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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림과 설렘을 위해, 이젠 내 인생을 설계한다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직국장 문애린
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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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19  09:5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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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렇게 절규하듯 외치는 걸까?’. ‘왜 저렇게까지 격렬하게 저항을 계속하는 걸까?’ 집회 현장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중증장애의 당사자들을 볼 때마다, 제3자의 시선으론 이해되지 않는 장면일 것이다. 스스로의 몸마저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들인데도, 그들은 외치고 요구하며 직접 앞장서서 행동한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막다른 벽에 내몰린 생존이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싸움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로 인해 법과 제도가 바뀌거나 새로 생겼고 지하철 승강기 같은 이동편의시설이 설치됐으며, 막연했던 탈시설의 꿈을 진지하게 설계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 지난한 운동의 한가운데 이번 호의 주인공도 늘 함께 있었다. 10년 넘게 현장에서 마주치던 그를, 이번에는 지면으로 초대하며 긴 대화를 나누었다. 투쟁하는 활동가로서가 아니라, 낯익은 이웃으로 맞이한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등장을 반길 것 같다. 문애린 씨를 만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눈물

“열 살 때 다리 수술하러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전형적인 시골이던 고향에서만 살았어요. 십 년 동안 말 그대로 재가장애인이었죠. 바깥 구경은 거의 하지 못했으니까요. 제주도 서귀포의 모슬포항과 가까운 동네였는데, 지척에 있는 그 바다를 처음 봤던 게 여덟 살 무렵이었으니 저의 세상은 집 안뿐이었던 셈이에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문애린 씨의 얼굴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참 오랜만에 떠올리는 기억인 듯, 그의 시선은 벽면 여기저기로 향하면서 오래 전 그 시간을 되살렸다. 돌이 지나서도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제대로 앉지도 못하던 아이, 부모님은 지역 병원을 전전하시다가 서울의 큰 종합병원에 와서야 딸이 뇌병변장애 1급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셨단다.

“말처럼 생기고 바퀴가 달린 놀이기구 있잖아요. 마당에서 그걸 타며 놀았던 게 기억나고요. 대부분은 집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림을 그렸어요. 인형놀이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낮에는 집에 혼자 있어야 했거든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으니까, 혼자 놀던 게 하루의 전부였던 것 같아요.”

아주 가끔씩 할아버지께서 오토바이를 태워 주셨는데, 그게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었단다. 혼자만의 움직임이 거의 없던 일상생활에서, 오토바이의 속도감이란 건 그에게는 지금껏 기억에 남을 만치의 특별한 경험이 됐던 것 같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언제 처음 떠올리게 됐는지 물으니까, 그는 일곱 살 때라고 답했다. 그 현실을 자신은 남들보다 훨씬 일찍 깨달았다는 것이다.

“찻길로 향하는 문 바깥쪽에서 제 또래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할 때마다 늘 바라봤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도 부러웠나 봐요. 그래서 어느 날 저녁, 방 안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양쪽에서 끈을 붙잡아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고무줄놀이는 두 다리로 껑충껑충 뛰면서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게 안 되니까, 혼자서 끈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하며 흉내를 냈어요. 저만의 고무줄놀이를 했던 거죠.”

그런데 손녀의 그 모습을 한참 보고 계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정말 엄청나게 우셨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우시는 걸 본 적도 없었지만, 그렇게까지 크게 우시는 모습에 어린 문애린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혼자 다짐을 했어요. ‘아, 내가 이런 걸 하면 안 되겠구나. 내가 남들하고 확실히 다르구나….’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애들이 하는 걸 따라하지 않으며 지내게 된 것 같아요. 그림 그리기 같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에만 더 몰두했던 거죠.”

 

벗어나자, 이 틀에서!

장애로 인한 오른쪽 다리의 휘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세 차례의 수술을 받았단다. 수술 뒤 얼마간의 입원생활을 마치고, 그는 부모님이 당시 일하시던 철원 지역으로 가서 몇 년의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하나 있는 남동생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보이스카우트 활동에다 수학여행 같은 것도 가는데,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 문애린의 일상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였단다. 대신 나름의 큰 변화 한 가지가 찾아든 건, 부모님께서 그에게 공부를 가르치신 것이라 했다.

