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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기적은 내 안에 있다사람 사는 이야기 - 장애우 영화 제작에 나선 KBS 김영진 프로듀서
조은영 기자  |  01627296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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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06.11.23  1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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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드라마를 보면서 그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까지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대부분은 드라마에 등장한 배우들을 기억하고, 그래도 좀 드라마를 본다 싶은 사람들이 더 기억을 한다면 그 드라마를 쓴 작가 정도다. 드라마를 연출하는 프로듀서(PD)는 드라마 제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도 연말 시상식에 상이라도 받아야 얼굴을 볼까, 그렇게 얼굴을 드러내도 사람들의 기억에선 쉽게 잊혀지는 인물이다.

98년 방영된 KBS 드라마 ꡐ야망의 전설ꡑ을 기억하는가. 실미도 사건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이 드라마를 연출한 PD를 기억하는 사람 역시 드물 것이다. ꡐ야망의 전설ꡑ하면 우선 유동근, 최수종, 채시라가 머리에 떠오른다.

ꡐ허준ꡑ, ꡐ상도ꡑ 등을 쓴 작가가 최규완씨라는 것도 ꡐ드라마를 좀 본다ꡑ 하는 사람들은 기억을 한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를 연출했던 PD는? 이걸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답은 김영진(47) PD. 배우들 이름에 비하면 생소한 이 사람이 바로 이번 호 ꡐ사람 사는 이야기ꡑ의 주인공이다.

드라마 PD, 영화감독이 되다
ꡒ그때 참 고약했어요. ꡐ야망의 전설ꡑ을 촬영할 때 최수종씨 역할 중에 산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살아있는 개구리를 뜯어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사실 방송엔 조금만 사용할 거였는데, 그거 다 먹을 때까지 ꡐ컷(cut)ꡑ 사인을 안했다니까. (웃음)ꡓ

이런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에는 아직도 장난기가 묻어난다. 순수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고집스러울 것 같은 그 눈빛을 제외하면 김영진 PD는 40대 중년 남성의 표준 체구에 평범한 인상이다. 그런데 KBS 별관 1층 ꡐHD영화 제작팀ꡑ 방에서 만난 그에게선 새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의 분위기가 한껏 풍겨온다. 방도 짐을 옮겨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것저것 설치하느라 어수선하다. 얼마 전 KBS미디어와 영화 연출 계약을 하고 3년간 마음에 담아 온 영화 제작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

ꡒ이렇게 ꡐ야망의 전설ꡑ을 얘기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사고가 난 이후 한동안은 눈물이 나서 그 작품을 볼 수가 없더라고. 아유~, 산이며 들이며 강이며 상관없이 뛰어다니면서 일했던 시절이 자꾸 생각나서….ꡓ

그때까지만 해도 김 PD는 자신이 장애를 겪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에게 사고는 정말 한 순간,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자동차 전복 사고
그가 ꡐ야망의 전설ꡑ로 승승장구하며 성공가도에 들어선 98년.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고 그도 동의했다. 결코 여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아내 친구들은 모두 유학을 갔다 와서 자기 활동을 하는데, 아내만 그렇게 남아 있는 게 안타까워서 아내의 꿈을 찾아주고자 결정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그는 새로 시작할 드라마 걱정 때문에 미국에 가보지 못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는 모든 일은 결국 고스란히 아내 몫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반. 아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준비했던 드라마 ꡐ사랑하세요ꡑ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성공리에 끝나고 나서야 그는 일주일 정도 여유가 났다. 2000년 7월, 한창 여름 향기가 짙어질 무렵, 그는 그제야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품고 미국으로 갔다.

ꡒ일주일은 정말 신나게 지냈어요. 가족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살았는데, LA에서 만나서 라스베가스도 가고 디즈니랜드도 가고. 그런데 가족 여행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렌트한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난 거예요. 글쎄, 딱 10분만 더 가면 집이었는데…. 저는 아내에게 운전을 맡긴 채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난 줄도 몰랐어요. 근데 그 상태로 4개월을 깨어나지 못했던 거죠.ꡓ

사고 당시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단다. 여러 차례에 걸쳐 대적인 수술을 받고도 4개월간 식물인간처럼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조차 ꡐ그만 포기하고 산소호흡기를 떼자ꡑ고 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호흡기를 떼려는 순간마다 마치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를 움직였단다.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병원비가 10억에 가까울 정도로 쌓여갈 무렵, 마침내 그가 깨어났다.

