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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시설장은 개인재산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해요"거제도 애광원 김임순 원장
박숙경  |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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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1997.05.01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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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거제도 애광원 김임순 원장

 

"시설장은 개인재산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해요"


  시설에서 벗어나자는 탈시설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최근까지도 우리나라 장애우복지 예산의 반이 넘는 액수가 수용시설 운영비로 쓰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장애우 수용시설은 시설운영자들의 파행운영과 비리로 여론의 지탄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과연 올바른 시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함께걸음은 100호 발간을 맞아 우리나라 장애우 수용시설 중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거제 애광원의 설립자이자 우리나라 시설복지사의 산 증인인 김임순 원장을 만나 그이의 45년 시설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현장에서 장애아를 돌보고 있는 김 원장을 통해 수용시설의 현주소와 복지시설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들어본다.

 


피난길 움막에서 영아시설로 시작된 애광원


 이태곤   원장님이 거제도에 애광원을 설립하신지 올해로 45년째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독자들을 위해 애광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와 애광원 현황에 대한 소개부터 해주시죠.

 김임순   애광원은 6·25전쟁을 피해 거제도로 내려온 난민 중에 부모를 잃거나 버려진 영아들을 제가 돌보면서 시작되었어요. 당시 전쟁으로 인해 버려진 영아들을 돌볼 시설이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전국적으로도 영아시설이 5∼6개 정도 있었을 뿐이었고 거제도에는 단 한 곳도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의 전신인 사회부 분실장님의 권유를 제가 받아들여 지금 이 자리에 움막을 짓고 영아 7명을 돌보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죠. 현재 저희 애광원은 제가 원장으로 있는 애광재활센터와 정신지체인 요양시설인 민들레집 그리고 애광특수학교와 특수학교를 졸업한 장애아들을 위한 보호작업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애광원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기존의 영유아시설을 그대로 사용해 오다 85년부터 숙소나 교실 등을 정신지체아들에게 맞게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지요.

이태곤 영아시설을 정신지체인시설로 전환하게 되신 계기가 있었을텐데요.

김임순 애광원이 정신지체인시설로 전환한 때는 1978년입니다. 그 이전에도 돌보던 아동 중에 정신지체아가 있긴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약물중독 등에 의해 정신지체인들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기왕이면 아무도 돌보려 하지 않는 정신지체아이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시설을 바꾸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50여 명의 정신지체아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지금은 230명으로 식구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이태곤 원장님에 대한 소개의 글을 보니까 원장님 고향은 경북 상주시더군요. 상주분이 어떻게 거제도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원장님 가정 이야기도 좀 들려주시죠.

김임순 저는 결혼해서 딸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6·25로 인해 사실상 가정이 파괴되었지요. 시아버님은 납치당하시고 남편은 임신 중인 저를 상주에 있는 친정에 데려다 주고 돌아가던 길에 전쟁이 나서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그 후 저는 수소문 끝에 시어머니가 피난가 계시다는 걸 알고 거제도로 오게 되었지요. 그래서 결국 거제도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딸아이는 시어머니가 돌보아 주시고 저는 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딸아이는 지금 사위와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고 외손녀가 둘 있지요. 아마 저는 6·25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이태곤 원장님께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여성이 대학을 가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 때 전공과 장래희망은 무엇이었는지요.

김임순 원래 저의 꿈은 사회사업가는 아니었습니다. 조금 거창하지만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 훈련과 도시락을 싸가지 않는 훈련, 사진을 같이 찍지 않는 훈련 등을 했어요. 그 덕에 지금까지도 저는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해방이 됐습니다. 그 이후 제 꿈은 피폐해진 농촌을 살리는 농촌운동가로 바뀌었지요. 농촌에서 활동하기 위해 대학에서 가정학과, 그 중에서도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6·25 전쟁이 나면서 전공과는 상관없이 사회사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시설을 운영하면서부터는 제가 가정학을 전공한 것이 큰 도움이 됐지요. 가정학은 주거, 의복, 영양, 경영까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학문이어서 시설운영을 위해 필요한 많은 것을 대학 때 배운 셈입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 아이들에게 인스턴트 식품을 먹이지 않고 무공해로 직접 만든 음식만을 먹이고 있습니다. 신기하게 재래식으로 담은 고추장, 된장, 간장을 먹은 아이들은 발작도 줄어들어요. 아마도 정성과 사랑의 힘일 겁니다.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자는 원칙으로 운영


