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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젊음의 패기와 날카로움이 있던 시절

<함께걸음>과의 인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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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간절히 글이 쓰고 싶었다.
마음속에 꽁꽁 묶여있던 답답함을 글로 풀어내면 한결 시원해질 것 같았다. 가슴속 응어리를 글로 토해내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와 ‘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강박이 내 안에 혼재돼 있었다.

이러한 욕구들이 우연히 지하철 선반에서 꺼내든 장애인 신문을 보고 무작정 <함께걸음>에 전화하도록 만들었다.
<함께걸음>에서 보낸 시기는 1992년부터 1994년 3월까지. 기사 한 개를 맡아 1년 6개월의 시간을 그들과 함께했다.

잠시 당시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제일 안쪽 방에 계신 김정렬 실장님.

사무실에 무거운 기운이 돌면, 어느 틈에 나와서 농담도 하고, 가곡을 자주 부르셨지. 그 옆에는 교정보고 넘기느라 야근에 철야를 하면서도 늘 즐거웠던 권명옥 님. 연구실 사무실 안쪽에 계신 신용호 간사님. 부드러운 표정으로 가만가만 얘기하면서 사람과 일을 모두 챙기셨지.

그 옆 책상엔 작은 몸집에 야무진 박옥순 간사님이 계셨다. 열정이 많은 분이셨는데, 민요을 부를 땐 신들린 것 같았다. 나보다 어린데 언니 같았던 조문순 간사님은 자기 일에 확신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나는 정식 직원은 아니었지만 거의 사무실에 살다시피 한 것 같다. <함께걸음> 식구들은 교육장 큰 책상 주위에 둘러앉아 편집회의를 했다. 그때 주된 주제는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것, 인권유린사례, 사람 사는 이야기, 장애인 문학, 장애여성, 법률적인 것의 소개 등이었다. 내가 맡은 것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안고 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취재하는 일이었다.

전흥윤 편집장님과 이태곤 기자님, 고은경 기자님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평소 말이 없던 이태곤 기자님 목소리도 높아지고, 부장님은 맞장구를 치거나, 반론을 폈다. 가끔씩 고은경 기자님이 이를 바라보다 날카롭게 문제 지적하곤 했는데,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편집회의가 끝나면 전흥윤 편집장님과 이태곤 기자님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취재하러 나가신다. 나는 처음에 한 분을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혼자 다니기도 했다.

그곳에서의 1년 6개월은 다른 곳에서의 5~6년과 맞먹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날마다 새롭고, 낯설음에 힘겹기도 했지만, 그때만큼 깨어있던 적도 없었으리라. 취재를 나가서 만났던 사람들, 장소, 사건은 내가 간접적으로 겪은 역사적 장면들이었다.

서초동 꽃동네, 그곳에서 주민들은 단결하여 판자촌을 지키고,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거대한 쓰레기산 뿐인 난지도 매립장에서 쓰레기를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역시 그곳에도 아이들 삶을 붙잡아주는 공부방이 있었지. ‘노가다꾼’이라 불리는 건설일용노동자들은 조합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앞산에 걸어서 가고 싶은데, 갈 힘이 없어 앞산만 바라보며 사는, 눈이 맑은 결핵환자촌 아저씨가 생각난다. 부모에게 버려져 시립아동병원에 온 중증장애아들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아이어른인 채로 평생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감전으로 다리를 잃은 이우기 님은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공동사업장을 운영하며 힘차게 살고 있었다. 지적장애인끼리 결혼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도 보았다.

겉으로 보면 잘 모르겠고,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데, 취재를 하고 글을 쓰다보면 가난한 삶은 왜 그리 팍팍하고 끈질기고, 또 거룩한지.
연구소와 <함께걸음> 식구들 중에 절반은 몸이 불편한 분들이셨다. 그분들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겪었을 어려움이나 고민의 크기가 남들보다 컸으리라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연구소에서 주최했던 ‘장애우 대학’의 학생 중에는 남의 도움 없이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인도 있었다. 그분들은 말끔한 양복차림이었고, 얼굴 표정이 밝고 의지에 차 있었다. 그들을 돕는 봉사자들 역시 같은 모습이었다. 모두 장애인 권익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경이로웠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당시의 나를 바로 세워주는 버팀목이었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만족감이 큰 만큼, 장애인 운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음도 컸다. 낯가림이 심하고 두려움에 편견까지 가진 채, 장애인에게 마음을 닫고 사는 나를 보면서, 나는 이만 그곳에서 물러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뒤 15년이 흘렀다.

다시는 글을 쓰는 일을, 장애인 관련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엔 <함께걸음>이 있다. 주위에서 장애인을 볼 때마다 그 곳 생각을 한다. 장애인 권익운동을 하는 많은 분들과 장애인들이 있었던 <함께걸음>을. 연구소와 <함께걸음>이 뿌린 씨앗이 여기저기서 싹 터서 끝까지 생명을 이어가기를 멀리서 꿈꿔본다.

나는 되돌아본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한다. 원숙함 못지않게 15년 전의 그 젊음의 패기와 날카로움이 필요한 시기라고. <함께걸음>과의 인연을 추억하며 새삼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

작성자오숙민 (전 함께걸음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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