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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그 ‘함께-함’을 사유하기 위하여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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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09.04.17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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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자 공간’으로서의 ‘시설’

지금 나는 ‘시설’이라 불리는 어떤 특별한 공간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곳은 내가 체험은커녕 직접 보지도 못한 공간이다. 희소한 곳이어서가 아니다. 서울시만 하더라도 지원 법인 수가 38개, 수용 장애인 수만 3천 명이 넘는다. 그럼에도 그 많은 ‘시설’과 시설장애인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시설은 우리 사회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다.

‘시설’은 분명 번지수를 가진 물리적 장소이지만 또한 도덕적 장소이다. ‘시설’에 들어가는 것은 서점이나 박물관, 병원에 가는 것과는 다르다. ‘시설’에 들어가면서 장애인은 ‘자립할 수 없는 존재’, ‘버림받은 존재’라는 낙인을 맘속에 찍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돌봄을 받기 위해 들어가지만, 그것은 주변에서 돌봄을 포기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설’은 준사법적 공간이기도 하다. 전화나 외출 등이 사실상 통제되고, 일부에서는 교도소와 비슷한 생활방식까지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시설경험 장애인들이 시설생활을 ‘형기 없는 감옥’, ‘옥살이 아닌 옥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 ‘시설’ 입소를 결심했다면, 아니 강요받았다면, 그는 이런 규정들이 내려진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다. ‘시설’은 진정 먼 곳에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물리적으로 제 아무리 가까워도 ‘여기(here)’라 부르지 못하고, ‘거기(there)’라고만 부를 수 있다. 누군가 ‘시설’에 입소한다는 것은 어떤 어둠 속으로, 어떤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사회의 어떤 공간에 들어가는 일이 어떻게 사회를 떠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어떻게 그런 공간이 있을까. 사회란 여러 공간들의 집합이다. 사물들의 배치에 따라 다양한 공간이 존재한다. 맑은 공기와 따스한 햇살, 울창한 삼림이 쾌적한 침실과 어울려 휴양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비슷한 지역에 좁은 창과 닫힌 철문, 감시카메라 등이 결합해서 감금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를 이루는 이 다양한 공간, 다양한 배치 중에서도 다른 것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갖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른 모든 배치들을 비춰주면서 동시에 뒤집혀 있는 배치이다. 그것은 국지적임에도 사회 전체의 윤곽을 드러내고, 사회 내부에 있으면서도 ‘외부 공간(espace du dehors)’을 구성한다. 푸코(M. Foucatult)의 명명을 빌자면 그것은 ‘타자 공간(espaces autres)’ 혹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

내 생각에 ‘시설’은 우리 사회에서 명백히 그런 공간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오늘 ‘시설’이라는 특정한 공간, 특정한 배치를 통해 우리 사회의 윤곽, 우리 시대 권력의 어떤 중요한 배치를, 흐릿하게나마 읽어내고 싶다. 무엇보다도 ‘인간’과 ‘삶/생명’에 관련된 우리 사회의 ‘기본 인식’, 좀 더 엄밀히 하자면 ‘인식의 토대’를 문제 삼고 싶다. 그리고 이 토대에 구멍을 내기 위한, 이러한 사회적 배치를 깨기 위한 실천, 일종의 ‘대항 배치’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시설’의 문제를 특정 장소와 사람의 문제로 국소화하는 시도에 반대한다. 우리는 ‘타자 공간’을 ‘타자의 공간’으로 국한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에게 장소를 지정하는 일은 자칫 ‘거기’를 ‘여기’와 분리시키고, 거기 있는 이들을 여기에 있는 이들과 무관하게 만들 수 있다. 마치 거기에는 타자가, 여기에는 동일자가 있는 듯 생각하는 것은 내 안의 타자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들 뿐 아니라, 서로의 변신 잠재력을 차단하는 아주 나쁜 태도이다.

나는 우리가 서로의 언어를 아는 것이 불가능할 때조차, 우리의 공통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시설’은, 운동가의 상투적인 선언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의 문제로 제기되어야 한다. ‘거기’를 사유하는 일은 ‘여기’를 사유하는 일이다.

