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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을 선택하세요. 그러면 우리가 지원할 것입니다서울장애인 자립생활센터 소장 박찬오
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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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6.11.03  15: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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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상에서 가끔씩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게 분명한 얼굴과 마주칠 때가 있다. 격랑의 풍파 속에서 결국 주저앉고 쓰러지는 이들이 훨씬 많겠지만, 끝내 이겨내고 삶을 자신의 것으로 쟁취해낸 이들을 가려내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눈빛에 답이 있다. 생존자의 눈빛, 이겨낸

자의 눈동자엔 인생의 깊이가 그만큼 더 짙게 담겨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라고 이번 호 주인공을 소개하고 싶다.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박찬오 소장이다. 대한민국 장애인권운동의 역사에 이름 세 글자를 뚜렷이 새겨놓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긴 대화를 나눴다. 편하고도 진지한 마음으로 말이다. 그 내용을 옮긴다.

 

같은 뿌리, 따로 또 같이

대화에 앞서 가장 궁금했던 점 한 가지를 먼저 물었다.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명칭 앞에는 항상 ‘사회복지법인 한국소아마비협회’가 표기돼 있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인데 소아마비만 한정한다는 건지, 소아마비는 그 발생이 이미 과거형으로 정리가 된 장애인데 왜 그 명칭이 지속되고 있는 건지, 풀지 못하고 늘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었기에 그 매듭부터 풀어 봐야 했다.

그의 설명은 자세하게 이어졌지만, 짧게 요약한다면 이렇다. 사회복지법인인 한국소아마비협회 산하에 정립회관, 정립전자, 정립보호작업장, 요양원인 워커힐 실버타운 그리고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서울센터), 이렇게 다섯 개의 기관이 있다고 한다. 정립회관은 누구나 아는 대표적인 기관인데, 오래 전 창립 당시엔 한국소아마비특수아동보육협회라는 명칭으로 시작했고 ’75년에 한국소아마비협회로 법인명을 바꿨단다.

6, 70년대엔 장애의 대명사가 소아마비였을 만큼 다수를 차지했기에, 소아마비 중심으로 정립회관이 운영되면서 점차 지체장애, 신체장애로 범위를 확대했다고 한다. 정립전자에 근무하던 장애당사자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 출발했던 게 노들장애인야학이고, 2000년대 초반에 본격적인 자립생활운동의 확대와 활성화를 위해 출범한 게 서울센터라고 한다.

장애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노들야학과, 자립생활운동의 밑돌을 괸 서울센터의 뿌리가 한국소아마비협회에서유래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그 과정에 수많은 고민과 갈등과 연결이 반복됐겠지만, 현재의 장애인권운동의 발자취가 서로에게 모두 연계된다는 점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일 대목인 것 같다. ‘정(正)반(反)합(合)’의 변증법처럼 맺고 끊어지고 다시 연결되는 지난한 과정 끝에 2016년 현재의 질서가 만들어진 거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고 중심에 자리 잡는 단체라는 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답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자립생활센터의 기본 원칙은 전 장애영역을 포괄할 것, 지역사회에 기반을 둘 것, 항상 열려 있는 서비스를 제공할 것, 집단거주시설을 운영하지 않을 것, 당사자 주도로 진행할 것, 이런 몇 가지 원칙들이 있잖아요. 그 중 하나가 크로스 디서빌리티(Cross Disability), 그러니까 전체 장애영역을 포괄하는 지역사회 중심의 자립생활센터가 돼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지역에서 지역 장애인들 중심으로 뭉쳐서 지역을 변화시키고, 그 힘으로 더 큰 단위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지, 특정 장애인단체 연합처럼 이익집단의 활동을 하는 건 아니죠. 한국소아마비협회라는 운영법인명이 계속 기록돼 있어서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저희는 전 장애영역을 총괄하는 업무와 임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박찬오 소장은 의견을 시원스럽게 발언한다. 그리고 이해가 빠르게 전달한다. 그건 매우 긍정적인 능력임이 분명하다. 어려운 전문용어를 나열하며 자신이 아는 ‘100’을 언급해도, 듣는 입장에선 정작 이해되는 게 ‘30’도 안 되는 발언을 일삼는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울센터가 중점으로 추진하고 있는 건 발달장애인의 자립이란다. 거기에 정신장애인 영역도 최대한도의 관심과 집중을 병행하려 노력하는 중이란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지원하는 총 3년 사업인 발달장애인자립생활모형개발사업을 저희 서울센터가 2년차로 진행하고 있어요. 지적능력이든 신체능력이든, ‘결손’에 초점을 맞추는 게 이 사회가 말하는 장애잖아요. 하지만 천부인권설과 같이, 어느 누구든 권리를 더 받고 덜 받는 인권의 가중치라는 건 존재할 수 없어요. 부족한 부분을 보완시키면서 어떻게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만드는가의 여부가 자립생활운동의 관건인데, 이 부족한 부분이 충족되는 사회의 환경만 만들어지면 현재의 의미로 말하는 ‘장애인’은 없는 겁니다.”

