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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군가산점제 부활 논의에 우려를 표한다

사회적 약자를 생활공간, 시장에서 내쫓는 군가산점제

본문

1. 군가산점이라는 권력

 
 
‘흑인에게는 백인이라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게는 비장애인라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하며, ‘여성에게는 남성이라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부둥켜안고 살아간다.

공무원시험이나 교사임용시험 등에서 제대군인에게 일정한 점수를 가산해 준다는 ‘군가산점제’는 바로 이 명제가 남근(男根)적 군사문화에 의해 변용, 강화된 모습이 된다. 그것은 공동체적 삶의 보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국방이라는 국민적 의무를 ‘병역의 의무’라는 근육질의 의무개념으로 변질시키고 이를 다른 어떤 미덕에도 우선하는 최고의 가치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신체 건장한 청년남성-이를 군사행정체계에서는 ‘장정’이라 호명한다-만이 사회적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고, 예컨대 장애인나 여성, 허약자, 생계유지 곤란자, 다문화 자녀, 전과자 등 그들과 다른 특성을 가진 수많은 인구집단들을 ‘비정상’으로 내몰아 버린다.

신자유주의의 사회가 내세우는 생산성이데올로기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위력을 획득하게 된다. 영어공부의 첫머리에 배우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경구는 자본제적 생산방식이 요구하는 수준의 생산력을 갖춘 신체만이 자본주의적 정신을 담아낼 수 있으며, 그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대우받을 수 있음을 내세울 뿐이다.

군가산점제는 이 경구의 또 다른 버전이다. 그것은 겉으로야 군대 가서 고생하며 흘린 피와 땀을 보상한다는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실질에 있어서는 군대와 같은 근육질의 통과의례를 거친 자, 그래서 ‘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검증받은 자만이 이 사회에서 대접받을 자격을 가진 자임을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 군가산점제는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라는 담론이나 ‘군대 갔다 오더니 사람 되었네’라는 담론과 일맥상통한다. 이 담론체계는 군필자야말로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아름답고도 고귀한 희생자이자 국가의 동량이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산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나 여성, 허약자 등은 그대로 국외자가 되기를 강요한다.

2. 위헌일 수밖에 없는 군가산점제

이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헌법재판소마저도 군가산점제를 위헌으로 판정하고 있음에서 잘 드러난다.

헌법재판소는 1999년 12월 23일의 결정에서 비록 우리 헌법에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한 자에 대해 불이익처분을 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가산점제와 같은 방식의 조치는 우리 헌법이 요구하고 있는 바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이런 제도는 병역을 필한 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헌법이 강도 높게 보호하고자 하는 고용상의 남녀평등, 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하는 결과를 야기한다’는 비판조차 서슴지 않는다.

‘공무원 채용시험이야말로 여성과 장애인에게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공정한 경쟁시장’이지만 이런 군가산점제는 ‘공무원 채용시험의 합격여부에 미치는 효과가 너무나 크’기에 ‘이른 바 우리 사회의 약자들’인 장애인과 여성들로 하여금 공무원 사회 혹은 학교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결과를 야기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새로이 부활한 군가산점제안은 그 적용대상을 보충역까지 확대하고, 가점비율을 각 과목별 득점의 2%이내로 한정하는 한편 횟수도 제한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런 위헌성을 치유하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원초적 하자를 가진다. ‘군가산점제를 어떻게 하면 합헌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식의 문제의식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정작 고민하여야 할 것은 ‘군가산점제 자체가 과연 치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군가산점제는 군필자에 대한 혜택보다는 군필자가 아닌 자(‘비군필자’)에 대한 박탈의 의미가 더 강하다. 이 제도 자체가 일반경쟁시험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가산점제 찬성론자들이 더러 원용하는 미국의 제도는 이를 잘 반영한다.

미국의 공무원채용과정에서 제대군인을 우대할 수 있는 것은 그 공무원채용체계 자체가 일반경쟁시험의 방법이 아니라 수시의 면접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경쟁 자체가 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형요소 또한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군필 여부는 다양한 전형요소중의 하나로 고려될 뿐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미국식의 특별경쟁이 아니라 모든 희망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경쟁이며, 전형요소 또한 시험의 성적이라는 거의 단일항목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런 판국에 이 시험의 성적을 군필자냐 아니냐에 따라 다시 획정하는 것은 그 자체 가점을 받지 못하는 다른 경쟁자의 탈락을 강제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군가산점제가 우대요인으로 작용하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박탈과 배제의 요인으로 성격지워짐은 이런 제도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3. 군필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아직까지도 군사정권기에 형성된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헌법재판소마저도 군가산점제를 두고 단호하게 위헌이라 선언한 것도 그것이 가지는 이런 본원적 한계 때문이다.
오죽하면 헌법재판소가 ‘군복무기간을 호봉산정이나 연금법 적용 등에 있어 적절히 고려하는 조치’나 ‘취업알선, 직업훈련이나 재교육 실시, 교육비에 대한 감면 또는 대부, 의료보호 등’의 여러 가지 사회정책적, 재정적 지원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을까?