2. ‘거기’에 수용된 것

시설에 수용된 존재의 정체를 묻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거기에는 누가, 무엇이 있는가. 시설이 보호와 육성의 공간인지, 파괴와 감금의 공간인지를 논하기 전에 거기에 격리되어 있는 삶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보자. 시설에 격리된 채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가는 것, 일 년에 한두 번 놀이 공원에 간 것이 전부인 사람들의 삶, 그 삶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이 제거된 채, 삶의 모든 색깔이 벗겨진 채 시설에서 관리되고 있는 그 무색(無色)의 삶은 무엇인가. 조르지오 아감벤(G. Agamben)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발가벗겨진 삶(barley life)’, ‘날 생명(just life)’이다. 인간의 삶이 생물학적 생명으로 급격히 축소되는, 다시 말해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배설을 하고, 성장을 하다 또한 쇠약해져가는 ‘그저 생명체’로 축소되는 것이다.

노경수씨의 증언.
“아침에 콩나물국이 나온다. / 넓은 대접에 밥을 말아가지고 온다. / 아이들은 그것도 정말 잘 먹는다. / 점심은 콩나물국에 김치를 넣은 국이 나온다. / 저녁은 콩나물국에 김치를 넣고 거기다 두부를 넣은 국이 나온다. / 거기다 밥을 말아서 아이들에게 먹인다. / 잘~ 먹는다. / 왜? 배고프니깐!” 차라리 ‘시’라 불러야 할, 그의 절규와 분노를 담은 증언은 이렇게 계속된다.

“그들이 사온 과자들은 고스란히 창고로 들어가서 썩고 있다는 것을... / 그들은 모를 것이다. / 그런 위문품은 들어온 순서대로 창고에서 나온다. / 유통기한 다 지난 바람들어간 과자. / 그것도 / 잘 먹는다. / 왜? 배고프니깐!”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의 의미를 단 한 문장에 압축하고 있다. “춥고 배고픈 것보다 더 슬픈 건 내가 짐승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소위 ‘인간적인 것’이 제거되었을 때 사람의 생명은 한없이 ‘동물적인 것’에 가까워진다. 시설생활경험자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나는 시설에서 살고 싶지 않다! 시설은 사람을 사육하는 곳이다.’ ‘날 생명’이 되었을 때 인간의 삶은 사실상 동물의 삶이다.

가령 시설경험자 배덕민씨가 자신이 들어간 기도원에 대해 이렇게 말할 때, 즉 “말이 기도원이지 소가 20마리, 개가 30마리, 알콜중독자가 80%, 지적장애가 20명이 있었던 곳이야.”라고 할 때, 그가 동물들과 사람들을 함께 세어나갈 때, 나는 그것을 느낀다.

아감벤은 ‘어떻게 그런 잔학한 일이 인간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었느냐’고 묻는 것은 위선적이라고 했다. 하나의 구조에서 눈을 떼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일어난 일들이 범죄의 사법적 개념을 초월해 있는 탓에 흔히 우리는 강제수용소를 사유할 때 그런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던 특별한 사법적 정치적 구조를 간과한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범죄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권리와 특권을 완전히 박탈할 수 있는” 권력의 행사 구조 자체이다.

어떤 개별적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도 ‘시설’은 잔인하다. 그 잔인성은 인간의 삶을 ‘날 생명’으로 떼어내어 권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시켰다는 점에 있다. 권력이 ‘날 생명’을 돌보든 파괴하든 상관없이, 한 삶이 ‘날 생명’으로 분리된 채 관리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침대 위에서 편히 자고 있을 때조차 무방비 상태의 ‘날 생명’을 보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가.

“보모들은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자해나 사고가 벌어지니까 지적장애 아이들에게 CP라는 약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때로는 이틀이고 삼일이고 깨어나지 못하고 잠만 잤죠.”

그런데 ‘날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이 비단 ‘시설’의 문제일까. ‘시설’은 정말로 예외적인 공간일까. 하지만 모든 ‘예외’들은 상례, 즉 규칙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준다. 아니 우리 시대,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리는 예외이기는커녕 아주 상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디즈니랜드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이 감춰진다’는 보드리야르의 수사처럼, ‘시설’은 우리 사회, 우리 시대가 시설을 가능케 하며, 더 나아가 하나의 시설일 수 있음을 감추는 게 아닐까.

앞서 내가 인용했던 두 사람의 이론가, 푸코와 아감벤은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 속에서 근대 사회의 독특함을 읽어내고 있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의 “기본 현상 중의 하나는 소위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이다. 권력이 생명체로서 인간을 장악한 것, 생물학의 국유화라고나 할까,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의 경도 현상이다.”

