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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불편하고 질병은 힘들어요[그녀의 시선] 민들레장애인야학 박길연 교장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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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9.08.09  10:3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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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부(女丈夫)는 남자처럼 굳세고 기개가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여자에게 기개는 어울리지 않는 성품으로 본 편견이 깃든 단어다. 기개가 있는 씩씩한 성인 남성은 대장부(大丈夫)라 부른다. 클 대(大)자라니! 성차별적 시선이 확 드러난다. 그럼에도 여장부라는 지칭이 나쁘지 않을 때가 있다. ‘역시 장부의 풍모는 여자들에게 있지’라고 전유할 만큼 멋진 여성을 만날 때다. 바로 인천에 있는 민들레장애인야학(이하 민들레야학) 박길연 교장이다.

장애인 차별에 저항하는 자리에 꼭 앞에 서는 박길연 씨의 표정에는 기개가 느껴진다. 굳은 표정과 매서운 눈빛으로 공무원들이 뭘 잘못했는지 조목조목 따지는 모습을 보면 ‘여걸’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인천 지역 젊은 장애인 활동가들이 민들레야학으로 모여드는 걸 보면 분명 어떤 매력이 있지 않을까. 벌이 향내를 맡고 꽃으로 가듯이 민들레야학이 있는 인천시 계양구로 찾아갔다. 그녀에게 들은 그녀의 삶은 한 편의 소설처럼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지쳐 보이지도, 닳아 보이지도 않는다. 타고난 힘인지도 모른다.

 

병으로 쓰러지다

1남 7녀를 둔 경찰인 그녀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성차별적 태도를 취한 적이 없다. 딸이건 아들이건 똑같이 대했을 뿐 아니라 동네 어른들의 성차별적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짧은 반바지를 입은 채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 동네 어른들은 “말만 한 처녀가 속옷 다 보이는 옷을 입고 저러고 다닌다”고 핀잔을 줬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 성별 규범을 강요하지 않아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배구나 수영 등 온갖 운동을 즐겼고, 여행도 자주 다녔다.

다만 결혼해야 한다는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둘째인 그녀가 결혼해야 동생들도 차례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결혼 적령기였던 스물일곱에 결혼했다. 선본 지 4개월 만이었다. 상견례를 하고 온 저녁에 심한 감기를 앓았다. 병원에 가니 류머티즘성 관절염 초기라며 주사와 약을 처방해줬다. 그런데 웬일인가. 신혼여행 다음날 일어날 수조차 없게 됐다. 허니문 베이비를 가져 약은 먹지 못했다. 입덧은 심했지만 몸이 괜찮아진 듯했다.

아이를 낳고 몸이 가벼워졌다고 느껴 집안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통증이 조금씩 심해졌다. 결국 100일 동안 하던 모유 수유를 중단하고 약을 먹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아이를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심해져 누워 지내야 했다. 요즘 표현으로 와상장애인이 된 것이다. 모기가 얼굴 주변을 날아도 손이나 고갯짓으로 쫓아낼 수 없어 입으로만 후후 불 정도였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아이가 다쳐도 움직일 수조차 없었을 때였다.

“아기가 아장아장 발걸음을 뗄 때였어요. 딱 한 시간 아기랑 제가 둘이 방에 있는 시간이었는데, 아이가 놀다가 철제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 사이에 발이 낀 거예요. 그 상황에서도 저는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보고만 있다는 게 정말 지옥이잖아요. 그런데 아이가 울면서 ‘엄마 아파요’가 아니라 ‘아줌마 아파요’라고 부르는 거예요. 엄마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 아니까 옆집 아줌마를 부른 거죠. 옆집 아줌마를….”

아기는 주로 남편과 여동생이 돌봤다. 아이는 종종 침대 옆에 와 아픈 엄마를 불렀다. 시댁은 ‘집안에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아들이 고생한다’고 여겼다. 결혼 전엔 겪지 못한 성차별이라 면역력이 아예 없었다. 남편에게 고마웠지만 시댁의 눈총과 폭언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남편과 헤어졌다. 양육권은 그녀에게 왔다. 아이가 엄마랑 살고 싶다고 했다.

병세가 심해져 응급실을 많이 오갔다. 힘들어서 생을 끝내려던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번번이 몸에 상처만 나고 끝났다. 몸에는 그때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있다. 한번은 정신을 잃고 응급실에 갔는데 의사가 한 달을 버티면 잘 견딜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가족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아이를 생각하니 살고 싶어졌다. 아직도 그녀의 어머니는 손자가 그녀를 살린 거라고 말한다. “살고 싶더라고요. 우리 아들 눈빛도 희미하게 보이고. 살겠다고 생각하니까 살 이유만 보였어요.”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병원에서 더 해줄 게 없다고 해서 이름 있는 민간요법을 찾아다녔다. 그 후 건강식품을 먹고 염증이 완화돼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장애인으로 정체화하고 장애인운동을 시작하다

박길연 씨는 자신을 장애인으로 정체화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녀의 몸을 ‘안 아프게’가 아니라 ‘낫게’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을 뿐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와 가족 모두 장애인 복지 카드를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공식적으로 찍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기초생활수급을 받으려면 장애인 등록을 해야 했다. 전남편은 생활비도 주지 않았다. 생활비를 비롯한 치료비나 건강 보조 식품 값을 거의 친정에서 받았다. 2004년 장애인 복지 카드를 만들었다.

