의원을 TV에서 처음 본 적이 있다. TV속 그의 외모와 유쾌함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구냐는 물음에 함께 TV를 보던 가족은 가수라고 알려줬다. 오랫동안 방송에서 봐와서인지 언제부턴가 그에겐 가수보다는 방송인이 더욱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요즘, 방송 뿐만 아니라 유투브 같은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서울시 광역의원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를 보게 된다.

지난 8월, ‘4집 가수, 방송인, 희망 강사, 장애인 문화운동가, 복지TV 부사장, 정치인’인 그를 만났다. 옅은 카키색 재킷부터 재킷에 꽂은 행치 커프까지 멋스러워 보인다고 하자 비싼 건 아니지만 신경 쓴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어떤 질문에든 막힘없이 이야길 이어나가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TV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대중들에게 가수로 먼저 알려지셨던 것 같은데 어려서부터 가수를 꿈꾸셨나요?

가수로 시작했는데 히트곡이 없어요.(웃음) 지금은 많은 분들이 저를 방송인으로 알고 있는 거 같아요. 엔터테인먼트, 또는 멀티테이너쯤으로 해두죠.

음악을 어려서부터 접했다면 좋았겠지만 어려웠던 가정형편 때문에 그러질 못했어요.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으로 순환근무를 하시면서 가정을 돌보지 못하셨어요. 어머니가 가정 경제를 도맡으셨기 때문에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어요.

20대 초반에 어머니가 뇌출혈로 돌아가시면서 서울에 왔는데 처음으로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어요. 밥벌이가 필요해서 다방의 DJ를 시작했죠. 목소리가 좋다고 옆에서 막 부추겼거든요. 근데 그 때 당시에는 아는 팝송이 없었어요. 외우는 것은 더더욱. 시골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Am라디오뿐이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어차피 해야 될 거다 생각하고 죽어라 외웠죠. 락, 재즈, 팝, 가요 할 것 없이.

DJ보조할 때였는데 영업이 끝나고 나면 LP판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음악에 빠져들곤 했어요. 딥 퍼플, 엘튼 존 등의 팝송이 유행할 때였는데 터치, 노래, 톤이 우리 정서와 맞는 부분이 있었던 거 같아요.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당시 저의 감성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던 거예요. ‘아! 이런 음악이 있었구나’ 하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나요. 친구들하고 나이트클럽을 가기도 했는데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가 내 심장을 관통하는 느낌이랄까?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전까지는 다른 세계로 존재하던 음악이란 것이 나를 사로잡은 느낌이었어요.

음악에 빠져들다 보니 듣는 것만이 아니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다방 DJ할 때부터 라이브무대에 서기 위해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떨어지기 일쑤였어요. 지금보다 편견이 많았던 시절에 라이브무대에 목발을 짚은 장애인이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죠. 덕분에 눈물섞인 밥을 많이 먹었어요.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시절이었는데 비오는 날은 무대에 오를 수 없는 날이었어요.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가 있는 지금도 장애인들의 이동은 쉽지 않잖아요. 하물며 그런 편의시설은 아예 없던 시절이니까요. 일부러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바로 앞에 서야 할 버스가 줄줄이 저를 지나쳐 가는 건 부지기수였어요. 기타를 메고 목발을 짚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건 전쟁을 치른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그래도 용기가 대단하다고 저를 써주셨던 고마운 분들이 계셔서 첫 봉급 15만원을 받고 라이브무대에 섰었네요. 저 스스로 노력해 받은 거라 신기하고 소중했어요.

열심히 연습하고 여기저기 무대에 섰지만 장애인으로서 가수로 활동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있었어요. TV 출연뿐만 아니라 무대에 서는 것, 행사 등 모든 것에 제약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저를 알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장애인들이 스포츠, 문화, 미술 등 어떤 영역에서 활동하던지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봐요. 상업적으로 들리겠지만 자기들이 갖고 있는 역량을 마케팅함으로써 또다른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방송을 오랫동안 하셨잖아요. 방송일은 본인과 잘 맞으셨어요?

