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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시련 그리고 결별정신장애인이 말한다
박은정/정신장애인 인권 활동가  |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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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승인 2020.02.05  15: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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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서른 번 본 영화가 있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나는 이 영화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이 영화를 보여줬다. 엄마, 아빠는 빼고. 가정이 미웠으나, 가족은 결별하지 않을 거란 걸 어린 나도 숙지하고 있던 모양이다. 오늘 서른한 번째 홀로 감상 중이다. 언제쯤 나는 나와 시련을 겪고 사별을 마주할까?

사별. 나는 죽지 않는다. 우울증이 나를 덮쳐도, 때로 온몸을 뒤덮는 분노에 잠식당해도, 억울해도, 비참해도, 후회해도, 실망해도, 설령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다. 정신질환은 괴롭다. 그 자체로 힘들거니와, 아주 개인적인 결함으로 치부되며 누구도 긍정해주지 않는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야, 모두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신뢰한다. 사랑, ‘영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주인공 조제는 장애여성이며 연인 츠네오는 비장애남성이다. 내 애인들은 조제와 츠네오가 만나 사랑하고 결별하는 이야기를 보았지만, 나는 언제나 그 곳에 혼자 있었다. 마음이 아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스크린을 타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널리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미친년이란 본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므로. 내게는 사랑도 사랑이야기도 익숙지 않았고, 내 안에서 나는 미친년이 아니었다. 연인을 옆에 두고 <조제>를 볼 때면 숨을 고르듯 문득 눈치챘을 뿐이다. 아, 맞아. 나는 우울한 사람이지.

모두가 큰 소리로 떠들고 전시하는 아름다운 우애에 장애란 불순물이다. 비유로서 ‘장애’만이 범람한다. 집안의 반대, 온 세상이 적, 부족한 결혼자금, 그런 걸 넘어선 ‘절정’은 존재한다. 절정의 주체는 외부 환경 혹은 심리적 불안 같은 것이다. 내가 <조제>의 조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결별의 주체라는 사실에서 온다. 나는 ‘장애’와 ‘절정’ 대신 조제에 나를 이입한다. 쿨하게 모든 것을 준비하고, 담담하게 사랑을 수용하는 위인이란 명실상부 동경의 대상이다.

<조제>는 우리네 이야기다. 빌 게이츠나 유관순을 동경하는 서민은 없듯, 조제는 우리와 닮았는데 우리보다 멋있어서 동경한다. 누구를 사랑하다가 나의 장애 때문에, 내가 정신질환이 있어서, 미친년이라는 말을 들어서 사랑할 줄 알고 결별하고 삶을 살아가는 그 총체의 주체가 되고 싶기에.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조제, 더 많은 조제들, 20년 후 내 모습을 상상하고 동경한다.

알려지지 않은 결별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냄새 나는 아이였고 더럽거나 더럽혀진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죽은 듯 살아가라는 문장만큼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절 단위로 내 인생에 개입하곤 한다. 사회 구성원에 나쁜 걸 옮기지 않을 책무만을 지니는 오염원. 내 팔목에 그인 수만 획의 고통은 '깡패 같다'고 조롱당할 만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똥을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지는 않는다.

음, 비록 최근이지만 만 스물셋 어느 날엔가, 나는 갑자기 '짐'이라든지 '더럽다'는 말이 비로소 문자 그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엄마랑 당시 내가 신뢰하던 사람의 배신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고, 불현듯 이별이란 개념이 몹시 다루기 쉬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부터 많은 것이 변했다. 훨씬 능동적인 이별들을 겪었다. 실수도 있었고, 인생에서 처음 겪는 성공도 있었다.

 

조제의 휠체어

이별에 이유가 있듯, 정신질환에도 대부분 이유가 있다. 조현병이 세계적으로 유병률 1%를 유지한 데도 그것은 있다. 조현병은 세계적으로 낮은 사회경제적 계층에 많이 보인다는 사실도 유지하나, 언론엔 ‘유전적 소인’만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조현병은 생화학적 기능장애, 생리적 요인, 사회심리 스트레스 등등 다양한 변수의 조합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유독 ‘사회’는 사회심리 스트레스나 사회경제적 계층 따위에 힘을 싣는 데는 인색하다.

전문가와 언론과 대중은 입을 모아 정신질환자를 우선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약물을 투여하면 대개 진정되며, 잠시 입원하고 혹시 심각하다면 영구격리하자고 말이다. 심리상담이나 정신보건을 논하는 전문가는 사실 양심적이다.

