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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사람을 만든다
글. 장명훈/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 위기거주홈 간사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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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02  18: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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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거주홈은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학대피해장애인의 쉼터입니다. 함께걸음은 348호부터 위기거주홈의 생생한 일상이 담긴 ‘위기거주홈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젊은 영주의 실패

1573년 일본 전국시대의 어느 겨울. 젊은 영주는 천하를 통일해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소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군대가 젊은 영주의 영지에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젊은 영주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섬겨오던 충신들은 “병력이 적어 불리하니, 성문을 굳게 닫고 기다리면 어쩔 수 없이 적들이 돌아갈 것”이라고 간언했지만, 젊은 영주는 내 땅을 무단으로 침입한 영주를 크게 혼내고 싶었다.

충신들의 극구 만류에도 젊은 영주는 성문을 열고 빠르게 진군해 미카타가하라 평원(현재 시즈오카현 하마마쓰 시 부근)에서 상대와 격돌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노련한 명장 다케다 신겐이었다는 것이다. 상대는 강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젊은 영주를 따르던 많은 충신들과 병졸들이 이 전투에서 죽거나 크게 다쳤고, 젊은 영주 역시 겨우 목숨을 건져 자신의 성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젊은 영주는 있었던 일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의 성급함과 자존심으로 인해 계획 없이 적에게 달려들어 큰 패배를 불러왔고 재기하기까지는 앞으로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젊은 영주는 씻지도 않은 채 즉시 그림을 그리는 화공을 불렀다. 그리고는 오늘 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라는 명을 내린다.

명예를 중시하던 무가에서 남겼던 파격적인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전해져 ‘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타가하라 전역 화상이라는 명칭으로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 시에 있는 도쿠가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그림은 흔히 ‘이에야스의 우거지상’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는 이후에도 실패를 잊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의 패권을 잡자, 그는 천한 신분 출신에게 밀린 것에 자존심 상했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패전의 영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영주들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꿈을 이룬다. 잊을 수 없는 실패의 경험이 결국 한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자몽은 달다(?)

2월의 어느 오후, 외투를 입고 위기거주홈을 나서던 나를 보고 거실에 계시던 당사자 한 분이 말씀하셨다.

“장 간사 어디 가요?”
“월요일이라서 이번 주 먹을 거 사러 마트에 가요.”
“나도 따라 갈까?”
“네 그러셔요. 추우니까 외투 챙겨 입고 내려오세요.”

실내에 계속 있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바로 앞 대형마트에는 신기한 구경거리도 많아 호기심 많은 당사자분들은 장을 보러 함께 나가는 것을 좋아하신다. 시식코너 아주머니들이 권하는 음식들도 잡숴보시고, 본인이 잡수시고 싶은 거 사려고 따라 오시기도 한다. 그렇게 날 따라 나온 이 당사자은 외투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씨, 너무 얇게 입고 나오셨네요.”
“됐어! 안 추웅께 그냥 가!”

뭐든지 나와 반대로 말하는 이 분에게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제가 오늘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기 벤치에 10분만 있다 가면 안 될까요? 더워보이시는데 옷도 한 겹 벗어서 저 좀 주시구요. 전 추워서요”
“됐어! 저리 가! 그마리(거머리)! 멍청이! 똥개야!”

우여곡절 끝에 ○○씨는 위기거주홈의 똥개(?)를 데리고 5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도착했다. 이것저것 집었다 놨다를 반복하던 중 과일코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게 물으셨다.

“이거이 뭐시여?”

성큼성큼 걸어가서 ○○씨가 집어온 것은 껍데기가 샛노란 자몽이었다.

“귤도 아니고 오렌지는 아닌 것 같은디. 이거슨 첨본다! 우리나라에서 농사지은 거여?”

한참 동안 자몽을 이리 만져보시고 저리 만져보던 ○○씨는 자몽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열매 맛은 써서 맛으로 먹지는 않고 주로 주스로 만들어 먹는 과일이에요. 제가 먹어본 느낌을 말씀드리자면 첫 맛은 시고 끝 맛이 써요”
“거짓말 하면 못써! 단내가 나는데!”

