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일만에 남태령 넘어 서울 들어서
[순례길 묵상] 2009년 5월 17일 부활 제6주일에
본문
![]() |
||
| ▲ ⓒ참소리 | ||
‘새만금갯벌을 살리기 위한 삼보일배’ 때 눈물로 넘었던 고개입니다. 남태령은 조선시대 지방 유생들이 정치를 잘못하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 봇짐에 ‘상소문’을 넣어 넘은 고개라 합니다.
그래서인가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라는 우리 시대 ‘상소문’을 올리는 오늘 여정은 지금 시대상황처럼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103일 중에 가장 힘든 날이었던 듯합니다. 비는 종일 철철 내리고 고갯길이니 절하기 힘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까지, 게다가 수시로 순례행렬을 불편하게 만든 경찰까지 환상의 조합을 이루어, 이 순례여정의 험난함과 고됨의 절정을 이뤘습니다.
어쩌면 우리 순례단의 의미를 각별하게 드러내주는 아주 특별한 환영식이었을지 모릅니다.
빗물과 한기로 온몸이 얼어붙어도, 시퍼런 입술과 덜덜 떠는 몸으로도 빗물 흐르는 도로에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며 끝까지 의연하게 동행한 모든 벗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힘들어 주저앉지 않게 체온을 나누고 고행 속에서도 기쁨과 웃음을 나누며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모든 벗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 진정 그 길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요한복음 예수님 말씀이 더더욱 웅장하게 울리는 주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친구’라는 특권과 영광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을 위해 정말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다.’ 이건 아주 옛날 정서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럴리가요. 돈을 위해 목숨 거는 경우는 흔해졌지만 말입니다.
심지어 배우자도 자식도 부모도 돈 때문에 저버리는 경우가 빈번해지는 마당에 무슨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어쩌고라니, 지나가던 개가 듣고 웃을 얘기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진짜 ‘벗’ 친구가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고, 자신이야말로 그런 벗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 또 먼저 성찰해야 하는 게 순서입니다.
그러나 요즘도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정말로 있습니다. 바로 내일 5월 18일 29주년을 맞는 광주민중항쟁의 의인들이 그랬고, 민주화운동 과정 속에서 수많은 의인들이 그랬습니다.
![]() |
||
| ▲ 18일 오체투지순례단이 용산 남일당으로 온다. 사진은 순례103일차 모습. ⓒ참소리 | ||
진짜 친구 됨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머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 가르침에서도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속에 머무름이 바로 어느 경우엔 목숨도 바치는 우정, 사랑의 태도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저희 오체투지 기도순례에 한 동안 서울교구 신부님들이 오셔서 일주일 피정으로 함께 했습니다. 서울교구의 도시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이신 이강서 신부님은 같은 시기 용산참사 현장에서 피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피정 뒤에도 떠나시지 않고 아예 그곳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신부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처음엔 이 분들이 당한 고통과 억울함을 교회 안팎에 널리 알리는 것이 내 임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유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머물기로 한 겁니다."
고통의 현장, 이 시대 광야의 현장에 어떤 외부지원보다는 그냥 그저 함께 하고 곁에 머무름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신부님 말씀이 이 시대 참된 벗의 음성이 아닌가 합니다.
연민과 연대, 기도 속에 함께 함이 바로 진짜 친구 됨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극구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참된 길이며 포도나무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진리의 길입니다. 서로의 형편과 마음을 읽어주고, 연민을 느끼며 손 잡아주는 것, 기도해주고 동행해주는 것, 이것이 아니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존재와 삶을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들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 삶은 그 자체가 순례길입니다. 그 순례길에서 만나는 모든 크고 작은 인연들이 내어준 그와 같은 도움과 지지, 응원 덕에 우리는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 앞으로의 삶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오체투지 순례는 바로 그 같은 인간심성과 존재의 윈리를 회복하자는 기도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평화동성당 현 사목회장님은 저와 동갑내기입니다. 주임신부와 사목회장으로 만나 때로는 신경전하고 때로는 의기투합하며 재미나게 지내왔습니다. 진짜 새로 얻은 친구마냥 말입니다. 얼마 전에 사목회장님께서 오체투지 순례길에 동참하자며 ‘신자들에게 보낸 호소문’을 울다 웃다 하며 읽었습니다. 지도자가 어리버리 하면 신자들이 똑똑해진다더니, 저 없는 본당에서 사목회장님은 저보다 더 신자들 심금을 울리고 계십니다. 오체투지 끝나고 본당으로 돌아가면 제 설 자리가 있을까 하는 궁상스런 생각도 해봅니다. 사목회장님의 글 중 한 대목을 옮겨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 싹을 틔우듯, 우리의 작은 희생으로 모든 이에게 삶의 기쁨을 만나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순례길에) 나서보자고 한 바 있습니다. 기도와 선행과 성사 생활에 힘쓰지 않으면 영혼은 게을러진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신앙생활이 귀찮아 질수 있다고 해요. 진리와는 먼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진리는 하느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노력 없이 「하늘의 힘」을 청하면, 정작 주어지더라도 못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무조건 실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천! 해야 예수님의 진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목회장님 말씀처럼 기도와 선행과 성사생활에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참된 벗이 되기 위하여 오늘 하루도 제 자신을 더욱 낮추고 비우고자 노력합니다. 나보다는 내 벗들을 진정으로 내 안에 모시게 해달라고 길에 엎디어 기도합니다. 마음과 기도로 함께 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제 벗입니다. 우리는 서로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 길 궂은 길 가리지 않고 조용히 동행하며 정성을 다해주는 한 분 한 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 믿어지지 않는 길을 100일 넘게 만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님 덕으로, 이렇게 생명을 얻고 삶의 의미를 얻고 하루하루 희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갖는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도 벗을 위해 목숨조차 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매순간 거듭나고 성장하고 있음을 믿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힘과 용기와 신념을 심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으로 우리 삶 구석구석에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내어갑시다. 성 어거스틴은 “사랑하는 가슴을 가진 사람은 다른 이들 가슴에도 사랑의 불꽃을 붙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각자가 바로 그 뜨거운 ‘사랑하는 가슴’을 지닌 사람입니다.
- 문규현 신부
작성자문규현 신부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