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새벽,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옛)전남도청 창가에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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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 5월27일 도청의 마지막 밤으로의 호출. 27일 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옛 전남도청에서 밤샘공연을 펼친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을 ‘이름없는공연팀’이라 부르는 신영철·임혜영 부부의 지난 2006년도 도청 밤샘공연의 제목은 <잊혀질 때까지는…>. 도청에서 마지막밤을 지킨 오월의넋들과 함께 하는 제의적 성격의 공연이었다. 공연의 어느 대목에 이르러 도청 2층 건물의 창문마다 조화(弔花)가 한송이씩 올려졌다. ⓒ 남신희 기자 | ||
28년이 지난 5·18을 들추는 이유다.
“기억한다는 건 묻는다는 걸 뜻한다”는 말도 있다. 기억의 성실함이란 곧 물음의 성실함에 있다는 말일 것이다.
하여, 지금은 텅 빈 (옛)전남도청 창가에서 묻는다. 5월항쟁의 마지막이 된 그 날 27일 새벽, 시시각각 좁혀드는 총잡이들의 움직임이 주는 전율과 공포 속에서 창문 너머 어둠 속으로 그들이 봤던 것은 뭘까.
▲ 오월을 담아낸 영화 <화려한 휴가> 중. 도청 창 하나씩을 맡은 채, 서서히 다가오는 최후의 순간 앞에 선 시민군들의 모습. ⓒ 전라도닷컴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새벽 3시30분, 도청 인근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가두방송을 듣고 도청을 향해 집을 뛰쳐나온 젊은이들이 계엄군의 포위망에 걸렸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도청 주위를 맴돌다가 수백 명이 체포되고, 달아나던 사람들은 가차없이 사살됐다.
도청 상황실에서는 자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이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가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돼야 한다.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中 최후의 항전>
새벽 4시쯤이 되자, 도청 앞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당시 항쟁지도부를 이끌던 김종배(52)씨는 도청 본관 2층 부지사실에 있었다.
“도청에 남아 있던 시민군은 200명 정도였어요. 자정이 넘으면서부터 계엄군이 온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지요. 각자 창문을 하나씩 맡았죠.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는데, 계엄군 총소리는 점점 가까워졌어요. 이미 물러설 수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되는 상황이었죠. ”
이날 ‘최후의 항전’은 이미 예고돼 있었다. 26일 오전 계엄군이 최후통첩을 해왔다. 이날 자정까지 도청을 비우지 않으면 작전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지도부는 한편으론 도청 분수대에서 규탄대회를 가졌고, 다른 한편에선 대변인이던 윤상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여 명의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엔 <볼티모어 선>지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도 있었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또 다른 편에선 남동성당에 모인 재야인사들이 목숨을 걸고 ‘수습’을 위해 상무대 계엄분소로 향했다. 돌아온 대답은 역시 최후통첩뿐이었다.
도청 안은 술렁거렸다. “계엄군이 들어온다, 엄청난 병력일 것이다…” 논란 끝에 결론이 내려졌다. “최후의 한 사람이 되어 싸울 자신이 있는 사람만 남고, 아닌 사람들은 돌아가자.” 200명 정도가 남았다.
▲ 80년 5월에도 창 바깥의 세상은 저렇듯 눈부신 초록이었을 것이다. 저 생명의 초록은 그 봄날에 일어난 학살 피 죽음 폭력 눈물 통곡 절망 공포를 더 선연하게 일깨운다. 광주민중항쟁의현장인 옛 전남도청에서 열렸던 전시중 한 작품. ⓒ 남신희 기자
1층부터 방을 차례대로 뒤지며 ‘소탕’에 나선 계엄군 그리고 마침내 계엄군의 사격이 개시됐다. 그들의 자동화기가 일시에 불을 뿜었다.
당시 본관 2층에 있던 김종배씨는 도청 정면 상무관 쪽에서 다가오던 계엄군에 의해 시민군들이 하나둘 길바닥에 쓰러지는 걸 봤다. 동시에 도청 뒤편을 지키던 40여 명의 시민군들은 총소리에 불안해 자꾸 건물 앞쪽으로 이동해왔다. 이 틈을 타고 공수대원들이 도청 뒷담을 넘었다.
