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하는세상 > 사람 사는 이야기
삶의 조각은 당신이 선물한 퍼즐 맞추기였습니다.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0호] 승인 2016.08.02  15:20:0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장애인 배우자 수기 공모 대상 수상자 정용진 씨

이번 ‘사람 사는 이야기’ 만남의 장소는 충청북도 충주시의 한 아파트 내부였다. 거실 바닥에 마주앉아, 이번호 주인공인 정용진 씨와 지난했던 지난 인생의 얘기를 길고도 깊게 나눴다. 가톨릭 신자인 그의 곁에는 성모상이 소파 위에 모셔져 있었다. 당연히 성모상이라고 생각하며 3시간 넘는 긴 대화를 마쳤는데, 모든 취재를 마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그 성모상’은 재활용품으로 가져왔다던 ‘싸구려’ 소파 쿠션이었다.

이런 착각과 환상이 가능한 일일까? 물론 단순한 착시였겠지만, 쿠션임을 확인한 뒤에 다시 촬영한 모든 이미지들 속엔 단순한 헝겊 덩어리 모양만 기록돼 있었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에서 ‘2016 전국장애인배우자초청대회’ 수기공모를 거행했다. 장애인 배우자와 함께 사는 비장애 배우자의 인생을 글로 받는 공모전이었다.

대상을 수상한 이가 정용진 씨이기에, 그의 수상작을 취재 원고와 함께 전문(全文)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파란 글자색으로 편집한 게 대상 수상작의 내용이고, 본문의 소제목은 수상작의 소제목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대상 수상작의 제목은 ‘내

삶의 조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 취재 원고의 본문은 정용진 씨의 1인칭 관점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그의 모든 고백과 독백이 그 형식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영화 같은 삶을 꿈꾸다

식사하세요. 난 애교 없는 말투로 말을 합니다. 콩나물국에 잘 익은 김치 한 접시! 혹독한 겨울을 잘도 이겨내고 우리 식탁까지 몸소 마중 나온 향긋한 냉이 한 접시, 정성을 다해 암탉이 만들어 준 계란말이. 행복한 만찬 앞에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불현듯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남들에겐 평범한 일상의 식사 자리지만, 우리에겐 멀고 험한 산을 넘은 뒤에야 맞은 감격의 자리입니다. 이런 기적 앞에 오늘 하루도 감사하며 숙연할 따름입니다.

어린 시절의 풍경을 떠올린다. ‘엄마’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가난한 농촌마을이 내 삶의 배경이 된다. 다섯 남매의 셋째인 나는 다섯 남매 이전에 태어나 먼저 이승을 떠났다던 두 핏줄이 있었음을 잊지 못한다. 어렸던 내가 그것까지 기억할 리는 없다.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다 떠나기 전 남기신 부모님의 말씀 때문에, 그 사실을 마음 아닌 심장에 품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한 지점으로 몰려든다. 당장 우리 집도 좁고 먹을 게 없는데, 오갈 데 없는 사람들한테 한 끼 식사를 매번 대접하던 엄마의 모습이다. ‘거지’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집에 찾아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그들에게 잠을 잘 공간까지 제공하자, 그들은 자기 가족들까지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어렸던 나는 불만이 커져갔다. ‘내가 당장 먹을 것’도 저들에게 양보 아닌 양보를 해야 할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철없는 유년의 시절에는 결혼만 하고 나면, 마법의 성에서 영화처럼 아름답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는 47세의 시어머니, 대학생 시동생, 연년생 시누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철없는 환상 속에 마법의 성 놀이는 깨끗하게 끝나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남편을 의지하며 어렵게 시집살이에 입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티격태격 엎치락뒤치락하며, 사랑의 밑그림을 그려가려 할 즈음 먹물이 송두리째 쏟아져 버렸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본다. 왜 그토록 영화 속 마법의 성 같은 인생을 간절하게 꿈꿨는지 말이다. 당시에는 현실에 대한 반발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정말로 멋진 결혼을 해서, 정말로 남부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 인생 자체가 그런 생각에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이제야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 것 같다.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게 멋진 결혼생활이라고, 제발 엄마도 남들한테 ‘퍼주는’ 인생 그만 살고, 엄마 스스로 행복한 생활을 하는 걸 챙기며 살아달라고 말이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유난히도 추웠던 그날이 떠오릅니다. 1994년 12월 31일, 여느 때처럼 남편은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파르르 떨던 전화벨……. 믿기지 않는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구급차에 실려 온 남편이 알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남편에게선 역한 휘발유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남편의 차는 출근길에 빙판에서 낭떠러지로 추락하며 전복됐다고 했습니다. 위중한 남편은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되었습니다. 아홉 살과 열 살 어린 두 자녀를 시어머니께 맡겨 놓은 채, 기약 없는 병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중환자실의 하루하루는 삶과 이승의 경계에서 오락가락 피를 말리는 고통과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걱정할까 봐, 처음에는 말도 못 꺼냈던 당시 기억이 난다. 뒤늦게 전후 사실을 알게 된 아빠가 혼잣말로 한마디 하셨다. “새끼 둘을 보냈는데, 이젠 사위까지 보내야 하나….”