“전 학교를 못 다녔잖아요. 그래서 글은 배우지 못했었는데, 열두 살 때였나? 그때부터 부모님이 저한테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간단한 덧셈, 뺄셈, 구구단 같은 것도 배웠는데, 하루 종일 집 안에서 혼자 지내던 때라 계속 쓰고 연습하면서 굉장히 빠르게 습득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정말 집중해서 책을 읽었어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하나의 꿈을 갖게 됐어요. 꼭 되고 싶은 장래희망이 생겼고, 그걸 아주 강하게 열망했던 거죠. 바로 탐험가였어요.”

‘탐험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왜?’라는 질문 대신 그가 탐험가를 꿈꾸게 된 모든 이유가 그 단어 안에 다 포함된 것 같았다. 집이라는 좁고 작은 공간에서 벗어나, 세상 전체를 직접 마주하고 싶다는 뜻이다. 게다가 당시 그가 가장 깊게 빠져들었던 책들이 바로 무협지였다고 한다. ‘무협지’라는 세 글자만으로도 그는 그 의미를 전부 설명한 셈이 됐다. 가장 격렬한 움직임과 몸동작 속에 그의 갈망이 투영됐다는 얘기가 된다.

“서울 중랑구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됐는데, 그 무렵부터 부모님은 더 늦기 전에 공부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고 저한테 제안하셨어요. 검정고시를 보라는 말씀이셨죠.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던데, 당시 아파트 인근에 복지관이 있었어요. 그 기관을 알게 돼서, 한 자원봉사 선생님과 연결이 됐어요. 그 선생님이 저의 공부를 전담해 주시게 된 거죠. 그래서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삼 년 만에 초중고 과정 검정고시를 모두 마칠 수 있었어요.”

3년 만에 초중고 과정 검정고시를 모두 마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그가 복지관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세상은 집이라는 공간이 전부였다. 생애 최초라고 해야 할 ‘바깥 생활’인데, 환경의 변화가 그에게 전해놓은 또 다른 변화는 없었을까? 있었단다. 처음으로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구체적인 목표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이왕 시작한 공부, 검정고시까지 모두 마쳤으니까 끝장을 보고 싶었다는 거죠. 그런데 솔직히 말한다면 대학도 대학이지만, 그 즈음부터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집안이 숨 막히는 분위기로 느껴지면서, 나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기숙사가 있는 대학을 떠올리게 된 거예요. 그런데 당시 제 실력으로 수능시험을 본다는 것도 그렇고, 입시학원을 다닌다는 것도 수동휠체어로는 불가능했어요. 게다가 그때는 장애인 특례입학이 시행되기 이전이었거든요.”

20여 년 지속된 ‘집 안 생활’이라는 틀을 깨고 싶다는 욕망은 시간이 갈수록 간절해졌지만, 문애린 씨에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단다. 그런데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복지관에서 알고 지내던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던 게 문득 떠올랐다고 한다. ‘장애인 야학이 있다. 노들야학이라고, 장애인들이 모여서 대입 공부를 한다. 나도 다니고 있다.’

 

분노는 따로 시작됐다

   
 

“그 선배한테 다시 물어서 확인한 뒤, 당시 서울 광진구 정립회관에 있던 노들야학이라는 곳을 찾아가 봤어요. 그런데 그 첫 방문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건,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장애인들을 본 건 정말 처음이었다는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랐거든요. ‘어?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 나하고 비슷한 사람도 많구나.’ 더 중증의 장애를 가진 분들도 많아서, ‘내가 잘못 온 건가?’ 이런 생각까지 떠올릴 정도였으니까요.”

