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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는 관점, 이제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특수교육과학생총연합회 집행위원장 양준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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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특수교육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6월 통과된 「장애인등에대한특수교육법」과 관련한 교육부 후속조치 때문인데, 치료교사에게 특수교사 임용 기회를 주겠다는 교육부에 특수교육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 푹푹 찐 올해 여름, 특수교육과 학생들은 연일 집회와 기자회견을 벌였다.
그 현장에서 양준호 씨(우석대학교 특수교육과)를 만났다.
올해 스물 셋인 준호 씨는 이제 막 세상과 싸우는 법을, 그리고 무엇을 지지할 것인지를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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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인 양준호 씨 ⓒ 전진호 기자
   
“밥그릇 싸움이면 왜 이 투쟁을 견디겠습니까?”

양준호 씨와 만나던 날, 기자는 그이를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준호 씨는 미안함에 달려오는 내내 전화로 상황 설명을 했다. 그 날 준호 씨는 경찰서에 집회신고를 하러 갔었다.

“집회신고가 그렇게 오래 걸릴지 몰랐어요. 2백 명 규모 집회라고 했더니 20명을 이름과 연락처, 주민번호까지 전부 적어서 내라는 거예요. 여차하면 그 애들부터 불러들이겠다는 심산이겠죠. 그거 처리하느라 이렇게 늦어버렸어요.”

습기마저 피부로 스밀 것 같이 무덥던 날, 헐레벌떡 달려 온 준호 씨는 찬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서야 숨을 내쉬었다.

준호 씨는 한국특수교육과학생총연합회(이하 한특련)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 6월 15일 교육부가 발표한 후속조치 때문에 요즘 한특련은 정신없이 바쁘다.

교육부가 치료교사들에게도 특수교사 임용기회를 주겠다고 발표한 이후, 한특련은 50여일 간 교육부 앞에서 천막농성을 했고, 수차례 집회를 열었다.

“힘 많이 들었어요. 집회, 노숙농성, 교육부 면담 등을 계속 했지요. 이쯤이면 교육부가 우리 얘기 들어줄 때도 됐는데, 싶었어요. 그치만 결과는 계속 제자리고... 같이 했던 친구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속상하더라고요.”

준호 씨를 괴롭힌 또 한 가지는 ‘밥그릇 싸움하는 거 아니냐’는 곱지 않은 눈길이다.
이에 대해 그이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했다.

“부정하진 못해요. 그동안 교육권 확보 투쟁에 특수교육과 학생들의 참여가 부족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밥그릇만 지키려고 시작했다면, 뭣 하러 이 힘든 투쟁 과정을 견딥니까. 공부나 더 열심히 해서 임용 시험 통과하면 그만이죠.”

너무 힘들어서 이쯤에서 물러설까, 하는 생각도 솔직히 했단다. 그러나 준호 씨가 아직도 현장을 지키는 이유는 동지애 때문이다. 준호 씨는 이번처럼 특수교육과 학생들이 결집한 적은 최근 없었다며 그만큼 관심과 요구가 크다고 전했다.

준호 씨는 “이번 교육부 조치를 두고 기존의 전국특수교육과학생총연합회가 이를 찬성하는 것에 반발해 한특련을 새로 조직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최근 상황에 대해서는 “그동안 교육부가 특수교육의 전문성을 얼마나 비웃어왔습니까. 3천 명에 달하는 일반 초중등 교사들에게 시험 한 번으로 특수교사 자격증을 준 적도 있지요. 지금도 특수교사 자격증이 없는 교사 수천 명이 장애학생을 지도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잖아요.”라며 “4년간 배워도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이 많은데, 특수교육 관련해 겨우 두 과목을 이수한 치료교사들에게 아이들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고 항변했다.


“이런 아이, 책임 못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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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양준호 씨는 12년 동안 특수교육을 받은 당사자다.
왜소증이 있는 준호 씨가 비장애우 학생들에게 치일까 걱정한 부모님 뜻에 따라 특수학교에 다녔다.

“어머니께 들은 얘기인데,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나와서 배정받은 일반학교에 부모님이 찾아가셨대요. 제 장애를 미리 설명하려고요.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대뜸 ‘이런 애가 와서 다치면 어떻게 하냐. 우리 학교는 책임 못진다.’고 하셨대요.”

안타깝지만, 아직도 이런 일은 학교 현장에서 비일비재하다.

