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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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을 통해 소개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독자들을 울리고 웃겼던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함께걸음의 10년을 이끌어주고 채워준 장본인들이다. 그때 그 사연 속의 주인공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함께걸음이 가져다준 작은변화는 혹시 없는지 오늘, 그들을 다시 만나보았다.
이혼하는 남자? 결혼하는 남자!
함께걸음 97년 2월호 사람사는 이야기 코너에 소개됐던 ‘이혼하는 남자, 권진오’ 편의 권진오 씨는 그간 결국 부인과 합의이혼을 했다. 아이들의 양육권과 레스토랑마저 전처에게로 넘어간 후 권진오 씨는 한동안 마음을 못 잡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결혼해서 20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인에게 그렇게 철저하게 배신을 당했으니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연주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소개받은 직장에 나가며 간간이 의뢰가 들어오면 연주로 용돈 정도나 벌면서 다시 새롭게 인생을 살아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해 10월의 어느 날 한 장애우협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연주를 하러 갔다. 그런데 자원봉사자들 가운데 일본인이 끼어있는 것을 보자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일본노래를 한 곡 불렀어요. 어머니에게서 배운 일어실력으로 부른 건데, 전 단지 행사에 참석한 일본 사람이 있길래 즐겁게 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런데 노래가 끝나고 나자 웬 여자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더라구요.”
권진오씨의 노래를 듣고 다가온 여자가 바로 유끼꼬씨였다. ‘함께걸음’에 실린 그의 사연을 읽었다며 아는 체를 해온 것이다. 유끼꼬가 다니던 봉사단체에 ‘함께걸음’이 배달돼서 읽어보곤 했는데, 거기에 실렸던 권진오 씨의 사연이 유끼꼬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7개월이나 지났지만 일본 노래를 열창하는 권진오씨를 보자 자신이 읽었던 기사를 기억해 낸 것이다. 그때의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후에도 권진오씨와 유끼꼬는 친구처럼 만났고 결국 지금은 연인사이가 됐다. 오는 12월에 결혼을 계획중이라고 한다.
권진오 씨는 낮이면 상봉동에 있는 공장에 나가 일하고 밤이면 명동에 있는 음악학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유끼꼬를 만나 공원으로 데이트를 나간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 다시 밤무대에 나가 음악을 할 것이라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유끼꼬도 지금 하는 일어강사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사람으로 얻은 상처는 사람만이 치료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혼한 남자’였던 권진오 씨, 그는 곧 결혼하는 남자가 될 것이다.
“남편도 없으니, 마음 굳게 먹고 살아야죠.”
95년 11월 ‘사람사는 이야기’ 코너에 실렸던 이남숙(45) 씨에게도 그간 적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함께걸음이 자신의 사연이 실린 뒤 얼마 안 있어서 남편이 아주 집을 나갔다고 한다. 남편이 집을 나가고 나서 생활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그녀는 슬쩍 웃어보였다.
“남편이 들어올 때 쯤이면 항상 긴장됐는데, 이젠 긴장하지 않아도 돼서 마음은 편해요. 하지만 자식들을 생각하면 남편이 없는 게 불안해요. 그러니깐 마음을 더 굳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2년 전 그녀는 남편에게 수시로 심하게 맞으면서도 이혼은 싫다고 말했었다. 아이들을 아버지없는 자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도 이남숙씨는 이혼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많이 변한 것 같다. 여태까지 장애우니까 어쩔 수 없다고 단념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번째로, 그녀는 검정고시 시험을 보기 위해 야학수업을 듣고 있다. 공부를 못해서 지난번 시험에는 응시하지 못했지만 다음 검정고시 때는 꼭 합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남숙 씨가 열심인 일이 한가지 더 있다. 여성 장애우 모임인 ‘빗장을 여는 사람들’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씩인 모임에 모두 나갈 수는 없지만 빗장의 회지도 받아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다고 한다. 빗장모임에서 자신처럼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여성장애우들을 보면 그래도 많은 위로가 된다.
이남숙 씨는 요즘 돈벌이에도 열심이다. 얼마 전에는 집 앞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잡곡을 팔았는데 약국주인이 싫어해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쫓겨났다. 다시 장사를 해보려고 하는데 좌판을 벌일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녀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단지 먹고사는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아들 진수가 대학교 진학에 실패해 재수를 하고 싶어하는데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민이 된다는 것이다. 학원에도 보내야 하고 책값도 줘야 g k고 아마 차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5살 때 사고로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딸 진희에게 보조기를 달아줘야 하는데...
