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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안에 우생학이 있다
배용진 기자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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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09  10: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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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이러한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母)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하며, 태아가 독자적 생존능력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그에 대한 낙태 허용의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형법 제270조 제1항 위헌소원 판결문(헌재 2012. 8. 23. 2010헌바402)


현재 한국에서 낙태는 죄다.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할 것을 우려한다. 위 판결문에 나오듯 인간의 생명은 너무도 귀중하고, 그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 강간을 당하거나 근친상간으로 임신했을 때, 임부의 건강을 심하게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을 때, 그리고 임부나 그 배우자에게 전염성 질환이나 우생학적 정신장애, 우생학적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다.

 

열등한 인종은 사라져야 한다

우생학(eugenics)은 그리스어로 ‘좋은 태생’을 의미한다.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의 사촌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이 1883년 만든 용어이자 학문이다. 골턴은 박식했다. 지문의 패턴을 분류해 법적 증거가 되도록 도왔고, 황소 무게 맞히기 경기에서 전체 참가자가 추정한 무게의 평균값이 실제 무게와 거의 같다는 사실(‘집단지성’)도 발견했다. 그는 사회가 문명화되어 생존 경쟁에서 ‘정당히’ 희생될 인간이 살아남고 대를 이으며 인간 전체에 피해를 준다고 봤다. 고로 열등한 인종은 사라져야 마땅했다. ‘이성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목표인 혈통 개선’을 위해 골턴은 우월한 인종이 더 많이 번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생학의 가장 자비로운 형태는 우월한 혈통이나 인종의 지표를 살핀 다음, 그 후손이 늘어나 낡은 인종의 후손을 대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생학 신봉자들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저능아는 3대로 족하다

그의 사상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7년 인디애나 주가 정신질환자와 범죄자 등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할 수 있는 단종법을 최초로 제정했다. 이후 약 30개 주가 단종법을 채택했고, 우생학적 결함이 있다고 판단된 6만 명 이상이 불임수술을 당했다. 기폭제는 ‘벅 대 벨(Buck v. Bell)’ 사건이었다. 1927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정신장애인 캐리 벅(Carrie Buck)에게 불임수술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8대 1로 판결했다. 벅은 당시 열일곱 살로 장애인 시설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강간을 당해 낳은 딸 모두 정신장애가 있었다. 대법관 올리버 웬들 홈스(Oliver Wendell Homes)는 판결문에 “후손이 범죄로 처형되거나 저능함으로 굶어죽기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명백한 결함이 있는 사람은 종을 잇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면서 “저능아는 3대로 족하다”고 썼다. 다수의견 판결문을 쓴 홈스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을 때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등 수많은 소수의견을 내어 ‘위대한 반대자(the great dissenter)’로 지금까지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에게 장애인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었을까. 아니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을까.

   
 

살 가치가 없는 생명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치당이 1933년 ‘유전 질환 자녀 출산 금지법’을 만들었다. 대상자 약 40만 명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았다. 나치는 장애인 등을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규정했다. 1939년 일명 ‘T-4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장애인 학살을 시작했다. 장애아를 낳은 한 아버지가 히틀러에게 아이의 안락사를 허용해달라고 편지한 것이 계기였다. 히틀러는 법률 제정 없이 자신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Karl Brandt)에게 장애아를 안락사시킬 것을 지시했다. 처음에는 3세 미만의 아동만이 대상이었지만 1941년, 17세 이하로 확대됐다. 같은 해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는 종료할 때까지 장애아 7만 명 이상이 전국 각지의 수용소로 이송돼 약물이나 굶주림, 가스와 폭탄 등으로 ‘안락사’됐다. 아이의 부모는 ‘최선을 다해 돌봤으나 타고난 질병으로 죽었다’는 의사의 통지서를 받았다. 의사는 대개 필명이나 가명을 사용했다. 이후에도 비공식적 장애인 학살이 지속돼 최대 20만 명이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프로그램 주도자 브란트는 전후 재판에서 “스스로 돌보지 못해 장기간 고통스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을 도우려는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

 