기자는 일반학교에 입학한 날, “이런 아일 데려다 놓으면 어떻게 하냐”고 펄펄 뛰었다는 교사나 교실 내 장애학생 자리에 금을 그어놓고 비장애우 학생들의 접근을 막았다는 교사의 행태에 분노한 장애아동의 부모들을 만난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시 교장이 했던 말도 안 되는 엄포는 준호 씨의 교육권을 박탈한 것이다.
교장의 엄포는 부모님이 준호 씨를 특수학교에 보낸 이유 중의 하나니까.

“제가 특수학교 다녔을 당시, 어린 제 눈에도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는 소수였어요. 당시 특수교사 자격증 없는 교사 정말 많았죠. 장애유형이나 정도에 맞춘 개별화 교육? 저는 받아 본 적 없어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이해도와는 상관없이 책 한 번 쓱 읽고 나가는 분도 있었죠. 애들 때리는 거는 예사였고, 학교 기숙사의 허드렛일은 정신지체 장애우 학생들 몫이었죠.”

준호 씨는 특수학교를 다녔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래서 지금 저희가 하는 투쟁이 중요합니다.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특수교사들에게 교육받는 건 아이들의 기본 권리입니다.”고 덧붙였다.


장애는 내 캐릭터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아파트 복도가 생각나요. 복도식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또래 아이들과 주로 그 복도에서 놀았지요. 저랑 한참 놀다가 싫증난 친구들은 ‘나, 밑에 내려갔다 올께’ 하고 가버리곤 했어요. 저는 그 때 아이들과 같이 내려가지 못했어요. 왜냐면...”

준호 씨는 아파트 밖 놀이터에서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1층으로 내려가면 왠지 안 될 것 같고, 혼날 것 같았단다.
그래서 준호 씨는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비가 오면 아이들이 놀이터로 안 내려가잖아요. 복도에서 오래 놀을 수 있으니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부터 내다봤죠. 비가 오나, 안 오나. 후후”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한창 예민한 사춘기 때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준호 씨는 어머니 얘기를 했다.

“중학교 입학할 때 어머니가 책 한 권을 내미셨죠. ‘오체 불만족’이라는 책이었죠. 그 책이 저에게는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아요. 그 책에 자주 나오는 문구가 있어요. 대략, ‘키가 작거나 큰 것은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팔이나 다리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장애는 그냥 한 사람의 특징일 뿐이다.’라는 이런 내용이에요.

그 책 첫 부분에 저자인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태어났을 때 장면이 나와요. 그 사람을 받아낸 간호사가 그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란 표정을 지었대요. 엄마도 놀라서 ‘아기가 죽었나요?’하고 물었죠. 간호사가 아기를 들어서 보여주자 ‘잘 생겼구나’고 말했대요.

그 장면이 참 인상 깊이 남았어요. 장애는 저의 캐릭터예요. 드라마나 만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자기만의 캐릭터가 있는 것처럼.”

덧붙여 “왜 나만 이렇게 생겼을까라는 생각 별로 안했어요. 제가 의아했던 것은 왜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나를 쳐다볼까였죠.”라고 했다.

준호 씨는 형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장애가 있는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비장애우 형제가 자기 친구들에게는 장애가 있는 형제 얘기는 아예 안하거나,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형은 그렇지 않았어요. 형은 생활 환경이 바뀌거나 친구들을 새로 사귀면 저에게 늘 소개해줬거든요. 하지만, 그런 형도 힘든 부분은 있었나봐요. 아마 부모님이 저에게 집중하셔서 그랬을 거예요. 한 번도 고맙다는 말 해본 적 없지만, 지면을 통해서 전하고 싶어요. 형, 고마워.”


“야, 너네들 다 앉아!”

그렇다면 준호 씨의 지금 학교생활을 들어보자.

“12년 동안 특수학교 다니다가 대학에 들어오면서 비장애우 학생들과 본격적으로 어울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천사 같다‘는 말이에요. 그런 말은 아기들에게 하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천사처럼 보일까봐’ 조심했어요. 일부러 더 반항적으로 보이고 싶었죠. 하하.”

준호 씨는 누가 묻지 않으면 먼저 말을 걸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대학교 들어와서 성격이 바뀌었다고 했다.

