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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요구는 부탁이 아니라 권리입니다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강윤택
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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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2  11: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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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관점으로 보면, 모든 게 긍정으로 받아들여진다. 대신 부정의 입장부터 앞세우고 나면, 세상 무엇이든 올바르게 자리 잡은 건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마음 자체가 회색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점을 먼저 생각하며, 이 세상을 자유의지 그대로 살아가는 이를 만났다.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로 진행된 대화의 자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강윤택 소장과의 만남, 독자 여러분도 그 대화의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느낌을 받게 되리라 기대한다.

 

시력을 잃긴 했지만

“수술실에 들어갈 때는 그 수술대 위의 불빛이 흐릿하게 보였던 것 같아요. 그건 기억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깨어난 뒤부터는 전혀 안 보였죠. 색감은커녕 빛조차도, 최소한의 빛마저도 느끼지 못하게 된 거예요.”

자전거를 타며 놀던 유치원생 남자아이가 오토바이와 부딪쳤다고 한다. 두 눈의 신경을 잃은 것뿐 아니라, 그 아이는 뇌의 일부분까지 다쳐서 반년 넘게 신경외과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었단다. 그 어린 나이인데 시력을 일순간 잃게 된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당시의 심정을 물었는데, 그는 전혀 다른 반응을 내놓았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죠? 그땐 엄청 좋았어요.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까, 뭐든 말만 하면 먹을 거고 장난감이고 가족과 친척들이 다 사줬거든요. 단지 불편했던 건 오는 친척들마다 제 곁에서 다 울었다는 거, 그게 좀 귀찮았던 마음 빼고는 전부 좋았던 것 같아요.”

강윤택 씨는 사고 이후의 상황을 담담하고 편한 언어로 표현했다. 속리산을 품은 보은이 고향인데, 그는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며 함께 어울렸던 기억부터 펼쳐놓았다.

“동네 아줌마들 모두 잘해줬죠. 동네 누나들도 다 잘해줬고, 동네 형들이 맨날 와서 같이 놀아줬어요. 원래 농경사회는 마을에서 장애인을 함께 돌봐줬잖아요. 그래서 저는 늘 재미있었어요. 맨날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데, 힘들게 잡지 않아도 제가 갖고 싶은 만큼 물고기를 얻을 수 있었죠. 당시 산에서 비료자루를 가지고 썰매처럼 타고 놀았는데, 저한테는 정말 실컷 타게 해줬어요. 그게 정말 좋았어요.”

그의 언급은 ‘OO장애 1급’, ‘OO장애 2급’이라는 규정에 따라, 장애와 비장애를 철저하게 구분 짓는 지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1970년대 말까지는 실제로 몸이 불편한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이웃이었다. 누군가 다리가 불편하면 곁에서 다리 역할을 대신해 줬고, 눈이나 귀가 불편하면 서로가 눈과 귀의 빈자리를 맡아줬다. 소외된 이가 있다면, 더 먼저 다가가 놀이와 모임에 동참시키는 게 당시의 문화였다.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거리청소’와 ‘사회정화’라는 명분으로 철저하게 격리시켰던 ‘5·18’ 군부세력의 집권 이후, 우리 사회엔 지금과 같은 차별과 대립의 틀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은 원래 이런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왜 안 되는데?

   
 

“아홉 살에 집과 가까운 대전맹학교에 들어갔어요.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집보다 더 좋은 거예요. 거기는 전부 다 안 보이는 친구들만 있잖아요. 저는 사춘기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안 보이는 것에 대해선 별다른 불편함은 없었던 것 같아요.”

4학년까지 대전에서 다니다가 5학년 때 서울맹학교로 전학했는데, 그때부터 달라진 환경이 확 느껴지기 시작했단다. 공부할 양이 훨씬 많았고 애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대전 생활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때까지는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던 사투리 발음 때문에 꽤 많이 놀림도 받았던 모양이다.

“맹학교는 초등학교 과정까지는 학교 안에서 주로 지내요. 그런데 중학교 과정부터는 밖에 나가야 할 일들이 많이 생기죠. 사사로운 심부름이라도 직접 해야 하는데, 그럴 땐 저시력인 애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요. 그때부터 안 보인다는 불편함이 서서히 생겨나더라고요.”

그가 회고하는 어린 시절은 별다른 기복 없는 무난한 생활처럼 들렸다. 현재 자립생활센터를 운영하며, 장애인권을 앞세우는 인생과는 연결고리가 없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언제 있었는지를 물으니까, 그는 남들과 좀 달랐던 자신의 성격을 언급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부당한 것에 대해 ‘이게 왜 이러지?’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아닌 게 분명하면, 그걸 바로 잡아야 된다고 늘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맹학교 고3 때 학생자치회장을 맡으면서, 참 많은 부분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고 계속 시도했어요. 학교 선생님들이 저를 정말 싫어하게 될 정도로 집요하게 제기했죠.”