박찬오 소장은 자신처럼 하반신을 쓸 수 없으면, 휠체어와 엘리베이터, 경사로와 같은 사회 기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졌을 때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닌’ 게 된다고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발달장애인의 영역에서는 활동지원인제도와 일정 부분 다른 지원이 집중된다면, 발달장애당사자들도 완전한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 답은 박 소장이 연재하기로 예정된 <함께걸음>의 기고문 안에 포함될 것 같다. 발달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위한 최선의 답을 찾으려 노력했고, 이젠 그 대안을 가시적으로 풀어낼 시기가 됐다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에 얻은 장애

“저는 장애가 하나 더 생겨서, 2004년부터 신장 때문에 혈액투석을 해요. 그래서 지체·신장 1급, 이렇게 됐어요. 원래 지체 1급이었는데, 신장이 하나 더 추가가 된 거죠. 일주일에 세 번씩, 한 번에 네 시간 동안 해야 하니까 투석하는 과정이 늘 힘들긴 하죠. 덕분에 외국 세미나 참석도 거의 다른 활동가들에게 양보하게 된 것 같아요.”

박찬오 소장은 ‘이분척수증’이라고 자신의 장애 원인을 설명했다. 이분척수증? 그때까지만 해도 소아마비라는 용어가 대화의 자리에 계속 언급되던 와중이라서, 그 증상인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처음 듣는 원인이 등장했다. 박 소장의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우리나라에선 뭐라고 표현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단다. 그런데 일본에 갔더니 그런 명칭을 써서 자신도 그렇게 말을 하게 됐는데, 전신으로 연결돼야 하는 척수가 중간에서 끊긴 상태로 태어나는 걸 의미한다고 한다. 자신도 지금까지 이 땅에서 대여섯 명 정도만 같은 증상의 당사자들을 만나봤단다.

“이분(二分), 둘로 나눠졌고 끊겼다는 거죠. 그러니까 태아 때부터 척수장애를 갖고 태어난 거예요. 선천성 척수신경기형, 이렇게 말해야겠죠. 이건 원인이니까 현재의 장애등급의 표현으로는 하반신 마비에 의한 지체장애가 되죠. 하지기능장애, 이런 식으로 때마다 용어가 바뀌었던 것 같네요.”

그가 태어났을 때, 등에 ‘꼽추처럼’ 조그만 혹이 있었단다. 예전에는 집에서 애를 낳았으니까 가족 모두 걱정만 하다가, 사흘 후에 병원에 안고 갔더니 의사가 그 아기의 다리를 바늘로 콕콕, 톡톡 찌르더란다. 그렇게 계속 찌르는데도 아기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척수신경이 마비가 됐고, 그 신경이 아래로 가야 할 게 밖으로 나와서 혹이 된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게 정확한 진단이냐고 물으니까 거기까지만 맞는 것 같다며, 그는 밝힌 적 없다는 과거사를 언급했다.

“그런데 저의 아버지가 이 아이의 척수신경을 잇겠다고, 국립의료원에 수술을 요구하신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제가 돌 무렵일 때 ‘척수신경 재생수술’이라는 그런 거창한 수술이 벌어졌대요. 그걸 하겠다고 한 의사들이 도대체 누구였는지…. 좌우지간 그 수술에 들어갔다는데, 결과는 지방덩어리일 뿐인 등의 혹을 떼어낸 것밖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죠.”