사랑의 가족 리포터가 시작인데요, 목발을 짚고 방송한 건 제가 세계 최초 아닌가 싶네요.(웃음) 처음엔 당시 KBS 사랑의 가족 담당 피디가 저에게 문화소식을 전해주는 패널 MC로 와서 앉아 있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움직이는 걸 좋아하거든요. 장애인들이 갖고 있는 꿈들이 많고 어려움도 많으니 조금만 도움을 주시면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설득했죠. 협찬사를 끌고 와서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해서 장애인들의 꿈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사랑 하나, 행복 둘’이라는 코너가 생겼고 리포터로 합류하게 되었어요. 많은 리포터들이 저와 함께 했는데 개그맨 권영찬, 안영미 등과 했던게 기억에 남는군요. 저도 그 분들께 많이 배웠던 시절이에요.

저는 리포터를 하더라도 밝게 하자고 생각했어요. 튀어보자고 생각했죠. 처음엔 KBS 측에서 목발 짚고 리포터를 하면 거부감이 있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해보고 게시판 등에 부정적인 의견이 나오면 앉아서 붙박이 MC를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아서 이후 7년 동안 리포터를 했어요.

리포터를 하고 있었을 때 EBS에서 희망풍경 MC를 맡고 있었는데 사랑의 가족에서 강원래 씨와 메인 MC를 제안해 3년을 더했어요. 메인 MC가 되고 나니까 대우부터 모든 게 달라지더라고요. 스타로 MC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저처럼 아래서부터 MC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게다가 그런 자리가 한사람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은 복지 TV에서 당당히 내 이름을 걸고 토크 프로그램 ‘마루의 행복한 휴먼 플러스’를 진행중이예요. 베테랑은 아니지만 이제는 솔직히 작가들이 컨셉을 잡아주지 않아도 진행이 되더라구요. 경쟁을 통해 거듭나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기에 장애인에게 기회는 더 많아져야 하고 장애인들은 기회가 왔을 때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해요. 제가 처음에 방송할 때도 그랬는데 지금도 장애인 후배가 많이 없어요. 방송이란 곳이 기회를 주고 바로 효과와 효율을 따지는 곳이다 보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돼요.

그리고 방송은 냉정하죠. 철저히 보이는 걸로 평가하니까요. 제가 강원래라는 대스타하고 메인 MC를 한다고 했을 때 걱정들을 많이 했데요. 다행히 거의 안티가 없었어요. 항상 밝은 표정으로 떠들어주니까 사람들이 좋았나 봐요.(웃음)

 

원래 성격이 밝으신가요? 밝고 유쾌해 보이세요.

처음엔 힘들었지만 스스로 성격을 만들었어요. 어려서 개구쟁이긴 했지만 개구쟁이들이 막상 판을 깔아주면 쑥스러워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책 읽으라면 부끄러워서 책도 못 읽을 정도였고 교회 성가대도 쑥스러워서 못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제 성격을 바꿨어요.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장마로 비가 와서 다리가 넘쳤어요. 그래서 멀리 돌아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어머니가 남의 가게 앞에서 장사하시는 모습을 보게 됐죠. 여름이면 맛있게 과일을 먹고 겨울이면 생선을 먹을 줄만 알았지 그것이 어머니가 계절별로 바꿔가며 행상을 하신 덕분인 걸 몰랐던 거예요. 그걸 보고 철이 좀 들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원하는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제가 뭔가 결실을 맺어 보여드리기 전인 20대 초반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죠.

큰 힘이 되어 주시고 절대적인 사랑을 주신 분인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심한 방황을 했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머니 장례식 때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상주로 문상객들을 맞고 앉아있었는데 오시는 분들마다 측은해 하시면서 한마디씩 하시더라고요. 저를 가리키면서 “쟤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하면서요. 어떤 심한 분들은 “이 집은 거꾸로 됐어야 한다”고, 어머니가 사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야 저를 돌볼 수 있을 텐데 거꾸로 됐다고 말이죠.

