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도 인정받는 사회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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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 ||
김 씨는 “18세 미만 정신지체가 있는 아동들에게 활동보조인서비스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장애 아동들을 온전히 부모들에게만 떠맡기겠다는 것”이라며 장애아동과 부모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아동들에게도 활동보조인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한 달 뒤 정부는 이들의 투쟁에 떠밀려 부모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아담한 체구에 동그란 어깨를 가진 김태완 씨는 인천통합교육부모회를 운영하는 활동가이자, 동주와 동표의 엄마다.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열두 살 쌍둥이와 아웅다웅 살 부비며, 아이들의 권리를 지켜내고자 동분서주 하는 김태완 씨의 삶을 들여다봤다.
“얘들아, 브이하고 사진 찍자!”
인터뷰를 마친 김태완 씨는 ‘코코아’로 동주와 동표를 호출했다. 아이들과 같이 있는 모습을 찍고 싶다는 기자 요청에 아이들을 불러낸 것. 열두 살 사내아이들이 그러하듯, 동주와 동표는 눈가에 호기심과 장난기를 자글자글 달고, 싱긋 웃으며 나타났다. 아이들은 곧 엄마를 에워싸고 코코아를 기대하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김태완 씨와 두 아이 사이에서 ‘코코아’는 이들을 연결해주는 암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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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 ||
“얼마 줘요?” 김태완 씨가 아이들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오백 원!” 동주와 동표가 작은 손들을 한꺼번에 내밀며 합창한다. 꺅꺅, 어미에게서 먹이를 받아먹으려는 제비새끼들 같다. “거스름 돈 가져와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김 씨가 당부를 잊지 않는다. 동전을 받아든 형제는 자판기로 직행, 김태완 씨 두 눈은 그 아이들 뒤에 가서 선다.
“여기 오려면 저금통에서 동전을 아예 여러 개 가져와요. 아이들이 자판기 코코아 너무 좋아해서.” 김태완 씨는 살면서 터득한, 아이들과 소통하는 지혜로운 여러 방법을 가진 듯 했다. 기자가 낯선 듯 아이들이 슬쩍슬쩍 피해버리는 통에 사진 촬영은 쉽지 않았다. 진땀 빼는 기자에게 김태완 씨가 웃으며 비법을 슬쩍 알려준다.
“브이하고 사진 찍자, 하면 아이들이 찍혀(?)준답니다.” 기자는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얘들아, 브이하고, 사진 찍자!” 까만 조약돌 같은 아이들 눈이 순간 반짝했다.
드디어 찰칵!
“제 신발 보여드릴까요?”
김태완 씨가 신고 온 분홍색 단화에는 그이 이름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학교 실내화도 아닌데, 신발에 웬 이름을? “우리 아이가 쓴 거예요. 재밌죠? 낙서를 처음 봤을때는 큰 맘 먹고 산 신발인데, 못 쓰게 해놨다는 생각에 엄청 속상했어요. 그런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요. 자기 물건에는 다 이름을 쓰니까, 엄마 신발에도 이름을 써줘야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 맘을 알고 나서는 신고 다녀요. 사람들이 신발 보면 깔깔대요. 저는 우리 아이가 썼다고 자랑하고요. 뭐, 이런 게 사는 재미죠.”
컵에 담긴 물을 반이나 남았다고 볼 것인지, 반 밖에 없다고 볼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엎어치나 메치나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 그 간극을 넘기는 쉽지 않다. 여기까지 온 김태완 씨에게도 무릎으로 넘어야만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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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 ||
“아이들에게 선천적으로 장애성향이 있는데, 양육방법 때문에 그 성향이 증폭된 것 같아 많이 힘들었죠. 임신했을 때 먹은 햄버거로도 제 자신을 미워할 정도였으니까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에게만 매달려 많이 가르치면 좋아질 거라고 믿었어요. 내가 잘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죠. 그러다보니 점점 피폐해지는 건 저였요.”
김 씨는 그 시기에 자신은 물론, 남편이나 친정, 시집 등 모두가 밉고 원망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그 때는 늘 우울하고 불안했던 것 같아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는 모습만 봐도, 부러워서 눈물이 쏟아졌어요. 사소한 예를 들자면 이런 거죠. 샴푸 한 통을 화장실에 다 풀어 놓거나, 라면 먹겠다고 찬물에 푹 담그거나, 새 점퍼에 이름 써놓는 것들. 어떻게 보면 속 터지는 일들이죠. 이런 것들에도 서러워서 많이 울었어요. 요즘도 비슷한 상황은 벌어져요. 그렇지만 지금은 ‘너 덕분에 화장실 청소 잘 했다’, ‘너가 즐거웠으면 됐다, 6천원 짜리 샴푸보다 네가 더 중요니까’, ‘뜨거운 거 싫어하는 넌데, 라면 불는 것이 대수냐’ 라고 넘겨요.
