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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황홀한 순간에는 고통이 뒤따릅니다영화이야기
글. 이영문/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이사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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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23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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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열정(A Quiet Passion, 2017)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때는 자신의 신념과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을 때입니다. 특히 권력구조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억압은 우리의 영혼을 짓밟는 결과를 초래하지요. 민주주의와 철학이 태동된 그리스에서도 여성과 노예계급은 참정권이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유럽 전역에 전파된 이후 중세기는 교황과 황제에 의한 지배가 일상화됐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마녀사냥이 그치지를 않았지요. 특히 청교도 신자들의 종교적 자유를 위해 건설된 미국에서도 강요된 믿음에 대한 폭력과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한 억압이 지속됐습니다. 19세기 미국이 배출한 서정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일생을 다룬 영화 ‘조용한 열정(A Quiet Passion, 2017)’은 종교적 억압과 더불어 여성의 부당한 사회적 배제에 대해 조용하지만 굳은 신념을 평생 지닌 채 내면의 열정을 서정시로 승화시킨 위대한 여성의 삶을 담았습니다.

영화는 홀리요크 대학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묻는 의식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1837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지금도 여성들의 교육에 전념하는 유서 깊은 대학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믿음을 확인하는 엄숙한 서약의 시간에 에밀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신념에 따라 답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한 죄를 어떻게 회개하라는 겁니까?” 분노한 학장은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지요. 그날 이후 에밀리는 56세에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고향집에 은거하며 매일 밤 시를 쓰는 고난의 여정을 시작하지요.

영화는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다큐멘터리에 가깝고 간간히 삽입되는 그녀의 시 구절 때문에 낭독회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미장센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 쓴 시를 들여다봅니다. 아마도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관조하는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 자신의 젊은 날이 떠오릅니다. 그 또한 에밀리 만큼의 아이덴티티에 따른 방황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동성애와 무신론자의 정체감을 형성하기까지 많은 번민이 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모든 황홀한 순간엔/고통이 대가로 따른다/황홀한 만큼/날카롭고 떨리도록 사랑받는 시간만큼/비참한 수년/치열하게 싸운 동전들/눈물 가득한 금고

에밀리 디킨슨은 시에 대해 ‘진실을 압축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19세기의 거대한 강박관념에 외롭게 부딪힌 그녀에게 시는 삶의 근거였고, 삶 그 자체였지요. 그녀는 56년의 삶을 살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철저히 은둔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새벽 3시부터 아침까지 모든 사물이 잠든 시간에 그녀는 깨어 있었고, 매일 매일을 시를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죽음과 어둠, 무기력한 생,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사건 뒤에 나타나는 공허한 감정들.

그녀는 사회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집으로 고정한 채, 19세기 유물들, 여성억압과 가부장적인 결혼생활 등과도 싸웠습니다. 따뜻했지만 여성의 사회생활에 보수적이었던 아버지와의 갈등과 순종의 이중성, 사랑을 주셨지만, 평생 우울증을 겪었던 어머니의 힘없는 손길, 스스로의 뇌전증과 신장병, 그래도 자신을 가장 이해하고 아껴주던 여동생 비니와의 우정 등이 스크린에 지루하리만치 자세하게 그려집니다. 또한 남북전쟁의 결과 노예해방이 시작되었을 때 당시 여성들의 삶이 노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식은 에밀리의 내면에서 나오던 진실이었습니다. 다음의 시는 어떠신지요.

이것은 한 번도 답장하지 않은/세상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자연이 부드러운 당당함으로 전해준 소박한 소식이다/ 다정한 동포들이여 자연을 사랑하듯/ 나도 후하게 판단해주길

죽기 직전 남긴 마지막 시입니다. 사람들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결코 가까이 갈 수 없었던 에밀리에게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엄격함은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지요.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질수록 그녀의 내면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채, 메마른 자신의 삶을 진실의 힘으로 관조하던 그녀의 고단한 일생은 1,800여편의 시로 남았고, 살아있을 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조차 받지 못했던 에밀리 디킨슨은 사후에 위대한 시인이 됐습니다.

짐승과도 같은 남성들의 폭력에 분노한 한국의 여성들이 ‘미투(me too)’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그들의 담대한 여정에 남성으로서의 부끄러움과 함께 깊은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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