의료보험 같은 제도 자체가 없던 시절,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은 당시 돈으로 5백만 원에서 6백만 원의 비용을 치르게 만들었단다. 당시 집 두 채의 가격이라고 한다. 그 충격이 이어지면서 사업이 망하게 되고 너무 힘든 상황이 되니까, 아버지께서는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독일에 광부로 떠나시게 됐단다. 박 소장은 그 영화를 직접 보진 못했다고 한다. 대신 광부로 떠나려던 인물들이 쌀가마니 들고 심사 받던 장면을 예고편으로 봤을 때 남몰래 많이 울었다고 한다. 바로 ‘나의 아빠’가 그랬기 때문인 것이다.

 

눈에 띈 하나의 문장

   
 

박찬오 소장은 서울센터를 책임지게 된 이후로, 센터를 소개하기 위한 몇 차례의 언론 인터뷰에 응하곤 했단다. 그런데 더 이상은 언론과 만나는게 불편해졌다고 한다. 피상적인 얘기만 왜곡된 내용으로 정리하는 ‘비장애 언론관’을 확인한 이후부터는, 인터뷰 자체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그가 뒤적거리며 관련 자료들을 찾아낸 걸 보니, 2007년의 짧은 인터뷰가 마지막이었다. 10년 가까이 언론과의 대면을 사양했다는 의미가 된다.

4살인가, 5살 때인가? 독일로 떠나셨던 아버지가 몇 년이 지난 후 귀국하셨고,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드셔서 배달용 차량 한 대를 구입한 뒤 용달기사의 일을 하셨단다. 상대편이 음주운전으로 반대차선에 넘어오면서, 정면충돌로 인한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그의 나이 16살 때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청소년의 사춘기가 아닌 진정한 인생의 사춘기가 시작됐다며, 그는 긴 한숨과 함께 눈시울을 매만졌다.

그를 거부하던 교육 시스템의 대안을 찾았지만, 몇몇 재활학교마저 다닐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너무 비싸서, 너무 멀어서, 혼자 기숙한다는 건 불가능해서 1년만 늦게, 2년 터울의 동생과 함께 다니기 위해 1년 더 늦게 미루고 또 미루다가, 결국 그는 ‘나만의 책가방’을 갖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열여덟 살까지 학교를 안 다니고 집 안에만 있었는데, 16살 당시 아버지의 떠나심은 그에게 엄청난 혼란을 안겨줬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엄마까지 죽으면 난 어떻게 살까’, ‘아,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이런 생각부터 시작된 갈등은 ‘아,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라는 결론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선, 무엇이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절실해지게 됐단다. 집 내부가 아닌, 창 밖의 세상을 비로소 떠올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때 집으로 배달된 반회보라는 게 눈에 보였어요. 반상회를 할 때 나눠주는 공문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런데 그 안에 적혀 있던 ‘장애인 직업훈련과정 모집’이라는 문장이 눈에 확 띄는 거예요.”

박찬오 소장과 긴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 내용을 A4지 24장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녹취로 풀어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그 반회보 하나가 인간 박찬오의 삶 전체를 완전히 뒤집어놓았다는 점이다. 무시하고 넘어가도 될 관공서의 문서 같은 것이다. 안 봐도 된다. 그냥 버려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그걸 손에 잡았고, 펼쳤고, 읽었다. ‘장애인 직업훈련과정 모집’이라는 문구도, 그가 간절하지 않았던 상황이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을 배우겠다는 다짐과 각오가 그 문장에서 시작된 것이다. 장애인복지관이라는 곳을 알게 됐고, 원치 않은 분야였지만 일을 배우게 됐고, 복지관의 횡포가 무엇인지도 알게 됐고, 장애의 유형과 특성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 사회의 부조리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깨닫게 됐고, 진짜 실력을 갖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새로운 도전을 떠올리게 된 것도 모두 반회보의 그 한 문장에서 비롯된 셈이다.

