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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그날 외쳤다. “나는 자유다!”
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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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15  1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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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면 일어나 아침식사를 한다. 오전 일정을 보낸 뒤 점심식사를 하고, 차 한 잔의 여유를 잠시 즐긴 뒤 오후의 일을 열심히 진행한다. 하루의 일과가 모두 마무리되면, 집으로 돌아가 편안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선약이 있는 날이라면, 퇴근 후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갖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생활인들의 하루일과 내용이다. 그런데 모든 게 통제되고 제한되는 24시간 365일 속에서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수십 년을 살아야 한다면, 대체 어떤 감정으로 그 상황을 마주해야 할까? 22년의 시설생활을 박차고 나와,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1인을 만났다.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다. 우리의 이웃 주민이다. 김동림 씨가 이번 호 주인공의 입장에서, 탈시설의 진정한 의미와 권리를 독자 여러분 앞에 전한다.

 

스스로 잠가버린 문

뇌병변장애 1급,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뇌위축증으로 살아온 김동림 씨는 두 발 자전거를 혼자 탈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가장 먼저 추억한다. 혼자만의 보행으로 스스로 몸의 중심을 잡는 기립이 가능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고장 나서 차고지로 돌아가던 버스와 부딪쳤다는 것이다. 고장이 난 상태였던 버스는 경적의 작동마저 무용지물이었던 상황…. 그는 아무런 대비도 못한 채 버스와 부딪쳤고, 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가 차도 아닌 인도 쪽에 떨어졌다고 기억한다.

“사고 당시 엑스레이를 찍고 검사할 건 다 했는데, 손목 부위의 타박상 이외엔 다친 부위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지냈죠. 그런데 6개월 정도 지나니까 한쪽 다리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던 거예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제야 사고 당시 병원에서 의사와 아버지가 주고받던 대화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랐단다. 살짝 열려 있던 진료실 문틈을 통해 들었던 내용, ‘아이한테 후유증이 있을 겁니다’ 하던 의사선생님의 진단이 뒤늦게 몸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비록 힘든 자세이긴 하지만 혼자만의 걸음걸이가 가능했던 ‘국민(초등)학생 김동림’, 그는 이후 13년 동안 일체의 외부활동이 불가능해진 상태로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 했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술을 진짜 많이 드시고 들어오셨던 날이었어요. 아버지가 다짜고짜 ‘저 놈 좀 안 봤으면 좋겠다’ 하시는 거예요. 저는 진짜로 웬만한 소리를 들어도 넘어갔었는데, 침대에 누워 있다가 그 말씀을 딱 듣는 순간 어마어마한 자괴감이 드는 거예요. 도저히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침대에서 스스로 굴러 떨어진 다음에, 집 안의 골방으로 들어갔어요. 그날부터 저는 제 마음의 문을 잠가버렸어요. 가족이 저를 가둔 게 아니라, 제가 모든 문을 닫아버렸던 거죠.”

 

잘못된 탈출

그가 골방에서 할 수 있었던 건 텔레비전을 보는 일과 책을 읽는 거, 그 두 가지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장애인의 날이라고 하는 어느 해 4월 20일, 방송에 한 장애인이 나와서 이런 내용을 진행했다고 한다. ‘장애인들은 집에만 있지 말고, 시설에 가서 비슷한 입장의 장애인들과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 친구가 되면 훨씬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식의 홍보방송이었다는 것이다.

군사쿠데타로 민중을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당시 ‘거리청소’라는 개념으로 장애인과 노숙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시설에 집어넣는 데 혈안이 됐던 바 있다. 일반사회 안에서 ‘있어도 되는 사람’과 ‘안 보이는 게 나은 사람’을, 독재정권의 잣대 하나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 실증적 증거가 ‘삼청교육대’로부터 시작돼서, 곪아터지던 ‘형제복지원’ 같은 강제수용시설에 국가 차원의 지원을 쏟아 붓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 와중에 ‘그런 방송’이 공영방송의 전파를 통해, 국민 전체한테 전해졌다는 증언이 될 만하다. ‘장애인들은 시설로 가라’고 말이다.