모자보건법 속 우생학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국내에서는 유신 체제 하인 1973년 모자보건법이 만들어졌다. 1964년 민주공화당 의원이 발의했지만 논란이 돼 무산된 ‘국민우생법안’이 그 전신이었다. 모자보건법의 목적은 ‘모성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보건향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당시 법 제9조에 따르면 특정한 우생학적 장애나 질환이 있는 환자를 발견한 의사는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보고해야 했고, 장관은 환자가 불임수술을 받도록 명령할 수 있었다. 이 조항은 인권침해 논란으로 1999년 폐지됐다. 같은 해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이 장애인 강제 불임수술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장애인 시설에서 실제로 강제 불임수술을 행해왔고, 그 과정에서 행정기관과 보건소, 가족계획협회 등 정부 공식기관의 불법적인 협조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초 법 제정 시 임신중절이 가능한 장애 하나는 ‘현저한 유전성 범죄경향이 있는 정신장애’였다. 2009년이 돼서야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걸인정하고 기존 목록을 삭제했고, 대신 태아에 미치는 위험성이 높다며 연골무형성증과 낭성섬유증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두 질환 또는 장애가 있어도 태아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희망을만드는법 최현정 변호사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국가가 가진 ‘태어날 가치가 있는 인간’에 대한 기준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전성 장애라고 하더라도 태아 생명에 문제가 없는데 임신중절을 허용한다면, 태아의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 태아의 ‘질’을 문제 삼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태아에게 장애에 있다고 임신중절이 허용되는 건 아니다. 장애인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특정한 장애가 있어야 한다. 무슨 의미일까. 황지성 여성학 연구자는 “임신중절을 허용해준다고 말하지만 장애인은 아이를 낳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여성학자 수전 웬델(Susan Wendell)은 <거부당한 몸>에 “사회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의 출생을 막기 위해 노력함을 안다면 자신이 가치 없고 그 사회에 속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 장애인을 배척하고 조롱하는 태도와 생활조건을 가진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적었다.

   
 

장애는 비정상인가

우생학이 태어난 영국에서는 2008년 장애를 갖게 될 배아를 일부러 선택하는 것을 금지했다. 장애를 ‘비정상성’으로 규정한 법 조항에 영국의 청각장애인들은 우생학을 멈추라며 시위했다. 의도해서 장애아를 낳는다는 것에 의문이 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한 청각장애인 레즈비언 커플은 그런 선택을 했다. 이들에게 듣지 못하는 것은 치료해야 할 장애가 아니었다. “듣지 못하는 것은 그저 삶의 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스스로 온전하다고 느낀다. 청각장애인 공동체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아이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우리는 들리지 않아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5대째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의 정자를 기증받아 바람대로 청각장애인 아들을 낳았다.

태어날 아이의 머리색을 고를 수 있어 검은 머리를 골랐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그런 특질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다지 이해받지 못했다. 그들의 소식이 <워싱턴 포스트>에 소개된 뒤 자녀에게 고의로 장애를 유발했다며 많은 비난이 뒤따랐다.

 

우리 안의 우생학

우생학은 골턴이 만든 것이지만 그것의 근본적인 생각은 오래된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우생학을 만들고 지지한 사람들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 <국가>를 쓴 건 기원전 374년이다. 문명화를 거듭한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는 우생학적 생각이 곳곳에 있다. 설령 법에서 ‘우생학적’이라는 표현이, 또 모자보건법 14조 1항이 삭제된다고 해도 그 같은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지금도 과거 우생학 지지자처럼 장애인은 아이를 낳을 권리가 없다거나, 장애아는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현실적인 관점에서, 양육할 부모의 어려움과 자라날 아이의 행복 여부를 걱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를 갖게 된 장애 부모에게 임신중절을 하도록 압박하고 아이를 낳은 부모에게 이기적이라거나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게 올바른 방향일까. 수전 웬델은 “장애로 인한 개인적 괴로움은 아무리 접근성과 편의시설이 좋아지고 사회정의가 이루어진다 해도 없앨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장애의 괴로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장애로 인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또 장애를 치료하고 예방하기를 바라는 것과 장애를 가진 사람의 출생을 예방하는 것 사이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작년 11월,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이 약 23만 명의 추천을 받아 청와대의 답변을 받았다. 조국 민정수석은 “모든 부모에게 출산이 기쁨이 되고 아이에게 축복이 되는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할 것이고, 국가의 의무와 역할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겠다”고 답했다.

 

참고 도서

<우생학, 유전자 정치의 역사> 김호연, 아침이슬, 2009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유전자 정치와 영국의 우생학> 염운옥, 책세상, 2009

<완벽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와이즈베리, 2016

<리씽크, 오래된 생각의 귀환> 스티븐 풀, 쌤앤파커스, 2017

<불편해도 괜찮아> 김두식, 창비, 2010

<거부당한 몸> 수전 웬델, 그린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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