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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얽매지 않는 감동, 우리는 인간의 진심으로 표현한다.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
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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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6.09.01  1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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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미디어 정기모임에 함께한 모든 참석자들이 영화 '조선농역사'를 진지하게 관람하고 있다

“대화 및 정보 전달은 수화와 활자를 통하면 됩니다. 그렇기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시각입니다. 생활의 모든 소통이 시각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죠.” ‘본다’는 건 스스로를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영상으로 구현해낸다는 그룹이 있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가 그 주인공이다. 아주 유의미한 활동을 전개하는 그들의 소개가 이 지면에 너무 늦어졌다고 믿어질 만큼, 데프미디어의 활동은 뚜렷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창립 이후 지금까지 대표 역할을 맡고 있는 박재현 감독과 대화를 나눴고, 함께 활동하는 기명진 씨가 소중한 수화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본문의 정리는 그들의 표현 방식 그대로 ‘농인’과 ‘청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기술한다.

 

   
 

소리가 없는, 그래도 모든 감동이 전달되는

새로운 소통의 문화로 자리 잡은 스터디 카페, 그들의 모임이 진행된다 했던 서울 종로의 한 공간으로 찾아갔다. 예약된 세미나실 내부엔 이미 참석자들로 가득했고, 모두의 시선이 전방 스크린에 고정된 상태로 데프미디어의 2014년 작품 ‘조선농역사’가 상영되고 있었다. 완성도 높은 작품의 내용은 모두 자막으로 처리되며 화면 위에 새겨졌다. 제3자인 어느 누가 관람하더라도 조선시대 농인의 삶이 이만큼 더불어 사는 형태였다는 점을, 또한 각자 전문화된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살았다는 사실을 전달받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묵직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소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들어야 할 일이다. ‘영화’라고 하면 웅장한 음악, 자극적인 효과음, 주인공과 출연진들의 생생한 발성, 거리의 격렬한 자동차 소리와 하늘의 비행기 소리, 바닷가의 거친 파도 소리 등을 떠올리게 되는데, 데프미디어의 모든 작품 제작 과정엔 음향을 전담하는 스태프가 없다. 농인독립영상제작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음으로 전해지는 감동 안에는, 그 어떤 영화보다 풍부한 소리울림이 담겨 있었다. 문득 그것이 노하우라는, 수많은 초기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해낸 농인독립영상제작단의 힘과 능력이 바로 그것이리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게 됐다. 영화에 몰입하는 이유는 ‘영상’과 ‘사운드’라는 두 핵심요소의 유기적 결합 때문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데 소리가 없이도 모든 걸 전달할 수 있다는 것, 데프미디어의 존재이유는 그 지점에 최고의 방점이 찍혀져야 할 것 같다.

 

   
진지한 토론을 나누는 참석자들

말은 대화의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1910년 6월 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게 확인됐다. 독자 투고란에 올라온 한 장의 편지가 우리가 모르던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만든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험한 세상에 / 수화로 이야기하며 좋은 소식을 기다리니 / 그건 바로 귀먹장이회! // (중략) 높은 파도 일렁이는 바다에 배를 타고 / 열심히 노를 저어가며 간절히 소망하는 것 // 그것은 바로 귀먹장이회! // (중략) 참된 자유를 얻지 못해 더 큰 세상을 꿈꾸지 못하는구나! / 하늘만 바라보며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있으니 / 그것이 바로 귀먹장이회!’

청각장애인을 지칭하는 당시의 표현이 ‘귀먹장이’라는 사실도 새롭지만, 편지글이 지향하는 내용이 지금의 장애인단체와 같은 조직을 결성하자는 공식적인 제안이라는 게 획기적이다. 1910년 당시에도 청각장애인들의 권익과 연대를 위한 조직이 필요했다는 의미 아닌가.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가 집중하는 건, 농인의 역사를 정확히 파헤치고 영상으로 완성해내는 일이다. 오래 전 과거의 농인들 삶이 어떠했고 현재의 삶과 무엇이 다른지를 찾아내는 것, 그것만이 농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데 가장 큰 밑거름과 자양분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올해 가장 집중적으로 기획하고 있는 영화는 ‘한국농역사’입니다. 청인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던 역사를 일반상식처럼 다 알고 있는데, 수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를 농인들은 거의 대부분 모르잖아요. 농인학교는 누가 언제 세웠는지, 어떤 단체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밝히는 농인의 근대사가 없었기 때문에, 저희는 올해 ‘한국농역사’ 제작에 모든 걸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가 없었다면, 지금 농인들의 삶도 훨씬 힘겨웠을 테죠. 농인의 역사가 없다면 농인의 정체성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번 작품을 만들고 완성해서 세상 앞에 곧 공개할 예정입니다.”

   
▲ 데프미디어 대표를 맡고 있는 박재현 감독

2005년 4월에 탄생한 데프미디어의 산증인인 박재현 감독은 ‘농인의 힘이 약한 이유가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에 강조점을 찍는다. 그렇기에 농인사(史)를 발전시키고 농인의 실질적 삶에 힘을 키워야 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전달수단이 영화이기에 데프미디어가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런 활동은 사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장애유형별로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데프미디어의 활동은 농인 중심을 넘어서서 한국 장애인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새기는 과업이라 불려야 할 일이다.

