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세상’을 향한 ‘함께걸음’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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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한 해를 걷기도 힘든데 (함께걸음)은 10년을 함께 걸어왔다. 그것도 성한 사람들 하고가 아니라 장애우들과 함께!
<함께걸음>은 월간지이다. 우리 나라에는 무수한 월간지가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다.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해방공간을 거쳐 6․25 전쟁을 치르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월간지들은 대중매체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요즘에는 텔레비전을 비롯한 전파매체와 컴퓨터통신이 대중매체의 첨단을 걷고 있지만, 인쇄매체인 일간신문, 주간지, 월간지에다 계간지까지 아직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 활자에 대한 인간의 애착은 대단한 것 같다.
경쟁이 심해서 그런지 자본의 뒷받침이 약한 인쇄매체들은 특히 명이 짧았다. 심지어는 든든한 ‘물주’를 가진 월간지가 몇 호를 내고 문을 닫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함께걸음>이 지난해에 100호를 내더니 이제 창간 10돌을 맞은 것은 그야말로 경이적인 사건이다. 구독료 수입이나 광고료만으로는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을 텐데 10년을 한결같이 걸어왔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내가 ‘장애우’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90년대 들어서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92년인가 어느 날 민중 미술운동을 하는 화가 여운 교수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도와줘야 겠닥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마침 그 연구소에는 70년대 재야운동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이철용 전 의원과 한신대 김성재 교수가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연구소 사무실에 간 나는 그날ㄹ 열린 모임에서 얼결에 이사가 되고 말았다. 그 뒤 여러 해 동안 연구소 일을 도와준 일이라고는 <함께걸음>에 글로 부조를 좀 하고 연구소 행사에서 축하의 말 몇 마디 한것이 전부라서 미안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연구소에 대해서는 이렇게 죄지은 느낌이면서, 한편으로는 장애우운동에 관해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눈을 조금이나마 열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의 머리는 눈이 전해주는 영상을 받아들여 제 나름으로 해석한다. 가령 장애우에 대해 눈이 전달하는 모습을 뇌는 어떻게 생각할까? 지팡이로 길을 두드려가며 걸어 가던 시각장애우와 부딪힌 사람들의 반응을 예로 들어보자.
가) “이봐요, 앞 좀 똑똑히복고 다녀요. 에잇. 아침부터 재수없어.”
나) “미안합니다. 제가 조심성이 모자랐습니다. 일어나시지요.”
다) “제 손 잡고 일어나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 없으신가요? 제가 차 타시는 데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정확한 통계는 없겠지만, 우리나라 사람 중 절반 이상이 ‘가’에 든다고 보면 지나칠까? 어디까지나 내 짐직이지만 ‘나’는 10%를 넘지 못할 것이며, ‘다’는 1% 미만이 아닐까? 문항을 하나 덧붙인다면 부딪치고 나서 한동안 말 없이 쳐다보다가 옷을 툭툭 털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장애우 운동과 <함께걸음>을 알기 전의 나는 아마 ‘툭툭 털고 가기’ 아니면 잘 보아주어야 ‘나’에 들었을 것이다.
나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이름을 걸고 나서도 한동안은 장애우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돋뵈를 끼지 않으면 신문을 읽을 수 없는 나 자산이 바로 장애우라고 깨닫기 되었다. 일단 그렇게 작은 깨달음을 얻고 보니 장애우를 보고 눈이 전하는 영상을 뇌가 달리 해석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장애우문제는 사회 구성원 각자의 정신상태, 세계관과 직접 닿아 있으며, 국가의 민주주의 수준이나 복지정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드러내놓고 장애우를 경멸하거나 잠재적인 우월감을 가진 ‘성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나라나 사회는 어김없이 민주화의 후진국이며 복지 수준도 형편이 없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신문이나 여러 매체에 글을 쓰면서 그런 후진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했다. 그런데 <함께걸음>을 읽고 거기에 칼럼도 연재하면서 장애우문제를 보는 마음과 머리가 차츰 변화해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서 경험담을 하나 소개하겠다. (언젠가 <함께걸음>에 ‘베트남 장애우들’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1995년 7월 중순에 호치민시에서 ‘베트남 한인 2세와 함께가는 모임’(약칭 코베트)이 창립되었다. 60년대 중반부터 75년까지 한국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그 나라에 낳아놓고 떠나온 채 어쩔 수 없이 버린 젊은이들을 돕고 자립의 길을 열어주자는 뜻으로 만든 단체였다. 93년 9월에 처음으로 베트남을 취재한 뒤 그들의 딱한 처지를 안타깝게여기던 나는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코베트를 만들고 두 달이 멀다 하고 베트남을 찾아갔다.