제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아이가 행주를 물에 첨벙 적셔서 제 머리에 철퍼덕 얹어줘요. 물이 줄줄 흐르지만, 아픈 엄마 이마에 물수건 얹어주고 싶은 아이 마음 아니까, 아이들이 소중하고 고맙죠. 팍팍하고 힘든 일상에서 아이들이 보여주는 기발한 발상에 즐거워하며 살아요.”
김태완 씨는 이제야 아이들 키우는 기쁨을 알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 한창 예쁠 때는 이리저리 몸을 쪼개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 때문에 예쁜지도 모르고 지나갔는데, 아이들이 학교 다니면서 말이 많이 늘어, 지금은 개그콘서트 수준으로 웃긴다며 즐거워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비장애 아동이었으면 하는 생각 많이 줄었어요.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 바램은 저를 힘들게 하니까요. 그보다는 기쁜 점을 보려고 해요. 쉽지는 않았지만, 생각을 바꾸니까 같은 상황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무엇보다 제가 안정을 되찾으니까, 아이들도 편안해하는 것 같아요.”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믿고 싶었어요, 혹시 통합교육 받으면 좋아지지 않을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마다, 아무런 보호막이 없구나 하는 생각 많이 했어요. 지금은 많은 부분을 놓았지만,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지킬 수 없으면 어쩌나 두려워요. 정부는 부모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기고 있죠. 저는 특히 초등학교 입학 전후 2~3년간이 제일 힘들었어요. 제가 특수교사였지만 우리 아이들은 통합교육 2,3년만 받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돌이켜보면 그 때까지도 아이들 장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봐요. 안되는 거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부모님, 남편, 친척, 친구들... 신경 쓸 새도 없이 살았어요.
아이들에게는 교실이 감옥인데 종일 어떻게 버틸까 안타까웠죠. 사실 아이들이 교실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없잖아요. 동주와 동표 반을 오가며 눈동자처럼 아이들을 돌봤죠. 교실 안에 있는 애들도, 밖에 서 있는 저도 가엽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동네 아이들이 놀려도 상황 파악을 잘 못하니까, 놀이터까지 따라 나가게 되고. 내가 그렇게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고 속상하고... 지금은 부모회 엄마들끼리 ‘중고등학교 가면 반 아이들에게 더 맞는다더라. 우리 아이들 몸에 충격을 감지하는 센서라도 붙여놔야 할까보다’는 농담을 하는 정도가 됐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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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 ||
그이도 장애 때문에 강요될 낙인감 때문에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입학할 때 장애등록을 했는데, 장애진단을 하는 의사나 사무처리를 하는 동사무소 직원들 모두 그냥 ‘일’로만 처리하는 태도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제게는 인생이 왔다갔다하는 문젠데, 그들에게는 처리할 ‘일’이더군요. 한 조각의 정보도, 한 마디의 따스한 말도 없었죠. 장애진단 받고 등록을 하는데,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 아마 이 과정을 겪는 부모들은 다 그랬을 겁니다. 어디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그 정보조차 제공하는 곳이 없죠. 만약 그 때 통합교육을 어디서 하는지, 입학하는 과정이 어떠한지, 하다못해 특수학교 명단이라도 한 장 받았다면 정말 큰 위로가 됐을 텐데 말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장애아동이 있는 가족을 지원하는 제도가 거의 없어요. 아이의 장애로 제일 힘들어지는 건 부부 관계인데, 이를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당사자들은 막막하기만 하거든요. 현실적으로 아이를 둘러싼 가족이 무너지면 아이의 미래도 무너집니다. 그러니 장애아동이 있는 가족을 지원하는 제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김태완 씨는 그 때 쓰러지지 않게 도와준 사람들이 장애아동을 키우는 선배 엄마들이라고 했다. 그 엄마들이랑 친목회 수준으로 모임을 만든 것이 발전해 지금의 인천통합교육부모회가 됐다고. 김 씨는 장애아동이 받는 차별은 부모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며 단체로 힘을 모아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 아이 밥 먹일 때, 다른 아이 밥 먹는 거 생각하죠.”