실제 군필자가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아름답고도 고귀한 희생’은 그 ‘조국’이 보상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신을 위해 젊음의 시간을 투여한 군필자에 대하여 무언가 보상을 하거나 혜택을 주거나 그도 아니면 돈이라도 주어야 한다. 그것이 법의 정신이다.

물론 옛날처럼 못 살던 시절에는 어려운 국가재정이 변명거리라도 되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교역 10위권을 넘보는 경제대국에서 국토안보를 위해 희생한 청년들에게 취업알선이나 직업훈련, 재교육, 교육비감면·대부, 의료보호 혹은 실업수당 등의 조치를 외면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국가의 책임회피 내지는 직무유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국가의 의무를 되려 장애인나 여성과 같은 비군필자들에게 덮어씌우고 그들이 공무원·교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 군가산점제는 군필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회피를 은폐·엄폐하는 가식으로서의 성격까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체로서의 군필자에 대한 또 다른 억압요소가 되기조차 한다.

실제 군가산점제의 적용을 받는 집단은 군필자 중에서도 7급·9급 공무원시험이나 교사임용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뿐이다. 나머지 군필자들은 아무런 혜택도 보상도, 심지어 어떠한 보장조차도 없이 맨 땅에 내던져져 버린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이 알량한 군가산점제 하나로 군필자들의 희생에 대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한 듯 손 놓고 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내무반 군기니 뭐니 하면서 「근로기준법」상의 휴식시간 하나 제대로 갖지 못 한 채 몸과 정신 모두를 소진하게 만들어 놓고도, 그래서 ‘사람’이 아닌 ‘군인’으로 만들어 놓고도 그들이 정작 사회에 복귀할 때가 되면 ‘나 몰라라’ 하면서 뒤로 빠져 버리고 만다. 몇 안 되는 시험응시자들에게 군가산점이라는 특전을 부여한다는 명분 하나만으로 말이다.

4. 단호히 맞서야 할 군가산점제

사정이 그러함에도 거의 모든 군필자가 이 군가산점제에 대해 찬성한다.

자신들이 군복무과정에서 겪었던 그 고통과 고생을 보상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말 그러한가? 1999년의 군가산점제 위헌결정을 전후하여 부산에서는 ‘월장 사건’이 발생한다. ‘월장 사건’은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에서 대학내 군사 문화를 기획으로 다루었는데, 기획 기사 중 대학내 예비역 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다룬 에세이 글에 분노한 예비역들이 ‘월장’ 편집 기자들을 무차별 공격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라 할 사이버테러였다.

이 사건은 군가산점제가 군필자에 대한 국가의 보상 유무가 아니라 군필자/비군필자간의 권력문제에 그 본질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군대라는 국가적 억압기제가, 군필자를 중심으로 한 신체건장한 남성집단이 장애인나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집단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제2의 억압으로 전이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남근적 군사문화의 폭력이 그대로 사회적 폭력으로 변화하는 대표적인 예가 이 군가산점제인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그 나마의 이념적 장벽조차도 뿌리친 채 의기양양하게 우리 생활을 압도하는 이 시점에서 죽어 버렸다고 생각되었던 군가산점제가 다시 부활함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시장의 자유만을 내세우며 한없이 보수화되는 이 국면에서 자본의 이익을 담보할 수 있는 생산력중심주의가 교묘하게 이런 군사주의와 결합하면서 군가산점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즉, 군가산점제는 일부 군필자에 혜택을 주는 듯한 외관을 가지면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생산성의 극대화라는 시장의 요청을 감당하지 못하는 장애인나 여성 혹은 ‘부적응자’와 ‘비정상인’들을 시장 밖으로 혹은 생활공간 밖으로 내쫓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군가산점제는 인권을 말하고 공동체적 삶을 말할 때 무엇보다 먼저 구축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차별적 구조를 가지면서 현실적으로 차별이라는 결과를 야기하기 때문이며, 미시적으로는 군필자에 의한 비군필자의 억압을 구성하면서 거시적으로는 지배권력에 의한 소수자집단의 배제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속에서의 그것은 사회내의 모든 소수자들에 대하여 ‘너희들에게는 자본이라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한다.’고 외치는 또 다른 질곡이기 때문이다.
작성자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과 교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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