김동림 씨는 당시까지만 해도 장애등록을 하지 않았단다. 더 지내다 보면 회복될지 모르겠다는 집안의 기대 아닌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계속 손에 받아들었던 건 ‘(입영)신체검사 통지서’였다고 한다. 어느 날 새벽, 아버지의 부름에 따라 일찍 일어나서 입영대기자들을 위한 신체검사장에 따라갔단다. 그런데 당시 검사를 진행하던 대위 계급의 군인 담당자가 엄청난 짜증을 아버지한테 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김동림’의 기억에 남아 있을 만치의 생생했던 그 목소리, “아니, 이런 사람을 왜 데리고 왔어요?” 얼마 후 동사무소(현,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증을 가져오라 하기에 가져갔더니, 당시 주민등록증 앞면 아래에 있던 빈자리에 병역 ‘면제’라는 두 글자가 새겨지게 됐단다. 아버지의 돌출발언 때문에 상처를 받았던 당시, 게다가 ‘시설이 좋다’던 식의 방송이 이어지던 즈음, 김동림 씨는 가족 앞에서 선언을 했단다. 시설에 보내달라고 말이다. ‘병역면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고 한다.

“시설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린 뒤, 딱 한 달 후에 입소를 하게 됐어요.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어머니는 ‘너, 안 들어가면 좋겠다’ 하셨죠. 하지만 그때까지는 제게 탈출구가 필요했어요. 13년 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 지냈다는 거, 그건 대안을 따질 심정이 아니었거든요.”

   
   
 

단세포로 살아가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게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했을, 그 22년이라는 시간을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그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시설’이라는 건 무슨 의미냐고. 그가 답했다. ‘바보, 멍청이가 되는 곳’이라고 말이다. “입소 후 처음에는 얼마간 잘 대해줘요. 저도 초기엔 왜 잘해주는지를 정확하게 몰랐어요. 원래 그런 줄 알았죠. 그런데 5년의 기간을 딱 정해놓더라고요. 5년 정도는 가족들이 들락날락하니까, 시설 차원에서도 관리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5년이 넘으면 이제 ‘버려진 1인’이 되는 거죠. 그때부터는 완전 무시가 시작돼요. 오갈 데 없는 인간으로, 아니,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인생이 시작되는 거죠.”

그는 당시의 기억을 되씹는 동안, 몇 차례나 어깨를 움찔거렸다. 다시 생각하기에도 끔찍하다는 의미였다. ‘인권’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 하지만 1년에 몇 차례는 아주 잠시나마 사람대접을 받을 때가 있었단다. 후원자들이 방문할 때였는데, 그마저도 보여주기식 행사에 동원되는 소모품인 건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후원자들이 시설에 오면, 전부 아래로 내려오라고 방송을 해요. 사실 그런 자리에 내려가는 걸 다들 엄청 싫어했어요. 후원자들이 후원물품을 전달하는 자리에 기념사진 찍는 아니, 찍히는 용도로 저희를 부르는 거니까요. 사진은 정말 엄청 찍어댔어요. 그리고 끝인 거죠. 그런데 그 선물이라는 것들은, 그게 라면이든 뭐든 간에 최근에 생산된 제품들이잖아요. 생산된 지 얼마 안 된 라면을 끓여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잘 아시죠?”

무슨 의미의 질문일까? 답은 그가 곧장 꺼냈다. 시설 생활 내내 먹었던 음식에 대한 넋두리와 푸념이 세세하게 이어진 것이다. 라면을 기준으로 한다면, 생산 이후 유통기한은 반년에서 길어야 1년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먹었던 라면은 유효기간이 1년 정도 넘어간 게 기본이었다고 한다. 입소 후 처음 얼마간은 라면 맛과 냄새가 왜 이런지 이해가 안 됐지만, 그래도 그는 꾹 참고 먹었단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 내내 누워서 지내야 하는 몇몇 동료들은 식당에서 퍼져 나오는 음식 만드는 냄새만으로도, 유통기한이 얼마나 지난 식사를 이제 곧 해야 하는지를 정말 ‘귀신같이’ 맞췄다고 한다. 그들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단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에는 라면 냄새 같아요. 그런데 식당 의자에 앉아 식판에 코를 가까이 대면, 아주 오래된 청국장 냄새 같은 게 나는 거예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후원물품으로 초코파이가 엄청 많이 들어온 날이 있었어요. 유통기한이 넉넉하게 남은 초코파이는 얼마나 맛있어요. 그날 원장이 모두한테 선심 쓰듯 초코파이를 넉넉하게 나눠줬는데, 세상에, 유통기한이 1년 이상 넘어간 것들만 던져준 거예요. 방금 들어온 새 것들은 다 어디로 가고, 어디에 있던 이런 것들만 우리한테 제공되는 건지…. 후원자들이 자기 이름이나 단체명을 앞세우고 가져오는 건데, 설마 유통기한이 훌쩍 지난 것들만 가져올 리는 없잖아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인간적으로 가장 슬펐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시설 안에서의 외로움’, 이런 내용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는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햇빛을 못 본다는 게 가장 슬펐다는 것이다.

