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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진정한 내 인생을 시작한다-인권강사 주정수
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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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17  10: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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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내용을 녹취로 옮기는 긴 작업을 하다 보면, 그 인물을 상징할 만한 한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위로’나 ‘아픔’일 때가 있었고, ‘응원’이나 ‘성취’라는 두 글자가 앞설 때도 있었다. 이번 호에 만난 인물에게선 ‘첫인상’이라는 단어가 계속 연상이 됐다. 마주앉아 대화하던 내내 그가 전한 인상은 ‘성실’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성실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는 거, 그건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스스로를 꾸며낸다 해도, 타인에게 인위적으로 전할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성실한 삶’을 산 사람, 기나긴 인생여정에서 이제야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았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인권강사 주정수 씨가 이번 만남의 주인공이다.

 

장애를 의식하지 않았던, 하지만 장애로 인해

“어렸을 때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한 4살 정도까지? 그랬던 아이가 갑자기 열병을 앓으면서 쓰러졌고, 그때부터 걷지 못하게 됐죠. 정말 갑자기 열이 확 오르고 쓰러지면서 모든 게 마비가 됐대요. 당황한 부모님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너무 겁이 나서, 갈 수 있는 모든 의원을 다 다니셨대요. 열은 내리고 마비는 풀렸다지만, 아이는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상태로 ‘걸음’에 대한 기억을 접어야 했죠.”

또 하나의 땅끝마을인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주정수 씨. 아무런 예방접종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앓은 열병의 정체가 소아마비였다는 건, 10살이 됐을 때야 최종 진단으로 알게 됐단다. 농사를 지으며 목수 일을 같이 하시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딱 맞는 목발을 직접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완전한 맞춤형 사제목발이었던 셈이다. 주정수 씨의 어린 시절 회고엔 친구들이 많이 등장한다. 정말 잘 어울리며 지냈단다. 장애는 스스로도 거의 의식하지 않았고, 친구들도 그의 불편함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 자신이 무난한 성격이고공부도 잘하는 편이었기에,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은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단다.

“제가 열 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또래보다 늦은 스무 살에 고등학교를 가게 됐는데, 당시는 장애가 있으면 공무원도 안 되던 시절이라 기능을 가져야겠다 결심하고 기계공고를 지원했어요. 전자제품 쪽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학과 성적이 괜찮아서 나름 기대가 컸는데, 기능검사라는 걸 하더라고요. 신체검사 같은 일종의 적성검사였는데 열 손가락 오므렸다 펴기, 일어서고 앉기 같은 걸 시키는 거예요. 거기서 바로 낙방이 됐죠. 아…, 그건 제 인생에서 장애로 인해 받은 첫 번째 좌절이었어요. 진짜로 죽겠다는 시도를 했을 만큼 엄청난 상처를 받았으니까요.” 공부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위안이 됐던 건 펜팔을 통해 알게 된 한 이성이었던 것 같다. 결혼이 아닌 동거를 시작하게 됐고 2세까지 생기게 되자, 그는 부양의 의무감 때문에 취업을 위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단다. ‘무작정’이라는 표현을 반복한 걸 보니, 살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작심했을 당시의 그의 심정이 읽혀진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생존을 위해서

그에겐 서울이 희망의 땅이었을까? 허나 대한민국의 수도에서도 장애를 가진 이를 받아주는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단다. 수소문해서 만난 고향의 지인을 통해 한 전자업체에 들어갔지만, 일주일 만에 그 회사 회장한테 발견돼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급여 한 푼도 받지 못했지만, 지인한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지금의 하남시 지역에 있던 한 액세서리 공장이 장애인 직원들로 운영된다고 해서 들어가 자신의 첫 직장으로 삼았지만, 손을 크게 베는 사고를 당해 그마저도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또 다른 공장에 들어가 일을 했지만,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만 계속됐단다. 점심값도 없어서, 그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먹은 점심은 매일 호떡 하나뿐. 그런 막막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그의 눈과 귀에 한 회사가 들어왔단다. 당시 허허벌판이던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한 만년필 회사였는데, 취업이 가능할까 싶어 경비실에 먼저 문의했더니 안 된다는 답만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역시 장애였다. 그렇지만 그 다음날 다시 가서 다른 경비원한테 물어보니까, 가능할 수도 있으니 일단 면접은 한번 받아보라는 대답을 듣게 됐단다.

“어떻게든 이 회사에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목발 하나는 건물 밖 목재 쌓아둔 곳에 숨겨놓고 최대한의 자세를 잡으며 걸어 들어갔어요. 집 밖에서는 할 수 없지만, 집 안에서는 최소한의 보행 자세는 잡을 수 있었거든요. 그 하나의 목발도 책상 밑에 숨겨두고 들어가서 면접을 봤는데, 말 그대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면접이 통과가 된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 회사에서만 40년 가까이 근무를 하게 된 거죠.” 40년? 정확히는 38년이라는데, 순간 시간 계산에 혼동이 왔다. 그의 첫인상으로는 50대 중후반이겠다 싶었는데, 40년의 시간을 빼면 스무 살 이후에 서울로 올라왔다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양해를 구하며 그의 나이를 물었다. 그는 껄껄 웃음부터 지었다. 왜 묻는지 알겠다는 눈빛이었다. 다들 자신을 대여섯 살 정도 아래로 본단다. 1952년생 용띠란다. 깜짝 놀라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고 했더니, 모두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할 뿐이라며 그의 ‘껄껄’은 얼마간 더 이어졌다.

