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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만의 탈시설, 그리고 미정 씨가 써 내려가는 시(詩)학대 피해 장애인, 그 후
글. 김은정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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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9  10: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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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의 만남

시설에서 26년간 인권유린을 당했던 미정 씨는 탈시설 후 학교에 입학해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들 사이에서 학업을 시작했고, 이제 막 그녀만의 시를 써내려가고 있다. 첫 시의 소재는 출산 후 시설 측에 의해 강제적으로 헤어져야 했던 아이에 대해서였다. 자신의 마음을 글에 담아내고 싶다는 그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그녀는 생각해보면 그 계절의 목포 바다와 참 닮아 있었다.

 

처음 만난 아홉 살 아들

“아동보호시설에 있는 아홉 살 아들을 작년에 처음 만났어요. 태어나서 못 본 게 가슴 아프니까 (그간) 왜 낳았을까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첫 만남 이후로) 생일 때나 명절 등 1년에 서너 번 가는데 혼자 가는 게 어색해서 친한 언니랑 갈 때도, 친한 동생이랑 갈 때도 있어요. 처음에는 저도 낯설고, 아들도 원장님이 엄마라고 불러보라고 해도 부르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돌아)가고 나서 (아들이 친구들한테) 나도 엄마 있다고 무시하지 말라 했다더라고요. 제주도에서 초콜릿 선물이 들어왔는데 안 먹고 아들 가져다줬거든요. 그것도 엄마가 줬다고 자랑하고….”

연신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미정(가명. 43세) 씨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던 순간이었다. 모든 근심과 시름을 잊게 만드는 존재일까. 미혼인 기자는 그 작은 아이가 그 아이만큼 작은 미정 씨에게 얼마나 큰 존재일지 감히 가늠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출산 직후 시설에서 강제분리 되어 8년 만에 되찾은 피붙이. 그래서 귀를 의심할 만큼 잔혹했던 해당 시설의 인권유린 사례들 가운데서도 그녀가 가장 억장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 ‘아기를 떼어 놓은 것’이라는 진술도 어찌 보면 당연해 보였다. 그녀는 당시 시설에 이렇게 간절히 부탁했다.

“외국에만 (입양)보내지 말라 했어요. 외국에 보내면 영영 찾을 수가 없을 거 같았으니까….”

시설 입소자와의 사이에서 미정 씨가 임신하게 된 이후 해당 시설은 더 잔악한 인권유린을 감행했다. 미정 씨는 출산 전후로 정신병원에 몇 달 강제 입원됐으며, 그녀를 비롯한 8명의 여성 입소자들은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산부인과 수술대 위에 눕혀졌다. 그리고 피임 시술인 루프 수술이 강제적으로 진행됐다.

 

“시설에서 내 청춘을 다 바쳤어요”

“할머니, 아버지, 엄마랑 살다 열네 살에 시설로 갔어요.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총을 맞아서 귀가 안 들리셨고, 엄마도 소아마비라… (키울 형편이 못됐다). 좋은 데 있다고 해서 갔는데 거기(시설)였어요.”

왜소증의 지체장애인 미정 씨는 그 무렵 사촌 오빠에 의해 목표의 한 부랑아동시설에 입소돼 2014년까지 약 26년간 시설에 거주했다. 해당 시설은 1980년대 후반 아동시설에서 노숙인 시설로 변경했다. 좋은 곳이라던 시설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대를 이어 운영되던 시설은 입소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했고, 미정 씨도 조리원으로 등록된 시설장의 부인을 대신해 무임금 노동을 했다. 더욱이 시설장 사택 가사 업무 및 시설장 모친 병수발을 하기도 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시설장의 안마를 하도록 불려 나가 폭언과 폭행을 당하기도 일쑤였다. 입소자들의 식사는 미정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돼지 밥’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입소자들이 모여 지내던 방문에는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쇳대가 걸려 감금 생활과 다름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때는 방 하나에 9명 있었고, 텔레비전도 없었으니까… 밤에 (갇힌 방에서) 뭐하냐고 묻는데 그냥 하늘 보고 땅 보는 거죠. 겨울에는 그래도 덜한데 여름에는 선풍기 한 대니까. 더워서 열병이 났어요. 그래도 병원을 안 데려가서 제 돈 들고 간다고 버스 타고 (병원에) 가니까 의사가 어디서 왔냐고 OOO(해당 시설)에서 왔다고 하니까 전화를 하더라고요. 사람 죽이려고 하냐고… 방문한다고… 그리고 저한테 온 열꽃이 (차츰) 다른 애들한테도 퍼졌어요.”