모든 국가, 모든 사회, 문화, 개인에 공통된 단일 처방이란 없다. 어떤 이는 정말로 사악한 병마에 일시 휩쓸려, 곧장 약을 먹고 진정되기도 할 것이다. ‘절대로’란 위험한 속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정의란 대부분과 예외, 고정관념과 공감을 적절히 배합해야 이룰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절대다수 정신질환은 맥락 속에 발현되므로 공동체적 합의로써 당사자를 도와야 하나, 예외를 배제하여 정신장애를 본질적 개념으로 오도하지 않는 것. 주로 확실한 근거를 들어 사회 상식에 준하는 평가를 내리되, 그것이 타자화에 더 가깝다면 우선 멈추고 타인의 입장을 느껴볼 것.

조제는 츠네오와 헤어진 후 휠체어를 탄다. 생활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어, 변태 아저씨의 상스러운 요구에도 응하던 그였다. 유일한 혈육이던 장애인 손녀의 외출을 부끄러워하던 할머니의 장례를 치렀지만, 조제는 여전히 집에 있었다. 이후 츠네오와 렌터카에 올라 바다를 볼 때도, 화장실에 가기 위해 츠네오의 등에 업힐 때도, 심지어 휠체어를 사자는 츠네오의 말에 “네가 업어주면 되잖아”라던 조제도, 결코 그걸 살 줄 모르거나 탈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다.

만일 처음부터 조제가 휠체어를 마련했다면, 조제는 단지 힘없는 의존적 여성 캐릭터로 전락할 것이다. 이별하고 나서야 거리를 쌩쌩 누비는 조제의 휠체어가 독립적이고 강인해지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장애인의 이동 수단에 자주성을 부여하나? 장애도 아니고 기술도 과학도 아니었다. 단지 그 순간, 그 상황, 조제라는 사람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는 미련한 짓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열세 살에 처음 삼키던 항우울제를 지금 내가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지 가끔 상상은 한다. 과거를 후회하고 이렇게 할 걸, 해봐야 이미 자라버린 내 인생은 완연히 별개의 색깔이다. 별도의 맥락이고, 선택의 이유도 다르다.

심리적 혼란과 고통을 약물로 진정시키려는 당신 삶 속 맥락, 색, 온도, 이유, 그 총체를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만일 누가 “약물 의존자? 의지가 박약하네” 따위 판가름을 내린다면, 응당 부당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고 반대급부는 당신의 정당함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장애도, 기술도, 과학도, 그 무엇도 당신만큼 자기 실존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약물은 언제든 정신과에 가서 받아올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의 실존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지혜로울수록 세상의 권위, 아름다운 신뢰 따위는 믿지 않는다. 더불어 그 비정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한계와 초라함을 느낄지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만 지혜로울수록 단지 자기 삶과 시간은 아끼고 존중한다는 점이다. 부족한 사람일수록 세상을 과신하나 자기 가치관은 비대하고, 일부의 타인에게 극도로 의존하는 동시에 본인 인생을 돌보지 않는다.

조제는 휠체어가 있든 없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만일 조제가 남자친구 츠네오 혹은 츠네오가 권유한 휠체어에 통제당하는 인물이었다면 <조제>는 하나도 달갑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신질환 치료는 결단코 우리 실존 및 선택권을 넘어서지 못한다. 순서를 명확히 하자.

 

정신장애인의 이름

조제는 언제나 사강의 소설을 읽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나는 몇 번이고 <조제>를 본다. 아무리 늦어도 츠네오와 호랑이를 볼 때면 모든 것을 이해했을 조제는 ‘쿠미코’가 아니다. 꽃과 고양이를 보고 싶고, 칼날의 루미놀 용액 검사를 대비하고, 요리를 잘하는 쿠미코가 작중 어디에 존재하는가. 물고기들, 호랑이, 그리고 조제가 아니다. 조제가 발단이다. 사람들은, 나는 언제나 결별 후 시련이 찾아오고 그것이 나를 결정한다 믿어왔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문득 나의 이름 석 자를 기록했을 엄마와 공무원에 대해 생각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내 이름을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고, 대신 검사지에 적힌 그 석 자를 읽었다. 본래부터 내 것이었던 글자들을 빼앗긴 후로, 나는 줄곧 상실 뒤에 고난, 고난 뒤에 내가 오는 줄 알았다.

내 이름이 이제 본래 목적과는 다른 기호, 다른 방식, 다른 의미를 갖는 이름일 수 있다면 좋겠다. 고작 스물세 살이 되어서야 이름을 찾다니 퍽 모양 빠지지만, ‘정신질환’을 재전유할 수 있다면 멋질 것 같다. 오히려 희망 찬 약자 임파워링이나 역전의 성공 서사란 좀 오만하고 찌질한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 애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조제에서 출발해, 호랑이와 물고기를 보고 다시 조제로 돌아간다. 나도 그렇고, 우리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죽을 수가 없다. 이제 더는 아무에게도 <조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 다시 정신과에 들를 수도 있다. 정신장애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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