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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해서 가장 좋은 건 사람들 안에 있는 거예요그녀의 시선
글.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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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9.03.06  09: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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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혜란 기자

“우리도 일하고 싶다!”

이 구호를 들었을 때, 당신은 누구를 떠올렸는가? 근육질의 비장애남성을 떠올리지는 않았는가. 왜 장애여성을 떠올리지는 않았는가? 산업자본주의 등장 이래 노동자는 비장애남성만을 상정하곤 했다. 최근 몇 년간 장애인 들이 장애인 일자리와 최저임금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아니, 아주 오래 전부터 장애인들이 소리쳐 왔지만 사회의 주요 의제가 되지 않았다. ‘2017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인구 대비 취업자 비율로 보면 여성 장애인의 취업률은 23.4%로 남성 장애인의 절반 수준(47%)이다.

노동하는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 장애인, 그중에서도 장애여성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을까. 스무 살 무렵부터 돈을 벌기 시작해 육십이 된 현재까지 일하고 있는 박정숙 씨를 만났다.

 

손으로 하는 건 자신 있었어요

박정숙 씨는 처음 면접 가서 당한 일을 잊을 수 없다. 사장은 재수 없다며 그녀 등 뒤에 소금을 뿌렸다. 욕 한마디 하지 못한 게 분해서 요즘도 가끔 꿈에 나온다.

“열일곱 살 무렵 노라노 양재학원에서 미싱을 배웠어요. 소아마비라 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일하는 데는 전혀 불편한 게 없었어요. 협회 회장님이 ‘너 정도면 일하면 된다’고 해서 같이 의상실에 면접을 갔어요. 그런데 쫓겨났어요. 아침부터 안경 낀 장애여성이 와서 재수 없다 이거죠. 깜짝 놀랐어요. 손으로 하는 건 다 자신이 있었는데….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그것조차 인정받지 못하니.”

자신감이 많이 꺾인, 사회에서 장애인차별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눈치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홍역과 함께 찾아온 소아마비 감염 때문에 네 살에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그녀를 키운 고모의 말에 의하면, 장애인이 돼서 그녀의 부모가 이혼했다고 한다.

엄마의 얼굴은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재혼하기 전까지 서울에 사는 고모가 키웠다. 고모에게 그녀는 “자기 동생의 인생을 망친 웬수”였다. 친척들이나 이웃들이 놀러 오면 부엌 위 다락방에 있어야 하는 부끄러운 존재였다. 고모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싶어서 말썽을 피우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말썽을 부리지 않으면 아무도 나한테 관심을 안 가져요. 주는 대로 먹고 하루 종일 방에서 책을 보면 아무도안 쳐다봐요. 부르지도 않아요. 그런데 내가 신발 감추고, 지갑 감추고, 설탕 같은 거 다 엎으면, (고모가) 욕하면서 때려요. 그러면 사랑받는 거 같았어요. 그렇게라도 관심 받고 사랑 받고 싶었어요.”

어렸을 적 말썽을 피우면서 가족에게 존재를 증명한 것처럼, 장애인이 일하는 건 사회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일은 존재예요. ‘나 여기 있어요’ 하는 거죠. (일을 안 하면 장애인을) 안 돌아보죠. 말썽을 부리지 않으면 보지 않았던 거처럼요. 끊임없이 (사람들과) 섞여서 일하지 않으면 그때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편안하게 쉬지 못해요.”

그녀에겐 일은 산후우울증도 벗어나게 하는 힘을 주기도 했다. 첫애를 키우면서 우울증이 왔다. 비장애인 남편의 삶은 망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일은 그런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했다.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되는 장애인이 일을 해서 결과물을 내놓을 때 뿌듯함, 자심감.

“애를 키우면서도 일을 했어요. 티셔츠에 라벨 붙이는 거. 몇 천 장씩 붙여요. 일주일에 한 번씩 수금을 해줘요. 20만 원도 벌고 50만 원도 벌고. 남편한테 ‘나 이거 벌었어’ 할 때 회복되더라고요.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거니까 기분이 좋죠. 요즘 우리 아들이 취준생(취업준비생)인데, ‘엄마 용돈 좀 줘’ 하면 제가 10만 원을 딱 줘요. ‘엄마 능력이 있어.’ 이런 건방진 생각이 들죠.