박 감독은 수화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수화어(語)에 대한 문화를 모르는 청인들의 사고가 일반화된 데는 농인들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대처하지 못한 탓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농인들의 정체성 확립에 노력하는 만큼, 청인들의 사고방식에도 커다란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청인들은 농인을 만나면 ‘말을 못해요?’라고 묻는 걸로 끝나죠. 그건 엄청난 실례를 범하는 일입니다. 왜 말을 못합니까? 수화가 있고, 필담으로도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잖아요. 만약에 농인이 청인한테 ‘수화도 못해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농인들이 말을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문맹이라도 되는 듯 취급하는 청인들이 많은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 보는 걸로도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글씨로 전하는 필담이라는 거죠. 왜 대화의 수단이 청인들의 언어뿐이라고 단정을 짓는 걸까요? 청인들의 편견이 농인들의 자립과 정체성 확립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만들면 힘이 됩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듯이

   
데프미디어의 작품 홍보포스터

유럽의 복지선진국 같은 나라들에는 농인 영화감독들이 적지 않다. 나름의 지명도를 가지고 있고, 대중적인 호평을 얻으며 활동하는 이들이 여럿 눈에 띈다. 문제는 그런 문화 자체가 전무한 이 땅의 현실에 있다. 농인 스스로 활동하는 독립영상제작단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 농인 자신이 중심이 되는, 장애인당사자운동을 하는 것처럼 농인당사자가 주인이 되는 삶을 표현하고 싶다는 것, 데프미디어는 그 욕구들이 한데 모이고 모이며 11년 전 봄에 탄생했다.

“어떤 단체나 조직의 외형을 갖추지 않는 형태로,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초기에는 모든 게 시행착오의 연속이면서도, 모든 걸 당사자 중심으로 운영하며 도전을 거듭했죠. 스스로 익히고 만들면서, 서로가 출연진이 되기도 하고 스태프의 역할까지 자임하면서, 데프미디어의 틀은 하나씩 단단하게 갖춰졌습니다. 그러면서 작품 수가 점점 늘어났고, 내용의 질도 확실하게 높여갈 수 있었죠.”

데프미디어의 작품들은 단순히 농인들의 어려운 현실을 내보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장애 관련 영상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를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가운데, 극소수의 전문가들 이외엔 아무도 몰랐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밝혀내고 실증해내는 데 전념한다. 데프미디어가 찾아낸 역사 속 농인들은 모두 음성(발음)에 약했던 대신, 미술 같은 회화와 손재주에 특히 강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이나 편견 없이, 정상과 비정상이란 흑백논리를 벗어나 조화롭게 생활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복지제도나 편의시설이 전무하던 조선시대에, 어떻게 농인들은 다양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답은 바로 ‘사람 중심’이다. 사람 자체를 바라봤고, 장애는 한 개인의 신체적 불편함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보편화된 모두의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유럽 복지선진국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이 우리 조선시대에 그대로 구현되고 있었다는 건데, 이런 능력 중심의 조화로운 사회가 언제부터 어떻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던 걸까?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인종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을 없애야 한다했던 나치 독일의 등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과 집시, 동성애자와 장애인들을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여기고 철저하게 박해했던 당시 나치 독일의 통치철학, 그건 한반도를 강점하던 일본에게 그대로 전수됐다. 이후 해방을 거치며 사람 중심의 조화로 조금씩 회귀되던 공동체 의식은 1980년대 출현한 신군부 독재정권이 ‘거리청소’, ‘거리정화’를 빌미로 ‘시설’이라는 장애인 격리감금기관을 대량 양산함으로써 최악의 이분법을 낳게 만들었다. 나치 독일의 만행이 ‘종교의 간판’을 내걸며, ‘수구언론의 여론몰이’를 거치며 그대로 대한민국 이 땅에 재현됐던 것이다.

“그동안 한국장애인재단의 예산지원을 통해, 힘들지만 우리의 과제를 하나씩 실현해왔습니다. 데프미디어 같은 자생적인 창작집단이 더 많이 탄생하고 활성화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실제 현장에서 움직이는 단체들이 다양하게 많아지는 게 가장 중요하잖아요. 하지만 메이저급 장애인단체들은 이미 권력화가 되어 있고, 젊고 패기가 넘치는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은 여전히 열악하기만 합니다. 하나하나의 밀알 같은 창작집단들이 주도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된다는 것, 그건 모두가 조화로운 삶을 살던 역사 속의 농인들 삶이 현재에도 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겁니다.”

데프미디어가 나아갈 미래는 멀고도 험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모든 게 푸르고 희망 가득한 기대로 채워져 있다. 문제는 현실이다. 박 감독과 마주보며 손의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서 표현했을 만큼, 절실한 문제들의 모든 결론은 부족한 자금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인터넷 클라우드펀딩을 비롯한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며, 박재현 감독과의 대화 자리에 같이 했던 모든 이들이 다양한 의견을 함께 펼쳐놓았다.

모든 작품들의 홍보 포스터도 디자인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농인 당사자들의 손길로 제작한다는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 이들의 치열한 활동과 멋진 결과를 <함께걸음>도 응원하고자 한다. 말 그대로 ‘함께 걸으면’ 서로의 어깨동무가 가능해지는 일 아닌가. 데프미디어의 작품 ‘농인의 이름으로 깨어나다!’ 발표 당시에 보도자료 형식으로 기록해놓았던 ‘제작의도’의 문장 내용에, 데프미디어가 품고 있던 내면의 마음 모든 게 담겨 있는 것 같아, 마무리 차원에서 그 문장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농역사를 이야기하며 수화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수화로 소통할 수 없는 땅에서 우리는 약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꿈을 꾸나 이룰 수 없는 현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누군가 내미는 손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약자의 위치다. 현명한 농인들이 사라져가고 사회의 편견과 차별은 꼬리를 물고 악순환이 된다. 농인은 고집 세다는 말이 당연시되는 이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 농인으로 태어난 것은 죽는 순간까지 시각을 의존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국수어법은 우리 모두가 붙잡아야 하는 공동체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농인들이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우리의 숙제는 다음 세대로 전해지게 될 뿐, 끝없는 차별은 계속될 것이다. 농인의 법은 농인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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