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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우리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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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보라매병원 ‘행려응급실’에서 한 달 간 일을 도운 적이 있다. ‘행려’는 말 그대로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으로, 집이 없는 노숙인들, 주민등록이 박탈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곳의 ‘손님’이다.
날씨가 추워지는 11월이면 환자들이 급격히 늘어난다. 그 중에는 의료서비스가 특별히 필요한 건 아니지만 마땅히 잘 곳이 없기 때문에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 당장 내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비워놓은 침대를 내어줄 수도 없어 난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날도 그렇게 환자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한 아저씨가 무릎이 아프다며 왔는데 바지를 걷어 올려 보니 왼쪽 무릎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런저런 검사를 통해 점액낭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우선 침대에 눕히고 항생제를 주사하는 등 기본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부어오른 무릎에서 점액을 뽑아내고 소독한 후 다시 부어오르지 않도록 탄력붕대를 칭칭 감았다. 다음날 아저씨는 주사를 좀더 맞아야 한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약으로 된 항생제를 처방받고 퇴원했다.
그런데 그날 밤, 아저씨가 다시 응급차에 실려 왔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말 안 듣고 나가더니 그렇게 됐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나 아저씨가 실려 온 이유는 점액낭염이 아닌 화상이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한쪽 다리 전체에 화상을 입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자초지정은 이랬다.
퇴원을 하고도 마땅히 갈 집이 없었던 아저씨는 다시 거리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여의도 근처 한 건물 입구에서 잠을 자던 아저씨는 너무 추워서 잠을 깼다. 그리고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몸을 따뜻하게 할 무언가를 찾다가 무릎에 감겨있는 붕대를 풀어서 불을 피운 것이다. 다시 스르르 잠든 사이에 불이 바지에 옮겨 붙었고 다행히 큰 불은 아니었지만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이촌역근처.철거를앞둔지역의모습

주거권, 기본적인 인권이다
언젠가부터 ‘인권’은 유행어처럼 여기저기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우리가 말하는 만큼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일까? 그 답은 부정적이다.
인권은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을 지키고, 꿈을 가꾸고, 사회 속에서 그 꿈을 실현해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함부로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인권이다.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강제로 시키면 안 된다는 것. 아무 이유 없이 해고되거나 일을 구할 때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 인간답게 사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아플 때 필수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집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인권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집이 우리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고 있을까?
집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피할 수 있는 곳이자, 하루를 정리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며 이웃이나 친구들과 관계를 맺어나가기 위한 기반이다.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고 독립하여 자신의 꿈을 가꾸는 곳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기본적이고 필수적이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0년부터 한국에 적용되고 있는 유엔의 사회권규약에서도 주거권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기본적 권리로 명시되어 있다.

시장과 건설경기에 휘둘리는 주택정책
거리에서 생활하시는 분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상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만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며 그 내용을 일곱 가지로 나누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적절한 주거라고 하려면 점유의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 말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쫓겨나거나 언제 쫓겨날지 몰라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한국은 강제철거의 실태가 심각해 여러 번 유엔의 지적을 받은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공공임대아파트에서도 일정기간 이상 임대료를 연체하면 물과 전기를 끊고 나중에는 강제로 내쫓는다. 그리고 집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대로 언제 또 임대료가 오르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집을 살 돈을 모으려고 저축을 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나날이 치솟는 집값을 쫓아가기 어렵다. 점유의 안정성은 집을 소유했든, 소유하지 않았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 적절한 주거가 되기 위해서는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시설들이 확보되어야 한다.
단순히 시멘트 덩어리가 아니라 전기와 상하수도가 들어오고 난방도 돼야 비로소 ‘집’인 것이다.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주방과 몸을 씻을 수 있는 욕실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요 도심지에 숨어있는 쪽방들은 이런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방 한 칸 덜렁 있기 때문에 환기도 잘 안되는 좁은 방에서 가스버너로 밥을 해먹어야 하고 몸을 씻으려면 공중목욕탕을 이용해야 한다. 그건 그저 방일 뿐, ‘집’이 아니다.