생명 자체를 가꾸고 관리하는 것이 근대 권력의 가장 큰 관심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근대 권력을 ‘생명권력(biopower)’이라 불렀다. 물론 이 권력의 관리 대상은 개개 인간이 아니라 한 종 전체[국민]의 생명력이다. 권력은 개인에 대한 훈육보다는 전체 생명의 건강, 그것의 ‘정상적(normal)’ 분포를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을 둔다.

권력의 관심은 한마디로 ‘정상화(normalization)’에 있다. 근대 생명권력은 출생율, 사망율, 발병율, 노화율 등 전체 인구의 생물학적 건강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축적하고 위험율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때로는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열등하거나 문제 있는 개별 집단을 정리해버리는 잔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체를 위해 ‘살게 할 자’와 ‘그럴 가치가 없는 자’를 규정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날 생명’에 대한 관심이 근대만이 아니라 고대부터 서구 정치 관념의 근간이었다고 말한다. 서구에서 정치란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적 삶[조에, zoe]에서 인간적 삶[비오스, bios]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었다. 다만 고대의 정치에서 동물적 삶이 ‘배제된 채로만 보존’되었다면, 근대에서는 정치의 중심으로 진입해서 인간적 삶과 구분 불가능해지게 된 것 뿐이다.

근대 정치의 중심 테마들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령 ‘국민국가(nation state)’는 ‘출생(nascita)’이라고 하는 자연적 사실에 근거해 있고, 민주주의와 인권은 시민법 이전에 ‘날 생명’의 인간이 이미 가졌다고 간주된 권리에 기반하고 있다. 근대 파시즘이나 인종주의가 보여준 생명에 대한 잔인한 학살 역시, 역설적이지만 생명에 대한 대단한 관심의 결과이다.

그렇게 보면 ‘시설’은 근대 사회의 ‘일탈’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근대 사회를 충실히 보여주는 ‘증언’의 장소이기도 하다. 근대의 생명 권력은 ‘시설’에서, 생명에 대한 육성과 폐기, 보호와 감금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설’에서 그 진정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

3. 치외법권지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와 ‘무엇도 할 수 없는 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수용소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적나라하게 인간이라는 추상적 사실로만 존재하는, 그저 ‘인간에 불과한 사람’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최대의 위험에 처한다고.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인권’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인간에 불과한 사람’은 아무 권리도 갖고 있지 않음이 드러난다. 인간 그 자체에 다가갈수록 인권은 선명해지기는커녕 추상화되고 껍데기만 남는다. 오히려 한 생명이 그저 ‘인간에 불과할 때’, 그것을 다루는 권력이야말로 무한한 권리를 갖는다. ‘그저 인간’을 다루는 권력에게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때 권력은 주권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시설’은 법이 미치지 못하는 지대, 대신 법을 대체하는 규칙들[시설 안에서 사실상 ‘법’이 되는 명령들]을 만들어내는 지대이다. ‘시설’에서 우리는 일종의 ‘치외법권(extra-territorial)’ 지대, 말 그대로 영토 안에 있는 ‘영토 바깥’ 지대를 보는 것이다.

이따금 언론에 보도되는 ‘시설’에서의 구타와 성폭행, 심지어 일부에서 확인된 살해와 암매장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와 ‘무엇도 할 수 없는 자’가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들의 예시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우리는 미등록이주노동자의 단속추방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소위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미등록이주노동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불법적’ 존재가 아니다. ‘합법’과 ‘불법’은 재판을 통해 가려지지만, 이들에게는 재판받을 권리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실상 ‘법 바깥 존재’, 즉 ‘치외법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법적’이라기보다는 ‘법외적’이다. 따라서 법은 원칙상으로는 이들에게 어떤 보호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치외법권지대’에 있는 존재가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외법권지대’에 있는 주권의 대행자를 만날 때, 즉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단속추방 요원들을 만날 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난다. 대규모 단속추방이 시작되면, 요원들은 ‘동물’을 사냥하듯 특정 구역을 버스로 에워싸고 도망치는 노동자들을 잡아들인다. 심지어 그물총을 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시설 규칙을 위반하고 행패를 부렸다는 이유로 장애인에게 ‘개목거리’를 채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치외법권지대에서는 이처럼 ‘처벌받지 않는 범죄행위’가 일어난다. 여기서 ‘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 법 바깥이기 때문이다.

4. 신성동맹 -국가와 자본, 그리고 가족

장애인이 시설 입소를 택한 경우는 자발적일 때조차 자신에 대한 가족의 ‘포기’를 예감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시설에 들어간 이들 중에는 부모가 ‘유기(遺棄)’한 경우도 많다.