이런 게 끊임없이 나를 일하게 하는 거 같아요. 무엇보다 일해서 좋은 건 사람들 안에 있는 거예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 감수성이 없고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할지라도, 차별적인 생각을 가졌을지라도, 사람들 안에 있으니까 내가 발전할 수 있고, 사람들 안에서 내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좋아요.”

 

장애인은 채용만 해도 자랑거리

그렇다고 일이 즐거운 것만도 아니다. “장애여성이기 때문에 몇 배 노력했어요. 진짜 힘들었어요”라는 말에서 무수한 차별에 부딪쳤을 그녀의 삶이 짐작됐다. 때로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능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이 일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그녀는 차별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당시 패션업체에서 옷 마무리 손바느질 작업을 했는데 같은 일을 하는 비장애인보다 30%나 월급이 적었다. 마침 야학을 다니면서 노동법을 배운 터라 용기를 얻었다.

야학을 찾은 건 처음에 의상실에서 겪은 멸시 때문이었다. 장애인이고 초등학교밖에 안 나와서인지 무시를 많이 당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에 다녔다. 당시 야학에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는 대학생 선생님이 많았다. 그 선생님들에게서 노동법을 배웠다. 항의하다 잘릴지도 모르지만 그만둘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사장을 찾아갔다. 다른 데 취업할 보장도 없으니 생계 문제를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먹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사장님한테 그랬어요. 왜 돈을 조금 주냐고. 제가 손이 빨라서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보다 작업량이 많았거든요. 한 번도 지각한 적도, 결근한 적도 없었고요. 그런데 그분이 ‘내가 너를 채용한 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돈을 똑같이 다 달라고 그랬어요. 안 그러면 고발하겠다고. 야학 다니면서 공부할 때라 선생님들하고 의논한 게 있었거든요. 사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박 양은 야학 다니지 마라. 야학 다니면서 이상한 거만 배워.’ 사장님이 좋은 사람이니까 결국 (월급을) 다 줬다고 생각해요. 야근 안 시키고, 야학도 보내주신 고마운 분이세요. 고마운 것과 나한테 잘해 주는 것과 그건 다른 거잖아요. 당시에 노동법을 배우다 보니까 항상 불타오르고 있었죠.”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었어요

박정숙 씨는 몇 년 전까지 공연엔터테인먼트에서 회원 관리를 했다. 10년 정도 일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관뒀다. 노들야학에는 공부할 생각만으로 왔는데, 노들에 활동지원사 교육기관이 생기면서 노들법인에서 일하게 됐다. 그녀의 전력을 보고 제안한 것이다. 지금은 활동 지원사 교육생들에게 안내와 상담을 한다. 주로 전화 상담이다.

그녀는 나이 먹어서도 일하는 게 좋다고 했다. 힘든데도 명절이나 연휴에 집에 있으면 더 아프다고 했다. 그녀를 부러워하는 친구들한테 그녀는 활동지원사 교육을 받으라고 권하지만 친구들은 겁을 낸다. “나는 노들에서 장애인 취급도 못 받는다”고 말하면 친구들은 자기는 못할 거 같다고 뒤로 뺀다. 그러면서 외롭다고들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노후 꿈은 공방을 차리는 것이다.

“2000년도부터 종이접기를 배웠어요. 강사자격증도 있고 지금도 교회에서 모임을 해요. 장애가 있으니까 나이를 먹으면 2차 장애가 올 거고 그렇게 되면 밖을 못 다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겼어요. 활동을 해야 사람을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종이접기 공방 같은 걸 하면 아이건 어른이건 저한테 배우러 와야 해요. 사람들이 저한테 오는 거죠. 사람들이 이제 너도 쉴 때가 되지 않았냐 그러는데, 10년만 일하고 쉴 거라고 해요. 10년 동안 건강이 받쳐줄지 모르지만…. 내 마지막 버킷리스트는 공방을 내는 거예요. 공방카페 같은 걸 내서 장애인친구가 오든, 갈 곳 없어 외로워하는 친구가 오든, 누구나 와서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마지막 목표예요.”