미정 씨는 2014년 8월 퇴소했다. 시설 측은 나가면 거지가 될 거라는 둥 악담을 퍼붓고 뜯어말렸지만 그녀는 몇 년 전부터 푼돈이나마 악착같이 모아가며 다가올 퇴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곳을 나올 때 그녀의 26년 시설 생활을 대변하는 것은 생사조차 들을 길 없는 아들과 600만 원뿐이었다.

“엄마는 저 20살에 아빠는 저 30대 때 돌아가셨어요. 시설로 가서 거의 가족들과 통화만 했죠. 퇴소한다고 하니까 사촌 언니는 고생하는데 뭐 하러 나오느냐고 하는데 (언니는) 이런 거(인권 유린)를 잘 모르니까. 시설에서 내 청춘을 다 바쳤어요. 아프면 꿈에 부모님이 보이는데 엄마는 일어나라고 하고, 아빠는 (원래) 못하셨는데 거기서는 말씀을 하셔요. 제가 제일 가슴 아픈 건 나 이러고 (자립해서) 산다고 엄마 아빠한테 보여주고 싶은데 보여줄 수 없어서 마음이안 좋아요.”

자립 후 따뜻한 한 끼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었던 가족은 그녀의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102살까지 사셨어요.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직전에) 사촌오빠가 할머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신다더라고요. 그렇게 집에 오셨었는데 어릴 때보고 처음 봤던 거예요.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 그날 바로 임종하셨어요.”

현재 미정 씨의 민·형사 재판은 종료된 상태이다. 민사소송은 승소했으나 가해자가 채무를 변제할 의사가 없어 강제경매 신청을 위한 사법절차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사회복지법인이라는 이유로 강제경매 과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정 씨 사례를 지원하고 있는 전남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 이기림 간사는 사회복지법인에서 운영하는 시설의 장애인 학대 피해는 발견되기도 어렵고, 실질적인 손해배상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미정 씨 사례는 가해자가 아닌 가해법인이 있는 어려운 사례에요. 당시 시설장이 주도적으로 했지만 주변 관계자들이나 법인의 묵인이 없었다면 장기간 인권 침해할 수 없는 사례죠. 소송도 길었고, 완료되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도 해당 시설에 한 20명 정도의 입소자들이 있는데 한 번에 폐쇄가 어려워요. 불법 감금, 강제 피임 등이 증거 부족으로 인정이 안됐죠.

현재도 급식이 부실하다든지 당사자들의 자유의사를 통제한다든지 이런 점이 이어지고 있는 눈치고, 당시에 가담했던 직원들도 여전히 근무하고 있어요.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꾸준히 모니터링 하고 있는 것이 최선인 상황입니다.”

 

“놓고 온 구루마 생각에 후회했어요”

기록적인 무더위가 전국을 휩쓴 8월 광복절 다음날 미정 씨를 만난 곳은 전남 목포에 위치한 전남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였다. 미팅은 9시 10분경으로 예정돼 있었는데 미정 씨는 일찌감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왜소증에 무릎까지 좋지 않은 그녀의 이른 여정이 고단하지 않았는지 노파심에 묻자 다행히 그녀는 지역 사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기림 샘(선생님)이 가까이 계시고, 그 아파트에 센터 선생님들 많이 계셔요. 그래서 차를 함께 타고 왔는데 그래도 평소에는 버스 타고 와요.”

알고 보니 미정 씨가 자립할 집을 구할 때 담당 간사가 적극적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권했다고 했다. 그래야 더 섬세하게 미정 씨를 지원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미정 씨도 다소 경직된 듯 보였고 기자도 기관에서 미리 보내 준 자료를 접한 뒤 그녀가 지적장애가 있는 중복장애인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잠시 서로를 헤아려보려는 침묵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 분위기를 깨트린 건 광복절인 전날 그녀의 집을 방문한 손님이 사다준 5만 원어치의 삼겹살 일화였다.

“(뜻하지 않게) 삼겹살 잔치를 했어요. 5명이 먹었는데 아는 남자 동생이 부담되게 고기를 5만 원어치 사왔거든요. 그 동생이 돈의 개념을 잘 몰라서…. 그래서 5명이 먹고 남은 거 돌려보냈어요. 동생한테 돈 아껴 써야 한다 하니까 우리 엄마 아빠 돈 많이 번다고 그러더라고요. 사실 그 집도 가난한데…. 그래서 계속 돈에 대해 일러주고 있어요.”