이규정씨의 증언.
“어머니가 목욕을 시키시더니 평소에 입어보지 못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더라고요. 조금 있느니 택시가 오고,… 나중에 알고 보니 대전시 동구에 있는 터미널 버스 대합실이었더군요. 의자에 나를 눕혀 놓고 부모님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셨어요.”

시설에 가지 않고 집에 있다 해도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집 자체가 ‘시설보다 더 시설 같은’ 곳이 되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들은 집 안에 ‘유기’되기도 한다. 상당히 많은 시설 경험자들이 입소 전에 수년에서 수십 년을 외출하지 못한 채 집 안에 갇혀 지낸다.

정윤선씨의 증언.
“77년도부터 집밖으로 한 번도 나와 본 적 없다가… 2002년도에 집에서 처음 나왔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집에서 마당도 못나왔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조금만 나가도 왜 나가냐고… 막 혼냈어요.”

가족이 장애인을 유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보다 먼저 사회, 특히 정부[국가]와 기업[자본]이 장애인을 ‘방기’하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버틸 수 없는 하중이 실리는 건 장애인에 대한 정부의 방기 탓이 특히 크다.

한국에서 장애인 시설에 대한 국가 정책이 체계적으로 수립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80년대 들어서였다. 그러나 법과 제도, 예산은 한 없이 미비하다. 교육, 소득, 주거, 활동보조, 이동권 등과 관련된 복지 시책들이 2000년대 이후 장애인 투쟁의 성과로 미약하게나마 시작되었을 뿐이다. 장애인 복지예산의 경우 총액은 말할 것도 없고, GDP 대비 비율에서도 OECD 평균의 약 1/10 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의 방기 탓에 기업 역시 장애인을 노동시장에서 아예 배제해버린다. 가령 2000년도에 이루어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증장애인의 취업율은 13.2%에 불과하고, 경증장애인도 52.3%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은 시설 입소를 사실상 강요받는다. 사회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장애인의 경우 ‘추방’은 ‘포기’, ‘유기’, ‘방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그 강제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가족, 정부, 기업이 추방 주체로서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추방의 주체는 마치 이들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자체인 것 같다. 그러나 ‘포기’, ‘유기’, ‘방기’라는 단어에 포함된 공통 글자 ‘기(棄)’는 말 그대로 ‘내다버림’을 뜻한다. 포기한 자, 유기한 자, 방기한 자는 글자 그대로 추방하는 자다. 그것은 세련된,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위선적인 ‘추방’이다.

그런데 ‘시설’ 입소는 일종의 ‘추방’이면서 또한 ‘포획’이기도 하다. 가족, 국가, 자본에 의한 ‘내다버림’은 새로운 ‘붙잡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설’에서 가족과 국가, 자본의 복합체를 발견한다. 먼저 가족이 포기한 곳에서 가족관계가 만들어진다. 장애인과 관리자로 이루어진 시설은 흡사 ‘대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설 관리자들과 시설 장애인은 대체로 부모와 어린아이의 관계를 맺는다. 한편으로 보면 가족을 떠나온 수용자에게 후견인이 되어 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의 권력을 수용자에게 행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준애씨 증언.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면 여름엔 나시도 입으면 안 되고, 치마도 입으면 싫어했지요. 외출할 때 여자들은 빨리 들어와야 하고 남자친구가 생기면 무슨 일 있었느냐 어디엘 다녀왔느냐 물었어요. 여자는 함부로 몸을 굴리면 안 된다는 말. 너무 황당했지요. 또 벌점을 무서워했는데, 잘못 해서 벌점을 받게 되면 반성문, 시설에서의 노력봉사, 한 달간 외출금지를 받았거든요.”

다른 한편 장애인을 노동시장에서 배제했던 자본은 ‘시설’에서 장애인 신체, 장애인 생명의 상품성을 발견한다. 시설의 대규모화 현상은 수용 장애인 수에 따라 정부 보조금이 지급되는 것과 깊이 관련이 있다.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 한 사람은 그 존재로 매달 40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 강요가 여러 곳에서 벌어진다.

배덕민씨 증언.
“부업으로 마늘도 깠는데, 아침 먹고 까고, 점심 먹고 까고, 저녁 먹고 까고, 돈도 못받고 죽도록 일만했어. 그러고도 한 달에 집에서 20만원씩 시설에 내야 했지.”