 

장애여성으로 사는 일

누군가 박정숙 씨에게 장애인이라서 힘들다거나, 맨날 웃고 다니고 안 힘들어 보인다고 하면 바로 화를 낸다고 했다. 장애인이라고 퉁 쳐서 힘들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게 싫다고 했다. 비장애인들도 삶이 힘들듯이 저마다 힘든 삶이 있지 않냐고. 그녀는 그녀의 고유한 삶이 ‘장애 인의 삶’으로만 평가되고 해석되는 게 싫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삶에는 아내이자 엄마인, 누군가의 친구인 박정숙이 있다. 그리고 일하면서 느끼는 어려움과 성취감이 있다.

결혼 전에 공장기숙사에서 일할 때였다. 야학이 끝나고 늦게 들어가면 비장애 동료남성들이 쉽게 몸을 만지곤 했다. 그때는 그게 성추행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비장애 여성들을 대하는 것과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농담 같은 그들의 말이었다. “너 도망가 봐. 도망갈 수 있어? 너 같은 건 밥이야.” 공포 그 자체였다. 그 후로 공장을 관두고 자취하는 교회 언니집에서 생활했다. 결혼도 힘들었다. 비장애인남성과 결혼할 때 겪은 수모는 드라마 장면 그대로였다. 아이 얘기를 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동대문에 있는 공장에서 재단하는 남편을 만났어요. 저는 제품검사라 마지막까지 일했어요. 남편이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사귀게 됐죠. 사장님이 친척 형님이어서 사귀는 게 시댁에 들어갔나 봐요. 반대가 심했어요. 우리 시아버님은 장애인하고 결혼하면 나랑 똑같은 애를 낳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저는 소아마비라 전염병에 의 한 거라고 얘기해도 이해를 못하세요. 그때 임신 중이었는데 진짜 드라마처럼 시아버님이 시누이랑 돈 봉투를 갖고 와서 병원에 가면 애를 돌려서 낳는 것도 있다더라 그러세요. 죽이자는 거죠. 8개월이면 다 만들어졌어요. 사람이에요. 장애가 있는 애기를 낳기 싫다는 거죠. 그래서 남편을 불렀죠. 아버지를 따라가든지 나랑 있든지 결정하라고. 아버님이 호적에서 파겠다고 했는데 남편이 파시라고 했어요. 2년 동안 (시댁과) 왕래를 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녀는 장애여성이 애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면 ‘저 분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생각한다. 남의 일 같지 않다. “그 몸을 해가지고 애를 낳았어?” 하는 말로 시작하는 장애여성에 대한 차별은 그녀만 겪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92년도에 임대아파트를 구하려고 동사무소에 가서 문의했을 때, 장애여성은 장애 남성보다 사람취급을 못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공무원이 하는 말이 내가 장애인이지만 비장애인남편이 있기 때문에 나한테는 임대아파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장애인이어도 남자여야 된대요. 남자는 가장이기 때문에 비장애여성이 부인이어도 (자격이) 된대요. 그 얘기를 듣고 더럽고 치사해서 안 한다고 했어요. 취업해도 장애남성을 더 많이 줘요. ‘남성은 가장이다’ 그런 거 같아요.”

고된 삶의 끝자락에서 노들을 만났다. 그녀는 노들야학을 만난 건 행복이라고, 일을 관둬도 노들야학 학생으로 있을 거라고 했다. ‘가장 좋은 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아무도 장애가 언제 생겼는지, 부모가 있는지 등을 묻지 않는다. ‘비장애인들과 사회에 살면서 나를 계속 말해줘야 했던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 소원대로 이제는 그녀가 행복하게 나이 드는 (또는 들 수 있는) 곳에 머물게 됐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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