장애아동 부모들이 만든 단체들은 엄마들이 맺는 끈끈한 연대로 유명하다. 새끼를 키우는 어미라는 공통점이 그런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이 엄마들의 힘으로 만든 ‘장애인교육지원법’(안)이 현재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아마도 내 아이 밥 먹일 때, 다른 아이 밥 먹는 거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내 아이 키우는 거 힘들다는 거 아니까, 남의 아이 사정도 생각하는 거죠. 사실 아빠들은 다른 집 아이 돌보는 거 힘들어하거든요.
그리고 엄마들이 공통적으로 아이들 키우는데 남편 도움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서로 힘든 부분 채워주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엄마가 아이 둘을 데리고 외출하는 것보다, 엄마 세 명이 모여 아이 여섯 명을 보는 것이 훨씬 수월하거든요.”
김태완 씨는 같이 활동하는 엄마들이 친척보다 훨씬 더 가깝고 편안하다고 말했다. 부모회 엄마들은 아이들에 대한 고민과 정보를 나누는 것은 물론, 학교 행사나 특수학급 설치 문제 등에 대해서도 같이 힘을 모아 대처한다고.
“작은 애가 아파서 열흘 동안 입원한 적이 있어요. 그 때 부모회 한 엄마가 큰 아이를 맡아서 돌봐주었죠. 남의 아이 열흘씩이나 봐주는 거 정말 쉽지 않아요. 그것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말이에요.
부모회 엄마들은 알죠, 집에 다급한 상황이 생겨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맘 놓고 맡길 곳이 없다는 것을, 그것 때문에 문제가 또 발생한다는 것을요.”
“내 인생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죠”
지난 2월 중순, 복지부는 18세 미만 아동들에게도 활동보조인서비스를 성인과 동일한 내용으로 제공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현재 김태완 씨는 인천시가 하는 활동보조인서비스 시범사업을 이용, 하루에 8시간 서비스를 받고 있다. 만약 기존 방침대로 활동보조인서비스를 시행했다면, 시범사업이 끝나면 김 씨는 서비스를 아예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방침이 바뀌어, 전액 자부담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서비스를 이용할 수는 있게 됐다
활동보조인서비스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김 씨는 “내 인생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고 했다.
“사내아이들이라 목욕탕이나 수영장에 가려면 남자가 필요한데, 남편이 같이 갈 상황이 못돼서 몇 년째 가질 못했죠. 아이들이 좀 어렸을 때는 수영장 남자 탈의실 문에 붙어서 ‘양말 벗었니?’, '수영복 입었니?’ 하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크니까 그마저도 못하겠더라고요. 지금은 활동보조인과 같이 가는데, 아이들이 정말 좋아해요. 활동보조인서비스 받으면서 저희 부부는 몇 년 만에 영화를 봤죠. 그 날 생각했어요. 내 인생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고 말이에요.”
김태완 씨는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자립을 위해서도 활동보조인서비스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늘 엄마 손길만 받던 아이가 성인이 돼서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가 하는 지원을 어떻게 소화하겠냐는 것이 그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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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 ||
“요즘은 초등학교 4,5학년만 되도 부모가 학교 오는 거 아이들이 싫어해요. 부모님 오면 놀림도 받는다는데, 중고등학교 때는 더하지 않겠어요? 장애가 있는 아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적 손길이 필요한 거죠.
성인이 되면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독립해야 하는데, 20년 넘게 엄마 도움만 받다가 어느 날 다른 사람이 하는 지원을 받아들이는게 가능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독립을 연습할 수 있는 중간과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활동보조인서비스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부모가 끼고 살 수 없으니 독립을 준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부모나 아이도 사회적 지원을 어떻게 받을지도 연습해야죠.”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도 제 할 일 다하는 겁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부족한 점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언어치료, 물리치료, 글씨 공부, 이것저것 많이 다그쳤죠. 그게 엄마로써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십 년 넘게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수영이나 달리기를 잘하는 것 자체도 무척 훌륭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뭔가 특별하게 잘하게 다그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아이들은 존재 그 자체로도 제 할 일을 다 한다고 생각해요.”
김 씨는 부모들이 해야 할 것은 앞으로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한 것이라고 조언한다. 김태완 씨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사회가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좌지우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를 기준으로 사회를 바꾸는데 부모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장애를 극복하기 보다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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