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기구, 외국의 사례와 우리의 과제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보조기구, 외국의 사례와 우리의 과제

[보조기구로 일어서는 사람들] 외국사례

본문

마흔이 넘은 듯한 중년의 남자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다. 마비된 손으로 전동휠체어를 조작하는 그의 모습은 아주 불안해 보였다. 심한 뇌성마비로 온몸이 틀어진 그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말도 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였다.

초라한 행색으로 낮선 환경에 긴장을 해서인지, 땀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듯 신음 같은 소리를 겨우 끌어냈다.

알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아는 듯, 경직된 손으로 바지춤을 자꾸 가리켰다. 직원들과 함께 확인해 보니, 그것은 꾸겨질 대로 꾸겨져 볼 품 없는 종이 조각이었다. 거기에는 마치 초등학생이 쓴 것 같은 자음과 모음이 빽빽하게 적혀져 있었다. 그는 하고픈 말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음과 모음을 하나씩 가리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내었다.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말은 ‘휠체어 고장’이었다.

그와 우리는 이렇게 대화를 시작했다. 중년의 남자는 사십여 년의 세월을 이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하고픈 말을 하기 위해 몇 시간을 걸려 어렵게 전동휠체어를 타고 가야 하고, 또 단 몇 마디를 위해 몇십 분을 소비하면서….

    보조기구 북유럽은 3만6천 가지, 우리나라는 400여 가지에 불과

복지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을 갈 때마다 목격하는 장면은, 휠체어를 타고 여유롭게 거리를 다니는 장애인들의 모습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휠체어 위에 보드(board)가 부착되어 있는데, 그 위에 마치 노트북 같은 기계가 하나씩 얹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계는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글자를 입력하고, 그것을 음성으로 변환시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기이다.

손이 불편하여 글자를 입력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간단한 조작만으로 미리 입력된 단어나 문장을 출력하여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휠체어 장애인에게는 필수품처럼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도 이런 기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분명 보다 불편함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기들을 우리는 보조기구(Assistive Technology Devices)라고 한다. 최근 20년 동안 보조기구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원시적인 보조기구의 수준을 넘어, 장애인들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보조기구에 대하여 얼마나 알까? 휠체어, 목발, 보청기, 휜지팡이 등, 아는 것을 다 끌어 모아 꼽아도 대부분의 경우는 손가락이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이 보조기구 업체에 가서, 보고 사용할 수 있는 보조구들은 약 300~400여 가지 정도에 불과하다. 등록 장애인만 2백만 명이 넘은 우리의 상황에서 이건 많은 것일까, 아니면 적은 것일까.

   
북유럽에 사는 장애인들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보조기구가 3만 6천 가지가 넘는다. 미국의 장애인들도 최소한 2만 5천 가지 이상의 제품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보조기구를 지원하기 위한 국가 예산도 북유럽은 우리보다 약 50배 이상 많다.

게다가 장애판정도 없는 이들 나라에서는 장애인에게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 전문가들에 의해 가장 좋은 제품을 받을 수 있다. 좋은 제품을 사용해야 기능 향상과 안전에 더욱 유익하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건강보험에 209만원으로 묶여 있어, 누구나 비슷한 전동휠체어를 사용해야 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북유럽 어느 기관의 담당자에게, 왜 이렇게 막대한 예산을 통해 보조공학 서비스를 제공하는지를 물어 본 적이 있다. 그 담당자는 설명은 이러했다. 한 사람의 장애인나 노인에게 보행기구를 지급할 경우 예산은 약 30만원 정도 소요되는 반면, 음식을 나르거나 심부름을 하기 위한 활동보조인의 투입을 절감할 수 있고, 또한 넘어지지 않아 부상을 예방할 수 있어 병원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약 5년 동안 1,300만원 이상 예산이 절감되는데, 어떻게 보조기구 서비스를 활성화시키지 않을 수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장애특성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보조기구 보급 시정해야

복지선진국에서 이러한 보조기구에 대한 강력한 서비스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조건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보조기구 및 보조공학과 관련된 전문적인 서비스가 가능할 수 있도록, 법률적 체계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는 보조공학과 관련된 독립된 법률을 제정·시행하여, 장애로 인해 고통받는 장애인들에게 보조공학과 관련된 전문 서비스와 보조기구에 대한 공적 급여를 보편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유럽의 국가들은 기존 복지 제도 및 정책에 보조공학 관련 서비스를 보완함으로써, 보조기구에 대한 서비스뿐만 아니라 복지와 보조공학 서비스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연계됨으로써, 실질적인 독립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다.

둘째, 지역마다 전문 서비스 기관을 설치·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복지선진국가에서는 보조공학 관련 전문 서비스를 필수적으로 제공하고 있는데, 재활, 치료, 공학, 의료 전문가들이 서로 협업하여 최선의 서비스 결과를 만들기 위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전문 기관은 국가마다 고유한 사회·환경적 요인을 바탕으로 약간씩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일본은 의료기반 즉, 병원 중심의 서비스를, 유럽은 보조공학 서비스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서비스를 받는 이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역시 지역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서비스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보편적이고 전문적인 서비스가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장애 특성과 필요(need)를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보조기구의 적용, 그것도 최소한의 급여, 이것이 아직까지의 우리 현실이다. 보조기구 및 보조공학과 관련된 법·제도적 기반이 매우 미흡한 상태이며, 따라서 전문 서비스 기관 또한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그야말로 보조기구와 관해서는 정책과 서비스가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제도 마련을 위해 장애계와 보조공학 전문가들이 연합하여 2007년 11월 보조기구와 관련된 법률을 발의하였으나, 17대 국회 일정이 끝나도록 여러 정치적 사안들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장애인들 보조기구에 대한 권리 주장해야

몇 해전부터 전동휠체어가 보급되면서 중증의 재가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외치고 있다. 차별과 불편을 해소하고 좀 더 편안한 세상에 목 말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것이 생존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움직일 수 없고 세상과 소통할 수 없다면, 그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스티븐 호킹은 20세에 근육병이 발병하여 모든 근육이 마비되었다. 오직 손가락 두 개만 움직일 수 있는 그는 65세인 지금까지도 보조기구를 통해,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사례도 영국에서 태어나고 살았다면,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새 정부의 슬로건이 ‘능동적 복지’라고 한다. 복지 사업 및 프로그램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어떤 경우에는 복지 예산이 축소되는 것 또한 예상된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직업재활국(OVR)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조기구를 통해 장애인 스스로가 독립생활을 하고 직업생활을 할 경우, 오히려 국가의 예산이 적게는 6배에서 많게는 20배 이상 절약된다고 한다. 장애인의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을 통해 장애인의 삶의 질도 향상시키고 궁극적으로 공적 급여 예산을 줄여 다른 복지 사업에 보탬으로써, 장애인의 또 다른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실질적인 능동적 복지 아닐까. 이제 우리사회의 장애대중도 아직은 낮설게만 느껴지는 보조기구에 대한 권리, 과학기술의 권리를 요구할 때라고 생각한다.
작성자오도영 (경기도 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 연구실장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