제가 울면 그대로 온 사방이 울음바다가 될 거 같았어요. 끝내 울음을 삼키긴 했는데 그 대가인지 일 년 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어요. 자포자기 심정으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칩거에 들어갔어요.

제가 놓지 않았던 세상과의 통로는 종교였어요. 당시의 저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마스 이브 칸타타 연습 때였어요. 사람들이 예수탄생을 기뻐할 때 저에게는 갑자기 큰 슬픔이 쏟아지는 것 같더라고요. 교육관 한쪽에서 참았던 눈물을 쏟고 났더니 소위 말하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더군요. 어머니가 저를 키우셨던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러면서 일부러 성격을 만든 거죠.

 

장애인 당사자 의원으로 장애 문제를 접하면 어떠한 자세로 임하시나요?

국가나 지자체가 중증장애인들은 보호하고 일할 수 있는 장애인에게는 교육과 일자리의 기회를 제공해야죠. 사회에 나가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 말이에요. 물론 현장이 2,30년 전하고 많이 바뀐 건 사실이에요. 장애인차별금지법도 당사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고 장애인복지법도 때에 따라서 개정이 되고 있어요. 최근에는 장애인 등급제를 없애자는 논의도 있고 정부도 약속을 한 상태니까 그만큼 우리가 소리를 낼 수 있게 바뀌었다고 봐요.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장애의 문제를 사회와 공감할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봐요.

장애인으로서 장애인 정책을 볼 때 당사자의 입장이니 분명히 달라요. 저의 욕구와 경험이 장애현장의 소리도 되는 거죠. 장애계의 문제의식을 찾는 거부터 장애 정책을 고민하는 것까지요.

얼마 전 제가 제기한 서울시교육청 문제가 있었어요. 4년 동안 장애인고용부담금을 120억이나 내고 있더라고요. 올해도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아서 27억을 낸 거예요. 교육청 쪽에서는 장애인 일자리가 없다, 요청을 해도 장애인 지원이 없다는데 학교에 교사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행정직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다양할 텐데 부담금을 내는 편리한 쪽을 선택한 걸로 보이더라고요. 장애인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들도 많이 지적하고 있어요. 장애인 관련 예산이 적으면 왜 적은지 생각하게 되고 늘리려면 근거를 생각하는 등 적극적으로 찾게 되요.

 

서울시장애인인권센터(이하 인권센터)의 열악한 환경을 문제제기 하신 것이 화제가 되었었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인권센터가 있다는 얘기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통해 들었어요. 한번 보고 싶어서 현장에 계신 분들과 통화를 해보고 사무실에 가봤죠. 가봤더니 사무실이 좁고, 상담실은 더 좁은 거예요. 휠체어 장애인 한명만 들어와도 사무실이 꽉 찰 텐데 그런 곳에서 어떤 비밀 보장이 된 상담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죠.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못해 두 분이 업무과다와 스트레스로 유산을 한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장애인복지정책과에 얘기해서 예산 증액을 요청했어요. 과에서는 올렸는데 예산과에서 전부 삭감됐더라고요. 그래서 본 회의장에서 박원순 시장님께 바로 질의했어요. 챠트를 만들고 사진까지 찍어서요. 조사자 여성 두 분의 유산 진단서를 서울시공무원들과 106명의 시의원들이 다 볼 수 있게 띄웠죠. 시장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인권센터 변호사와 이메일 주고받는 사이인데 몰랐다고요. 그걸 계기로 인권센터가 조금 나아진 걸로 알아요.

저는 의원들에게도 하는 말이 있어요. 사회약자나 장애인에 대한 문제는 여·야가 필요 없다고요. 특히 광역의원들에게는 당도 필요 없어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때론 당이 없는 게 공감을 만들어내기 쉬울 수도 있다고 봐요.

 

정치적으로 대립할 때도 있지 않으신가요?