이남숙 씨에게는 여전히 많은 고민들이 있다. 그러나 웃는 얼굴이 더 어울리는 그녀이기에 앞으로의 삶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그림상자에 닥쳐온 IMF 한파
아마 우리 나라 사람 두 명만 삼 분내에 한 번은 꼭 나오는 얘기가 ‘IMF’라는 단어일 것이다. 나라 전체가 경제 한파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런 때일수록 힘이 드는 건 장애우들이다. 후원금이 끊기는 건 물론이고 사람들의 마음마저 얼어가기 때문이다. IMF가 내뿜는 찬기운에 몸살기운을 느끼는 건 ‘그림상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림상자의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그림상자에 회원들은 한 달에 한번 모임을 갖고 연극이나 영화를 본다. 그런데 회원들 대부분이 장애우들이라 이동이 불편하다. 그 동안은 한벗회에서 차량이동봉사를 해줬는데, 기름값이 배로 오르다보니 차량봉사자들이 줄었다는 것이다. 봉사자가 반으로 줄었다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건 더하다. 장애우의 집과 봉사자의 방향을 맞추기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2월 15일에는 파카디리 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교통편 때문에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신입회원도 못받고 있다. 어떻게든 교통편을 확보해야 신입회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또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림상자 회원들이 모여 가끔 비디오를 보고 토론회를 갖기도 했는데 그 장소가 제일기획이었다. 한벗회에서 이동봉사를 나왔다가 인연이 된 한 회원이 자신이 근무하던 제일기획에 장소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가 명예퇴직을 당하면서 그림상자는 모일 장소를 잃게 됐다. 가뜩이나 힘든데 안심하고 만날 수 있는 장소 하나를 잃게 됐으니 여간 아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힘들어만 할 수도 없다. 우선 다음 달에 있을 정기 총회 준비가 바쁘기 때문이다.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다시 뽑아야 하고 4월이면 선보이게 될 제1호 회지 준비위원도 뽑아야 한다. 회지라고는 하지만 몇 장이나 될 지 모르겠다는 게 회장 김동수(31)씨의 말이다.
또 9월이나 10월 중에 서울시내에 있는 극장의 편의시설을 점검해 보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명실공히 장애우들의 문화 활동을 대표하는 모임이다 보니 다른 장애우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극장들로부터 점검하기로 했다는데, 준비가 만만치 않다. IMF한파, 피해갈 수 없다면 이겨내는 수 밖에.
작은 권리찾는 인권지기 김칠준 변호사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연신 울려대는 호출기에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다시 이야기가 진전된다 싶으면 핸드폰이 울려대는 사람이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짜증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보기좋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호출기가 한번 울릴 때마다 답답한 사람의 가슴의 풀리고 전화 한 통화로 억울한 사람의 누명이 벗겨진다면 은근히 기쁜 마음마저 들지 모른다.
안국동에 있는 참여연대의 사무실에서 만난 김칠준 변호사가 그랬다. 함께 있는 1시간 동안 그에게 걸려온 전화나 호출은 손으로 세기에 부족했고, 심지어는 담배를 피우러 잠시 복도에 나간 사이에도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상담을 하고 들어왔다.
요즘이 김칠준 변호사에게는 가장 바쁜 시기이기 때문이다. 3월이면 안식년이 끝나기도 하거니와 지난 달 28일에 있었던 아파트 공통체 연구소의 출범식문제로 정신이 없다. 옛날에는 마을 단위로 뭉쳐서 주민들의 권리찾기를 했지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이젠 아파트도 마을 못지 않은 공동체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아파트 시민학교에 나가 수업도 하고 참여연대에서 교육도 하고 1인 2역, 아니 1인 3역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에바다 문제도 그에게는 커다란 짐이 아닐 수 없다. 이사장이야 물러났다지만 동생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완전퇴진이 아닌 한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월요일이면 참여연대로 출근하는 그에게 참여연대가 갖는 의미를 물었다.
“항상 변호사라는 직업적 관점에서 사회를 보게 되는데, 참여연대에서는 한 사람의 시민운동가로서 일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사건을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통해 변화를 꾀하는 거죠. 일상 속에서 간과하고 지나가는 인권침해나 권리침해의 이면에는 국가나 재벌의 오만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고, 이런 작은 권리를 찾아줌으로써 인권은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겁니다.”