문애린 씨가 노들야학의 문을 두드리던 2000년 전후의 시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장판’이라고 부르는 장애인권단체들 안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장애당사자 활동가들이 그 시기에 노들야학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장애인 이동권투쟁’이 막 발화되던 상황과 맞물려 있다. 한마디로 장애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던 바로 그 시점에 그가 노들야학의 문을 두드렸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노들야학을 1년 반 정도 다녔고 졸업을 했단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는데, 그 중간 과정에 관해 꼭 듣고 싶은 대목이 있었다. 집 안 생활의 틀을 최초로 깬 게 복지관이었다면, 노들야학이라는 전혀 다른 대상은 훨씬 범위가 넓어진 세상에 대한 도전이었음이 분명하다. 집과 가까운 복지관까지 1km 내외의 이동과,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할 10km 내외의 환경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게 받아들여지고 적응이 됐던 걸까? 그는 6개월 정도 지난 뒤부터는 긍정을 하기 시작했단다. 우려만 앞서던 ‘수동형’의 자세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형’으로 관점을 바꿨다는 것이다.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저는 제가 집에 없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노들야학 수업이 그때는 보통 오후 여섯 시에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엄마한테 도시락을 싸달라고 해서, 낮부터 야학에 나와 있었어요. 특별하게 따로 할 일은 없었지만, 저처럼 먼저 와 있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동네 여기저기를 함께 다니는 게 참 좋았거든요. 뭔가 해방감을 느낀다고 할까? 그런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대신 ‘투쟁’이라는 현장은 그때까진 몰랐단다. 자신은 공부하기 위해 야학을 다녔기 때문이란다. 현장성을 강조하는 교사들과, 순수한 학업에 중점을 두는 학생들 간의 토론이 갈등으로 비화되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고 기억한다. 강요 아닌 권유로 인해 투쟁의 현장에 몇 번 나가보긴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문애린 씨한테는 대입을 위한 수능시험 준비가 우선이었지, ‘장애인권’ 같은 용어와 의미는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애인차별철폐’라는 세상에 눈을 뜬 건 언제였다는 걸까? 대답은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 의지가 생겨났고, 그 불합리함을 가슴 가득 분노로 품게 됐다는 것이다. 누가 가르치고 전해 준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말이다.

 

자연스럽게, 한 걸음씩 가까이

   
 

그가 다닌 대학은 국내 최초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통합해서 다닌다고 알려졌던 캠퍼스였다. ‘집을 벗어나자’는 일념에 앞선 나머지 원치 않던 전공을 택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든 건 바로 장애당사자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던 강의의 환경이었다고 한다. ‘장애인의 속도’라는 주제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대목이 된다.

“학교가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을 똑같이 경쟁시킨다는 거예요. ‘장애인의 속도’라는 게 있잖아요. 중증장애를 가진 저 자신의 속도라는 게 분명히 존재해요. 그게 현실이고요. 그런데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과제를 똑같은 시간 안에 제출해야 한다는 거예요. ‘과연 이걸 100% 따라갈 수 있을까?’ 게다가 뇌병변의 지체장애는 저 혼자였고, 그 불편함을 누구한테도 하소연할 방법도 없이 저 혼자 감수해야 했어요. 그때부터 정말 심각하게 갈등하기 시작했죠. ‘이게 맞는 걸까?’ 배려 자체가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혼자만의 분노로 바라보게 됐던 거예요.”

누구한테든 얘기를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단다. ‘야, 그러면 네가 더 열심히 해야지’, 심지어 교수들도 같은 의견이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그게 안 되면 밖에 나가면 더 뒤처진다. 장애라 해서 봐 줄 건 아니다’, ‘못하면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장애와 비장애의 통합은커녕 일상적인 환경 자체가 그랬던 탓에, 문애린 씨는 기숙사 생활을 하던 학기 내내 강의실과 기숙사만 오가며 과제에만 매달려야 했다고 한다. 주말이면 기숙사 이용학생들이 전부 다 밖으로 나가서 자유롭게 지내는데, 그는 그 시간마저도 ‘장애인의 시간’을 맞추기 위한 혼자만의 싸움으로 가슴을 앓아야 했다는 것이다.

“강의 도중에 몰래 빠져나와, 화장실에 가서 혼자 한참 울었던 적이 자주 있었어요. 대학생인데, 이젠 성인인데, 그렇게 울어야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잖아요. 한참 울고 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수업에 들어가야 하고…. 그걸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방식이긴 하지만 졸업을 얼마 앞두고 있을 때 사고를 쳤죠. 삭발을 해버린 거예요.”

삭발? 학과의 동기들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깜짝 놀랐단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이곤 했다고 한다. ‘졸업할 즈음이 되면 삭발하는 학생들이 몇 명 있다. 마지막 다짐을 한다고. 그런데 네가 할 줄은 몰랐다.’

문애린 씨는 지금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노들야학에서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과는 방학 때마다 항상 만나며 지냈다는 점이다. 그게 의도된 건지, 그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인연 자체가 그렇게 진행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간의 인간적인 연결은 항상 간직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랬던 결과였을까? 졸업하자마자 부모님께 들은 제안은 ‘공무원 시험을 봐라’였는데, 그는 그에게 전해진 노들센터의 인턴 근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단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저를 아는 분들은 다들 웃으시겠죠. 경찰과의 마주침이 정말 무섭고 두려웠다고요. 하지만 당시엔 진짜로 주저됐었어요. 그런데 집회 현장에서 저보다 훨씬 더 불편한, 장애가 훨씬 심한, 말도 잘 안 나오는 언니와 형들이 악을 쓰면서 싸움을 하는 게 제겐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화가 났으면, 얼마나 억울했으면 저렇게까지 할까…. 그런 상황에서 그런 언니와 형들을 앞에 두고 ‘이건 내가 힘들다, 못 나오겠다’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두고, 제가 먼저 그 자리를 피하는 건 더더구나 못할 일이었어요.”