호치민시와 하노이는 물론이고 베트남에는 어디를 가나 거지와 장애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관광안내인이 나그네들에게 처음 하는 말은 ‘거지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거지에게 돈을 주면 다른 ‘패거리들’이 몰려오니 선심은 쓰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나도 으레 그렇게 했다. 중부의 다낭에 처음 갔던 때였다. 호텔 문을 나서는 데 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거지’가 손을 내밀며 끈질기게 따라오기에 5천동(우리 돈으로 8백원쯤)을 주었다. 잠깐 뒤에 내 뒤에는 수십개의 손이 따라붙었다. 나는 그 숲을 헤쳐 나오느라고 진땀을 뺐다.
그러나 그 뒤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인 고엽제 환자들이나 손목 발목이 잘린 사람들에 맞닥뜨린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안스러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저들은 믹국의 고엽제와 총탄에 맞았고, 한국군에게 당한 이도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눈을 돌릴 수 있단 말인가.’
한국에는 그렇게 처참한 장애우는 많지 않지만, 멀쩡한 옷을 입고도 그들에 못지 않은 차별과 냉대와 설움에 우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함께걸음>이 지난 10년 동안 장애우들이 사는 곳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밝혀 냈듯이, 우리 사회는 장애우들에게는 아직도 까마득한 후진국이다.
앞을 못보는 장애우가 인파에 밀려 지하철에서 전동차에 부딪혀 목숨을 잃는가 하면 휠체어를 탄 외국인이 여관 문 앞에서 박대를 당하고, 이런저런 대학들이 장애우를 몇 사람 입학시키면서 가장 큰 선심을 쓰는 듯이 호들갑을 떨어댄다. 가까스로 대학에 들어간 장애우는 휠체어는 타고 곡예하듯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 뿐인가. 장애우를 위한 교육기관이나 복지시설을 지으려고 하면 주민들의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법률로 정한 장애우 고용을 제대로 지키는 기업은 몇 군데나 될까? 살아갈 길이 막막해서 장애자녀를 보호시설에 맡기려 하면 친권포기각서를 요국하는 데가 많다. 국제통화기금 신탁체제인 이 시기에 얼마나 많은 장애어린이들이 부모 곁을 떠나야 할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함께걸음>은 장애우의 지옥인 한국에서 외롭고 고단한 싸움과 보도를 참으로 끈질기게도 계속했다.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장애인복지법개정, 사회통합 차원의 장애우 대책 촉구, 여성장애우 공동체 운동 지원 같은 일이 대표적이다. 특히 연구소 운영과 <함께걸음> 발간에 인생을 바치다시피하며 살아온 이성재 변호사가 국회의원이 된 뒤에 법과 제도를 개선하고 보완하는 활동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누군가 말했듯이 국민회의 김대중 총제가 잘한 일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이 변호사를 전국구 의원후보로 추천한 것이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한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 중에 중요한 것은 장애우의 삶의 질과 복지수준이다. 내가 늘 잊지 못하는 것은 몇 해 전 어느 텔레비전에서 본 독일의 장애우 정책과 그들의 당당한 삶이었다. 군 복무를 대신해서 장애우를 보살피는 젊은이의 얼굴에서는 동정이나 시혜 같은 것, 성한 사람의 우쭐함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장애우도 보통 사람과 같은 인간이며, 다만 불편한 점을 성한 사람이 보살펴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이 온 사회에 퍼져 있다고 느꼈다.
우리 나라는 언제 그런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함께걸음>은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먼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다행히 지난 시절의 군사정권이나 무능한 권위주의 정권과는 달리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새정권이 들어섰다. 특히 새 대통령이 정치적 음모의 냄새가 짙은 ‘공격’을 받아 장애우가 된 뒤 장애우의 고통을 익히 알게 된 만큼 획기적인 장애우 정책을 마련하고 실천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함께걸음>은 그런 낙관에만 기대지 말고 언제나 장애우들을 위해 깨어 있으면서 ‘참 좋은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차분하게 나가기 바란다.
글/ 김종철 (한겨레신문 대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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