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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찾아 떠난 내 인생,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연극배우 백우람
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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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0  09:5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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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마자 물었다. 이 만남은 길바닥에서 진행하고 싶다고 말이다. 무슨 의미냐고 의아해하던 ‘그’의 고개가 끄덕여진 건 3,4초 정도 지난 후였다. 그리고 환한 웃음과 함께, 좋다는 의견을 ‘연극배우답게’ 더 큰 몸짓으로 화답했다. 우아한 인테리어의 커피전문점이나 카페 같은 자리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맨바닥에서 나누는 대화가 훨씬 자연스럽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오가는 이들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서울 대학로 길바닥에 앉아 3시간 가까운 대화를 나누게 됐다. 색다른 시도였기에, 특별한 추억으로 오랜 기간 남겨지게 될 것 같다. 연극배우 백우람 씨를 만났다.

 

내겐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진지하다. 할 얘기는 다 해버린다. 저런 동작까지 가능할까 싶어 우려했는데, 무난하게 넘어간다. 뇌병변장애 1급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의 장애 때문에 오히려 더 호소력이 짙어졌던 것 같다. 무대 위의 그는 자유롭다. 발음의 불편함, 행동의 부자연스러움, 그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더 몰입하며 그를 향해 박수를 보낸다. 그의 연극무대 공연은 항상 무언가 가슴 뭉클한 느낌을 남긴다. 스스로 몰입했다는 확신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힘든 길이에요. 연극이란 건 비장애인 입장에서도 가장 어려운 길 중의 하나잖아요. 배고프거든요. 아르바이트 몇 개씩 하면서, 근근이 버티는 이들의 얘기를 늘 듣게 돼요. 그걸 각오하셔야 할 것 같아요. 연극과 예술을 지망하는 분들께 희망차고 좋은 덕담을 먼저 전하는 게 예의겠지만, 저는 달콤한 소리보단 쓴소리 먼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현실이니까요.”

백우람 씨는 자신만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고 했다. ‘단소리’라는 건데, ‘달콤한 소리’라고 풀어낼 수 있다고 했다. 반대의 의미는 ‘쓴소리’가 되고, 단소리로 향하기 위해선 반드시 쓴소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그게 순서라는 것이다.

서문에 밝혔듯이, 그에게 처음 제안한 건 ‘길바닥’이었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로 결정했던 날부터, 가장 먼저 떠올렸던 건 모든 격식을 내려놓고 만나겠다는 형식의 파괴였다. 가면을 쓸 필요도 없이 민낯으로 인생을 얘기할 수 있다는 거, 그게 바로 그가 추구하던 자유가 아닐까? 그는 맨바닥의 대화가 너무 좋다며, 대화 내내 기분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사진학과 출신이다. 방송 뉴스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너무 보기 좋았단다. ‘펑펑’, ‘팡팡’, 눈부시도록 연달아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매료된 게 사진학을 전공한 첫 번째 이유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사진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고, 모든 건 자연스럽게 그 전공을 향해 흘러갔단다.

“어릴 때는 저희 집이 좀 괜찮게 살았어요. 당시 수동 필름카메라가 있는 집은 잘 사는 집이었잖아요.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아버지 서랍에 있던 스트로보(외장 플래시)를 몰래 꺼내서, 저 혼자 ‘번쩍번쩍’ 빛을 터뜨리면서 놀았어요. 그게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당시 백우람 씨의 관심은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는 게 아니라, 한마디로 말해 스트로보를 이용한 불빛놀이에 집중됐던 셈이다. 하지만 워낙 고가의 제품이라서, 부모님은 카메라를 절대 못 만지게 하셨단다. 그의 놀이는 늘 ‘몰래’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야외 공원으로 놀러갔을 때 이모가 잠시 카메라를 맡기고 자리를 비우셨단다. 제대로 된 수동 필름카메라를 처음 자신의 두 손으로 만지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프레임(눈을 대고 보는 뷰파인더 속 사각형의 틀. 그 사각의 틀에 맞게 사진이 촬영됨)을 봤어요. 한참 이것저것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셔터를 누르게 됐어요. ‘철컥’ 하잖아요.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데, 제가 셔터를 눌러 무언가를 촬영했다는 건 그 영상이 영원히 제게 남는다는 것이잖아요. 영원히, 최소한 아주 오랫동안 제 것이 된다는 거, 그게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엄마한테 계속 얘기했어요. 사진을 하고 싶다고요. 정말 계속 얘기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하고 싶은 거 하라’는 승낙을 받은 게 중학교 2학년 때였단다.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한 것 같았다고 한다. 사진이라는 인생으로 살 수 있다는 거, 그는 그 희망과 기대 하나로 삶을 버틸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20여 년 전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한 눈빛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하지만 뇌병변장애 1급으로 성장기를 보낸다는 건 순탄할 리 없는 일이다. 그는 거의 대부분이 안 좋은 기억들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여러 놀이를 했던 일 같은 건 많은 이들한테서 비슷한 내용으로 듣곤 했지만, 백우람 씨는 처음 듣게 되는 자신만의 경험과 상황을 꺼내놓았다.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지, 직접 들으면서도 내심 놀라게 된 내용이었다.

