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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이은 학대상황, 그 끝은...

친척에게 15년간 학대당한 지적장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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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인에 관한 모든 책임을 가족에게만 떠넘기는 사회적 구조가 학대상황을 조장하고 있다.
이 학대상황의 유형을 유심히 보면 도시와 농어촌 지역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는 주로 ‘돌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버려지거나 방치되다 시설 등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례가 많다면, 농어촌은 떠나간 젊은이들을 대신해 ‘돈 안주고 부릴 수 있는 일군’으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15년 전 친척의 꾐에 넘어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온 사건이 또 드러났다.
'가족처럼 돌봤다'고 주장하며 보호를 자처해온 친척이 지적장애 특성을 악용해 ‘일하는 기계’로 부려먹었던 현장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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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며 눈물짓는 정 할머니와 며느리인 순영 씨. 이들 옆에는 그들이 안고있는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진호 기자  
 
사건의 시작은 지난 1992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년 전, 고향인 봉화 땅을 떠나 안동에서 생활하던 이광식(가명, 40, 지적 2급)씨에게 고모인 이영자씨(가명. 76)씨는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자신의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어 주면 더 이상 부모들이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꼬인 것. 그 길로 광식 씨와 부모는 봉화 행을 결정했다. 15년이 넘는 세월동안 학대와 멸시 속에서 임금 한 푼 받지 못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삶일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친척에게 이 같은 학대를 받으면서도 아무 말 못하고 살아온 건 광식 씨의 아버지(지적장애인으로 추정, 사망)를 비롯해 광식 씨 부인인 순영(가명, 지적장애 1급)씨, 아들인 재근(가명, 12, 지적장애 3급)군이 모두 지적장애인이어서 스스로 자신들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 때문. 광식 씨 어머니인 정숙자(가명, 85)씨가 실질적인 보호자 역할을 해줘야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고된 농사일로 굽어버린 정 할머니의 손가락 마디. 하지만 호적조차 없어 그 흔한 병원한번 찾지 못했다 ⓒ전진호 기자  
9살에 결혼해 평생을 혹독한 시집살이 속에서 일만하며 살아온 정 할머니는 허리와 손가락 마디가 호미질로 인해 모두 휘어버렸다. 그리고 호적조차 없어 그 흔한 병원에도 한번 가보지 못했다.
광식 씨의 누나와 형이 있긴 했지만 대물림 된 빈곤과 가정문제로 인해 이들까지 챙길 여력은 없어보였다.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 요청할 수도 할 곳도 없는 상황에서 피눈물 나는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나마 손자에게까지 이어질 뻔 한 학대상황을 종결할 수 있었던 건 광식 씨의 조카인 이재숙(가명, 30)씨가 할머니의 상황을 알게 되면서.

믿었던 친척, 그러나...

재숙 씨가 정 할머니를 오래만에 찾은 건 지난 1월 경. 
재숙 씨는 어렸을 적 할머니와 생활한 적이 있어 애정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 사정상  할머니를 자주 찾기는 어려운 처지였단다.

하지만 고모할머니(영자 씨)가 바로 옆에서 돌봐주는 상황이기에 별일이야 있겠냐 생각했다고. 최소한 먹고 사는데는 지장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재숙 씨의 이런 생각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수리비 2만원이 없어서 못 고친 기름보일러는 어차피 기름이 없어 땔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얼음장 같이 차가운 집에서 그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소죽을 끓이기 위해 만든 부뚜막과 연결된 할머니 방 끄트머리 뿐. 광식 씨 부부가 생활하는 방은 흔한 전기장판조차 없었다.

차디찬 방에서 반찬 하나 없이 된장에 밥 비벼먹는 모습을 목격한 재숙 씨는 그 길로 자신의 집이 있는 대구로 정 할머니를 모시고 왔으며, 그로부터 일주일 후 숙모인 순영 씨도 데리고 왔다.

그리고 광식 씨 가족이 고모 네서 생활하며 겪었던 충격적인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현대판 노예문서가 ‘가족 같은 생활’의 증거?

우선 놀란 건 순영 씨 몸에 나있는 멍 자국이었다.
순영 씨는 “일을 못했다는 이유로 맞았다”며, 수시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정 할머니에 따르면 “광식은 시누이(영자 씨) 집에서 일하는 일군들하고 같이 일하고, 남자들 마냥 힘쓰는 일은 순영이 담당”이었다고. 뿐만 아니라 여든이 넘은 자신에게도 일할 것을 강요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일을 했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품삯이 아니라 몽둥이 찜질이었단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설과 매질이 가해졌다. 특히 광식 씨는 사람들 안보는 곳에서 고모 집에서 일하는 일군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했다고.