ꡒ아마, 저는 미국에 다시 못 들어갈지도 몰라요. 그때 병원비는 한국에 가서 갚겠다고 하고 그냥 손 흔들고 나왔거든요. (웃음)ꡓ
그는 관처럼 생긴 상자에 누워 한국으로 왔다. 앉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행기 좌석 6개를 차지하고 누워서 온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활주로에 대기 중이던 응급차에 실려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한국에서도 몇 차례 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 방송국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살아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그가 복귀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ꡒ드라마 PD는 경쟁이 무척 심해요. 연출로 첫 데뷔를 한 놈이나 20년 한 놈이나 화면에 올라갈 땐 그냥 연출일 뿐이니까 잘 해도 PD끼린 서로 칭찬을 안 하죠. 기껏해야 ꡐ잘~ 봤다.ꡑ 정도가 최고의 칭찬일 정도로. 근데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까 환장을 하겠더라고요. 남들은 다들 뛰고 있는데, 심지어는 내 밑에서 조연출하던 친구들도 전부 연출로 방방 날아다니고 있는데, 나만 병원에서 뭐하는 건가 싶고….ꡓ

어떻게든 복귀하리라 마음을 먹은 그는 혹독한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9월 마침내 그가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화
그런데, 정작 힘든 건 복직을 한 후부터였다. 그는 복직만 하면 예전처럼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2년 2개월 만에 돌아온 방송국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시청률 50%를 넘으며 잘나가는 PD로 인정받던 시절은 이미 옛 이야기가 돼 있었다. 그가 병원에 누워있는 사이 후배들은 밀고 올라와 큰 작품들을 맡았고, 회사는 그의 건강이 걱정된다며 더 이상 일을 맡기지 않았다.

ꡒ관리자 입장을 이해는 해요. PD 일이 워낙 경쟁도 심하고 작품하나 시작하면 건강한 사람들도 나가떨어지기 십상인데, 괜스레 일을 시켰다 건강도 나빠지고 프로그램도 실패할까봐 그랬겠죠. 하지만 전 그때가 가장 절망스러웠어요. 일이 왜 그렇게 하고 싶은지. 정말 너무 너무 일이 하고 싶어 미치겠더라고요.ꡓ

그렇다고 윗사람들에게 불만을 늘어놔가며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그에게 남은 방법은 드라마를 제작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선택한 게 영화다.
ꡐ타칭 폐기대상ꡑ.

아직 가칭인데다 시나리오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 영화는 김 PD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 예정이다. 연기자가 연기를 못하면 불같이 화를 내고, ꡐ저런 놈은 폐기해야 한다ꡑ고 서슴없이 말하던 드라마 PD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해 장애를 겪게 되면서 이제는 자신이 폐기대상 취급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 ꡐ폐기대상ꡑ이라는 말이 ꡐ타칭ꡑ일 뿐 자신의 실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ꡐ폐기대상ꡑ이라고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제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그는 그동안 자신이 폐기대상이라고 말했던 연기자들과 함께 뮤지컬을 만든다는 줄거리다.

사실 그는 사고 전에도 ꡐ칭찬을 잘하는 사람ꡑ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ꡒ자전적 영화라면서 그렇게 만들면 혹시 사람들이 성질 더러웠던 PD로 오해하는 거 아니냐.ꡓ는 농담에 그는 그냥 웃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관심이 없다는 투다. 그건 드라마적 요소일 뿐, 그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ꡒ살아가면서 장애를 겪는 일은 다반사죠. 장애를 조금만 넓은 의미로 보면 당장 외국에만 나가도 다들 언어장애우이에요. 우리 사회는 이혼만 해도 장애를 겪고, 취업을 하지 못해도 장애를 겪게 되죠. 저는 제가 만든 영화를 통해서 그런 사람들이 사회가 장애에 덧씌운 나쁜 인식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요. 사회의 편견 속에서 절망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뜻을 펼쳐갈 수 있게 말이죠.ꡓ

처음 겪은 장애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 역시 장애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단다. 현실에선 무수히 많은 걸림돌을 만나기 때문이다. 처음 방송국에 돌아왔을 때, 문제는 한 둘이 아니었다. 처음 방송국에 복귀할 때는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었으니 우선 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수많은 턱과 계단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그렇게 계단이 많은 줄 몰랐어요. KBS 별관은 그래도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미디어 연구동만 가도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별관도 처음엔 장애우화장실이 없었죠. 그래서 장애우화장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니까 바로 만들어주기는 했는데, 내참,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면 문이 닫히질 않더라고요. 장애우화장실이니 그저 좀 넓히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땐 이게 한국의 수준이구나 싶었죠.ꡓ

이후 재활훈련을 꾸준히 한 끝에 작년 봄부터 지팡이를 이용해 걸을 수 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엔 장애우를 위한 편의시설을 제대로 갗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은 상당부분 영향을 받았다. 영화관에 가는 것도 쉽지 않고, 하다못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계단투성이라 오르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계단에 손잡이 난간조차 없어서 자비를 들여 설치했다고.