이태곤   지금까지 애광원을 거쳐간 원생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요. 또 영유아시설과 장애우시설을 다 운영해 보셨는데 비장애아동을 돌보는 것과 장애아동을 돌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떤 원칙을 갖고 애광원을 운영하시는지도 말씀해주시지요.

김임순   1952년부터 애광원을 거쳐간 아이들이 약 7백 명쯤 될 겁니다. 장애아와 비장애아의 차이점이라면 비장애아를 키울 때는 제가 키우는 아이가 누구보다 건강하고, 똑똑하고, 공부도 잘 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좋은 위치에 있기를 바랬었어요. 그런데 정신지체아들과 함께 있다보니 그것이 다 헛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오히려 이 아이들에게서 순박한 사랑을 배울 때가 많습니다. 제가 애광원을 운영하면서 갖고 있는 원칙은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집 아이들은 정직을 강요하지 않아도 정직하죠.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아첨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태곤   처음 시설을 운영하실 때보다 지금 시설환경이 많은 변화가 있었을텐데요.

김임순   많이 달라졌지요. 제가 처음 시설을 시작하던 때는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람도 별로 없었고 경제도 어려워서 시설환경이 말이 아니었지요. 그때에 비해 요즈음에는 경제도 나아지고 사회의 인식수준도 많이 좋아져서 시설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 일선에서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바라는 환경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이태곤 구체적으로 어떤 환경을 바라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임순 그전에 옛날 이야기 하나 하죠. 처음 영아시설을 시작했을 때 제가 이 산중턱 오막살이에서 아이들과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에게 "저는 페스탈로찌 같은 사람이 못돼서 도저히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어요. 그때 새벽녘에 "네가 왜 그 아이들 수준으로 가려 하느냐? 아이들을 네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응답을 받았어요. 그 순간 저는 저도 모르게 "이 아이들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서원을 했지요. 그때로부터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는 장애아든 비장애아든 누구보다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시도 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결국 제가 하는 일이라는 게 이 아이들의 권익과 좋은 환경을 지켜주는 것이잖아요. 이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애광원이 만들어졌는데 어떤 분들은 저희 애광원이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을 얹고 별장같이 해놓고 사니까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지요. 속 모르시는 말씀이예요.

이태곤 지금까지 애광원을 운영해 오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는지요.

김임순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이 제일 크죠. 두번째는 이곳 거제도에는 대우와 삼성, 양대 조선소가 있어요. 그래서 인건비가 굉장히 비쌀 뿐더러 굳이 여기 와서 어려운 일 안해도 일자리가 많다보니 시설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50명 이내의 수용시설이 바람직한 시설


