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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세요, 자신만의 다음 인생을 위해광고 디자이너 주재우
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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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9  09: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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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인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이, 다음 목표를 향해 현재의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이,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룰 날이 이제 곧 다가온다는 기대감에 일정한 흥분을 느낀다는 이를 만났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떠올리게 된 만남이기도 했다. 광고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현실의 세상 속 문제에도 적극 동참한다는 주재우 씨가 이번 호 주인공이다. 그의 일상과 함께했던 하루, 그 시간의 대화를 이 지면에 옮긴다.

 

하늘이 너무 푸르렀던 까닭에

“와아, 날씨가 너무 좋죠? 간만에 기분도 상쾌해지네요.”

테이크아웃(외부 휴대용) 커피를 미리 구입하고 나타난 그는 환한 웃음과 함께 연신 파란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하루 일정에 맞춰 동행하기로 했기에, 만남의 장소이자 첫 출발지는 그가 사는 동네가 됐다. 저상버스가 많은 지역이라 해서 슬쩍 물었더니, 그는 지하철을 택했다. 비장애 입장에선 20여 분 걸릴 거리인데, 그의 동선에 따르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종각역에 내려 광화문 방면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재건축으로 사라진 피맛골의 옛 추억을 되살렸다.

“골목 안쪽 전체에 가득했던 생선 굽는 냄새, 정말 어느 집이든 들어가서 막걸리 한두 잔 마시고 싶었던 풍경이었잖아요. 정겨웠던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서 너무 아쉽네요. 바로 이 자리였는데 말입니다.”

굳이 고향이라 따지자면, 그는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기에, 게다가 서울 강북구 지역에서 지금까지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은 서울 사람이라고 했다. 즐겨 찾는 곳, 마음 편한 자리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걸 보니, 또한 도시의 시대별 변천사까지 생생하게 떠올리는 건 서울 토박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쌍둥이의 형인데,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태어났대요. 미숙아였던 거죠. 당연히 인큐베이터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너무 가난한 집안이라서 태어나자마자 곧장 퇴원해야 했대요. 지금의 기준으론 월 삼백만 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했다고 하니, 당시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던 거죠. 집에 온 지 열흘 만에 동생은 세상을 떠났고, 저도 죽을 상황까지 갔었다는데, 어떻게 해서 생명은 건지게 된 모양이에요.”

그에겐 지금도 눈물부터 짓게 되는 아픈 기억이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단다. 그가 일곱 살 때 당시 지병을 앓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항상 곁에 누워 잠들던 그를 어느 날 어머니가 있는 힘껏 끌어안으시더라는 것이다. 그 힘없는 두 팔로 말이다. 아마도 곧 멀리 떠나실 거라는 걸 당신께서 미리 아셨던 것 같았단다.

“그런데 너무 힘껏 끌어안으니까 숨이 꽉 막혀서, 제가 어머니를 밀쳐냈거든요. 그 어린 마음이 뭘 몰랐겠지만…. 다음날 잠결에 눈을 뜨니까 어머니 옆에서 다들 울고 있는 거예요. 형이 저를 깨우더니 ‘엄마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 순간 불편한 제 몸으로 벌떡 일어나서 얼마나 펑펑 울었던지 몰라요. 난생 처음 기도라는 걸 그때 했죠. 엄마를 왜 데리고 가셨냐고요.”

그런데 그가 마음의 상처라고 표현했던 건 그 이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새파란 하늘로 다시 시선을 옮기며, 그는 눈가를 몇 차례 매만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제가 정말 속도 없는 말을 했어요. ‘엄마, 엄마 돌아가시면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께 꼭 말씀드려 줘. 내 몸 좀 고쳐달라고 말이야.’ 아…, 이 생각은 정말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네요. 지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내용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화창한 날에 이런 기억이 왜 떠오를까요? 하늘이 너무 맑아서 그런가?”

 

내가 저런 사람이었다고?

직접 업고 등하교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학교는 반드시 보내겠다 하셨던 어머니와의 이별. 더욱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점에 떠나셨기 때문에, 그에게 학교는 다른 세상의 일이 됐다고 한다. 마음 아픈 언급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의 장애를 몹시도 창피하게 여기셨단다. 학교는커녕 집 앞의 외출조차 금지당한 채 십대 중반이 될 때까지 방에서만 지내야 했다며, 그는 당시를 떠올리듯 잠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열네 살 즈음인가? 그때부터 몸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성장기에 접어드니까, 몸집이 커지고 팔다리에 힘도 생기게 된 거죠. 그래서 걷는 것에 도전한 거예요. 그때부터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아버지 몰래 집 현관문을 열고 나갔어요. 벽을 잡고 애써 걸어가 봤자 십 미터 정도? 그래도 그렇게 나갈 수 있다는 게 제겐 얼마나 큰 해방감이었는데요. 그런데 집 밖으로 나온 제 모습을 동네 사람들이 보게 되고, 그 사실은 고스란히 아버지 귀로 흘러들어갔죠. 그런 날은 절반 정도 죽을 만큼 혼났어요. 그래도 또 나가고 또 혼나고, 그렇게 일 년 정도 부딪치고 나니까 아버지도 결국 포기하시더라고요.”