그런데 막상 계단에 손잡이 난간을 설치하니까 이것은 장애를 겪고 있는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며 노인들도 다들 좋아했다. 그러고 나니 ꡐ그럼 아파트가 설치해야 하는 게 아닌가.ꡑ하는 생각이 뒤이어 들더란다. 그는 그때 이런 편의시설이 결코 장애우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걷게 되면서부터는 운전도 시작했는데 그 덕에 또 다른 경험도 했다.
ꡒ사실 저는 왼쪽이 마비니까 오른쪽 발만 사용하는 오토차 운전은 어려울 게 별로 없어요. 저에겐 휠체어를 안타고 지팡이 짚고 걷는 게 오히려 기적이죠. 근데 사람들은 그보단 운전하는 모습을 보고 더 놀란다니까요. 사람들이 그럴 때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ꡓ

운전을 하면서부터 겪은 주차 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데, KBS에선 ꡐ국장급 사원ꡑ이라고 농담을 하면서 문 앞에 대도 사람들이 배려를 해주지만, 밖으로 나가면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주차 문제 때문에 다니던 교회를 포기하고 옮겨야 했다.

병원비와 활동보조인 비용만 월 300만원
그러나 그를 제일 힘들게 한 건, 마비돼 감각이 없는 왼쪽발이 아파온 것이었다. 어찌나 아프던지 눈물이 날 정도였고, 너무 아플 땐 망치로 왼발을 내리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단다. 그나마 침을 맞으러 다니면서 다행히 이런 고통은 차츰 사그라지고 있지만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괴로운지 진저리를 냈다.

ꡒ발바닥을 간질여도 아무 느낌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고통이 느껴지는지…. 그때 제가 너무 괴로워 하니까 저를 치료하던 재활의학과 과장이 이런 명언을 남겼죠. ꡐ고통은 예술이다. 너무 분석하지 말라.ꡑ (웃음). 고난은 안 믿는 사람에겐 아픔이고 시련인데, 믿는 사람들에겐 섭리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장애우가 된 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섭리로 받아들이면 편해요.ꡓ

그는 오히려 ꡒ예전엔 배를 때리고 소변줄을 꼽아서 넬라톤을 해야 했는데 이제는 서서 소변을 볼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ꡓ며 감사했다.

사고가 나고 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는 일주일에 두 번은 재활훈련을 하러 병원에 간다. 덕분에 병원비와 한방치료비로 매달 120만원이 나가고, 얼마 전까지는 여기에 더해 활동보조인에게 하루 6만원씩 한달이면 180만원의 비용이 들어갔단다. 요즘엔 그나마 낮시간 동안은 활동보조인을 쓰지 않기 때문에 하루 4만원씩 120만원으로 줄었다고. 주위 사람들은 몸이 그만큼 나아진 거냐며 인사를 하는데 그건 그의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ꡒ매월 돌아오는 카드 대금을 막느라 바빠지다 보면 몸이 그렇게 갑자기 나아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웃음).ꡓ
사고 후 들어가는 추가비용이 웬만한 도시근로자 소득을 넘다보니 월급을 받아도 생활을 꾸려가는 게 빠듯한 눈치였지만 그는 그 문제 역시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PD는 3D직종, 그러나 포기 못 해
이런 자세는 아마 PD를 하는데도 영향을 미친 거 같다. 사실 드라마 PD는 3D 직종이다. 일단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면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하고 어쩌다 새벽에 들어가도 옷 갈아입고 나오기 바빠서 한창 땐 가족조차 돌아볼 겨를이 없단다. 오죽하면 첫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유치원에서 가족을 그려오라니까 다른 가족들은 다 그렸는데, 아빠 자리엔 작대기 3개만 그어서 갔을까. 그 바람에 유치원 선생님에게 ꡐ아빠가 안 계시냐ꡑ는 오해를 샀다면서도 그는 PD 일을 포기하지 못했다.