“일부러라도 바깥 공기를 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도 못 나가게 해요. 재촉과 부탁을 계속하면, 조금 있다가 해주겠다 하면서도 절대 안 내보내줘요. 그나마 저 같은 입장은 수동휠체어에 앉아 후원자들이 올 때 잠깐이라도 햇빛을 맞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10년, 20년 제자리에 누워 지내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햇빛을 못 보는 거예요. 평생 천장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죠.”

‘위생 상태’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참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개신교 계열의 수용시설이었기 때문에 주일마다 예배를 보는데, 기억나는 건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목사 뒤쪽에서 어슬렁거리던 토끼만한 들쥐들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간식을 소유할 순 있지만, 아무도 개인 사물함에 보관하지 않았단다. 사방 전체에 가득한 게 바퀴벌레였기 때문이다.

“식사 때 국이라는 걸 먹어본 적이 없어요. 딱 김치 세 조각, 다 시어버린 장아찌, 보통 마늘종이라고 하죠. 그건 엄청 많이 줬어요. 시어서 먹을 수도 없는 거, 그걸 22년 동안 하루 세 끼마다 계속 줬어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마늘종은 아예 입도 대지 않아요. 치가 떨리고 넌더리가 나거든요.”

무슨 특별한 날이 되면 삼겹살 고기를 주는데, 식판에 올라오는 건 딱 세 조각이란다. 특별식이라고 잔치국수 같은 게 가끔 나오는데, 어른 주먹보다 적은 양이라서 포크로 두세 번 입에 넣으면 끝이었다 한다. 그런 환경에서 당연히 떠오르는 건 탈시설이 아닐까 싶어, 언제 처음 시설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됐는지를 물었다. ‘탈시설’이라는 용어 자체는 몰랐지만, 시설 생활이 5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진짜로 진지하게 떠올랐단다. 언젠가는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을 내내 가슴에 품었지만, 실천에 옮길 방법을 아무데서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긴 세월 동안 얘기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지화면처럼 이십 년 넘게 그 안에서 살았던 거죠. 그런데 2007년이었나? 저하고 친구하고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점심을 먹을 때였어요. 낮 12시 뉴스가 나오는데, 거기서 장애연금이 6만원에서 1만원 오른다는 얘기가 딱 나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장애연금? 그건 우리가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했더니, 친구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선생님은 그런 소리를 입 밖에도 내지 말래요. 뉴스에선 모두에게 지급된다는데, 저는 그런 걸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요.”

 

자기결정권의 소중함

   
 

전동휠체어 배터리 교체를 위해 외출하고 돌아오던 어느 늦은 저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친구가 김동림 씨를 기다리다가 한마디를 전했다고 한다. ‘너 내일 아침에 좋은 일 있을 거야’라고 말이다. 누워서 자려는데, 그 좋은 일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서 잠이 안 왔단다. 좋은 일이라는 것 자체가 없던 나날이었으니, 그때의 궁금증과 설렘이 지금껏 기억나는 이유 또한 시설 생활의 무미건조함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침이 되니까 ‘누구누구 원장실로 오라’는 방송이 나오는데 제 이름이 있는 거예요. 가니까 탁자 위에 통장들이 놓여 있는데, 제 이름의 통장에 오십만 원이 입금돼 있는 거예요. ‘내게 현금이 있다니 이게 웬 횡재냐!’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가 그 뉴스를 들은 이후에 보건복지부에 직접 문의를 했대요. 이런 장애수당을 장애당사자가 직접 못 받고 있는 게 정당한지를 물었고, 복지부에서는 즉각 조사에 들어간 거죠.”