이태곤 최근 선진외국의 흐름을 보면 시설의 규모가 점점 작아지는 추세입니다. 오랜동안 시설을 운영해오신 분으로서 큰 시설과 작은 시설과의 장단점에 대해서 알고 계실텐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작은 시설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 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임순 저도 처음에는 50여 명의 정신 지체아동들과 오순도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부에서 자꾸 장애아들을 보내서 100명이 넘었고 또다시 중증장애아들이 오게 돼서 원생들이 200명이 넘게 됐어요. 그렇게 아이들이 많아지다 보니 요양시설이 필요해져서 짓게 되고, 아이들 교육문제가 중요하니 특수학교를 짓게 되고, 또 유치원에서 고등부까지 졸업한 아이들이 오갈 데가 없으니 보호작업장을 건립하게 되어 어느새 애광원도 대형시설이 되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다 자라서 몸집이 커지니까 기존의 시설이 비좁고 부족하더라구요. 그래서 요즈음에는 또다시 성인이 된 원생들을 위한 그룹홈을 해보려고 부지를 매입해서 아파트를 짓고 있지요. 그렇긴 해도 저도 개인적으로는 50명 이내의 아이들만 있는 시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장애가 다양하게 섞여 있는 시설보다는 한 가지 장애만 가지고 있는 아이들만 전문적으로 돌보는 시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태곤 그릅홈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하는데, 그룹홈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먼저 원생들 직장이 확보되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원생들 직장은 확보되었는지요.

김임순 그 점이 가장 어려운 점이예요. 한 번은 이 지역 세탁소에서 아이들이 일을 하게 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만둬야 했어요. 이유는 아이들이 걸리적거려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일단 그룹홈의 아이들이 시내에 살면서 다시 애광원 자립작업장으로 출퇴근하도록 했지요. 이곳에서 사회 경험을 충분히 쌓고, 지역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하는 기회를 늘려볼 계획입니다.

이태곤 모범적으로 시설을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시설을 운영하는 시설장이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한다고 보는데요. 원장님은 시설장이 갖춰야 할 덕목을 뭐라고 보시는지요.

김임순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많은 질타를 받는 사회적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지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시설장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야 한다고 봅니다. 시설장은 개인재산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해요. 저도 개인 재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것이 없으면 편해집니다.

이태곤 원장님은 평생을 복지사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부문과 호암상 사회봉사상 등 큰 상을 많이 받으셨는데요. 상 받은 이야기도 해주시죠.

김임순 막사이사이상은 시설장으로서 받았기보다는 이곳 거제군 내에서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상을 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을 상이 아니었지요. 어찌됐든 제가 받은 가장 큰 상인데,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에서 이 상을 받은 10명 중에 저를 포함해서 여성수상자가 3명입니다. 김활란 박사, 이태영 박사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인데 우리 세 사람은 이화대학총장, 교수, 학생이라는 공통매개가 있더군요. 지역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 맡고 있는 가정법률 상담소 거제지부 외에 다른 활동을 할 여력은 없어요. 왜냐하면 외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려면 적어도 가고 오고 하는데 2-3일은 걸리는데 그럴 시간적 여유가 나지 않아요. 이곳에서 제 본분인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까요.

이태곤 원장님이 아이들을 직접 돌보기도 하시나 보죠.

김임순 그럼요. 저는 이곳에서 살고 이곳이 제 집이고 아이들이 제 가족입니다.

이태곤 함께걸음의 5월호로 1백호를 맞았습니다. 원장님도 애독자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바람이나 격려말씀을 부탁합니다.

김임순 함께걸음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평소 김성재 이사장님이나 장애우 권익문제연구소 직원들의 노력에 감사하고 있죠. 연구소와 함께걸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만이 아닌 장애우들을 위해 투쟁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정리․사진 / 박숙경 기자

 

 

 

[김임순 원장 약력]
  1925년 경북 상주시에서 출생한 김 원장은 1949년 이화여자대학 가정대학을 졸업했다. 1952년 애광원의 전신이었던 애광영아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을 지냈다. 이후 1958년 애광직업보도소, 1970년 애광기술학교와 애광탁아소(현 옥수어린이집)를 설립했으며, 1978년 영육아시설인 애광영아원을 정신지체인복지시설로 전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 원장은 애광원 외에 1988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거제지부를 개설하고 현재까지 소장을 맡고 있으며, 1992년 4월 한국기독교인권위원회(KNCC) 장애인운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 원장은 평생을 사회복지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막사이사이상(사회지도부문), 1994년 제4회 호암상(사회봉사부문)과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만난사람 이태곤 함께걸음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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