순영 씨에게 가해진 매질의 흔적은 병원 진단서로도 남아 있지만, 정작 폭력을 행사한 영자 씨와 영자 씨 며느리는 ‘얼토당토 않는 일’이라고 오히려 화를 냈다.

영자 씨는 재숙 씨가 순영 씨를 강제로 데려 갔다며, 순영 씨 가족에게 받아온 ‘고모(영자 씨) 이외에 어떤 사람도 광식이네 가족을 데리고 가거나 할 수 없다’ 는 내용의 각서를 보여줬다. 영자 씨 며느리 역시 “가족처럼 보살펴주며 생활해왔는데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모른 척 하는 이들이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 이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이들이 주장하는 ‘가족처럼 데리고 있었다’는 의미는 뭘까.
‘현대판 노예문서’를 보고 있자니 정 할머니와 순영 씨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undefined       ▲ 화목으로 하루종일 소죽을 끓이는 광식 씨네 집 구조상 그을음은 묻을 수 밖에 없다 ⓒ전진호 기자     이들 억울함 호소할 곳, 그 어디에도 없어

광식 씨 가족들 전부에게 주어졌던 학대가 무임금에 고된 노역만은 아니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상황이 순영 씨에게 벌어졌다. 고모네에서 일하는 일군인 김 모 씨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

순영 씨의 진술과 정 할머니의 목격담도 있고, 게다가 김 모 씨는 성범죄 전과도 있지만,  안타까운 건 범죄를 입증할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억울한 상황에 처해있는 건 순영 씨 뿐만 아니다.
광식 씨는 그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웃을 비닐하우스 안에서 방화 및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로 몰렸지만, 그를 변호해줄 것은 마땅치 않다.

광식 씨의 담당 변호사에 따르면 “불을 지른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죽은 사람의 전화기를 그가 갖고 있었고, 국과수 조사결과 현장에 있어야만 묻어있을 법한 그을음이 그의 머리와 눈썹에서 채취됐다는 이유로 유력한 용의자로 몰려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광식 씨가 정말 불을 질렀는지의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정황증거의 신뢰성에 대해선 의문점이 많다.

우선 사건 발생 직후 광식 씨에게 받았다는 경찰과 검찰의 진술서를 보면 당시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 하고 있다. 하지만 구치소에서 직접 만난 광식 씨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세부적인 묘사를 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또 지적장애가 있는 광석 씨를 심문하면서 이들의 특성을 잘 아는 전문가의 동석없이 진술을 받고, 이를 증거로 삼은 것은 문제가 있다.

그을음이 묻어있다는 이유가 결정적 증거가 된 사실도 납득 안 된다.
소죽을 끓이기 위해 하루 종일 장작불을 지피는 주택 구조상 제대로 씻지 못하고 옷을 자주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을 광식 씨 몸에 그을음이 묻어있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고려 없이 단언내린 건 분명 문제다.

물론 그의 재판이 아직 끝난 게 아니고, 경찰역시 추가조사를 하고 있다고 하니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적장애인이니까 충분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회적 묵인 속에서 많은 것들이 생략되고, 넘겨짚고, 몰아가며 수사가 진행됐다는 점이다.

  undefined       ▲ 광식 씨 식구가 생활했던 집. 기둥이 무너져내려 한쪽으로 쏠린 집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전진호 기자     이들 삶 조금만 관심 가졌어도 빈곤의 현실은 바뀔 수 있었을 것

이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보면서, 어려움에 처한 모습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렇게 삶에도 불구하고 고모네 밑에서 살 수 밖에 없었을까'라는 사실이었다.

광식 씨 가족들의 생활해온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이들의 집은 말이 집이지 폐가나 다름없었다. 한쪽으로 내려앉은 집은 위태롭게 보였으며, 외양간이 이들 집 바로 옆에 있어서 여름철, 이들이 어떻게 생활했을지 짐작이 갔다.

