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출하라 너의 분노를! 외쳐라 너의 요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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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성장애인대회에서 진행된 주된 프로그램은 바로 ‘인간관계 프로그램’이다. 세미나와 이벤트 중심으로 진행됐던 지난 1회 대회와는 달리 여성장애운동부문에서 활동하고 있고 앞으로 활동하게 될 대회 참가자들 개개인이 대외 활동에 앞서 우선 내면의 자아와 마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갖고 있던 모순된 심리적 틀에서 깨어 나올 수 있도록 하는데 주안점이 맞춰진 것이다. 여전히 적지 않은 여성장애우들이 집안에 갇혀 있지만 일단 문 밖으로 나와 사회와 맞부딪히려면 우선 자기 스스로 마음의 문부터 열고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대회 첫날 5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배숙일 인천여성의전화 상담부장 등 강사들의 지도에 따라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과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프로그램은 시작됐다. 각 그룹의 이름도 따스해, 다정해, 포근해, 뿌듯해, 뭉클해 등으로 붙여졌고, 각 참가자들도 대회 기간 내내 ‘강물’이나 ‘장미’, ‘안개꽃’이나 ‘파랑새’ 등 자신이 생각하는 혹은 바라는 자신의 이미지나 다른 팀원이 붙여준 이름으로 불려졌다. 그 때까지의 이름으로 불려져왔던 모든 기억과 상황으로부터 자유롭게 옷을 벗는 것이었다.
분노를 풀어내며 하나로 뭉쳐진 참가자들
이 프로그램들은 참가한 그룹내 당사자들끼리만 공유되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 그룹별로 약간씩의 변형이 이루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는 ‘왜 하필 나인가’와 같은 물음처럼 평소 자신의 장애로 인해 스스로 혹은 타인이나 사회에서 받았던 불합리로 인해 쌓여왔던 분노나 ‘만약 나의 신체가 갑자기 자유스러워지고 쓸 수 있는 만큼 (혹은 백만원의) 돈이 생긴다면’ 등과 같은 하나의 주제들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하며 참가자 개인들의 바람과 요구를 풀어내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특히 분노를 풀어내는 시간을 진행한 그룹에서는 장애를 이유로 자신에게 불합리한 대우를 했던 상대나 상황을 떠올리면서 감정이 격해진 참가자가 자신의 사연을 외치듯 쏟아내면 그 감정이 공유된 다른 참가자들도 모두 함께 한 목소리로 동조하며 울고 웃기도 했다. 여기에는 단단하게 말아진 신문지뭉치를 이용해 직접 행동으로도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순서가 끝났을 때 그 신문뭉치가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가슴 속에 내심 잊혀지지 않고 쌓여 있던 분노를 배출하고 난 후여서 그랬는지 참가자들의 얼굴 표정은 상기돼 있거나 눈시울이 붉어져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가뿐한 함박웃음을 얼굴 가득 안은 모습을 보였다.
한편 몇몇 그룹에서는 장애가 없어지고 얼마간의 돈도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가지고 얘기를 풀어나갔다. 이 자리에서는 평소 딸의 얼굴을 만져서 알고는 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시각장애우가 있었는가 하면 두 발로 낙엽을 밟으며 걷거나 휠체어 때문에 한 번도 가지 못한 어머니 산소에 제일 먼저 가고 싶다는 지체장애우들의 바람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은 자신과 다른 장애유형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한 청각장애우는 “이제까지 내 장애가 제일 심각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어떻게 보면 내 장애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더 한층 의욕이 생긴다”고 말하기도 했고, 한 지체장애우는 “수화통역사를 통해서만 일반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청각장애우의 현실이 크게 다가왔다”며 앞으로 수화를 배우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이렇게 참가자들은 자신의 장애를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의욕을 다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자신을 돌봐준 가족들에게 고마움의 뜻을 표하면서도 진정한 독립체로 인정받기 위해 3년 이내에 독립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둘째 날인 30일 저녁에 진행된 어울림마당도 다른 행사의 대동의 자리와 비교할 때 색다르게 마련됐다. 어울림마당은 이제까지 참여한 과정에서의 느낌이나 사회를 향한 요구나 바람 등을 대자보에 적고 그것을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현모양처가 될 기회를 달라”와 같은 익살스러운 표현에서부터 장애우 볼링장을 지어달라는 정신지체장애우의 요구나 낭독자원활동자들이 시간을 잘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시각장애우의 바람도 이어져 나왔다.
이어 진행된 ‘댄스쎄라피’ 시간에 참가자들은 무형의 깃털과 풍선, 축구공 등을 전달받아 옆사람에게 전해주는 동작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몸으로 표현해낼 것을 요구받았다. 휠체어를 탔거나 목발을 짚은 몸으로, 혹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몸짓으로 넘겨받고 넘겨주는 행동을 계속했는데 이중 높이 올라간 공을 목발을 들어 다루거나 손으로 돌리는 창의적인 모습을 보인 참가자들은 많은 박수를 받았다. 다음으로 시범에 따라 삼면의 벽에 ‘몸으로 벽화 그리기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는 다른 사람과 함께 각각 다른 다섯 가지의 몸짓을 해보이면서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다.
“모든 장애우 모임에 널리 보급됐으면”
이 프로그램은 대회 마지막 날 결의대회 전에 다시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간단한 소감과 앞으로의 삶의 각오를 다지는 순서로 마무리되었다.
한 참가자는 “강사들의 지도에 따라 이런저런 감정을 쏟아내면서 일정을 마치고 나니 샤워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대부분 “처음으로 내 안의 나와 직접 마주 대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이제까지 약간 움츠린 마음으로 살았지만 다른 어느 때 보다 더욱더 강렬한 삶의 의지와 희망이 생긴다”는 소감을 털어 놓았다.
이 인간관계훈련 프로그램은 상담기법 중의 하나로 도입된 것인데 사회 전체적으로 억압이나 차별구조에 놓이기 쉬운 여성들에게서 많은 효과가 나타나면서 최근 여성계 각종 프로그램에서 보급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장애계에는 이번 여성장애인대회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 것이다.
인천 여성의 전화 배숙일 부장은 “프로그램을 진행함에 있어서 다른 일반 여성들과 달리 여성장애우들은 분노를 갖게 한 원인으로 장애라는 점이 쉽게 드러나 있어 그 부분을 끌어내도록 명확하게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는 쉬웠지만 특히 연령대가 높은 참가자일수록 그 상처나 분노를 내적으로 이미 많이 승화시켜버린 상태였고 그것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을 꺼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성장애우가 가족과 주위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진정한 자립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당당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우선 잠재력과 자신감을 되찾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이 배 부장의 설명이다.
아울러 그는 “단순히 이번 대회에서의 경험을 일회성으로 넘기지 말고 일정한 그룹내 남성과 여성 장애우들이 함께 이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자주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빗장 회원 오정미 씨를 비롯한 많은 참가자들도 “이런 프로그램을 모든 여성장애우 그룹에서 빨리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분노와 열등의식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다양한 장애를 갖고 있는 참가자 개인들의 다양한 요구들을 서로 나누고 이해하면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찾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과정을 함께 하며 감정이 일치되는 순간들을 경험했던 같은 그룹 멤버들과는 짧은 기간이지만 깊은 정이 들었는지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하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참가자의 얼굴에는 유난히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글/ 한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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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제2회 전국 여성 장애인 대회 행동 강령 1. ’98 제2회 전국 여성 장애인 대회에 참가한 우리는 여성차별, 장애인차별 등 인권침해에 적극 대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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