심지어 정부에서 지급하는 기초생활수급비를 갈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은순씨 증언.
“나온 후에야 개인수급비도 횡령한 줄 알았어요. 3년간 있었는데, 3년간 나온 수급비가 천팔백만원 정도 되더라고요. 물론 한 푼도 못 받고 나왔지요.”

사회복지 법인들이 사실상 사유재산, 민간기업처럼 운영되고 있음은 ‘복지재벌’로 불리는 성람재단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1980년대 초반 정신장애인 몇 명을 수용하면서 시작된 성람재단의 소위 ‘복지사업’은 현재 13개 시설에 자산이 700억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성람재단의 주요 수용시설 4개가 1년에 지원받는 국고보조금만 105억이 넘는다. 이 재단의 시설 공사를 맡은 합정주식회사는 대표이사가 이사장 자신이며, 부인이 감사,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이사로 있는 회사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정부의 방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일에 소홀함은 물론이고, 현재 가지고 있는 행정권 자체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는다. 문제가 터졌을 때만 마지못해 특별감사를 실시하는 게 고작이다. 국가의 책임방기와 가족의 묵인은 시설자본이 이익을 취하는 우호적 환경을 구성한다.

5. 포기에 맞서야 한다

‘시설’은 한마디로 ‘포기’ 형식의 추방 체제이다. 가족과 자본, 국가가 포기하고 유기하고 방기하는 형식으로 시설에 장애인을 가둔 뒤 그곳에서 ‘날 생명’으로 포획하는 체제이다. ‘탈시설’을 생각하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포기’에 맞서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해서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타인을, 자기 자신을 추방하는 일이다. 랑시에르는 지능이 열등할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 바보가 생겨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시설’은 우리가 포기한 곳, 우리의 의지가 꺾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시설’은 그 존재 자체로 장애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비장애인들에게 의지를 꺾을 것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시설’은 우리에게 ‘내버림’으로써 ‘망각’해버리라고 속삭인다.

소위 ‘시설병’은 의지가 꺾였을 때 앓게 되는 병이다. “시설 장기 거주는 장애인으로 하여금 독립적으로 지역사회에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시설에서 생활은 개인들이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장애인은 어떤 ‘꿈’도 갖지 않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 무시, 위계, 동정적 관계형성과 통제, 폭력, 획일적인 삶을 강요받는 장기간의 시설생활은 결과적으로 무기력을 ‘습성’으로 만들고,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시설병을 앓는 것은 시설장애인만이 아니다. 의지가 꺾이고 무기력화 되는 것은 가족도 마찬가지다. 신인기씨 증언.
“‘시설에서 절대 못나간다, 시설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가족들의 생각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저의 삶은 많이 달려졌을 거예요.”

서울시정개발원이 지난 달 펴낸 자료는 시설입소 장애인과 가족의 욕구가 얼마나 상반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주거와 서비스가 지원될 경우 퇴소를 희망하는 장애인이 70.3%인 반면, 가족응답자의 94.4%는 장애가족이 계속 시설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시설에 입소했을 때 이미 의지가 꺾인 가족들 역시, 어떤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셈이다.

‘시설’이 존재하는 사회, 인간의 삶을 ‘날 생명’ 형태로 격리하고 고립시키는 사회는 모두가 ‘시설병’을 앓고 있는 사회다. 삶에 대한 포기가 존재하고 생명에 대한 관리를 누군가에게 의탁해야 하는 사회는 ‘시설’ 사회이고 ‘시설병’을 앓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삶을 가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국가나 기업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 생명권력은 그런 포기의 환경 속에서 곰팡이 번지듯 커져간다. 그리고 삶의 관리, 생명의 관리를 떠맡으면서 권력과 부를 생산하고 취득해나간다.

6. 코뮨, 그 ‘함께-함’의 실험

삶의 고립과 배제에 저항하는 ‘탈시설 운동’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나는 여러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탈시설’에 관한 여러 정책 아이디어들을 내놓았음을 확인했다. 그에 비하면 구체적 정책은 고사하고 실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내가 어떤 비전을 내놓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다만 탈시설 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두 가지 개념, 즉 ‘인권’과 ‘정상화(normalization)’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거리를 던지고 싶다. 적어도 오늘 내 글의 패러다임에서 이 두 개념은 넓은 의미의 ‘시설’을 가능케 하는 근대적 배치의 산물이지, 어떤 대항배치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먼저 인권의 경우. 시설생활의 반인권성에 대한 고발은 분명히 그 자체로 ‘탈시설’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권은 고립된 ‘날 생명’의 권리라는 점에서, 즉 ‘그저 인간에 불과한 경우’를 상정하는 권리라는 점에서, 그러한 분리를 전제하고 있는 근대 생명 권력의 패러다임에 조응한다.