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사실 평소에 뭘 먹고 싶다는 표현을 잘 안 하시는 분이었는데 자몽만큼은 꼭 사고 싶어 하시는 눈치였다.

“이거 한 봉지 갖고 가자!”

결국 그분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지만 껍질이 딱딱해 까먹기 귀찮은 과일인데다 한번 맛을 보고 별로였던 음식들이 남는 경우가 많아 나도 잔머리를 굴렸다.

“이 과일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일단 하나만 사볼테니 ○○씨가 드셔보시고 맛이 좋았다고 느끼시면 다음에 한 봉지 사 드릴게요. 약속해요.”

   
 

잔뜩 사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을 법도 한데, 원하는 걸 얻었다는 기쁨에 장을 보고 돌아가는 ○○씨의 표정과 발걸음은 날아갈 듯했다. 위기거주홈에 도착해 장을 본 것들을 정리하는데 자꾸만 본인 자몽을 달라고 재촉하신다. 그렇게 자몽을 손에 얻은 ○○씨는 본인 주머니로 자몽을 자꾸만 집어넣으려 하지만 자몽이 바지 주머니보다 커서 잘 들어가지 않았다.

“커서 잘 안 들어가는데요? 맛을 궁금해 하셨으니 드셔보시는 게 어떨까요”

우여곡절 끝에 딱딱한 껍데기를 까서 한 입 먹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빨간 자몽 과육이 입에 썼던 모양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드시기는 했지만 확실한 건 자몽 드시는 내내 표정은 영 아니었다.

“어때요?”
“달어!”
“정말요?”
“달다니깐! 간사는 안 줄꺼여!”

이후 ○○씨는 껍데기 깐 자몽을 이리저리 갖고 다니시며 딴청부리시다가 자몽 4분의 3정도 드셨다. 본인이 달다고 주장하는데도 계속해서 정말 달콤하냐며 자꾸 물어보는 똥개 생각에 어지간히 분하셨는지 저녁식사 준비하는 내게 뜬금없이 외치신다.

“안 줘!”

그 후로 ○○씨께와 함께 장을 보러 갈 때마다 그 달콤한 자몽을 사자고 하지는 않는 걸로 봐서, 자몽의 이 분께 큰 어필을 하지는 못했던 거 같다.

 

경험에서 배운다

내가 위기거주홈 근무한 지 한 달 정도 됐을 무렵, 당사자 한 분이 혼자 밤늦게 담배를 태우러 나가셨다 들어오지 않아 위기거주홈이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다. 흡연을 하다가 마주친 한 노숙인의 ‘옷도 없고 신발도 낡았다’는 하소연을 듣고 동정심을 느꼈는지 본인의 카드에서 현금을 인출해 준 것이었다. 노숙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빠져나왔다는 등 횡설수설 당시 상황을 설명하시는데, 그날 근무자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건 다음 날. 당사자분은 많이 침울해 하셨다. 어제 있었던 일과는 상관없이 오전에 센터장님이 위기거주홈에 방문하셔서 근무자들과 담소를 나눴는데 이 분은 본인이 잘못하셔서 근무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줄 알고 오해했던 것이다. 센터장님이 떠나시고 난 후 당사자분이 나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 이 분은 시선을 피했다.

“○○씨 드실 커피 한잔 타오셔요.”
“네?”
“아침에 출근하는데 도넛츠 가게에 도넛이 참 맛있어 보이더라구요. 커피랑 같이 맛 좀 보세요.”
“화 안 났어요?”
“화 안 났으니까 맛있는 도넛을 남겨놨지요.”