주 메뉴는 삼겹살이었으나 손님상 마련을 위해 그녀 역시 아침부터 바지런을 떨었던 모양이다.

“손님들이 오기로 해서 조금 떨어진 마트에 갔죠. 집 앞에 편의점이 있는데 없는 게 많아서…. 간단하게 가지나물이나 오이무침을 해야겠다고 갔는데 꽁치(캔)가 (평소) 오천 원 하는데 천원으로 세일하더라고요. (그래서) 세 개 샀어요. 거기에 참치(캔)도 조금 사고. (총) 만 원어치 샀는데 안 무거울 거 같아서 들고 오니까 한 1시간이 거렸어요. 어쩐지 할머니 같아서(웃음) 놓고 온 구루마(핸드 캐리어) 생각에 후회했어요. 아 그리고 태극기도 받았어요. 아파트에서 (광복절에) 달라고 태극기를 나눠주시더라고요.”

 

   
동료 상담 교육 수업 중인 미정 씨

“제 마음을 글로 쓰고 싶어요”

“옛날에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할머니가 여자는 요리든 뭐든 배워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런데 왜 학교는 안 보내느냐고 한 소리 했었던 게 기억나요.”

미정 씨의 대답에 그녀 본인이나 기자 역시 웃음이 번져 나왔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학구열에 대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설에 있을 때도 줄기차게 학교 진학을 요구했던 눈치지만 허가받지 못했고, 장애인들의 일상 훈련을 위해 진행되는 프로그램에도 관심이 일절 없어보였다.

“시설에 있을 때 학교 보내 달라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데(학교) 가고 싶다고 하니까 원장님이 안 된다고 했어요. 비누 같은 거 만들고 그림 그리고 하는 프로그램은 (통) 관심이 없었어요. 아는 언니한테 (학교를)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돈(수업료) 들어가는데 괜찮으냐고 묻더라고요. 상관없다고 했죠. 그리고 입학하게 됐어요. 내일 개학인데 친구들은 다 할머니들이에요.(웃음) 50대부터 80대까지… 연필도 안 잡았던 터라 처음에는 힘이 들었는데 지금은 재밌어요. 월, 수, 금 3시간씩 수업해요.”

미정 씨는 최근에 시를 몇 편 썼고 과제물로 수업 시간에 제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쓴 시의 소재는 늘 가족이었다.

“처음에 아이 얘기, 그 다음에 엄마, 아빠 쓰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관해서 시처럼 썼어요. 맞춤법이 틀려서 친한 언니가 고쳐주기도 했죠. 그리고 학교에 냈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눌변으로) 막히는데 쭉 글로 쓰고 싶더라고요. 제가 제 마음을 글로 쓰고 싶은 거예요.”

글쓰기는 미정 씨 학업의 목표 중에 첫 번째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 보였다. 문학 창작을 전공하는 기자가 문예창작학과에 대해 귀띔을 해주자 미정 씨도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그녀는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취는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들을 위한 바람 같기도 했다.

“한 번씩 (아들에게) 전화하면 제가 엄마 이렇게 생활하고, 수료증도 받고 그랬다고 하는데 한번은 가져와보라고 하더라고요. 막상 저랑 있을 때는 (아들이) 말을 잘 안 하는데 가고 나서 엄마 자랑을 많이 한대요. 교육도 받고 그런다고… 우리 엄마 이렇게 살았다고… 우리 엄마 이렇게 날 사랑한다고…”

 

청심환을 부른 나눔 강사

“저렴하게 고르는 법, 은행업무도 가르쳐주고. (나눔 강사) 올해 처음 한 거예요. 설렘 반 불안 반으로 시작했어요. 애들이 내가 이러니까(왜소증 때문에) 잘 따를까 너무 떨리더라고요. 주변에서는 저보고 청심환 먹고 하라고 했을 정도에요(웃음). 일대일로 맡았는데 아이들이 마트 가서 (가격은 생각 안 하고) 무조건 집더라고요. 그래서 고르는 법을 알려주고 요리는 김치찌개로 정했어요. 그랬는데 아이들이 (스스로를) 손님이라고 생각하며 쉬어야지 하더라고요. 야단칠 때는 확실히 시키고 잘해줄 때는 잘해주라 하던 조언이 생각나 우리가 선생님이고 너희들을 가르칠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죠. 칼질을 못했는데 천천히 하게 했더니 좋아지더라고요. 제가 배운 것처럼 뿌듯했어요. 다음에는 화장하는 법을 알려줄 예정이에요. 아이들이 배우고 싶다 하면 알려주거든요.”