“가뜩이나 특이하게(?) 생겼는데 의기소침해 있으면 ‘장애우라서 그런다’고 할까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애썼어요. 제가 움츠리고 있으면 남들이 저에게 다가오기 어려워한다는 거 알게 됐죠.”
준호 씨는 현재 우석대 특수교육과 대표로 활동하고 있고, 사진동아리 활동도 한다.

준호 씨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학생이 과대표가 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학생들의 반응을 묻자, “글쎄요. 뭐가 달라졌다기보다는 이런 말들은 하더라고요. 학과 행사나 세미나 등을 준비할 때, 제가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이 오면?’, ‘휠체어 탄 사람도 접근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거든요. 그래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한 번 더 고민을 하게 됐다고 하던데요.”

학교 생활에서 불편한 점은 없냐고 묻자, “비교적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불편한 점은 별로 없는데, 의자가 제 몸에 맞지 않아서 불편해요.”라고 답했다.

준호 씨는 책걸상 높이가 맞지 않아서 무릎을 꿇고 강의를 들어야 하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1시간 넘게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리가 저려요. 그렇다고 교수님 앞에서 매번 쿡쿡쿡 다리를 두드릴 수도 없잖아요. 지루해한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뒤에 앉자니 칠판이 안보이고.”

작은 키 때문에 대화에 참여하기 어려웠다고도 했다.
“대학교 생활을 시작하면서 초기에 힘들었던 것은 눈높이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특수학교 다닐 때는 휠체어 타는 학생들도 많아서 별로 의식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대학교 들어오니까, 다들 저보다는 훨씬 커서 눈높이 맞추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대화에 참여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얘기를 시작할라치면, ‘너네들! 좀 다 앉아!’라고 요구했죠. 지금은 저와 이야기할 때는 대략 알아서들 앉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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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특수교육의 중심, 자립생활이어야 합니다”

준호 씨는 이번 투쟁 과정을 통해서 세상은 결코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사실 예전에는 장애우들이 하는 투쟁을 별로 좋지 않게 봤어요. 이동권 투쟁할 때 중증장애우들이 지하철이나 도로를 온 몸으로 막고 싸웠잖아요.
좀 부끄럽지만, 당시 그러한 투쟁들이 장애우들에 대한 인식을 더 나쁘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직접 투쟁 현장에 뛰어들어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준호 씨는 장애우와 관련한 정책들이 필요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인 줄 알았단다. 그러나 현장에서 대중들에게 호소하고, 전경과 부딪히고, 삭발하고, 정부 부처를 찾아다니고, 같은 뜻으로 뭉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약자들이 눈물과 피땀을 쏟아야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준호 씨는 이젠 투쟁할 때도 좀 더 섬세하게 장애를 고려하자며 “저는 오래 못 걸어요. 발바닥이나 관절에 무리가 많이 와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지거든요. 가두행진 같은 거 하려면 정말 힘이 들죠.

투쟁 초기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업어달라고 하기가 쉽지 않아요. 노숙농성 때문에 다들 많이 지쳐 있기도 하고. 학교 대표로 활동하고 있어서 몸이 불편할 때마다 빠지기도 뭣해요.
그리고 노숙농성하면 보통 공공 화장실에 가서들 씻는데, 저는 세면대 높이가 너무 높아서 정말 불편했어요.”라고 말했다.

이제 준호 씨는 또 다른 삶을 열어야 하는 전환점에 서 있는 듯했다.
그이는 우리 사회에서 특수교육 대상자였다가 공급자가 될 수도 있는 위치에 서 있다.

준호 씨는 “이번 투쟁 과정을 겪고 나면, 사회를 보는 어떤 관점 같은 것이 설 것 같다.”고 말했다.
교육받을 권리가 무엇인지,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이들이 왜 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지 등에 대해 준호 씨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좌충우돌 세상과 부딪히고 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지 않는가. 특수교육을 십년 넘게 받은 당사자인 준호 씨는 아마도 특수교육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알지 않을까.

“특수교육요? 제가 생각하기엔, 학교에서만 배우면 끝인 교육이라면 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학교 안에서만 유용한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장애우에게 평생 학생 노릇만 시킬 건가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립할 것인가’일 것입니다. 교육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 적응하고 성인으로써 자립할 수 있게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는 것, 저는 그게 특수교육의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연륜을 말하기엔 아직 너무 이른 준호 씨다.
그러나 덜 익어 풋풋한 대신,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을 용기와 배짱이 있다.
스물 셋,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작성자최희정 기자  prota10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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