다소 딱딱한 어투로 말하는 그의 모습은 우직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회복지대학원에 재학중인 부인이 최근에 다음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수원시 시의원으로 출마할 의사를 밝히고 있어, 올해는 단상에 서서 지지연설을 하는 김칠준 변호사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원 합격의 영광은 남편에게” 고정심씨
97년 4월 표지모델이기도 했던 고정심 씨는 여전히 꿈을 꾸는 소녀 같았다.
“작년에 학원을 냈으니까 이제 1년이 다 되가는군요. 그 동안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안양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그린’이라는 미술학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았죠. 작품활동도 열심히 했구요. 올해 국전에 작품을 낼 계획이거든요.”
충남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그녀가 이제는 후학을 가르치는 어엿한 미술강사로서 자신의 계획을 밝힌다.
언제나 웃는 얼굴인 그녀지만 그간 웃을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처음 문을 연 학원의 빌딩 주인은 계약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건물이 팔렸다며 일방적으로 나가라고 통고를 해온 것이다. 그렇게 가진 자의 무지막지한 횡포에 밀려 학원을 옮겨야 했다. 급하게 학원을 옮기느라고 분주한 날을 보냈고, 경기가 위축되다 보니 학원 운영에 대한 걱정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요’하면서 웃어 넘긴다. 오히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작은 효도를 할 수 있었던 일을 자랑처럼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학원에 와 계실 땐데요. 같은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원장님’ 하면서 저를 찾는 거예요. 가끔 학부모들이 와서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저를 깍듯이 대하니까 어머니는 그게 그렇게 감동스러우셨던 것 같아요. 금방 눈가가 흐려지시더라구요.”
새로 옮긴 학원에는 넓은 작업실이 달려 있어서 그곳에서 또 고정심씨는 작품을 만드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작년에 학원을 꾸리느라고 작품활동을 소홀히 했는데, 올해도 작품활동도 많이 하고 대학원에도 진학할 계획에 영어공부도 열심히 한다. 등록금만 마련되면 언제든지 진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어머니가 저를 업고 다니느라고 고생하셨지만, 이제 남편이 그 일을 대신 해주겠다고 했어요. 대학원에 수석으로 합격하면 그땐 그 영광을 남편에게 돌리고 싶어요. 남편과 저, 둘 다 학수고대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죠.”
이제 다섯 살이 된 아들 상준이도 다 컸다고 곧 잘 엄마가 하는 일을 돕는다. 물도 떠오고 그림 그리느라고 더러워진 붓을 깨끗이 빨아오고 엄마 휠체어를 밀어주기도 한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아마도 내년 이맘때쯤, 대학원에 진학에 열심히 공부하는 고정심씨를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여전한 거리의 악사, 성모세씨
명동 성당 앞이나 남대문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 앞에 가면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자전거에 스피커와 마이크를 달고, 앞에는 성금함에 놓고 노래하는 사람, ‘갈대의 순정’을 애창곡 삼아 부르는 성모세(41)씨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다를 것이 별로 없는 걸인이다. 그런데 성모세 씨를 다른 사람과 구별짓는 것이 있다. 바로 모금통 때문이다. 자전거 앞에 달려있는 모금통에는 심장병 어린이를 위해 쓰여진다는 글귀가 있다. 이 모금함을 달고 노래를 부른지 7년이 넘었고 이젠 가족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나무상자다.
몸도 불편한 그가 모금활동을 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그에게도 한 때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돌잔치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심장병으로 죽은 것이다. 그 일이 화근이 돼 부인마저 그의 곁을 떠났다고 한다. 그 뒤 장터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모은 돈으로 번듯한 가게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안정적인 삶이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지 우연히 만난 걸인 때문에 성금통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7년, 성모세씨는 나무상자로 된 모금통을 싣고 명동성당과 남대문을 오가며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 심장병어린이를 돕기 위한 모금활동이다.
성모세씨는 올해를 너무 힘들게 시작했다. 재작년 주위 사람의 소개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두 달 전 갑자기 그의 곁을 떠난 것이다. 1년 남짓 오랜만에 사람체온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녀가 떠나고 난 자리가 마냥 허전하기만 하.
그래도 일을 관둘 수 없어서 매일 명동성당으로 나오기는 하는데 신나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성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을 보면 웃어줘야 하는데 웃음이 안나와요. 힘내라고 웃으며 돈을 넣는 사람을 보고 안웃을 수도 없고 정말 힘듭니다.”
성모세 씨는 여전히 명동성당 앞에서 또는 남대문 지하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마이크를 대고 노래하지만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잘 부르는 노래도 아니어서 옆에서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소리에 묻혀버리기 일쑤다.