당시 집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한창 신축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까지만 걸어가면, 그에겐 엄청난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단다. 공사자재로 쌓여 있던 모래와 자갈과 벽돌들이 그에겐 무한대의 놀이기구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혼자만의 놀이에 푹 빠진 그를 지켜보던 교회의 선생님이 그를 데리고 들어가, 교회의 여름성경학교라는 과정을 함께하게 만들었단다.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환경은 새로웠지만, 그에겐 또 하나의 상처가 남겨졌던 모양이다. 모든 걸 ‘사랑’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를 대하는 보이지 않는 벽이 너무나 견고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장애라는 걸 저 스스로 크게 느끼진 않고 살았어요. 청소년기까지는 그리 큰 문제로 다가오진 않았는데, 스무 살 때 일이 터졌죠. 장애인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모 공영방송 프로그램에서 이동식 목욕시설 차량을 홍보하기 위해, 제가 사는 지역에 와서 촬영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주민센터인 당시 동사무소에서 그 프로그램의 출연자로 저를 추천했다고 해서, 저는 별 생각 없이 그 이동차량을 타고 씻으면서 하루 종일 촬영을 진행했죠. 보름 뒤 휴일 오전 일찍 방송한다고 해서, 나름 기대를 갖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는데….”

그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충격’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하루 종일 촬영했던 게 겨우 30초 분량으로 편집돼 방영된 건 둘째로 치더라도, 방송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은 완전히 일그러지고 비참함 그 자체인 중증장애인으로만 묘사가 됐다는 것이다. 말하는 발음도 안 들리는 존재, 심하게 고통스러운 듯 찡그린 표정의 확대(클로즈업), 가두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손과 발의 떨림, 말 그대로 무력하고 무능하며 일방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밑바닥의 인생으로 자기 자신이 방송에 나왔다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이십 년 동안 장애를 크게 괘념치 않고 살아왔는데, 제가 저만큼이나 무능력한 중증장애인이라는 걸 방송화면을 보면서 깨닫게 된 거예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촬영하는 내내 저는 편하고 자연스러웠는데 방송에서는, 이 사회에서는, 타인들의 시선에서는 제가 저만큼 무기력한 존재로 보였다는 걸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 방송을 본 이후로 바깥출입을 아예 하지 못했어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시점을, 저는 아직도 그 순간이라고 떠올려야 할 정도니까요.”

해당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 담당자들이 월간 <함께걸음>, 특히 ‘사람 사는 이야기’를 애독한다는 건 이미 몇 차례의 개별 만남으로 확인한 바 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전하는 당부의 의견을 이 지면에 남겨놓아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선한 기획이라 해도 ‘시청률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장애당사자들을 ‘위한’ 방송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삶을 ‘짓밟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실제 현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이 대목은 주재우 씨 일개인한테만 들은 게 아니라, 그동안 다수의 당사자들에게서 반복적인 지적을 접한 바 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 방송 프로그램뿐 아니라, 뉴스를 비롯한 모든 방송 제작진에게 각별히 당부하고 싶은 건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가짐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무심한 타성으로 인해 타인의 인생 전체를 ‘짓밟는’ 우를 ‘나도 모르게’ 범하는 행위는 절대 안 되기 때문이다.

 

아, 나는 할 수 있다!

   
 

전동휠체어를 타기 시작한 건 언제였는지 물으니까 10년 정도 됐단다. 보행 자체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직장생활을 위한 이동이 힘들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후회가 들곤 한다고 했다. 왜냐, 비록 제3자들의 시선에선 힘든 자세로 보였겠지만, ‘걸을 힘이 남아 있을 때 더 많이 걸어 다닐 걸’ 하는 미련이 남겨진다는 의미였다.

“다른 당사자분들한테도 비슷한 의견을 자주 들었어요. 후회한다고요. 저도 처음 전동휠체어를 구하게 됐을 때, 주위에서 ‘너, 이거 벌써 타면 몸 일찍 망가진다’는 조언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내가 알아서 잘 관리하면 되지, 뭐’ 하는 자신감 같은 게 있었는데, 그게 말만 쉽지 지켜지기 어려운 현실이 되더라고요.”

그의 명함에 적힌 직업은 광고 디자이너다. 컴퓨터로 모든 작업을 진행하고, 실제 듣게 된 그의 오랜 이력 또한 다양하며 구체적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을 살게 된 그의 지난 과정, 편한 표현으로 그의 ‘꿈의 변천사’는 언제부터 어떻게 펼쳐졌던 걸까?

“청소년 시절에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소설가라고 할까요? 그런데 제가 손으로 쓰는 글씨가 힘들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컴퓨터 하나 사달라고 말씀드리니까, 장애인의 그런 손으로 무슨 컴퓨터냐고 타박을 하시는 거예요. 저의 상실감과 갈망을 알게 되셨는지 새엄마, 그러니까 저의 새엄마께서 밤새 바느질을 하며 한 푼 두 푼 모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가장 낮은 사양의, 거의 타자기 수준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만한 저가의 컴퓨터를 처음으로 장만하게 됐습니다.”