지나친 비약일까? 아니다. 인생에선 간절해야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절실해야만 떠오르는 대안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계기는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부분에서 찾아들곤 한다. 박찬오 소장의 현재 인생을 기준으로 볼 때, 그 반회보를 ‘봤을 때’와 ‘못 봤을 때’로 구분하며 추론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 싶어진다.

 

   
 

이 길은 모두를 향한 길입니다

뒤늦은 공부를 처음부터 시작하기 위해, 그는 서울 신설동의 한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단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몇 층의 강의실이든 계단을 기어서 올라갔고 기어서 내려왔단다. 장애인 특수학교나 다니지 왜 여기를 왔느냐는 경비아저씨의 동정 반 비아냥거림 반의 볼멘소리를 매번 뒤로 하며, 그는 정말 악착 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그렇게 석 달을 다니던 즈음, 정말 고마운 친구 하나를 만나게 됐단다. 신문배달을 하며 학교를 못 다녀서 검정고시 공부를 하러 온 동년배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를 업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마칠 때까지, 계속 그의 두 발로 함께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제 인생을 만든 얼굴들입니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 고 정태수 열사, 박흥수 열사 그리고 현재 장애인권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면면들을 그 즈음에 다 만나게 된 거죠. 복지관에서 알게 됐고, 술자리에서 만나게 됐고, 농성하면서 가까워진 이들과 장애인권을 얘기하고, 변화와 개혁을 논의하게 된 겁니다. 이후 정립회관 점거농성과 이동권투쟁이 그런 사회적 관계와 연결 속에 싹을 틔운 것이죠.”

박 소장은 뒤늦은 94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로 활동했단다. 1998년 한 복지관에 정식 입사를 한 이후로 지금까지 한 차례도 쉬는 적 없이 장애인권 관련 일을 계속 해왔는데, 장애인권운동에 뜻을 두던 초창기부터 그의 가슴에 자리 잡은 건 ‘자립생활’이라는 화두였다고 한다. 집 안에만 있고 시설에 갇혀 생활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모두가 생각하던 시절, 장애인의 자립생활이라는 건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그는 분명한 가능성과 확신을 느끼게 됐단다.

“어쩌면 자립생활이란 그 화두가 저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어요. 그쪽 길로 저의 방향성이 계속 맞춰졌거든요. ’97년 국제재활대회(RI)에서 일본 최초의 자립생활센터인 휴먼케어협회 나카니시 쇼우지 대표를 만나게 된 것도, 2000년 KBS 수요기획 ‘중증장애인 정만훈의 홀로

서기’를 기획해서 방송을 관철한 것도, 아시아태평양장애인리더육성사업인 일본 더스킨 연수를 다녀온 것도, 서울시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시범사업에 선정돼서 서울센터가 독립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한 것도 모두 하나의 길처럼 연결이 됐으니까요. 물론 하나하나 모두 싸워서 얻어낸 거죠. 그 모든 과정이 하나씩 모이고 모여, 지금 서울센터의 오늘을 만들어낸 겁니다.”

작년인 201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개소한 서울센터는, 120평의 넓은 공간을 장애인권운동과 자립생활운동의 허브(Hub)로 활용하고 있다. 센터 내의 모든 활동가들이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개별상담이 진행되고, 세미나실에서는 동료상담가보수교육이 많은 참가자들과 함께 열띤 토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휴게실 같은 중간지점엔 ‘마실’에 찾아든 듯 자유로운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고, 대화를 나누는 내내 박 소장의 전화기는 쉴 줄을 모르며 비명(?)을 질렀다.

“장애인자립생활모델 연구와 개발지원사업에 집중하면서, 저는 ‘개별예산제(Individual Budget)’와 한국형 ‘개별유연화 지원 서비스(Personalized Support Service)’ 정착과 개념 확산에 주력할 겁니다. 우리가 제시할, 이사회가 나아가야 할 다음의 길을 그 두 가지에 맞추는 거죠. 반드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할 겁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업무이고, 그 업무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박찬오 소장이 제시하는 개별예산제와 개별유연화 지원 서비스의 열매가 어서 맺어지기를 기대한다. 그의 건강도 함께 기원한다. 열매를 직접 따려면 건강이 뒤따라야 할 일 아닌가.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께 펼쳐질 앞으로의 그의 성과물 또한 반가운 만남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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