“전 두 살 때부터 물리치료를 받았대요. 그런데 매주 닷새 동안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기관에 저를 맡기셨다는 거예요. 부모님 입장에선 어떻게든 집중치료를 받게 하려고 하셨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이건 아니다’ 싶으셨대요. 제가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는지, 집에 오면 너무 풀이 죽은 상태로 지냈다는 거예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엄마는 직접 물리치료를 배우셨대요. 그리고 엄마가 직접 저의 몸을 만지셨어요. 그런데 두 살짜리한테 하는 물리치료라는 건 팔과 다리를 잡고 틀고, 몸을 위에서 누르는 식으로 진행되거든요. 저는 그게 너무 두려웠어요.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 어린 당시의 기억이 아직까지 떠오를까 싶기도 해요.”

부모님의 교육방침은 ‘직접 해봐라’였단다. 어린 백우람이 처음 걷기 시작한 건 다섯 살 때였고, 극히 힘든 보행 자세라 해도 그의 어머니는 항상 그를 집 밖으로 내보내셨다고 한다. 걷는 연습도 할 겸, 세상과 사회도 직접 보고 경험할 겸, 뒤늦게 시작한 걸음걸이로 그는 동네를 오가곤 했단다. 그리고 이어진 건 초등학교 입학이었다.

“일반학교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입학하고 나서 학교를 가야 되는데, 너무 가기 싫은 거예요. 그때 제가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최근에야 답이 떠올랐는데, 학교 교실의 천장이 너무 싫었던 거예요. 그 사각의 틀이 진짜 두려웠던 거죠. 무슨 의미냐 하면요. 어렸을 때부터 병원을 많이 다녀서, 병원 천장을 본다는 게 제겐 크나큰 공포였어요. 그런데 학교 교실의 천장이 병원 천장과 똑같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의사선생님도 ‘선생님’인데, 학교선생님도 ‘선생님’이잖아요. 선생님이라는 그 단어가 너무 듣기 싫었어요. 제 입으로 직접 말하지도 못했고요. 그런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걸 저는 견디지 못했던 거죠.”

억지로 학교를 가긴 했지만, 소년 백우람은 수업시간에 혼자 운동장에 나와 있었단다. 나와 있는 게 편했고, 운동장 땅바닥에 그냥 앉아 있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엄마가 그 모습을 보게 됐단다. 그래서 너 여기 왜 있냐고, 빨리 교실로 들어가라고, 그러면 싫다고, 안 들어간다고 싸우는 게 일상이 됐다는 것이다.

“그게 공포였던 것 같아요. 학교 건물 안에 들어가면 왠지 주사바늘이 저를 기다릴 것 같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병원이라는 곳에서 느꼈던 트라우마가 지워지지 않았던 거예요.”

 

저만 당했던 상처는 아니겠지만

그와 어울리던 동네의 동갑내기 친구가 3명 있었는데, 그의 기억으로는 엄마가 담임선생님한테 부탁해서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도록 손을 쓰셨던 것 같단다. 그래서 넷이서 어울리게 된 2학년 때부터는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하게 됐는데, 3학년 때 전학을 가야 할 불가피한 상황이 생겼다고 한다. 정말 내키지는 않았지만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아, 친구들을 뒤로한 채 전학을 갔고 그는 다시 혼자가 됐단다. 그런데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중학교 2학년 때 발생했단다. 지금은 수술을 해서 없어졌지만, 그의 표현 그대로 적는다면 ‘곶감 같이 생긴 점’이 그의 머리 뒤통수에 있었다고 한다. 혹은 아니었지만 제법 큰 흔적이라서, 사춘기의 그에겐 적잖은 콤플렉스였던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짧게 깎아야 하는 학교임에도, 그는 뒷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학교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곱게 보지 않은 애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넌 뭐냐고, 자기들도 기르고 싶은데 왜 너만 기르게 하냐고, 그렇게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던 애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그 애들이 제 머리카락을 강제로 다 잘라버린 거예요. 정말로, 정말 진짜로 제가 폭발했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부모님도 학교에 오시고, 당장 경찰을 부르라는 걸 학교 측은 뜯어말리며 사정하고….”