 정말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단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한 손에는 목발, 한 손엔 싸리 빗자루를 들고서 청소를 했고, 야근과 주말근무뿐 아니라 철야근무까지도 도맡아 했다고 한다. 회사에서 맡은 일은 기능 분야의 프레스 작업이었는데, 장애의 몸으로 그 무거운 금형을 끌어올리는 일까지 마다않고 열심히, 꾸준히, 최선을 다해서 했다며, 그는 인생을 다 바쳤던 회사생활을 잠시 동안 회고했다. 작년 5월에 최종 퇴사를 했지만, 그는 정년퇴직을 넘기면서까지 8년을 더 촉탁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듣는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회사에 꼭 필요한 핵심직원이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말 그대로 그 분야의 ‘장인(匠人)’이었다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 회사에서 38년을 근무한다는 게 사실 쉽진 않잖아요. 정말 열심히 일만 했어요. 아이엠에프(IMF) 당시 구조조정 태풍이 불었을 때도 저는 살아남았거든요. 같이 일하던 비장애기술직원들은 다 떠났는데, 지체장애를 가진 제가 살아남았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다는 걸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로소 찾아낸 나의 인생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던 그를 극도의 좌절로 내몰아내고 인생의 좌표를 풍랑 속에 밀어 넣었던 건, 어떤 부연설명을 덧붙이든 간에 결국 ‘장애’라는 단 한 가지 이유가 분명하다. 정신없이 회사생활에 매진하던 어느 시점에, 그는 이루지 못했던 꿈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는 것! 그래서 직장생활과 병행하며 한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됐단다. 한국방송대학교에 도전한 것이다. 49살이 된 뒤에야 고등학생이 됐던 그가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기에, 편한 마음으로 대학의 학번을 물었다. 법학과 03학번이라며 그는 멋쩍은, 그러나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함박웃음처럼 얼굴에 가득 담았다. “저는 ‘1인 5역’을 했다는 표현을 써요. 낮에는 회사생활, 밖에선 대학생 생활, 저녁에는 스터디 모임, 대학로에 있는 대학교 안에서는 학생회 활동, 가장으로서의 책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방송대는 입학하기는 쉽지만, 졸업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다들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정확히 4년 만에 졸업을 했습니다. 곧이어 후배들을 위한 강의를 시작했죠. 정식 강의라기보다는 야학의 개념일 텐데, 방송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이 모이잖아요. 법학을 전공한 선배로서, 무료봉사의 개념으로 야학 같은 학습 모임을 진행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새로운 욕망이 생겨났는데, 마침 방송대에 법학대학원이 생긴 거예요.”

주정수 씨가 대학원을 수료하며 제출한 석사학위논문 제목은 ‘평등권에 비춰 본 장애인의 고용차별’이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언급하던 중에, 그는 한 가지 고백 아닌 고백을 털어놓겠다고 했다. 살아오는 동안 자신 아닌 다른 장애인의 현실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장애계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건 불과 몇 해 전이었고, 인권강사 활동을 하는 지금의 입장에서는 그 대목이 너무나 죄송스럽고 마음의 짐으로 남겨진다는 진솔한 반성의 언어가 뒤따랐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아니라고 답을 전했다. 38년의 직장생활은 비장애 중심의 세상 속에서 생활과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을 테고, 이제야 진정한 세상을 마주대할 시선을 얻게 된 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 판단을 전달한 것이다. 그렇게 평가해 주시면 정말 감사할 일이라고 그가 답했지만, 이건 제3자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는 그의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에 따라 제2의 인생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정말 모든 걸 다 바칠 저의 인생을 찾은 것 같아요.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건, 강의를 통해서 저의 경험을 다른 이들한테 전하고 싶다는 겁니다. 제가 겪었던 어려움을 후배들이 겪게 될 어려움에서 덜어주는 게 제가 할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계속 하다 보니까 나름대로 더 쉽게 전달할 방법을 집중하며 연구하게 됐고, 그 방법론이 무엇인지도 찾게 됐어요. 회사와 함께했던 인생은 이제 마무리했으니까, 이제부턴 저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어디든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갑니다.”

주정수 씨는 방송대 법학과 출신이 중심이 된 ‘법률봉사단’을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10여 년 전 방송대 학생회를 통해 만들게 된 이 조직의 창단멤버로도 동참을 했는데, 활동을 하면 할수록 절감하게 되는 건 생활 관련 법률에 낯선 장애인들에게 정말 큰 힘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겨우내 진행됐던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제가 나간다니까 다들 걱정을 말씀하시곤 했죠. 그 몸으로 거기에 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겠냐고요. 그런데 그건 방에 앉아 뉴스 방송만 보던 분들의 생각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직접 나가 보면, 얼마나 질서정연한 행사였는지를 실감하게 되니까요. 방송의 보도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 그건 촛불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분들만 알 수 있는 감동일 겁니다. 누구처럼 물대포를 쐈다면, 누구처럼 인위적인 스키장을 만들어 ‘보여주기 식’의 행사만 진행했다면, 장애인들의 안전한 활동은 힘들었을지 모르겠죠. 그런데 촛불은 위대했습니다.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장애의 몸으로 위험을 느낄 상황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고 싶단다. 그 많은 국민이 이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겨울 내내 촛불을 불태우는 동안, 자신들의 대선 출마 입지를 다지기 위해 뛰어다니던 그 모든 후보들한테 하고 싶은 의견이란다. “우리가 겨울 내내 불태웠던 촛불의 가치, 그걸 자신들의 성취 하나에 대입시키려 하는 속칭 대선후보라는 분들은 과연 국민이 촛불로 외쳤던 적폐청산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느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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