 

더 확실한 나아감을 위해 이젠

그냥 모든 게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진행됐다고 그는 생각이 든단다. 특별나게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을 보고 영향을 받는다든지, 아주 직접적인 내용의 책 몇 권을 읽고 현실에 집중하게 되는 식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이들의 열정과 분노를 일상적으로 접하다 보니까, 세상의 불합리함이 그의 가슴에도 눈을 뜨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기름 위에 불을 붙인 건 바로 그 자신이 대학시절에 겪었던 모든 경험이었단다.

“대학에서 실제 몸과 정신으로 겪었던 그 모든 부조리함이, 노들야학 선배들의 절규 안에 그대로 다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제가 생각했던 거, 제가 불편했던 것들, 그동안 불합리하다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누군가 대신 얘기해 주는 게 아니라, 제 입으로 직접 발언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뭔가 아주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됐던 것 같아요. 갑작스럽게 의도적으로 바뀐 게 아니라, 저의 실제 경험과 세상의 현실이 접목되면서 의식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거죠.”

세월은 정말 빠르고 세상은 금방 바뀐다. ‘PC통신’이란 환경이 획기적인 천지창조 같았는데, 이젠 손 안의 스마트폰마저 진부하게 느껴지는 일상이 됐다. ‘장애인차별철폐’의 길로 들어선 문애린 씨의 발자취가 어쩌면 그 시기와 맞아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결성되고 활동한 지 10년, 거기에다 광화문농성장투쟁 5년을 그 누구보다 가깝게 현장에서 직접 바라봤던 그의 감회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는 어깨부터 움찔거렸다.

“정말로…, 진짜로 힘들었어요. 그 누구도 예상 못한 농성투쟁이 시작됐던 거잖아요. 맨바닥에 매트리스 깔고 노숙하면서, 서명운동을 하던 당시에 가장 충격을 받았던 거는요. 같이 농성하던 (김)주영언니가 농성 시작 두 달 만에 죽었잖아요. 바로 곁에 나란히 앉아 시민들한테 서명해 달라고 외치던 그 주영언니였는데, 어느 날 농성장 맞은편에 영정사진으로 등장한 거예요. 아…, 광화문농성이 일 년 넘게 진행될 때까지, 정말로 저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어요. 영정사진 속 언니와 눈을 마주칠 방법이 없었거든요.”

농성장의 충격은 연이어졌단다. 문애린 씨는 동료상담을 담당하던 시기에, 시설에서 생활하던 한 장애당사자와 상담을 진행했던 적이 있었단다. 상담은 좋은 결론을 맺었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가 탈시설했다는 소식까지 들은 걸 끝으로 그 상담 사실은 까맣게 잊고 지냈다고 한다. 몇 번의 계절을 지나보낸 후 농성장의 자리에 앉았는데, 맞은편에 새로운 영정사진이 하나 등장했단다. ‘누구지? 익숙한 얼굴인데?’ 단번에 떠오르지 않아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가던 그는 순간 정말 큰 절망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가 상담했던 그 당사자의 이름은 ‘송국현’이었다.

“정말 힘들었던 차별철폐연대의 10년이었고 광화문농성의 5년이었죠. 예전에는 장거리 마라톤을 뛰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단거리 마라톤을 전속력으로 하루에 열두 번씩 쉼 없이 반복해서 뛰어야 하는 느낌이라 할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탁탁 막힌다는 실감이 들어서, 이젠 잠시나마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됐어요. 일 자체를 쉴 순 없으니까 대안은 여행인 거죠. 구체적인 건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년 중에는 인도 여행을 꼭 갈 거예요. 그런데요. 일정을 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게 있죠. 두근거리고 설레는 일이 없던 오랜 시간을 보낸 탓인 것 같아요. 일 년 내내 현장과 사무실만 왕복하던 틀에서, 내년엔 아주 잠깐이라도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현장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내년에는 반드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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