백우람 씨는 당시의 분노가 새삼 연상되는 듯, 잠시 동안 말문을 닫고 깊은 호흡을 이어갔다. 그건 장난의 개념이 아니라 학대의 일상화였다고 한다. 그의 몸은 멍투성이였단다. 아이들이 툭툭 치고 시비를 거는 게 일상의 생활이었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창피한 게 더 커서 부모님께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넘어졌다고, 부딪쳤다고 둘러대기 일쑤였는데, 그 사건 이후로는 모든 게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 돼 버렸다. 학교 측의 조치가 뒤따랐고, 그 애들은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았단다.

“직접 사과를 받고 그런 일은 그 후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저의 학교생활이 이전보다 편해지긴 했지만, 사실 그 애들이 반성을 한 건 아니었겠죠. 저를 더 괴롭히면 더 시끄러워지니까, 자기들이 건드릴 다른 대상을 찾았을 거예요.”

그게 중2 때의 일인데, 그가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처음 들여다봤던 것도 중2 당시였다.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그에게 탈출구를 열어준 게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고등학생이 된 뒤 사진학과 진학을 최종 결정했고, 그는 대구의 한 대학으로 진학했단다. 시작은 순조로웠다고 한다. 게다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인생 최초로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된 거란다. 그게 나쁜 의미를 담은 게 아니라, 성인이 되면서 가족 아닌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는데, 기숙사 생활로 그 대안을 얻게 된 셈이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그도 이 발언이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아직도 남겨지는 미련

“전공을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무렵 집안의 사정이 너무 안 좋아져서, 엄마까지 생활전선에 뛰어드셔야 할 상황이 됐거든요. 아시겠지만 사진은 돈이 많이 드는 전공이에요. 제대로 된 장비 하나의 값이 얼마인데요. 다큐멘터리에 집중하려면 방학 때마다 진행되는 합숙생활에 참가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어요. 엄마한테 그걸 말씀드리면, 엄마는 아끼고 또 아껴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내주셨겠죠. 그런데 그 말 자체를 제가 꺼낼 수가 없었던 거예요. 저의 몸 상태로는 비장애 학우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가장 후회되는 게 당시의 상황이에요. 그 합숙에 참여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 제가 그걸 해결할 방법도 없어서 하지 못했다는 게 두고두고 큰 아쉬움으로 남겨지는 거죠.”

‘또 하나의 상처’라고 할까? 전공 학부생들이 3명씩 조를 짜서, 공동의 작업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숙제가 던져졌단다. 그런데 사진학과 전공 백우람 학생만 조가 없이 혼자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일종의 ‘왕따’ 상황이 됐다는 건데, 혼자서 묵묵히 모든 과제를 마무리한 뒤, 그는 술자리를 마치고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에서 정말 크게 울어야 했다고 한다.

“사진학과는 졸업을 앞두고 졸업작품전이라는 걸 하잖아요. 다들 거창하고 큰 의미를 담겠다는 대상에 몰두했는데, 저는 저 자신을 찍었어요. 릴리즈라고, 전선줄처럼 생겨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도 셔터를 누를 수 있게 하는 촬영 장비가 있는데, 그걸 이용해서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담아봤어요.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콤플렉스였죠. 콤플렉스라는 건 내면에 간직만 하고 있으면 병이 되는데, 일단 공개적으로 드러내면 그 다음부턴 더 이상 콤플렉스가 아닌 거잖아요. 그 의도대로 촬영하긴 했는데, 나름 호평을 받기도 해서 성과는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작업은 이제 막 사진가로 세상에 등장하려는 백우람 씨한테는 정말 큰 의미를 안겨줬단다. 스스로를 드러내놓고 나서 보니까, 그때부터 다른 장애인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보이지도 않았고 별다른 관심도 없었는데, 자신의 콤플렉스를 세상에 내던져놓고 보니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그의 시선 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졸업 후 일정 기간 스튜디오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그는 ‘장애인의 삶을 촬영하자’는 목표의식이 생겨났는데, 그 즈음 색다른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단다. 장애인들이 국토순례를 한다는, 당시로선 생소한 행사의 정보가 그에게 찾아든 것이다.