남편은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 힘들게 정신을 차려 다시 가족에게 돌아왔습니다. 수많은 고비 끝에 중환자실을 나오는 날, 우리 가족은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편이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수없이 부정해 보았지만, 분명한 것은 꿈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길고 긴 병원생활, 일 년이 다 돼서야 입원실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전신마비 장애1급이란 계급장만 단 채 손끝 하나, 발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살아있지만 목 밑으로는 감각이 없었습니다. 치료라도 마음껏 받아 보고 싶었지만, 본인이 운전을 하다 사고가 난 것이라 의료보험 처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비는 감당할 수 없는거액이 나왔습니다.

어느 날부터 아들한테 이상한 버릇이 생겨났다. 사진앨범 속의 엄마사진을 꺼내, 가슴의 품속에 안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 종일 땀에 젖은 사진들은 당연히 쭈글쭈글 일그러졌고, 왜 이런 엉뚱한 짓을 하느냐는 엄마의 다그침에 아들은 눈물로 하소연을 했다. “밖에 나가면 엄마의 냄새가 안 나. 나는 엄마의 냄새가 소중하다고. 그래서 엄마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 어린 아이가 왜 이런 난데없는 생각을 떠올렸을까? 병실의 아빠 곁에 머물러야 했던 엄마가 그리워서였을까? 원망의 표현이었을까? 그때까지는 그 이상의 의미를 상상조차 해볼 방법이 없었다. 당장 중요한 건 아빠였기 때문이다.

 

불행과 고통의 연속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했던가요. 우리가족의 보금자리가 원인 모를 화재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다 타버린 현장을 돌아보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네 식구 평온하게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밖으로 나왔지만 살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병든 남편과 어린 두 자녀, 그리고 병원비 낼 돈도 없는 빈 통장뿐이었습니다. 운명의 장난은 여기서도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내 건강신호에 이상이 왔습니다. 어느 날부터 몸에 기운이 없고 내내 피곤했습니다. 그런 지도 한참 지나 병원에 들르니, 유선 암에서 임파선 암으로 전이된 상황이었습니다. 주치의는 기도, 식도, 성대에도 이미 전이된 수치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 난데없이 엄마 사진을 옷 속에 품고 다니던 이유가 뭔지, 전혀 예상에도 없던 답이 졸지에 나와 버린 셈이다. 당시 나의 엄마, 그러니까 친정엄마는 나물을 열심히 캐며 다니셨다. 그리고 나물을 캐다가, 어둡고 추운 논두렁 옆에서 돌아가셨다. 직접 캐낸 냉이를 가득 담은 검은 비닐봉지를 손가락에 끼워 꽉 움켜쥐신 채로 말이다. 그날 오후 내내 엄마가 채취하셨던 그 모든 산나물들…, 알고 보니 항암치료에 최고라던 야생식물들만 골라 담으신 게 전부였다.

검사를 마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남편의 수발과 아이들 육아를 책임지는 상황이기에,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하고 있었습니다. 돈은 되지 않고 힘들기만 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가족의 형편은 더 어려워지기만 했습니다. 39살의 나는 고독하게 죽어가면서 소리쳐 울 수도 없었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 반항 한번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따위는 사치였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조금 먼 곳의 병원을 다녀야 한다던 내 둘러댐이 티가 났는지, 남편은 시누이한테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닌 게 분명한데, 왜 그 먼 곳까지 매주 몇 차례씩 다녀오는지가 의심이 됐던 것 같다. 그건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해야 할 일이다. 항암치료를 위해 청주의 한 종합병원 진료실로향하고 있는데, 눈앞에 시누이가 서 있었다. 우린 그 자리에서 함께 울었다. 아주 오랫동안.

 

조금씩 살아난 감각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발가락 한 마디를 움직였고, 손가락도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부추기면 몸의 균형도 조금씩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제일 반가웠던 것은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두 달 정도면 끝날 교통사고 후유증이거나, 단순한 과로에 따른 투병생활이 아니었지 않은가. 내 생이 끝나가고 있는데, 남편의 생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거, 이건 나 자신을 다시 추스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내 아이들이 있고 내 남자가 있는데, 내가 왜 새까만 벽면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어느 날 새벽, 잘잘 거리는 소리에 놀라서 깨보니, 남편이 옆으로 누운 채 방바닥에 흥건하게 소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껴안고 통곡했습니다. 그동안 용변을 보지 못해 기구와 약물로 내가 처리를 해 왔는데, 소변을 배출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남편은 사고 후 18년이 흐른 뒤부터 배뇨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정상 배뇨는 아니었지만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그 밖의 몸의 기능도 외출이 가능할 정도로 나아졌습니다.