그제서야 이 분은 안도하시고 커피와 도넛을 맛있게 드셨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뒤 내가 주말 야간 당직을 서게 됐다. 이 분 뿐만 아니라 다들 밤 9시 30분쯤에 나가서 마지막으로 흡연하시고 10시 이후로는 흡연을 안 하시려는 모습을 보였다. 늦게라도 담배 피우려면 얼마든지 피우실 수 있다. 그 시간에 담배 피우신다고 뭔가 큰일은 아니지만, 그 날의 경험으로 되도록이면 밤늦게 안 다니시려고 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한 분은 평소에 아무데서나 막 흡연하시던 습관이 있었는데, 글을 읽으실 줄 모르기 때문에 위험 마크가 그려진 표지판 앞에서도 흡연을 하셨던 아찔한 상황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심지어 다른 분들까지 함께 초등학교 담벼락이나, 어린이들 앞에서 피우던 일도 있었다. 그 때마다 그런 곳에서는 피우지 않도록 하며 흡연구역으로 유도했지만, 여전히 혼자일 때면 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멈출 줄을 몰랐고 그 때마다 아찔한 상황은 계속되곤 했다.

평소에도 정리정돈을 잘 안 하고 사시던 분이라 썩어가는 음료수병과 냄새나는 쓰레기를 보다 못한 근무자들이 보이는 쓰레기만이라도 좀 집어내려고 방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이 분이 숨겨놓은 ‘과태료 딱지’를 발견했다. 무려 10만원짜리였다.

마침 퇴근하고 오셨길래 말씀 나눠보니 화끈하게 보건소 앞에서 피우셨던 모양이었다. 덧붙여 이 분 표현을 빌리자면 ‘재수 없게’ 경찰한테 걸렸다고 하신다. 평소에 체크카드 들고 다니시며 마음껏 긁고 다니시는 분이라 금전관념은 없는 분이었다. 차라리 잃어버린 10만 원의 가치를 깨달으시는 게 나을 듯 해, 별별 비유와 동원이 이루어졌다. 10만 원에 담배가 20갑하고도 라이터가 몇 개, 피자가 무려 10판, 이 분이 좋아하시는 각종 먹거리들과 기호품이 총 동원돼서야 이 분이 방금 잃어버린 10만 원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시는 듯 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다른 곳으로 떠난 이 분을 다시 만났을 때 예전처럼 아무 곳에서나 담배를 피워 물지는 않으셨으며 흡연하시는 곳에 대한 원칙을 스스로 세우신 듯 했다. ‘사람이 많이 피우는곳’ ‘담배 꽁초가 많이 떨어져 있는 곳’ ‘대로변보다는 행인의 왕래가 적은곳’ 10만원이라는 돈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이 분은 10만 원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좋은 경험을 하신 셈이다.

 

위기거주홈에서 금지된 것들

사실 위기거주홈에서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큰 제약이나 제재가 없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본인이 먹고 싶은 것도 구입할 수 있고, 원할 때 밖으로 나가 흡연도 할 수 있다. 또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외출은 하지 않을 수 있고, 먹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먹어도 된다.

그래도 위기거주홈에서 할 수 없는 것은 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다. 예를 들어 폭행, 폭언, 금연구역 내 흡연, 성추행 및 성희롱, 절도행위와 자칫 병원에 실려갈 수도 있는 위험한 일들은 하고 싶다고 해도 당연히 금지된다.

이런 것들이 아니라면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사실 위기거주홈 근무자들에게도 위험부담과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긴 하다. 하지만 해보는 것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당사자분들은 함께 생활하는 종사자들의 말을 듣기 보다는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보고 그것이 좋았는지 나빴는지에 따라 행동의 지속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 분들의 선택을 존중해 드렸을 때 이 분들이 변화하는 것(긍정적인 태도, 적극성, 사회성의 향상)을 나도 이 분들과 마주하며 경험으로 얻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의 선택이 내 판단으로 황당하고, 얼토당토 않고 지금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일단 한 발 물러서서 조용히 바라보는 것. 비록 오늘 실패한 영주가 될 수도 있지만 나에게도, 당사자들에게도 가능성은 열려있으니까 그걸로 됐다. 경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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