충격적인 건 부엌의 모습이었다. 냉장고는 언제 고장이 났는지 부엌밖에 버려져 있었으며, 가스레인지는 가스가 끊겨 사용이 불가능했다. 이곳에서 밥을 해먹었다고 했건만 쌀 이외에 다른 부식들이 담겨있는 그릇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재도구라고는 부서진 서랍장과 이불 몇 채가 전부고 그 흔한 텔레비전조차 없는 방안 역시 을씨년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기초생활수급권자이고, 쉬는 날 없이 일을 해왔다는 이들 가족이 소 외양간이나 별반 차이 없는 곳에서 끼니걱정을 하면서 생활해왔다는 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본인의 무지, 주변의 무관심 때문에 할머니의 호적이야 살릴 생각조차 못한 탓에 정 할머니를 빼더라도 이들 가족 앞으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을 합치면 월 80여만 원. 도시 가족의 한 달 생활비와 비교한다면 적은 액수겠지만, 이 돈이 이들 가족에게 정확하게만 지급됐더라면 이처럼 비참한 생활을 계속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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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식 씨 집의 부엌. 가스는 끊겨있었으며, 쌀 이외의 찬거리는 그 어느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진호 기자  
 
함께 현장을 방문한 봉화군 춘양면사무소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은 이에 대해 “가족인 영자 씨가 통장관리를 했기 때문에 믿고 맡겼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거주지 상 동거인이 아닌데 왜 고모에게 통장을 맡겼냐”라는 질문에 “광식 씨 가족이 지적장애인이기 때문에 돈 관리를 할 수 없다.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친척에게 돈을 맡긴 게 뭐가 문제 되는가”라며 “아이 학교(특수학교)도 보내고 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지적장애도 없고 동거인이기도 한 광식 씨 어머니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거나, 그 분에게 통장을 맡길 생각은 왜 안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정리하자면 주변의 무관심, 관계관청의 무책임함속에 광식 씨 가족은 본인들 이름으로 지원금이 나온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고모네서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라는 절박함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온 것이다.

더욱 답답한 현실은 이들 가족이 고모네서 일한 품삯, 생계비와 장애수당, 장애아를 위한 지원비 등을 고스란히 빼앗기며 15년가량 생활해왔지만, 빼앗긴 돈을 다시 찾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법적조치는 무척 어려운 상황이다.

우선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맡기느니 잘 보살펴줄만한 가족한테 맡긴 게 뭐가 문제냐’는 면사무소 사회복지담당공무원의 생각처럼 가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 상 갈취당한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해 내는 건 쉽지 않다. 못 받은 임금문제도 마찬가지. 계약서를 쓰고 일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노동한 사실이 입증된다 하더라도 이들의 노동력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애매하다.

또 수급비 등 횡령, 임금갈취, 지속적인 학대상황이 법정에서 인정됐다 하더라도 영자 씨 나이가 고령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기소유예처분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 같은 문제로 인해 심정적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동안의 세월을 보상받아야겠지만, 어쩌지 못하고 그저 ‘더 이상 그런 학대는 안 받고 살 수 있다’는 점으로 만족해야 하는 게 광식 씨 가족이 처한 현실이다.

친척에게, 사회에게, 그리고 법에서도 버림받은 광식 씨 가족은 도대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지역자활후견기관 나서 그나마 안심, 하지만 먼 미래는?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그동안 광식 씨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던 가족들이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 광식 씨만 풀려나온다면, 가족끼리 최소한 예전과 같은 고생은 안하며 살 수 있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실상 영자 씨가 받아서 써오던 이들 가족의 수급비 통장은 광식 씨 구속을 계기로 순영 씨 앞으로 만들어 지면서 가족들이 쓸 수 있는 돈이 됐다.

가장 반가운 소식은 봉화자활후견기관에서 정 할머니 가족을 책임지고 후견하기로 나선 것이다.

봉화자활후견기관 김휘연 관장은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할머니의 호적과 이분들이 사실 집이다. 호적은 등록이 진행 중에 있어서 5월 초순경이면 발급될 예정이고, 주택은 조카의 도움으로 봉화군 관내에 계약한 걸로 알고 있다”며 “광식 씨 재판문제를 비롯해 할머니와 가족들이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우리 후견기관에서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정 할머니 사후, 광식 씨 가족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결국 지역사회의 인식개선, 정부차원의 지원체계 마련 등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광식 씨 가족은 언제든 다시 예전의 악몽 같은 세월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버지 대의 고통이 아들에게, 그리고 손자에게로의 대물림, 이제는 막아야 하지 않을까.
작성자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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