인권은 ‘발가벗겨진 인간’이 가진 최후 보루이지만, 인간이 발가벗겨지는 순간, 사실상 사라져버리는 역설적 권리이기도 하다. 인권 담론은 한편으로 고립된 생명에 대한 잔인한 폭력을 고발하는 데 유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권리 단위를 그런 고립된 생명으로서 재생산하는 측면이 있다.

<정치니, 사회니, 문화니 따지지 말고, 인간의 권리라는 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말은 감정적 호소력이 크지만, 또한 정치나 사회, 문화와 무관한 삶의 존재를 추인하는 역할을 한다.

‘정상화’ 개념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상화 개념이 요구하는 것처럼, 장애인들이 다른 시민들과 동일한 생활이 가능하도록 그 조건이 제공된다면, 장애인이 시설에 입소해야 할 이유는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의 지역사회통합도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정상화’ 개념은 ‘삶’의 ‘정상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지 않고 있다. 아니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비장애인들 일반의 삶의 양식에 장애인을 통합시키는 게 되지 않을까.

탈시설 운동이 ‘시설’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으로 일반적 삶의 양식의 정상성을 추인한다면, 그것은 인권 개념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 생명권력의 삶의 일반적 관리를 추인하는 것이 된다. 그 동안 ‘시설’은 ‘타자 공간’으로서 ‘비정상’의 규정을 떠안는 식으로, 시설 바깥 ‘정상성’의 허구적 이미지를 생산해왔다. 그런데 ‘시설’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이 그 ‘정상성’을 추인한다는 것은 현실적 유용성을 인정한다 쳐도 사리에 맞지 않아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우리가 ‘시설’과는 다른 ‘대항 배치’를 생각할 때 두 가지 과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은 삶을 고립된 단위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시설은 다양한 맥락으로부터 삶을 고립시킴으로써 작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삶도 집합적인 것으로,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둘째로 삶의 단순한 통합을 넘어서야 한다.

‘탈시설’은 시설 안에 있는 사람을 시설 바깥으로 빼내는 일 이상이 되어야 한다. 시설 바깥에 있는 삶의 양식이 시설 안에 있는 사람의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령 장애인이 지역에서 가족 생활을 편안히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족과 다른 다양한 형태의 주거 실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이 주거의 기본이라는 정상성 개념을 공격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인권과 정상화 개념이 요구해온 차별받지 않고 고립되지 않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시설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살기 위해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는 운동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요구와 투쟁이 그 동안의 차별과 고립에서 벗어난 삶의 대항배치를 꿈꾸는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면 한다. 나는 그 대항배치의 이름을 ‘코뮨’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은 무엇보다 ‘함께-함’의 사유이고, ‘함께-하는’ 삶이다.

나는 우리 삶이 우리들에 의해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제 아무리 호의를 가진 자(가령 이상적 복지국가)라 하더라도 그에게 삶의 관리를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함께 구축하는 데 있어 국가에게 우호적 조건을 요구할 뿐이다.

‘함께-함’의 삶이란 서로 똑같아지는 ‘공동체(共同體)’의 삶이 아니라, 서로 다름에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共-動-體)’의 삶이다. 서로의 독특함을 희생하지 않은 채로 ‘함께 살아가기’, 뿐만 아니라 ‘함께 함’으로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기. 서로의 삶의 가능성을 극대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코뮨들을 실험해보기. 각각의 장애를 넘어서 혹은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서 ‘공-동’의 삶을 실험하고 찾아보기.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프로그램들(다양한 공부 프로그램, 동아리 활동, 코뮨적 생활 워크샵 등)을 구상하고 실행하기. 작은 실험 코뮨들을 여러 개 만들어보기.

분명히 국가와 시설을 상대로 벌이는 탈시설 투쟁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그 투쟁의 다른 한편에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삶의 의존을 줄이는 실험들, 더 나아가 삶을 우리 모두가 함께 구축할 수 있는 실험들이 더 풍요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나는 ‘탈시설’ 투쟁이 시설에서 나오는 투쟁임과 동시에 시설 바깥의 삶을 공격하고 변형시키는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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