전 소신 발언을 해요. 실질적으로 일을 하다보면 정책적인 면에서 대립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광역의원은 주로 생활정치를 다뤄요. 정치적으로 대립할 게 1년에 한두 번 정도예요. 현장의 일을 해결하는 현장의 정치인 거죠. 정치적 이슈를 가지고 누구를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전 그런 게 싫어요. 단지 모르는 것은 알려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문제들이 상임위에서 해결되야 하는데 해결이 안 되면 본회의장까지 끌고 오는 거죠. 인권센터 문제도 상임위에서 해결이 안돼서 시장님께 질의한 거예요. 예결위 활동을 하고 있는데 예결위 위원들에게는 입법권과 예산, 결산 심의권이 있거든요. 그러니 집행부도 근거 있는 문제제기와 해결책에는 따를 수밖에 없는 거죠.

 

지난 4월 ‘발달장애인을 위한 조례제정과 평생교육센터 확대설치 요구 농성’할 때 함께 하신 걸로 압니다. 여러 창구를 통해 들어오는 민원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요?

민원인들은 간절해요. 그래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저도 장애인으로서 누군가가 저의 얘기를 잘 들어주었음 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 경험이 있으니 민원의 경중을 따지지 않아요. 제게 전화를 주시거나 문자로 남기시면 듣고 결과가 좋던 안 좋던 설명을 드려요. 그러면 민원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하시고 열심히 한다고 느껴주세요. 민원을 근거로 사안을 찾는 경우도 있고, 서울시 행정감사의 지적사항을 살펴보고 원인을 살피기도 해요. 거기에서 문제가 나오면 시정을 요구하는 거구요.

지난 4월 발달장애인 서울시 점거 농성 때 발달장애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었어요. 농성 장소가 서울시청 로비다 보니 집회를 할 수 없는 장소라고, 불법집회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방관자가 될 수는 없었어요. 이틀을 함께 밤을 새웠는데 서울시와 부모들의 갈등이 고조되다 보니 발달장애 아이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식사를 아무거나 못먹는 친구가 있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해 힘든 경우도 있고, 찬 바닥에 엎드려 잠을 자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등 보면 볼수록 안타까웠어요. 공무원들이 대화를 안 하려고 하니 더욱 힘들었고요. 그래서 서울시 의원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생각해 냈어요. 우창윤 서울시 의원과 협의를 해서 이후 사안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서명을 하고 서울시는 의원들이 협조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이후 서울시 과장, 팀장들과 T/F팀을 만들었고 자립지원과와 장애인복지과의 양 과장들이 같이 회의를 하고 있어요.

 

서울시 광역의원의 임기가 1주년이 되셨네요. 앞으로는 어디에 중점을 두실 계획이신가요?

7월 1일에 광역의원이 된지 1년이 되었어요. 사실 4년 동안 할 것을 계획을 짜 봤는데 장애인 쪽의 어려운 문제는 무조건 가지고 갈 생각이에요. 그 다음 사회복지 전체의 틀 내에서 장애인복지를 바라보려 해요. 장애복지 쪽에서는 일자리와 교육, 인권의 문제에 집중해야죠. 복지의 누수를 잡아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고요. 제대로 된 데에 예산이 쓰일 수 있도록 힘써야죠.

예산이 풍선이란 말이 있어요. 정말 필요한 곳에 쓰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 일인 것 같아요. 의원들의 기능이 입법, 예산, 심의, 조례, 정책 등을 할 수 있지만 감시와 견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의회란 존재가 없으면 민원인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이 없어요. 예를 들어 시청에 가보면 예약이 되어 있지 않으면 들어갈 수조차 없어요. 의회를 통하면 민원인들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어요.

의회의 역할에 큰 책임감을 느껴요. 장애 관련 쪽에 공인으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장애인에 관해서도 공부하고 노력하고 네트워크도 만들어 내면서 도전할 생각이에요. 장애인의 문제들을 당사자가 해결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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