셋째, 적절한 주거는 그에 합당한 비용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은 주거에 드는 비용이 다른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집은 새우깡이 아니다. 시장에서 사고파는 다른 물건들처럼 가격이 매겨지면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부동산 시장은 보통의 다른 시장과 비교해 봐도 매우 불합리하다. ‘집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다 보니 웬만한 돈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집을 산다는 건 꿈도 꾸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주택보급률(주택수/가구수)이 100%를 넘어도 자기집을 가진 가구는 절반이 안 된다. 반면에 전체 가구의 1.7%에 불과한 가구가 집을 다섯 채에서 스무 채까지 독차지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주택시장의 현실이다.

넷째, 적절한 주거가 되려면 쾌적한 주거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가족수에 맞는 면적이어야 하고 추위와 더위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어야 한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휠체어를 타고서도 이동은 물론 여유로운 활동도 할 수 있는 면적이 보장되어야 한다.

다섯째, 적절한 주거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집을 내놓으면서 ‘노숙인에게는 팔지 않음’, ‘장애우에게는 임대하지 않음’이라고 써놓는 경우를 본 적은 없지만, 노숙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가격의 집이나 장애우 편의시설이 되어 있는 집 역시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이것은 분명한 차별이다. 이러한 차별로 인해 노숙인들은 쉼터에 들어가거나 거리에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집’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 장애우 역시 집에 장애우 편의시설을 설치하려면 스스로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동일한 비용으로 누릴 수 있는 주거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결국 차별인 셈이다.

여섯째, 적절한 주거가 되려면 적당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출퇴근이 가능하며, 병원이나 학교 등 기본적인 공공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정부는 마땅히 살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다며 사회복지시설을 만들거나 지원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외딴 산자락에 있다.
시설은 그 자체로 ‘집’을 대신할 수 없다. 집의 기본적인 기능인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을 수도 없으며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설은 사람이 살기 적당한 곳에 있지도 않다. ‘집’은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일구어나가는 기본 토대이다. 따라서 시설을 지어 ‘집’을 대신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적절한 주거라면 문화적 특성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지역에는 그 지역만의 문화가 있다. 이웃과의 관계가 있고 독특한 관습도 있다. 같은 도시라고 하더라도 마을마다 특색이 다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개발정책은 이러한 문화적 특성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사도 반영하지 않는다.
토지나 주택 소유자 몇몇과 집을 지어 돈을 벌려는 자본가, 무조건 갈아엎는 게 능사라고 생각하는 지방정부 공무원들의 합작으로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왔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불도저에 밀리고 만다. 우리 동네에는 나무가 많은 공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나, 차 없는 거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들은 밀려들어오는 불도저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게다가 그렇게 밀려난 사람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외곽으로, 반지하로, 옥탑으로 옮겨가 결국 그들의 주거상황은 더욱 열악해진다.

우리사회에서는 주거권이 필수적인 인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주거권이 침해당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특히, 집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과 별다를 바 없이 취급하는 지금의 주택정책은 모든 사람이 적절한 주거를 누리게 하는 데에 목표를 둔 게 아니다. 어떻게 하면 건설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집을 사게 할까 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철거지역 아이들.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상황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집 없는 사람들이여, ‘집’을 요구하자
위에서 살펴본 적절한 주거로서의 ‘집’이 반드시 내 것일 필요는 없다. 또한 임대주택의 입주권은 시혜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적절한 주거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는 한 개인만이 아니라 누구나 적절한 주거를 누릴 수 있는 제도와 구조에 대한 권리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해법은 간단하다.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보장하면 된다. ‘집’을 만드는 방법은 새집을 짓거나 이미 지어진 집이 본래 의미의 ‘집’이 되게 하면 된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주거권 실현을 위해 활동하고 고민하는 단체들과 함께 ‘주거권침해 집단진정’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 각자가 어떤 주거권을 침해당했는지 정리해보고 주거권을 침해받는 다양한 집단의 이름으로 함께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접수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거권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주거인권 학교’도 준비하고 있고, 주거권침해를 고발하는 증언대회 등도 열어볼 생각이다.
이러한 집단진정 활동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집’이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집’을 요구하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더라도 이 활동이 주거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권리로 만들고 주거권이 실현되는 사회로 변화시켜가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그 아저씨 생각이 난다. 오늘은 응급실로 오더라도 내일은 ‘집’으로 갈 수 있는 세상, 그것은 우리의 권리다.

글 미류(인권운동사랑방 "신자유주의와 인권팀" 활동가)
사진제공 인권운동사랑방

작성자미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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