무엇을 어떻게 바꿨는지, 당시의 일들은 이 본문엔 적지 말아달라고 했다. 당시 학교 내부의 사정들을 굳이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진 않다는 의견이었다. 대신 그는 자세하게 설명했다. 자치회장으로서 그가 벌였던 일들은, 그 이전엔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부분들이 분명해 보였다. 관행적으로 지속되던 일들, 학교 임직원들의 묵인 하에 넘어가던 부조리함 등이 강윤택이라는 자치회장의 등장으로 밝혀지고 제자리를 잡아갔다는 것이다. 부당함이 끝까지 시정되지 않으면, 그는 곧장 교장실로 달려갔다고 한다.

“건의하는 절차를 무시한 게 아니고요. 교감이나 학생과장 선생님께 건의를 하면, 매번 안 된다는 대답만 반복했어요. 건의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선생님 선에서 제지하며 무마부터 시키려 했던 거죠. 그래서 교장선생님께 직접 찾아가서 ‘이게 왜 안 돼요?’라고 물으면, ‘그게 왜 안 되는데?’ 하며 오히려 반문하시곤 했어요. 그러니 선생님들한테 미움을 받을 수밖에요. 대신 친구들과 후배들한테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

   
 

원래는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당시 막 시작됐던 장애인특례입학의 문은 말 그대로 ‘좁은 문’이었단다. 고2 때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로 인해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학비 부담이 적은 국립대를 택해야 했고, 시각장애를 가진 입장에서 갈 수 있는 학과는 특수교육과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또한 너무 불합리한 거예요. 특례입학의 문을 열려면, 똑같이 다 열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저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열심히 운동하고 데모하고 싸웠어요. 그래서 그 다음해부터는 모든 과의 문호가 다 개방되게 만들었죠.”

그는 사회복지학을 복수 전공했고, 대학원도 사회복지로 마쳤단다. 학위 수료 후 사회로 나와 경기도 여주에 있던 한 직업재활시설에서 시각장애인들의 직업훈련교사로 지내던 어느 날, 그에겐 인생의 길을 전환하게 만드는 소식 한 가지가 전해졌다고 한다.

“2006년 5월 25일, 날짜도 기억해요. 시각장애인들한테만 안마를 하게 한 제도가 위헌판결이 났죠. 솔직히 저는 처음엔 그 위헌판결의 의미가 뭔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친구들과 선후배들한테서 계속 전화가 오는 거예요. 난리가 났다고, 쫓겨나게 됐다고, 일을 못하게 됐다고요. 게다가 아는 형들이 서울 마포대교에서 투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니, 정말 엄청 큰 일이 벌어진 거잖아요.”

‘직업선택권은 국민의 기본권인데, 이걸 보건복지부령으로 한정하는 건 위헌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법률로 해야 한다’며, 시각장애인으로 자격이 국한됐던 안마사가 일반인들한테도 가능한 직업이 됐던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면, 시각장애인을 고용할 업체는 사라지게 될 상황이었다.

“저는 안마를 배우지 않았지만, 저와 절친한 선후배들도 대부분 안마를 하지 않았지만, 저희

같은 시각장애인들과 맹학교 출신들한테는 안마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잖아요. 그래서 모두 함께 힘을 모으자며, ‘전국시각장애인청년연합’을 새로 결성해서 싸우기로 했어요. 그 싸움을 진행하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게 있었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거예요. 파헤칠수록 문제가 너무 많은 구조인데, 수십 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게 확인되면서, 이 싸움이 안마에 국한될 게 아니라 시각장애인의 생존권 자체로 확대해야 한다는 인식이 큰 공감대를 얻게 됐죠. 저 또한 절실한 당면과제로 받아들였던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 몇 십 년 동안 이어져 왔던 부조리의 틀을 깨기 위해선,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게 확인된 셈이다.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안마사는 시각장애인들한테만 자격을 준다고 법률에 명시됐는데, 강윤택 씨를 비롯한 젊은 활동가들은 또 다른 부조리를 뿌리 뽑기 위해 함께 움직였단다. 당시 서울시에서 장애인 공무원을 뽑는 임용시험을 본다고 발표했는데, 그 조건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장애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말이 안 되잖아요. 시각장애인인데 보조기기 없이 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씁니까. 이런 황당한 부조리함이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나서서 요구하는 이가 없어 그동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저희 동료들 십여 명과 함께 시험 등록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 안 받아준 거예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장애인들만 해당된다고 끝까지 접수를 거부했죠. 그래서 저는 담당직원이 퇴근할 때까지 계속 기다리며 접수를 시도했습니다. 퇴근도 못하게 된 그 직원이 결국 받기는 받았어요. 그러면서도 점자 지원 같은 건 없다고 애써 강조를 하더라고요.”