손으로 쓰는 글씨엔 약하지만 키보드 자판의 활용은 쉽게 익숙해졌기에, 주재우 씨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는 또렷한 목표의식이 생겨났단다. 당시 나이는 열여섯 살. 그는 컴퓨터를 혼자 배울 수 있는 책들을 구입해서, 책의 내용을 통째로 외울 만큼 집중했던 모양이다. 열악한 성능인 자신의 컴퓨터로 당시 도스(DOS) 시스템의 명령어를 일일이 외운 다음, 친구 집에 가서 책으로 봤던 모든 걸 제대로 된 컴퓨터로 하나하나 실습하며 익혔다고 한다.

“컴퓨터를 잘 다루게 되다 보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인생의 길이 조금씩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특히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눈이 확 뜨이더라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익히다 보니, 주변의 사사로운 부탁과 아르바이트 같은 일들이 점점 늘어나게 됐죠. 그러면서 저의 첫 직장을 갖게 됐어요. 후배가 다니던 여행사였는데, 거기서 홈페이지 관리와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한 몇몇 호텔의 데이터베이스 구축 같은 일들을 저의 주된 업무로 하게 됐죠. 실제 일을 하면서 실감한 건 ‘아, 나는 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 ‘아이 캔 두 잇!(I can do it!)’이었습니다.”

 

꿈,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의무’입니다

   
 

할 줄 아는 걸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과,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주재우 씨의 인생은 그때부터 업그레이드(up-grade), 그러니까 더 큰 세상으로의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은 여행사에서 시작해서 서울 강남의 초대형 교회 업무 담당으로, 그 다음 새로 도전한 장애인취업박람회를 통해 새 직장을 얻고, 다시 모 케이블방송사에서 6년 넘게 근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젠 ‘광고 디자이너’라는 경력이 또렷해질 만큼의 이력을 쌓게 됐다는 것이다. 활동의 범위가 넓어지면, 세상을 보는 안목 또한 넓어지는 법이다.

“말로 표현하기가 좀 그렇지만 강남의 초대형 교회에서 근무할 때, 저는 정말 확실하게 느꼈어요. 이건 교회가 아니라 철저하게 대기업이라는 거, 제가 알고 있던 믿음의 신은 거기엔 아무데도 없었다는 거, 낮은 곳을 바라보라는 주님의 말씀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거, 그걸 제가 확실하게 체득하게 된 것이죠. 일반 사회보다도 대형교회가 오히려 더 차별이 심하다는 것까지 알게 됐으니, 저한테는 나름 큰 깨우침을 얻게 된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문적인 능력만 확실하다면, 이 사회의 통념을 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회는 역시 통념 그 자체였단다. 학력이 없는 그에게 차별의 잣대를 매번 들이댔다는 것이다.

“약자들을 위한다는 케이블방송에서도, 저는 학력미달로 저임금만 받아야 했어요.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도전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떠나심 때문에 못했던 학업, 이젠 제가 해결하고 제가 결실을 얻어야 할 때가 됐으니까요. 그래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검정고시는 마쳤고 내년 초에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갖춘 다음, 저의 최초의 꿈을 뒤늦게나마 실현시킬 겁니다. 국어국문학과 전공의 대학생이 될 거예요. 작가의 꿈, 그걸 저는 실현시키고 싶거든요.”

주재우 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낸 기간도 있었지만, 그 수급을 포기하면서까지 끊임없이 사회생활에 도전했던 이유가 있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꼭 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단다.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럽여행’이라고 말이다.

“아주 오래된 꿈이었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제가 끊임없이 찾았던 거죠.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중순까지는 떠날 계획이 마련됐거든요. 같이 여행 갈 사람도 한 명이 정해졌고요.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세 나라를 다녀올 거예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그 나라를 직접 방문한다는 거, 제겐 진정한 인생의 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꿈꾸기 시작했던, 어쩌면 유치한 동경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제겐 제 인생의 무게감으로 간직해 왔던 도전이었거든요.”

인생의 꿈으로 간직해 왔다던 ‘꿈의 도전’, 그게 실제로 실현된다고 하니 ‘응원 이상의 응원이 무엇일까?’를 잠시 헤아리게 됐다. 그런데 답은 어렵지 않게 곧장 떠올랐다. 그의 여행기를 직접 들어보겠다는 것이다. 그가 유럽여행을 다녀온 다음, 그의 여행기를 기고 형식으로 <함께걸음> 지면 안에 수록하겠다는 기획안이 생겨났다. 좌충우돌의 성공담과 실패담으로 가득하겠지만, 그것 이상 생생한 기록이 어디 있겠는가. 가슴 가득 담아올 그의 여행기를 미리부터 기대하고 싶다. 새로운 제2의, 제3의 인생이 확고하게 설계된 상태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원한다. 한두 잔의 막걸리가 그리워지는, 생선 굽는 내음 가득한 골목길에서의 재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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