담당의사는 신체기능이 모두 마비됐기에, 다시 재생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더욱이 기가 막히게 들었던 건, 신체기능 모두가 마비됐기 때문에 그 기능들을 하나씩 하나씩…, 쉽게 말해서 영원한 ‘상황 종료’를 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기사용을 위해 늘 바닥에 뒀던 멀티콘센트의 플러그를 하나씩 빼내야 한다는 식의 얘기였다. 가족대표였던 내 의견에 따라 하나씩의 기능을 끄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은 그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갑자기 절대 안 된다며 절규를 하기 시작했다. 배뇨기능과 생식기능이 같이 있던 ‘그 부분’은 절대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건데, 그 부분의 일부기능을 절단해야 다른 기능을 살릴 수 있다는 의사와 절대 안 된다는 남편…. 그 싸움은 결국 예정된 수술 30분 전에야 남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기능에 손을 대지 않기로 말이다. 그런데 그 기능이 18년이나 지난 후에 배뇨기능으로 되살아날 줄을…, 글쎄, 당시에 그토록 반대하던 현대의학은 이런 결과를 예상이나 하고 있었을까?

너무 속상했던 일이라서 가려두고자 했지만, 이런 기회가 됐으니 언급을 해야겠다. 남편이 막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이던 무렵, 어느 날 병원을 가니까 어마어마한 인원의 의사들이 병원 안에 가득 몰려 있었다. 뭔가 하며 둘러보니까, 그들의 탐구대상이 바로 나의 남편이었다. 그만큼 심각했던 불가능이 현실이 된 경우를, 새로운 학습 자료인 양 확인하러 전국에서 모였다는 것이다. 내 남편을 실험실 동물실험의 자료처럼 관찰하러 와서 희희낙락하던 그 의사들…, 그 또한 내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얼굴들이다.

열악한 가정환경에서도 두 자녀는 바르고 곱게 자랐습니다. 아들은 대기업에 수석으로 입사했고, 딸은 간호사란 직분으로 성실하고 어여쁘게 근있습니다. 그동안 따스하고 감동어린 사랑으로 내 몸의 암이란 녀석들은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이후로 돌아가신 엄마가 꿈에 계속 나오시는 게 아닌가. 음식이든 청소든 뭐든 간에, 뭔가를 계속 만들고 해결해놓은 뒤돌아서 가시는 거다. 나는 내 형제들과 만나는 날마다 아주 크게 소리를 쳤다. “아이, 짜증이 나. 우리 엄마는 천국에 가서도 뭔가를 계속 만들어. 천국은 쉬라고 간 곳이잖아. 이젠 좀 그만 쉬라고!”

불행과 고통이 겹쳐서 오듯이, 행복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수없이 많은 바람이 우리 정을 흔들었지만, 우리는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사랑하며 버텨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함께 노력하면, 고된 삶 속에서도 행복을 나누며 기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절망의 늪에서 통곡소리도 내지도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이여! 용기를 잃지 마시기를 응원하며 마지막 그 하루까지 최선을 다해 봅시다. 

“아이들의 육아일기부터 시작해서, 저는 참 많은 기록들을 남기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게 화재로 다 사라졌고, 제 삶을 정리해야할 시점이 됐을 때부터 제게 익숙했던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거든요. 남겨질 가족에게 불필요한 짐이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참 많은 걸 없애고 치웠는데…, 그 텅 빈 자리에 이젠 남편이 돌아오고 행복이 찾아들기 시작하네요. 산산이 부서진 조각인 줄 알았는데, 이젠 하나의 퍼즐처럼 완성이 돼 가는 것 같아요. 진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가족의 행복 하나로 말이에요.”

채지민 객원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를 추천하시면 "오늘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6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왜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는가
2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후 독일연방 학교교육의 Inclusion
3
온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4
직접 만나야 정확히 전달된다는 것
5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장애인이 홀로 살고 있었다
6
장애와 비장애 모두 자기 내부의 벽을 깨야 한다
7
새로운 장애인복지서비스 지원 체계, 이대로 좋은가
8
시청각장애인 관련 도서 '농맹인과 함께 하기' 출간
9
간호사들의 노동권 인정, 올바른 의료의 출발점입니다
10
아트아토팀, 흰 지팡이의 날 맞아 흰 지팡이 음악회 및 전시회 개최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rss home back top
함께걸음 제호: 디지털 함께걸음  |  우)07236 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서울아00388 | 등록연월일 2007년6월26일 | 발행인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성재 | 편집인 겸 편집국장 김성재 | 청소년보호책임자 이태곤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정보공유라이선스 2.0:영리금지ㆍ개작금지'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