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
지난 며칠 포근하던 날씨가 어제 밤부터 갑자기 추워졌어. 하필 오늘 1차 경찰조사가 있는 날인데 말이야. 그래도 다른 병역거부자들 때와는 달리 오늘은 좀 마음이 가볍더라. 어제 법원이 구속영장 발부기준을 처음으로 공개했고 이를 계기로 ‘고무줄 영장’ 발부 관행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는 뉴스를 봤기 때문이야. 물론 현행 법체계 하에서는 병역거부자들은 실형선고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구속수사가 된다 해도 별다를 건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국회에서 병역법개정안이 통과될 때까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미뤄줬으면 하는 바램이야.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어볼 수는 있겠지.
다행히 지난 12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의 병역거부 인정 결정이 사회적으로 이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사람들은 인권위더러 국가기관이지 시민단체가 아니라고 호통을 치고 시기상조라고 말하지만 2001년 11월 26일 인권위가 문을 열자마자 2호로 진정하고 그 이후 8차례나 더 인권위 문을 두드렸던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게 이른 결정은 아니지. 그래도 그간 목이 늘어져라 기다렸던 보람이 있는 것 같아. 특히 헌법 19조와 자유권규약 18조에 따라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와 함께 내심(內心)의 자유에 속하며, 정신적 자유의 모체를 이루는 인간존엄성의 기초로서 정신적 자유의 근원을 이루는, 국가비상상태에서도 유보될 수 없는 최상급의 기본권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사회는 사상·양심의 자유란 것이 늘 국가안보를 이유로 유보돼 왔기 때문에 그 개념 자체에 대한 인식조차 희박하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너를 비롯해서 병역거부자들을 너무 쉽게 살인·강도 등의 범죄자와 일반시하거나 테러리스트들의 양심(?)과 비교하기도 하지.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개인적 안위가 아니라 공동선 혹은 사회정의가 무엇인가를 자신의 주어진 위치와 신념에 비추어 고민하고 이러한 생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잖아. 그렇기 때문에 다른 범죄자들과 구별해 양심수라고 부르는 거고. 이런 사람들을 살인·강도나 테러리스트들과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코미디라 할 수 있지.
민주사회를 구성하는 양심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은 이러한 천부적 인권이 보장되지 않고는 출현할 수 없는 건데 그걸 자각한 개인이 드물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의 국가 공권력이 법에 정해진 테두리를 넘어서 부당하게 시민적 영역에 침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 거야. 이미 국제적 인권기준에서는 일찌감치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던 병역거부가 한국에서 이처럼 어려운 것도 어쩌면 ‘대~한민국’이란 사회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이제 2006년, 우리에게는 또 다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어. 인권위의 결정은 그저 권고일 뿐 현실에선 바뀐 게 없으니 말이야. 우리의 발걸음도 계속되어야겠지.
우선 올해 국회에서 지난 2004년 가을에 상정된 병역법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거야. 너의 병역거부를 계기로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천주교계에서 올해도 꾸준히 그 관심 거두지 말고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시민적인 인식을 전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 누군가를 해칠지도 모르는 거라면 훈련조차 받을 수 없다는 젊은이들이 이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서슴지 않는 이런 사회의 시각에선 어이없을 수도 있지만 또다른 시각으로 보면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가를 차츰 알아갈 수 있도록 말이야.
더 나아가서는 현행 징병제도의 불합리성, 군대와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까지 논의가 발전됐으면 좋겠어. 지난 한 해는 병역거부 말고도 군에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들도 여럿 있었잖아. 이제는 징병제도와 군대에 대해 합리적인 논의를 할 수 있어야 할 거야.
지난해 12월 1일 병역거부 선언을 했던 영진씨도 1월 12일 첫 경찰조사가 있다는 연락이 왔어. 추운 겨울, 계속 우중충한 소식만 들리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잖아. 기쁘게 이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아. 날이 많이 추워. 감기 조심하고.
늘 한결같은 고동에게 고맙고 또 감사하다.
오리.
글 최정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집행위원장)
한국 병역거부운동의 기획자이자 조정자이자 실행자인 그는 20대 젊은 병역거부자들과 어울리다보니 30대 초반의 나이에 병역거부자의 "대모"로 불리고 있따. "오리"는 그가 중학교 때부터 불렸던 별명이다. 걸음걸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는데 지금은 고쳤다고.
이 편지의 수신자 고동은 병역거부자 고동주의 별명이다. 고동은 지난 10월 19일 천주교 신자로는 최초로 병역거부선언을 하였고 최정민씨가 이 글을 썼던 1월 4일 오전 10에 마포경찰서에서 입영기피죄로 1차 조사를 받았다. 고동의 병역거부 소견서를 비롯해서 재판관련 진행상황은 후원모임 "고동울림" 홈페이지 withpeace.cyworld.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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