“제가 모르는 수많은 장애당사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큰 기회인 게 맞잖아요. 그래서 참가했어요. 서울 동대문에 최종 집결하는 국토순례가 전국 각지에서 시작됐죠. 저는 천안에서 출발하는 팀에 합류했어요. 6박7일의 과정을 일일이 촬영했거든요. 그런데 그 행사가 진행되기 전에, 행사 준비를 위한 모임이 일주일에 한 번씩 있었어요. 거기에 가서도 촬영을 했거든요. 그 모임에 참석한 면면들이 누군지 아무것도 모를 때 제가 왜 거기에 가서 촬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하고 낯선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이젠 내 인생의 목적지가 보인다

   
   
극단 애인의 2017년 9월 공연인 ‘3인 3색 이야기’ 중 첫 번째 무대 ‘소리전쟁’에서 열연하는 백우람 씨. 그는 이 작품의 대본도 직접 적었다

인생에 있어서 기회는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찾아든다. 다만 그 전제조건은 미리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와 손을 맞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준비모임에 극단 애인의 김지수 대표가 참가하고 있었고, 국토순례가 최종 마무리된 뒤 그는 김 대표의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와서 동참할 의향이 있냐고, 촬영을 하든 뭐를 하든 좋으니까 극단 애인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다.

“저는 연극의 ‘연’자도 몰랐거든요. 제가 원하는 촬영만 진행했어요. 배우들의 준비과정, 무대, 일상의 소소함 같은 걸 촬영하고 있었는데, 당시 연기지도를 담당하시던 선생님께서 대뜸 제게 제안을 하신 거예요. ‘너, 카메라 내려놓고 이걸 한번 해 보자’는 건데, 연습실에서 보행의 동선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준비과정이었어요. 왜 그런 제안을 받게 됐는지, 왜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 못하겠네요. 그냥 자연스럽게 진행됐거든요.”

그는 모르겠다고 했지만, 연기지도 선생님과 극단의 대표가 아무나 무대에 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2009년에 현대극으로 각색한 작품에서 주인공의 역할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 아들의 공연을 보러 오신 부모님까지 객석에 앉아 계신 무대에서,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된 발성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공연이 모두 끝나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르겠다며, 같이 했던 배우들한테 뒤늦은 미안함까지 표현했다. 아직까지 마음에 쌓여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 작품 말고 다른 무대에서 초기에 했던 역할인데, ‘고도를 기다리며’의 럭키 역을 꼭 다시 해 보고 싶어요. 굉장히 의미 있는 역할이었는데, 당시엔 너무 쉽게 다가섰다는 게 계속 미련으로 남겨지거든요. 그렇게 중요한 역이었는지는 공연이 끝나고 나중에 알게 됐으니까요.”

이 글에선 본문의 앞쪽에 적었지만, 그는 이 대목에서 단소리와 쓴소리를 설명했다. 이젠 그런 언급과 조언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우람 씨는 배우가 갖춰야 할 그런 진지함을 제대로 모르는 채 시작했던 게 지금껏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인생길로 확신하는 지금의 길, 다시 말해 배우의 삶에 모든 걸 다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인생에서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잖아요. 하고 싶다면 해야 돼요. 저는 그렇게 배워왔고, 그걸 확인하는 삶을 살고 있거든요. 솔직히 아직까지도 배우의 길이 뭔지는 정확히 모를 수 있어요.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끊임없이 집중할 겁니다. 그게 제 인생을 목적지로 안내하는 지름길이 될 거라 믿으니까요.”

땅바닥의 대화를 긴 시간 동안 나누는 내내,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는 각자의 마이크와 앰프, 스피커를 직접 가지고 나온 젊은이들의 노랫소리가 가득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제각기 노래를 불러, 누구의 노래가 누구의 음성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넓은 공원 전체는 수많은 노랫말로 뒤섞였다. 꿈을 이루려는 절박함인지, 아니면 자기 과시의 목적인지를 굳이 구분하며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맨바닥에서 일어나 그 노랫소리 사이를 헤치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던 백우람 씨가 씩 웃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요. 오늘 땅바닥 대화, 너무 좋았어요. 정말 밑바닥의 얘기까지 다 한 것 같네요.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아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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