“장애인이 아니어야 했던 거죠. 그때는 저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장애인을 인간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어렸을 때 동네에 뇌병변장애인 두 명이 살았는데, 사람들이 쯧쯧거렸어요. 불쌍하게 여긴 거죠. 그걸 보고 자란 저로서는 장애인이 되기 싫었어요. 나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15년을 집에서 웅크리고 살다가 2006년 세상으로 나왔다. 인천에 있는 한 장애인 센터에서 그녀에게 같이 활동하자고 제안했다. 그즈음 활동지원제도화투쟁이 있었다. 중증장애인에게 활동지원서비스는 생명을 건사하는 일이자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다. 활동지원서비스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고 있었기에 앞장서 싸웠다. 2006년 6월 인천시청 앞에서 생애 처음으로 집회에 참여했다. 장애인들이 쏟아지는 비를 쫄딱 맞고 있었는데 공무원들은 나와 보지 않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따졌다. 공무원이 이게 뭐 하는 거냐고. 그렇다. 그녀의 굳셈이나 용기는 복잡하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상식, 비장애인일 때 받았던 대우를 그대로 장애인들에게도 해줘야 한다는 상식을 사회에 요구한 것뿐이다. 중도 장애인으로서 더 뚜렷이 자각된 장애인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경찰에 연행도 됐다. 그녀가 일하던 센터는 달갑지 않은 듯 면회조차 오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그녀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센터에서 나왔다. 나와서 민들레장애인야학을 만들었다. 세상과 운동에 대한 실망으로 집에 있으려고 했지만, 같이 센터를 나온 동료가 여섯이나 됐고 그들이 교육을 못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돈도 거처도 없으니 우선 그녀가 사는 집에 모였다. 하지만 집주인이 뭐라고 해서 다른 곳에 공간을 마련했다. 생활비를 야학에 썼다. 2008년 투쟁의 성과로 괜찮은 공간을 얻게 됐다. 민들레야학이 길거리로 쫓겨난 게 방송을 타면서 후원인도 많이 생겼다.

민들레 야학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장애인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국가에 요구할 게 많고 싸울 일이 많다. 한번은 시급한 싸움이 생겼다고 교육을 하지 않고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문제삼은 야학 교사가 있었다. 그녀는 교사들을 불러 말했다.

“여기는 누가 누군가의 신변 처리를 해주고 목욕을 해주고 밥을 주는 사람이 없다. 교사들에게 그걸 부탁한 적은 없다. 교육이 삶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누군가 밥을 주지 않아서 누군가 신변 처리를 해주지 못해서 죽을 수도 있는 장애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장애와 질병을 가진 여성장애인

그녀의 삶에 장애인운동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장애인운동을 하는 활동가와 연애를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연하에다 비장애인이고 결혼 경험이 없어 부담스러워 헤어질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가치관이 같고 같은 일을 하는 점이 주는 신뢰의 깊이는 동반자로서 정말 큰 힘이 됐다. 장애인인권운동을 먼저 한 사람이기에 배우는 게 많다. 그러나 결혼이란 제도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장애인차별과 성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결혼은, 자신과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할 것이 뻔하다는 게 그녀 생각이다.

장애인으로 정체화하고 살지만 박길연 씨의 병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다칠 때가 많다. 얼마 전 집회에서 경찰이 팔을 꺾는 바람에 팔과 손이 뒤로 돌아간 적이 있다. 병원에 가서 팔과 손을 돌리는 시술을 받았다. 비가 오는 날 노숙하는 건 그녀에게 쥐약이다. 찬바람이 오는 곳에서 노숙을 하면 통증이 더 심해진다. 류머티즘으로 다리가 구부린 채 굳어 있는 데다, 자면서도 허리가 굳지 않도록 수시로 몸을 굴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다른 동료들이 잠을 깰 수도 있으니 미안하다. 그동안 미안해서 질병이 있는 몸을 알리지 않았다. 상태가 더 나빠지면 지금처럼 생활할 수 없으니 몇 년 전부터는 자신의 질병에 대해 주변에 조금씩 알린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바라볼 때 힘든 건 장애인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 때문이잖아요. 내가 나를 장애인으로 받아들이고 나서는 거기에 기죽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제처럼 감기가 들면 아픈 곳이 몇 배로 더 아파요. 그건 어떻게 이겨낼 수도 없는 가죠. 질병이죠. 장애는 불편하고 질병은 저를 힘들게 해요. 아프니까 힘들어요. 불편해서 힘든 것(장애)과 아프니까 힘든 것(질병)은 다르잖아요.”

그녀는 장애를 받아들이면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 대해 용기 있게 반박할 힘을 얻었다. 위축되지 않고 삶을 살아갈 힘 말이다. 그러나 질병 있는 몸이 주는 통증은 그녀의 결심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아픈 것도 ‘아프다, 아프다’ 하면 너무 아프거든요. ‘이 통증은 내 친구야’ 그러면서 살아요. 비 오는 날은 항상 더 아픈데, 그럴 때면 ‘아, 오늘은 친구들 더 많이 왔네’ 이렇게 생각해요. 나만이 살아가는 방법이죠.”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장애 여성으로서, 그녀의 꿈은 소박하다. ‘오늘만큼만 내일도 살 수 있기를’이다. 가까이 있던 장애인들이 하나둘 떠날 때마다 아프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말한다. “사는 데까지 함께 열심히 살자.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많게 살자. 이게 저의 꿈이자 할 일이자 삶의 목표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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