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칠괴동에서 꿈꾸는 억지 소망
[쌍용차 회생 가능하다! 릴레이 기고 ①]
본문
쌍용차에서 또 한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쌍용차 현장에서 “해고는 살인이다”는 구호가 떠오를 때 선 뜻 내키지 않았었다. 과거에도 벼랑에 몰린 처절한 투쟁과정에서 본 아픈 기억들 때문이었고 쌍용차 농성장안의 분위기를 볼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가슴 한켠에 끝없는 불안이 쌓였기 때문이다. 해고되면 생계가 막연한 것보다 “뭔가 문제가 있어 잘린 사람”이라는 ‘사회적 의미의 살인’이라는 것을 직접 당하거나 지켜보면 이 구호를 차마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구호를 넘어 현실이 되는 이 아비규환을 어찌 해야 할까?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잘리나 망하나, 그럴 바엔 들어와 보라고 해! XX, 싸질러 버려야지 뭐!”
그냥 귓속을 맴도는 얘기가 아니다. 농성하는 조합원과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 담배한대 피우며 몇 마디 건네면 바로 튀어 나오는 얘기다.
야만의 정글!
분명 야만이다. “함께 살자”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살자”가 판을 친다. 뒤따르는 것은 “그래 함께 죽자”다. 어제 한솥밥을 먹던 한 식구끼리 적이 되어 버린 이 생지옥을 불태운다고 한들 무슨 말로 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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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파이프를 들고 바리케이트를 치우며 진입해 들어오는 용역 | ||
야만의 정글에서 무언들 치장해서 얘기하랴! ‘개도 밥그릇 건드리면 문다’고 했다. 어디 밥그릇만 빼앗은 것인가! 온통 퍼부어 대는 비난의 목소리들, 구사대와 용역, 이제는 경찰의 압박까지……. 착각했다. 관리자들은 정리해고에 저항해 봤자 며칠 못 버틸 것이라 생각했는가! 그래 대우차의 사례를 들먹이면서 준비한 것이 도장공장도 뺏긴 것인가, 공권력이 투입되면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을까? 과거의 노조 조직력을 생각했을 때 어차피 어울렁 더울렁 노사관계를 맺어온 과거처럼 갈 것이라 생각했을까?
파산이라구요?
10년이 넘은 개인적 경험에서 철저하게 느낀 것은 기업처리는 결코 경제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저히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무수히 많은 전문가들이 경제논리와 시장원칙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객관성이라는 이름의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정부 부처들, 회사관계자들, 전문가들, 시민사회단체들… 무수히 만나면서 ‘청산’이라는 두 단어를 듣는다. 그러나 청산은 내부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협박이 아니다. “그래, 함께 죽자”는 반대급부의 분노를 키울 뿐이다. 청산을 말하기 전에 이 아비규환의 정글에 내던져진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있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던가” “사람과 사회를 위해 회사가 있는 것이지, 회사를 위해 사람과 사회가 있는 것인가” 거꾸로 된 얘기는 이제 하지 말자.
노동자간의 갈등은 파산의 길
회사가 정말 회생을 원한다면, 노동자간의 싸움을 부추기면 안 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집안이 망했는데 집안싸움을 하고 있으면 이웃들이 뭐라 하겠는가? 집안이 어려워졌다고 식구들을 내다 버리는 그런 집안을 누가 구원하려고 하겠는가?
처음 쌍용차를 얘기할 때에 그야말로 전문가 바보들이 쉽게 뱉는 얘기는 “쌍용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된다고, 방법 있어요? 청산하지”라는 얘기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지 모르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존이 걸려 있는지 생각하고 얘기할까? 그리고 이제는 “노동자간의 극한 갈등으로 파산의 길로 가나”라는 식의 언론보도들이 뜨기 시작한다. 이제 멈춰야 한다. 이게 무슨 짓인가? 어제 한 솥 밥 먹던 가족 끼리 ‘너 죽고 나 살자’는 적대감을 키워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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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한 대한민국
소통이든 불통이든 떠나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비굴하기까지 한 것일까? 언론에서 쌍용차의 노사 갈등을 한껏 보도했다. 그리고 잘못들은 것이 아니라면 바로 어제 대통령이 “자기들이 살려고 해야 살리지”라고 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상하이는 기술도둑질, 산업은행은 방조, 지식경제부는 기술관리 부실, 검찰수사는 오리무중, 법원은 조사보고서를 통해 상하이 중대한 경영부실 책임 없다고 면죄부, 그리고 정부는 뼈를 깎으라는 주문만 외치고, 드디어 행동대원으로 용역과 깡패를 동원한 관리자들의 몸부림. 결국 쌍용차의 모든 문제는 “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집안싸움 때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정부에게 회사는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고, 노조는 공적자금 투입을 요청하는 엇갈리는 길을 계속 간다면 도대체 무슨 비전이고 희망이 있을까?
쌍용차의 ‘산 자’들에게
6월 27일, 연대를 위해 달려온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을 향해 회사편에 선 ‘산 자’들이 방송을 통해 “불법점거하는 저들만 조합원이고 다수의 우리는 조합원이 아니냐”고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투쟁하는 사람은 노조지침을 따르고, 투쟁하지 않는 조합원은 노조 지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노조는 다수의 의견을 모아 행동하는 대중조직이기 때문에 다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다. 그동안 수많은 언론들이 노조를 향해 퍼부은 얘기가 바로 약자인 비정규직을 외면했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쌍용차에서 정리해고 한다고 할 때에 평택의 시민들마저 “배부른 귀족노동자들도 당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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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사대로 변한 쌍용차 관리자들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있다. 경찰은 뒷편에서 지켜보고 있다. | ||
암 덩어리처럼 응어리진 이 가슴속의 상처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서로에게 더 이상 잔혹해져선 안 된다. ‘산 자’들만의 노조를 만들겠다는 얘기를 들으면 절망적이다. ‘치유하는 길’이 아닌 ‘불치병’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길
미래를 내다보면 경우의 수는 여러 가지다. 계속 누군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장기화하는 경우, 극적 타결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경우, 농성자들을 고사시키는 경우, 공권력으로 쓸어 내는 경우…….
이 비유마저 맘에 들이 않지만 단순화하면 “KO승부냐, 판정승부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 현재와 같이 간다면 승자는 없다. 극적 타결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일련의 과정을 놓고 볼 때 회사든 노조든 1,670명이나 내 보냈다. 누가 승자가 될 수 있겠는가! 엄청난 사람들을 잘랐으니 회사가 승자라고 해도 할 말 없다. 그렇기 때문에 976명에 대해서는 회사가 판정패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스스로 이 상황에서 책임을 벗을 수 없는 한 사람으로서 끝없는 자책의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처참한 자책감으로 호소하면서 어느 날 모든 언론사에서 이렇게 붙여진 제목의 기사들이 일제히 떠오르길 간절히 소망한다.
“쌍용차 노사 극적타결, 회생가능성 열리나,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할 때”
작성자조건준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 정책국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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