“IMF한파 때문이라고는 해도 너무해요. 지긋지긋하게 모금이 안돼요. 한동안 쉬는 바람에 모아놓은 성금도 없는데 언제 돈 모아서 심장병수술을 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모금활동이 끝나고 난 저녁, 그는 용산에 있는 집을 향해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보지만, 사람체취가 사라진 방에 혼자 들어갈 일이 걱정이기만 하다.
“9월이면 엄마가 돼요!” 김진옥씨
마흔의 나이에 비장애 남성과 용기있는 결혼을 해 화제가 됐던 김진옥 씨는 올해 초 또 하나의 뉴스거리를 만들었다. 임신을 해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이다. 임신 3개월, 그녀에게는 이제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배가 뿌듯하기만 하다.
“아기 엄마가 된다고 기뻐할 틈도 없었어요. 워낙 조심스럽게 불안해서요. 그런데 병원에서 괜찮을 거래요. 요즘에서야 조금씩 아이엄마가 된다는 기쁨을 느끼고 있어요.”
아이를 가진 부모가 그렇듯이 진옥 씨와 남편 김정근 씨는 우리 아이가 어떻게 생겼을까. 딸일까 아들일까로 설레이는 마음 반, 행여 아이에게 이상이 생기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마음 반으로 살아가고 있다.
“처음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남편한테 섭섭한 점이 없지 않았어요. 모르고 결혼한 것도 아닌데, 아이 양육이 걸렸나봐요. 그래도 부부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됐어요. 힘들 수도 있는 문제인데 서로 이해하면서 노력하고 있거든요.”
진옥씨의 출산예정일은 9월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앞으로 5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진옥씨는 해야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우선은 친정집에서 분가하는 일이다. 주위 사람들은 아이까지 생기는데 오히려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있는게 편할 거라고 걱정을 해주지만 진옥씨 생각은 좀 다르다. 평생을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없다면 차라리 빨리 독립해서 부모님의 도움없이 생활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현재 진옥씨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를 정리하고 새로운 일을 찾을 계획이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수입품을 판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젠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요즘 진옥씨는 감기로 몸은 물론이고 목소리도 항상 갈라져 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씩 한다. 아이 때문에 약도 못먹는데, 몸이 그렇게 아파서 어떡하냐고, 그러나 진옥씨와 정근씨한테는 그것마저도 기쁨일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사랑의 끈이 생기는데 감기쯤이야 뭐 대수롭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진옥씨와 정근씨의 결혼얘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두 사람의 용기에 부러워도 하고 걱정도 했다. 그런데 이제 진옥씨가 아이를 가졌으니 주위 사람들은 더 걱정 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김진옥씨는 마냥 행복하기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들의 얼굴없는 스타, 이현준씨
매달 함께걸음이 나오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사연이 하도 구구절절 내 얘기 같아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답답한 이야기를 시원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은 사람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사람 역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얼굴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함께걸음 독자라면 이름만 대도 ‘아 그 사람’ 하고 금방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몇 있다. 바로 ‘장애우의 세상형편’을 쓰고 있는 이현준(34, 근이양증장애우)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함께걸음을 읽는 사람치고 이현준 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쓰는 ‘장애우의 세상형편’이 역사도 오래되고, 독자들이 꼭 읽고 넘어가는 코너이기 때문이다. 장애우의 세상형편을 읽다보면 이 지구에서 장애우와 관련돼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상형편이 눈 앞에 보인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의 사회란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고작인 경우가 많고, 외국의 이야기라고 해도 그쪽은 이렇다드라 하는 식의 뜸금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현준 씨는 다른 나라와 우리의 상황을 엮어서 이야기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 보자는 생각에서다.
이현준씨가 글을 통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시작한 곳은 신문의 독자참여란을 통해서다. 평소에 일기장에 써 놓았던 글이나 장애우와 관련된 일이 있으면 거침없는 글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렇게 한두 번 글을 싣다 보니 원고를 부탁해오는 곳도 있고 ,관여하게 된 단체들도 많다. 함께걸음 외에도 열린지평이나 한벗회에 정기적으로 글을 쓴다. 가끔은 장애우문학에 대한 평론도 하고, 잔디회, 상록수 독서회 모두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단체들이다. 명실상부한 얼굴없는 스타다.
“올해 제가 34살입니다. 이제 저도 인생의 바양을 잡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여러 가지 방향을 생각해 봤지만 글을 쓰는게 적성이라는 생각이 들고, 좀 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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