시설 운영자측은 발칵 뒤집혔고, 그동안 참고 삭혀왔던 목소리들이 비로소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단다. 이 기회에 시설의 뿌리 깊은 비리를 밝히고, 탈시설을 준비하자는 의견들이 동시에 표출된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는 자괴감이 김동림 씨 혼자만의 갈등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는 것, 같은 공간에 살아도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던 이들이 최초로 입을 열게 된 결과는 시설 이사장과 원장, 총무 등의 고발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아, 여기는 진짜로 내가 살 데가 못 되는구나’ 하는 걸 절실하게 느끼게 됐죠. 그런데 어느 늦가을 날에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과 몇몇 장애당사자 활동가들이 자립생활 교육을 한다고 시설에 찾아왔어요. 당시엔 전부 초면이었는데, 저보다 중증인 장애활동가가 혼자서 자립생활을 한다고 자기 소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속으로 ‘야, 저 몸으로 어떻게 혼자 사냐?’ 하며 코웃음을 쳤죠. 그런데 정말로 혼자 산다는 거예요. 활동보조인제도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죠. 중증장애인도 사회에서 혼자 살 방법이 갖춰져 있다는 걸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던 거예요.”

자립생활을 한다는 그 활동가가 김동림 씨에게 말했단다. ‘나도 시설에서 나와서 혼자 사는데, 너도 나올 생각 있느냐’고. 그래서 그는 ‘너도 혼자 산다는데, 내가 왜 못 살겠냐’고 대답했단다. 그리고 그 대답이 그에게는 가슴 깊숙이 정답으로 남겨지게 됐다고 한다.

“확고하게 다짐을 했죠. 나가겠다고, 여기서 반드시 나가서 나의 삶을 살겠다고 말이에요.” 2008년부터 2009년 사이에 서울 양천구청 앞에서의 기나긴 농성과, 서울 마로니에공원에서의 노숙농성이 진행된 바 있었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게 바로 ‘석암 베데스타 요양원’ 시설비리로 인해 촉발된 투쟁이었고, 당시 함께 투쟁에 나섰던 8명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김동림 씨다. 같이 투쟁하기로 했던 시설의 많은 수용인들이 시설 측의 집요한 회유와 방해공작으로 돌아서게 된 점이 제일 힘들었지만, 김동림 씨는 최종적으로 탈시설에 성공하며 시설의 문을 나서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서서, 그는 가장 크게 외침을 내질렀단다. “나는 자유다!”

“우스운 얘기로 들리실지 모르겠는데, 밖에 나와서 길을 잘 모를 때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문의를 하면 대답을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르는 건 또 묻게 되고, 대답과 도움을 받으면서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됐어요. 제가 말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거, 저한테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시설에서는 발언도 거의 못하고 입 다문 채 지내기만 했거든요.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탈시설 이후 가장 기뻤던 일이 무엇이냐 물으니까, 김동림 씨는 ‘탈시설 1년 만의 결혼’을 손꼽았다. 같이 야학에 다니던 이와 결혼을 하게 됐고, 멘토가 돼서 아직도 시설에 있는 시설후배들에게 생생한 체험담을 조언으로 전하는 게 제일 보람 있는 일이란다. 8명이 감행했던 탈시설에 영향을 받은 후배들의 탈시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 그는 자신들이 퍼낸 첫 삽이 헛되지 않았음에 자긍심을 느낀다고 한다.

“가장 단순한 걸 말씀드릴까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다는 거, 사람을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연락해서 만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거, 바로 자기결정권이 제게 있다는 게 탈시설의 최대 성과가 되겠죠. 시설에는 자기결정권이라는 것 자체가 없잖아요. 시설에 수용된 분들은 대부분 기가 많이 죽은 채로 생활하고 있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저는 당당해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똑같은 인간이에요. 단지 몸이 좀 불편한 것 빼고는 다를 게 없잖아요. 당당해지세요. 그리고 꿈을 갖고 설계하세요. 탈시설의 다음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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