ꡒ아무래도 난 광대끼가 있는 거 같아요. 누가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면 무척 신나요. 뻐기는 것도 좋아해서 누가 옆에서 ꡐ잘한다, 잘한다.ꡑ하면 진짜 잘하는 성격이죠.ꡓ
그는 조연출 시절부터 드라마를 제작할 때 촬영장에서 느낀 느낌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새벽 서너시부터 시작하는 촬영장의 분주함, 추운 날씨에 추운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던 스텝들의 모습, 성황리에 드라마 제작을 마쳤을 때의 뿌듯함까지.

쉽게 드라마 PD가 된 게 아니라서 아마도 이런 감동은 더 했을 것이다. 그는 PD를 하고 싶어서 다니던 직장도 관두고 삼수를 해서 PD가 됐다. 그러고도 열흘간 연수를 마치고 나니까 라디오로 보내더라고. 지금은 라디오와 PD를 따로 뽑지만 당시엔 통합해서 15명을 뽑았는데, 배치를 하면서 그가 라디오로 가게 된 것이다.
ꡒ라디오에 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일을 잘해도 안 보내 줄 것이고, 일을 못하면 또 못하는 대로 텔레비전으로 갈 수 없을 테니까 어중간하게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웃음).ꡓ

그는 입사 3년 반만인 94년에야 텔레비전 방송 PD로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드라마 PD를 맡았는데, 이제 겨우 잘 나가다 사고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새로 만들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다.
ꡒ내 후년에야 개봉을 하겠지만 이 영화 대박 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놈은 뭘 시켜도 잘한다고 인정을 받고 싶어요. 장애우기 때문에 일거리를 주는 게 아니라 제 능력을 보고 일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도록 말이죠. 지금은 일하기 너무 좋은 조건이잖아요. 가족들도 모두 미국에 있으니 이젠 집에 늦게 들어가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웃음)ꡓ

재미와 감동 안에 장애문제 녹여내고 싶어
그는 장애를 소재로 하더라도 우울하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신이 인생을 즐기라고, 마음껏 누리라고 했는데 내가 그걸 어찌 어기고 인상 쓰고 살겠냐면서 말이다. 또, 장애를 소재로만 사용할 건 아니지만 영화 ꡐ한반도ꡑ처럼 너무 의미가 앞서는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게 어떤 이야기든, 전면에 앞세우는 게 아니라 재미와 감동 그 안에 녹여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런 마음을 반영이라도 하듯 그는 요즘 비보이(B-boy,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춤꾼)에 빠져있다. 비보이를 처음 본 건 한 장애우 인권단체 초청으로 ꡐ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ꡑ 공연을 보면서부터다. 처음엔 ꡐ휠체어 탄 장애우를 데려다 놓고 이게 무슨 짓인가ꡑ 싶은 생각이 들어 욕을 했는데 공연이 끝날 즈음에는 마치 일어나서 뛸 수 있을 것만 같은 에너지가 느껴지더라고. 휠체어를 탄 채 앞으로 나가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추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단다. 그 후론 비보이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단다.

ꡒ저, 완전 비보이 팬이에요. 똑같은 공연을 3번이나 봤다니까. 그렇게 비보이들을 따라다니다 보니까 그중에 한 사람이 목발을 짚고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사람의 동영상을 보내주더라고요. 근데, 그게 또 환상이에요.ꡓ
그는 자신이 만들 영화에 이런 비보이 공연 장면을 넣고 싶다고 했다.

ꡒ장애 문제를 되도록 세련되게 거부감 없이 담고 싶어요. 그래서 영화에서 성공하면 그 내용을 그대로 드라마로 만들 거예요. 드라마는 흥행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장애우를 위해서 뭘 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회 속에 감춰진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보고 싶을 뿐이에요.ꡓ

현재 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영화에 쏟아 붓고 있다.
ꡒ전 장애가 오히려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내가 장애우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승진만 생각하는 직장인이 돼 있었을 거예요. 어떻게 하면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될 지만 고민했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꿈은 안 꾸잖아요. 어차피 꿈꾼다고 되지도 않겠지만, 실제 그게 삶에서 중요하게 느껴지지도 않아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바뀐 거죠. 언제나 기적은 내 안에 있으니, 뜻만 있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ꡓ

한 손에는 지팡이를 멋스럽게 짚고, 다른 손을 들어 큐(cue) 사인을 보내는 장면을 생각하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의 믿음처럼 그 투박한 손이 영화 ꡐ집으로ꡑ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박 영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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