시험을 보러 갔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어떤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강윤택 씨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단다. 그런데 이 사건 아닌 사건은 이후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불합리한 임용시험 응시 조건 그리고 저의 실제 응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만들었죠. 나중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도입될 때, 그 법 제정의 여러 이유 중에 하나로 저의 시험 응시 문제가 제시됐었습니다. 국가가 정당한 편의제공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증명했던 거죠. 그 일을 계기로 또 한 번 절실하게 느꼈던 건, ‘이렇게 하면 바뀌기는 바뀌는구나’ 하는 성취감이었어요. 공무원시험제도에서 편의제공에 대한 의무조항이 명문화 됐죠. 모든 부조리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일단 바뀌지 않고, 모든 걸 혼자 할 순 없으니 단체의 힘과 연대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됐습니다.”

 

정당한 지원 요구는 권리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건 ‘자립해라’였단다. 혼자 다닐 수 있고 혼자 밥을 해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의존적이고 무능한 거라고 학교와 주변에선 늘 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직접 확인하게 된 건, 그렇게 되기 위해선 환경이 먼저 바뀌어야 하고 전체 사회가 변해야 한다는 실제 현실이었단다.

“청년연합의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게, 결과적으로는 자립생활센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뭔가를 하기 위해선 조직이 있어야 하고, 하나의 이슈에 함께 동참할 힘들이 모여야만 실제 바뀐다는 걸 반복 경험하게 됐으니까요. 말을 안 하면 안 바뀌었어요. 그런데 바뀐다 해도 시각장애당사자들의 절박한 입장이 아니라, 공무원이나 관련기관 책임자들의 입김과 편의에 따라 엉뚱한 방향으로 뒤바뀌더라고요. 간단한 일례를 든다면, 바우처택시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연구용역이 진행됐는데, 연구용역 내용이 ‘바우처택시 도입방안’이 아니라 ‘바우처택시가 필요한가?’로 중간에 바꿔치기 되는 식이었죠.”

강윤택 씨는 장애계 단체들의 책임자들에게 일차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현장에서는 너무나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인데, 그 안건이 위로 올라갈수록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들한테 유리한 내용 중심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법 제정과 개정에 일정한 힘을 쓸 수 있는 책임자들의 아전인수 같은 판단 때문에, 실제 고통 받고 있는 현실 속의 장애인들이 너무 큰 불편을 겪고 있어요. 자신들의 이해관계만 앞세우다 보니 원래의 의견이 산으로 가버리고, 뒤로 밀리고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게 다반사죠.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정말 중요할 때는 아예 대응 자체를 안 한다는 거예요. 진짜로 책임 있는 발언을 해야 할 때는 마땅히 꼭 등장해야 할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 그게 장애계 단체 책임자들의 최대 문제인 겁니다.”

강윤택 씨는 사회를 향해서도 의견을 남기고 싶다 했다. 시각장애는 중증장애인데도, 이 사회는 시각장애를 일상생활이 충분히 가능한 경증장애 정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말 잘하고 집 내부처럼 익숙한 공간에서는 잘 움직인다는 거, 먹고 생활하는 모습이 비장애와 다를 게 없는데 ‘단지’ 안 보인다는 것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는 사회의 인식이 큰 오해와 왜곡을 낳는다는 점을 그는 반복하며 강조했다.

“인간은 외부 정보의 90%를 시각으로 먼저 받아들인다고 하죠. 그 90% 자체가 박탈된 게 시각장애인입니다. 불쌍하게 봐달라는 얘기가 아니고요. 상대적으로 시각장애는 다른 장애유형과 다른 장점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제안하는 겁니다. 적절한 지원만 있다면, 사회 환경 안에서 장애감소가 가장 빠르게 이뤄지는 게 시각장애예요. 예를 든다면 다른 장애유형과 비교해 볼 때, 활동보조서비스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죠. 보행의 동선 확보와 식사와 같은 환경 제공만 지원되면, 사회 안에서의 일상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다는 거고, 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은 ‘넌 그것도 못하냐?’는 식의 무능함으로 내몰린다는 게 시급히 해결돼야 할 개선책입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한 선배로서의 조언도 잊지 않았다. 어린 연령의 시각장애학생들한테 뭐든 잘해야 하는 ‘슈퍼맨’이 되기를 강조하는데, 필요 이상의 강조는 강요일 뿐이라며 후배들이 마음가짐을 재정립할 것을 당부했다.

“한 인간으로서 의존적이지 않게 사는 게 당연히 가장 좋은 일이죠. 그렇지만 의존적인 것하고, ‘내가 필요한 정당한 지원’을 요구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당연하게 가져야 하는 권리는 당당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자존감과 권리의식, 그것과 의존 중심의 삶은 아예 다르다는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돼요. 스스로의 정체성과 당당함, 나의 권리와 나의 주도권, 그게 바로 자립생활인 거죠. 생활환경 안에서 위축되거나 억압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굳건하게 인식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는 게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후배 여러분께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스스로의 권리를 분명하게 주장하세요. 그건 부탁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으로서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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