김씨가 뒤편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계엄군 예닐곱 명이 총을 갈겨대며 진입하고 있었다. 카빈총을 들었다. 하지만 차마 겨누지 못하고 공포만 쐈다. 하얀띠를 두른 계엄군들은 1층부터 방을 차례대로 뒤지며 ‘소탕’을 해왔다. 동료 두 사람과 4층까지 밀려 올라간 그는 방안으로 숨어들었다. 계엄군은 문짝에 대고 총을 쏘아댔다.
어느 순간 총소리가 멎더니 손을 들고 나오라는 메가폰 소리가 들렸다.
“그때 심정이야, 시체들을 워낙 많이 봐왔기 때문에 겁도 상실한 상태였어요. 하지만 우린 맨꼭대기층까지 밀려온 상황이었고, 우리 200명이서 어떻게 그 많은 병력과 이기겠느냐, 이제 상황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죠.”
총을 밖으로 던졌다. 김씨는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3년을 살고 나왔다.
▲ 2006년 5월27일 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옛 전남도청에서 펼쳐진‘이름없는공연팀’의 공연 장면 중. 오월 넋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잊지 마세요’란 전언을 담았다. ⓒ 남신희 기자
대규모 군사작전 확연한 패배 앞에서도 죽음을 선택한 이들 당시 도청을 향해 8개 방면으로 밀고 들어온 진압작전은 3공수, 7공수, 11공수, 20사단과 31사단 등 모두 2만여 명의 정규군과 특전사부대, 그리고 탱크와 헬기 등 각종 장비가 동원된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패배는 예상된 것이었다. 너무나도 확연한 결과를 알고도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다. 사실 그들에겐 여러 차례의 선택 기회가 있었다. 18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군대가 투입됐을 때, 21일 백주대낮에 계엄군이 금남로에서 집단발포했을 때, 계엄군이 일시 도청에서 물러난 뒤 총기를 반납하고 도청을 비워주자고 했을 때. 그 때 집에 두고 온 처자식, 애끊는 어미의 얼굴을 떠올리며 돌아갈 수도 있었다. 26일 최후의 통첩이 날아든 뒤에도, 그리고 27일 새벽 도청에 계엄군이 밀고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매번 ‘죽음’을 선택했다.
그 해 5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10일 간의 항전을 가능하게 한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다름’이 아닌 ‘같음’으로 이룬 열흘 간의 대동공동체
총잡이가 죄 없는 사람들을 때렸다. 그들은 항의했다. 항의했더니 똑같이 맞아 쓰러졌다. 일으켜 세워주다 맞았다. 도망가다 피투성이로 실려왔다. 피가 부족하다기에 피 내놓고 돌아서다 총에 맞아 죽었다. 죽은 사람 옮기다 죽었다. 그 사람 찾아 나서다 죽었다.
돌아보면 형님, 동생이었고, 모두가 엄니, 아부지였다.
내 동생 네 동생 없이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자고 등 떠밀어 싸움터에서 내보냈다. 내 자식 네 자식 없이 쌀뒤주 털어 밥 지어 내놓았다.
그들이 만든 세상은 넝마주이도, 교사도, 학생도, 중국집배달원도,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없는 세상, 너와 내가 ‘다름’이 아닌 ‘같음’으로 이룬 대동공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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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신희 기자 | ||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왔는가
<동규: 시민군여러분… 제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전 이… 동규입니다…
병조애비: 지는 보급반 병조애비여, 지는 병조땜시 여기까지 왔는디 혼자남은 우리 마누라… 불쌍해서 어찌여…
용대: 저 제 5타격대 용대요. 장용대… 인봉이성, 성은 처자가 있으니껭 시방 빨랑 항복하시오…
민재: 광주고 3학년 3반 한민재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광주시민 만세!>
도청 창 하나씩을 맡은 채, 서서히 다가오는 최후의 순간 앞에서도 서로를 걱정하고 대한민국을 뜨겁게 부르는 시민군의 모습을 영화 <화려한 휴가>는 이렇게 담고 있다.
그 날 새벽 도청.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그들이 창문 밖 어둠 속으로 그렸던 세상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가.
그 창문 앞에서 그들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을 생각한다.
글=이광재 <광주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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