미정 씨는 그렇게 처음 청심환을 부른, 스무 살을 앞두고 있는 발달장애인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나눔 강사 일을 끝마쳤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짐작했지만 애초의 정보와는 다르게 미정 씨에게서는 지적장애의 특성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이기림 간사는 추정하기로 미정 씨가 노숙인 시설에 입소했을 당시에 시설 급여 유지를 위해 시설에서 중복장애 등급을 받도록 의도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다고 짚어주었다.

하지만 이 간사를 포함해 많은 활동가들은 처음에는 미정 씨의 지적장애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에 미정 씨가 눈 마주침이 안 되고, 상당히 위축돼 있고, 단답형으로 일관하는 등 일반적인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립하기까지 우여곡절 또한 많았다.

“전에는 미정 씨에게 자살을 우려하기도 했어요. 시설을 나오시면서 아이를 찾고 싶은데 과정이 힘들었고, 나와서 가해시설을 신고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녹록치 않았고, 현재도 진행 중이거든요. 탈시설 했지만 완벽하게 유토피아가 생겼던 것은 아니었어요. 퇴소 후 잠시 의탁했던 한 여성장애인단체에서마저 돈을 받지 못하고 일을 하는 등 재학대의 위기가 늘 있었죠. 결국은 당사자가 자기옹호능력이 생겨야 해요. 내가 이런 것을 의심해보고, 나한테 호의를 주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이런 사건이 있을 때는 이렇게 대처한다는 예방방법도 알아야 하죠. 그런 과정이 미정 씨에게 총 4년이 소요된 거라 볼 수 있죠. 지금 미정 씨는 자조모임이 굉장히 많아요. 그렇게 여러 사람 만나면서 스스로도 다양한 사례를 배웠죠. 결과적으로 지금은 상당부분 옹호가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어요. 처음에는 법원에 진술하러 가서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떨고 어려워해서 저희가 항상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했는데 이제는 본인이 하고자하는 말을 글로 써서 제출할 정도로 강해지셨어요.”

현재 그녀는 다양한 자조모임, 장애인차별철폐 운동, 인권강사, 나눔 강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왜소증에 무릎연골 퇴화와 다리의 변형으로 장시간 걷거나 서 있을 수 없어 장애 정도에 적합한 직업을 구하기 위해 장애인취업프로그램을 신청해 대기 중에 있다. 소송 중에 있는 미정 씨로서는 현재 쉽게 사회의 안전망을 벗어날 수 없지만 소송으로 기본 재산을 얻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지적장애라는 꼬리표를 없애고 신체장애만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직업을 얻어 탈수급해 살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구심점에도 역시 아이가 있었다.

“소송이 해결되면… 사춘기 넘기면 (아들을) 데려오고 싶은데 데려와서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도) 해요. 아이는 시설에서 대학까지 보내주니까 거기에 그때까지 있겠다고 해요…. 마음은 데려와서 살고 싶은데…. 그래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고 싶어요.”

 

   
장애인차별철폐 운동에 나선 미정 씨와 동료

삼겹살과 꽁치 캔을 사가겠습니다
“이야기하는 거 좋아해요. 상담하는 거 좋아하고. 저처럼 갇혀 있다 나온 사람들 만나고 (주변에서) 누가 시설에 있다가 섬에 팔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내용은 비슷하잖아요. 난 이렇게 살았다 이런 얘기도 교환하고 그런 자리 말이죠.”

그날도 미정 씨는 인터뷰 후 동료상담 교육이 예정돼 있었다. 이미 심화교육까지는 받았다고 했다. 어쩌면 기자가 어느 순간부터 들어주는 쪽이 아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갈증을 느꼈던 것도 그런 그녀의 자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자질은 선천적일까 후천적일까. 이기림 간사의 말처럼 처음 지적장애인이 아니라는 의심조차 못했던 미정 씨는 이제 할 말(?)은 다 하는 강단 있는 그러면서도 넉넉한 맏언니 같은 첫인상을 남긴다.

인터뷰 후 함께 점심을 나눈 뒤 동료상담교육 수업 참석하는 그녀와 헤어졌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기차 차창 밖의 석양을 바라보며 전날 보았던 목포바다의 낙조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지만 그 에너지와 생명력만큼은 8월의 날씨와 그 아래서 넘실대는 바다와 사뭇 닮아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목포를 다시 찾게 된다면 꼭 그녀의 집을 방문해 시간상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간절함을 느꼈다.

“미정 씨 허락해 주실 거죠? 대신 사양하셔도 삼겹살과 꽁치 캔을 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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